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짐꾼 쟁탈전 - 해답 (2) >
생각해보면 간단한 문제였다. 이들이 갑자기 나를 갈구는 건 단순히 질투 그 이상이었다.
내가 처음에 작전에 나갔을 때도, 알현할 때만 해도, 옌시인에 대한 차별이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이렇게 심하지는 않았다.
나를 거슬리게 하는 건 팔뚝에 붙은 부대마크였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은 모두 팔뚝에 IV를 박고 있었으니까.
난 그때부터 합리적 의심을 한 것이다.
"4군단 37육군사단장 사테 장군님, 제2황자 근위대 근위병 에퍼리 션이 인사드립니다."
"···에퍼리, 우리를 부른 건 자네인가?"
"그렇게 됐습니다."
내가 말했다. 공작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전말을 가장 늦게 파악한 오츠카 남작의 입에서 분노가 내뱉어졌다.
"제국법 7조 3항, 소집령. 하관(下官)은 상관(上官)을 소집할 수 없다. 지금 너는 명백하게 제국의 법을 어겼다."
"아직도 집중을 못하나, 오츠카 남작?"
내가 말했다. 반말을 하자 그의 목소리가 턱 막히고 얼굴이 붉어진다.
"···너, 너. 지금 뭐라고, 이 천한 옌시놈이···"
"오츠카 남작. 조용히 해라. 지금 그런 법도를 따질 때가 아니지 않느냐."
역시 장군이 중위 나부랭이 보단 훨씬 낫네. 그렇다면 대장급에 준하는 공작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라피테스 공작을 보았다.
라피테스 공작은 완전한 무표정이었다.
"자네는 공작령을 선택하지 않는 건가?"
"이런 유치한 수작을 부리는 곳에 어떻게 갑니까."
"뭔 수작을 말하는 거지?"
공작의 얼굴은 평온하기 짝이 없다. 역시 정치인들은 대하기 힘들다. 구밀복검(口蜜腹劍)이 일상화 된 사람들.
내가 공작을 의심한 건 사실 처음 만날 때부터였다. 그는 진심으로 날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라피테스 공작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어떤 수단이든 쓰는 사람이라는 걸 책을 통해 알고 있었다. 아무리 추잡하고 저열하다 할지라도, 그는 결과지상주의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 입장에선 가장 이해하기 쉬운 상대였다. 명예만 부르짖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현대인에 가까운 사람이었으니까.
"유치하다고 하지 않고, 비겁하다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공작님도 아시다시피, 실패한 정치는 리스크를 짊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자네가 그 리스크다?"
공작은 턱을 쓰다듬으며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걸 떠나서 우리는 왜 부른 거지? 설마 그저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 물론 그건 좋지만, 막말로 내가 여기서 자네를 죽여 버린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천생 공작이십니다. 공작님."
"칭찬으로 받아듣지."
공작이 껄껄 웃었다. 그는 더 이상 시치미를 떼는 건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는지 본인 입으로 진상을 꺼냈다.
"그래, 내가 내 사람들을 시켜서 자네를 따돌리라고 했지. 황도라는 곳에 경멸감을 품게 하기 위해 그랬네. 아주 귀여운 짓이었지."
변명을 하면서도 깔끔하지 않은 게 영락없는 정치인이다. 내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라피테스 공작은,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여기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라피테스 공작이 말했다. 그는 근위병들을 전부 뒤로 물렸다. 그는 내게 천천히 걸어오고 가죽주머니를 품에서 꺼냈다.
그리고 내게 척, 하고 건넸다.
"만약 자네가 공작저로 들어온다면, 이게 전부 자네 거야."
그는 친절하게 가죽주머니를 벌려주었다. 번쩍번쩍 빛나는 보석들과 장신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다 팔기만 해도 백금화 3개 정도는 나올 걸세. 자네의 몸값이야."
"뭘 보고 저를 이 값을 책정하십니까?"
"자네는 백금화 3개 이상의 가치가 있어. 그건 그저 내 판단일세."
글쎄. 어떤 계산식을 거쳐서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것을 조용히 손바닥으로 밀었다.
"죄송합니다. 이러려고 온 건 아닙니다."
"마지막 기회라네. 백금화 3개면 꽤 큰 힘을 가질 수 있지. 막말로, 자네가 백금화 1개를 사테 장군에게 주고 오츠카 남작의 목을 자르라면 그는 자를 수 있을 거야."
라피테스는 그걸 농담이랍시고 말하면서 껄껄 웃었다. 오츠카 남작이 오싹 하다는 듯 몸을 떨었다.
"물론 농담이지만. 자, 어떤가."
"싫습니다. 전 돈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지. 돈을 좋아하는 사람과 돈에 미친 사람. 보통 돈에 미친 사람은 돈을 싫어한다고 말한다네. 그렇게 말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 자신을 미치게 했으니까."
