< 23화 가테스 트라프비체 (1) >
"먼저, 대제에 대한 예들을 갖추도록 하라."
웅장하게 울리는 징소리. 대제전은 축구경기장의 두 배 정도 되는 크기였다. 이 크기의 대제전에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가득 차 있다. 모두들 중앙을 향한 채로. 중앙에는 조각처럼 잘 생긴 대제가 땅을 굽어보고 있었다.
"대제 폐하께 영광을 바칩니다!"
"대제 폐하께 영광을 바칩니다!"
메아리가 울려 퍼질 정도로 일관되게 울리는 사람들의 목소리. 나는 오늘 새벽만 해도 이 사람과 싸워서도 있고, 그 사람의 얼굴도 더 정확히 알고 있으니 뭔가 집중이 안 되었다.
"대제님이 너희에게 영광을 나눠주시려니!"
또 다시 울리는 징 소리. 하여튼 중세라서 이런 절차 하나는 더럽게 복잡하네···라고 생각하던 와중, 대제가 서있는 땅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무슨 장치라도 있는 것인지.
그와 함께 잘 생기게 조각된, 아니 조작된 대제 석상의 눈이 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한다. 대제의 눈이 가리키는 곳들의 사람들은 모두 무릎과 머리를 땅바닥에 꿇고 예를 표하고 있었다. 나도 어련히 눈치껏 했다.
"에퍼리, 넌 뭘 가져왔느냐?"
"뭐 말입니까."
"제단에 바칠 제물을 말하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
우연찮게 같이 예를 차리고 있던 칸나가 속삭였다. 지금 내 능력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그러니 더욱 궁금해하는 건 당연했다.
이럴 땐 연애 초보인 나도 알고 있다. 밀당이지. 난 한쪽 눈을 감고 손가락 하나를 입술로 세웠다.
"비밀입니다."
"···상관 모욕으로 징계감이구나."
이런, 중세에서는 통하지 않는단 말인가. 통탄할 세상아. 하긴 지구에서도 안 통했으니까 내가 모솔이지. 내가 생각하는 것만 반대로 하면 연애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해본다.
"어쨌든 기대하마. 내 것도 기대해도 좋다. 난 최소 주황색 불꽃임을 자신한다."
칸나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래, 넌 그래도 주조연 급은 되니까 괜찮은 것 가져와야지. 근데 마지막의 뜻 모를 말이 있다.
"붉은색 불꽃은 뭡니까?"
"이걸 모르···아, 넌 옌시 사람이지. 미안하다. 음, 설명하자면 제물의 등급을 대제께서 평가하시고 태워주시지."
칸나가 나를 질책하려다 미안하다는 얼굴로 바뀌었다.
그녀의 친절한 설명을 풀자면 제단에 올리면 제물이 태워지는데, 그 불꽃의 색깔에 따라 제물의 등급을 평가할 수 있다는 말.
제일 낮은 등급은 회색, 그 다음은 파랑색, 다음은 노란색, 다음은 주황색, 다음은 붉은색, 다음은 보라색. 뭐, 이런 식이란다.
근데 재밌는 점은 만들어진지 몇 년 안 되었다고 한다는 것.
"대제님께서 직접 평가하시는 겁니까?"
"당연하지. 너 지금 대제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거냐?"
아니, 그건 아니고 오늘 새벽에 대제를 만났을 때 그런 말이 없었어서. 그냥 거짓말 치는 것 같은데.
"제가 옌시 사람이라서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옌시 출신을 약점이 아닌 무기로 쓰는 놈은 제국에서 네가 처음일 거다."
칸나가 내 속마음을 읽고 노려본다. 앗, 들켰네. 하긴 옌시 방패가 언제까지 무적일 수는 없지.
"황제 폐하 등장하십니다!"
북 소리, 두둥. 웬일로 징소리가 아니고 북소리래. 나는 황제가 있는 쪽으로 몸을 틀려고 했지만 아무도 틀지 않았다. 아, 대제가 더 높은 사람이라 그렇구나.
"제 25대 황제, 헨리 트라프비체가 1대 대제, 트라프비체 트라프비체께 영광을 바칩니다."
황제의 근엄한 목소리가 대제전을 울린다. 아마 마나로 살짝 음성 확대와 에코까지 넣은 것 같다. 조금 연출된 분위기이기는 해도 비장하기는 하다.
"오늘 대제께 바칠 제물들을 용사들이 한껏 준비했으니, 즐겨주시옵소서."
북 소리, 두둥.
그와 함께 대제전에 모인 사람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이게 뭐가 그리 좋다고. 자기들 목숨 바쳐서 가져온 것들인데.
하긴, 영광과 명예라는 개념을 내가 아직 모르니까 이제 익혀가야겠지. 나도 여기 사람으로 살려면 말이야.
"지금부터 제단을 열도록 하겠다. 위관급 장교와 병사들이 먼저 제물을 바치고, 그 이후에는 영관급 이상이 바치는 것으로 하겠다."
이런 것도 순번이 정해져 있나. 1군단 근위대부터 병사들이 하나씩 예를 취하고 제단에 제물을 바친다.
대개 회색에서 파란색 불꽃이 제단에 퍼졌다. 하지만 회색이 나왔다고 비웃는 자들은 없었다. 그 역시 대제가 직접 태웠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질이 낮다고 해도 대제한테 바칠 영광. 그것은 곧 대제의 것이다. 그걸 비웃는다면, 대제를 비웃는 것이었다.
강제력 없이 존경심을 받고, 말 한 마디 없이 군중들을 이끄는 힘. 이런 게 중세시대에서 말하는 제패라는 거겠지.
"우리 중대 차례군. 다들 제물은 가져왔겠지."
칸나의 제2근위대가 모두 차렷한다. 그리고 꼿꼿이 나아간다. 우리의 대장인 칸나가 먼저 제물을 바쳤다. 안타깝게도 칸나는 아직 소령이 아니라서 위관급에 머물러 있어 우리와 같이 제물을 바치는 것이다.
칸나가 바친 건 신기하게도 생긴 무언가였다. 샴쌍둥이처럼 붙어있는 두 개의 머리, 또 양쪽 머리에는 뿔이 또 두 개씩 달려있다.
"트윈 헤드 미노타우르스라···"
"칸나 대장님이 고생 많이 하셨군."
병사들의 수군거림과 더불어 타오르는 주황색 불꽃. 처음 주황색 불꽃이 나왔다. 사람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칸나는 나를 보며 씩 웃었다.
마치, 이걸 넘을 수 있겠냐는 듯. 미안한데, 그 기대에는 부응하지 못할 것 같다.
"다음, 에퍼리 션 근위병."
제단 옆에 붙어있는 사회자가 근엄하게 내 이름을 부른다. 나는 미리 칸나에게 고개를 까딱 숙였다. 그녀는 의문부호를 머리 위에 띄웠다. 곧 알게 되겠지.
"죄송합니다. 제가 단독으로 준비한 제물이 없습니다."
"응?"
아니, 근데 이럴 분위기였으면 던전에서 나도 뭐 하나 챙겼지. 뭐 영광을 돌린다고 해서 난 선택 사항인 줄 알았단 말이야.
"전 페어로 이 행사에 참여했고, 제물은 그 페어가 가지고 있습니다."
"페어?"
사회자가 황당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이런 영광을 페어로 하다니, 역시 옌시 사람들은 명예가 없군."
"대체 저 옌시랑 같이 한 페어는 누구지? 얼굴이나 한 번 보고 싶군. 짓밟아주고 싶어."
너 얼굴 봐 놨다. 내 페어 앞에서도 그 말 할 수 있는지. 어쨌든 칸나가 내가 제안한 페어를 거절한 것도 이런 의미였겠군. 영광을 반으로 나눈다는 건 여기서는 꽤나 큰 의미였나 보다.
"그럼 예만 갖추고 물러나도록."
"네."
난 예를 갖추고 물러났다. 주변에서 나를 쏘아보는 눈빛들이 보인다. 칸나는 나를 걱정하는 모습으로 봤지만, 알 거 없다. 어차피 나야 꿀릴 거 없으니까. 당당하게 서있으면 그만이다.
그 다음부터는 아주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회, 파, 회, 파, 회, 회, 파, 회. 어디 모바일 게임 가챠도 아니고, 아주 지루한 것만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못해 터질 지경이다.
"에퍼리. 뭐라도 가져오지 그랬나. 아니면 내 걸 빌려줬을 텐데. 난 제물을 꽤 많이 가져온 편이라."
칸나가 내 곁에 슬쩍 붙어 말했다. 갑자기 이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재밌다, 재밌어.
"괜찮습니다."
"내가 트라프비체의 예를 정확히 알려주지 못했으니, 내 잘못이로구나. 미안하다."
"전혀 그럴 필요 없으십니다."
칸나가 풀이 죽었다. 뭘 이렇게까지 한담.
그렇게 위관 장교와 병사의 제물 의식이 끝났다. 황제의 명으로 잠깐 쉬는 시간이 되어서 난 잠시 화장실을 가려고 했다.
대제전 안쪽으로 들어가면 황궁이니까, 바깥쪽 근위대실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한 15분 정도. 왕복 30분이네. 쉬는 시간이 한 시간이니까 그렇게 시간이 빠듯하지는 않다.
내가 대제전을 빠져 나와 걷고 있자, 주변인들이 날 보며 수군수군거렸다. 복장을 보니 근위병들이었다. 아직도냐.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내가 무시하고 그들을 지나치려 하자, 그들은 심지어 내 주변을 갑자기 둘러쌌다.
"너냐, 트라프비체의 예를 모르는 주제 모르는 옌시 사람이?"
"음, 아닌데. 페어랑 같이 잡았는데. 그때 평가해줘."
"어디다 대고 천한 근위병이 반말이냐! 나는 제3군단 소속 중위 오츠카 하핌 남작이다."
"아, 네."
나는 그 사람들의 틈을 요리조리 빠져나가서 무시하고 근위대실로 걸어갔다.
"어, 어, 뭐야?"
당황스러운 오츠카 남작 수하의 병사들이 놀랐다. 어느샌가 빠져나가 움직이고 있으니. 너희들이 볼 움직임은 아니지.
내가 무시하고 걷자 그들이 날 다시 감쌌다. 아, 진짜 오줌 마려운데 이렇게 거치적거리는 것들다 패서 어디 구석에 묶어두고 싶다.
"무슨 술수를 써서 빠져나갔는지는 모르나, 상관 앞에서 이렇게 예의없이 갈 수 있나?"
"직속상관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상관을 이렇게 개무시해?"
나와 오츠카 남작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어쭈? 눈 안 깔아?"
이제는 저잣거리에 나올 법한 말까지 나오네. 응, 안 깔아. 꼬우면 네가 깔던가. 대통령 앞에서도 눈 안 깔던 나야.
싸울 기미는 기가 막히게 보는 혈기 넘치는 남자들답게, 곧 우리의 주변을 병사들이나 장교들이 둘러쌌다. 아, 이러면 오줌 싸기 더 힘들어지잖아.
"안 깝니다."
"이것 봐라? 너 지금 상관 모욕을 하고 있는 건 알고 있나?"
"장교님이 저를 먼저 모욕하셨지 않습니까?"
"어처구니가 없군."
우리가 기싸움을 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한 무대의 군인들이 척척 걸어오는 게 땅에서 느껴졌다. 중앙에는 흰색 말을 탄, 가죽 갑옷을 입은 남자가 있었다.
아주 느리게 다가오는 것 같은데, 아주 빠르다. 걸음걸이가 저렇게 빠른 데도 진형이 유지되는 것을 보면 엄청나게 훈련된 병사들이라는 뜻이었다.
곧 백마에서 내린 남자는 병사들이 몰린 우리 쪽까지 다가왔다.
난 그를 보자마자 그가 누구인지 직감했다.
"가테스 1군단장님을 뵙습니다!"
"가테스 1군단장님을 뵙습니다!"
그를 본 모든 사람들의 외침. 우리를 보고 있던 사람 중에는 장군도 있었던지, 장미꽃 하나를 견장에 단 장군이 경례를 했다. 오츠카는 경례를 하려다 슬그머니 내렸다. 상급자와 같이 있을 때는 상급자가 경례하는 게 맞으니까. 오츠카 남작, 폐급이었네.
백마에서 내린 그는 나와 오츠카를 보며 피식 웃었다. 어떤 상황인지 바로 눈치챘다는 느낌이다.
"영광의 대제전 앞에서 싸우는 자들이 있다니, 간들이 다들 배 밖으로 나왔구나."
가테스가 싸늘하게 웃었다.
그 말에 모든 분위기가 얼었다.
그것이 「장미꽃이 흩뿌려진 침대」의 표지 남자주인공, 얼음 황자, 추후 장미침대의 독자들에게 검은 고양이로 불리는 가테스 트라프비체와 나의 첫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