말이 안 통한다. 원래 이 정도 나이에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보통 머리가 굳기 마련이지.
"이래서 예프린 도련님이 도망가신 것 아닐까 싶습니다."
"뭐, 난 잃어버린 건 빨리 잊어버리는 성격이네. 꽤 도움 되는 성격이지."
"자식을 잃을 수는 있어도, 잊을 수가 있습니까?"
"그거야 사람마다 다른 거지."
그래.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스르륵 붕대로 감은 검을 풀었다. 대제전 동상에서 나온 흰 칼날 없는 검이었다. 처음 써보는 건데, 가볍고 좋다.
"전 사실 이걸 하려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오츠카 남작에게 먼저 겨눴다.
"전 돈보다 자신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행복한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어찌 명령이라도 저를 괴롭힌 사람을 같은 하늘 아래에 두고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무력행사를 하겠다? 생각보다 실망이군."
공작이 날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첫 타겟이 된 오츠카 남작은 분노해서 진검을 바로 빼어들었다. 칼에 비친 달의 광채가 날카롭다.
"오츠카 남작은 그렇다 치더라도, 사테 장군은 한 나라의 장군이라네. 소드 마스터 1 정도는 되는 양반이지. 그리고 내가 혼자 올 거라고 생각했나? 나정도 되면 당연히 소드 마스터급 근위기사를 대동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옌시 놈이 천박한데다가 무례한데다, 분수를 모르기까지 합니다."
오츠카 남작이 이를 갈았다. 사테 장군은 그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다. 그의 입장에선 병사가 검을 빼들고 하극상을 하는 셈이니.
"말도 필요 없습니다. 제가 확실하게 교육을 시켜놓겠습니다."
오츠카 남작이 고함을 외치며 달려 들어왔다. 곁눈질로 본 황국기사의 검술이다. 물론 정교하지는 않다. 나는 그의 화려하기만 한 검로를 단 한 군데를 찔러서 막았다.
챙!
그 소리와 함께 오츠카 남작의 검이 멈췄다.
"읏, 이 새끼가,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오츠카는 손을 돌리고 검을 어떻게든 비틀어보려고 했지만 그의 검은 꼼짝하지 않았다. 내가 압으로 그의 검을 완전히 고정시켜놨기 때문이다.
일단 이 흰 검에 좋은 점을 하나 알았다. 좋은 검이면 좋은 검일수록 마나의 전도율이 좋다. 이 검의 마나 전도율은 거의 100%에 가깝다.
지구에서도 이런 검은 보지 못했는데, 대체 어떤 유래를 가진 검인지 궁금해졌다.
"뭐냐, 그 칼날도 없는 검은? 나를 조롱하는 거냐?"
"사테 장군님. 이 자는 전투를 해본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내가 사테 장군을 바라보자 그는 이미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 합 만에 그와 나의 실력 차이를 가늠한 것이다. 그러나 오츠카 남작은 그저 모르고 있었다.
"천한 옌시 놈이 이상한 사술을 쓰는 구나. 어디서 주워먹은 스킬 밖에 없겠지. 옌시 놈들은 트라프비체 언어를 모르면 스킬도 모르니까. 네놈이 도서관에서 언어 공부를 하는 걸 잘 봤다. 아주 기초적인 공부더군."
난 대답을 하지 않고 기세를 끌어올렸다. 이제 나도 기본적인 단어 정도는 알아서 고유명사로 이루어진 고유스킬 몇 개를 제외하곤 거의 다 연 상태다.
【스킬 : 위압 Lv MAX 사용 중】
오츠카 남작은 당황스러워 했다. 자신의 몸이 떨릴 이유가 없는데 떨리니까. 자신이 압도당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하수다. 이 놈은 중위도 그냥 작위빨로 단 놈이었다.
난 그냥 검을 집어넣고, 주먹으로 그의 턱을 날려버렸다. 내 위압에 몸이 굳은 오츠카 남작은 어떠한 반항도 하지 못하고 그저 날아가서 쓰러지고 말았다.
"다음, 사테 장군님?"
"···네가 어느 정도 강함을 지니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이에 비해 얻을 수 있는 성취는 한계가 있는 법."
사테가 말했다. 그의 눈빛은 진지했다. 오츠카 남작처럼 자신을 모르지도 않고, 날 얕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진다는 생각은 안 하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너무 방자하구나. 난 공작님의 명이 아니더라도 네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겠느냐. 제국의 축제는 제국의 것. 어찌 외부인이 물을 흐리느냐."
"잔말 말고 덤비시지요. 소드마스터가 어느 정도의 경지인지 알아야겠습니다."
"알려주마. 대륙이 검증한 소드마스터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스킬 : 위압 Lv MAX가 무력화됩니다. 】
소드마스터 정도면 기세로만 잡을 수는 없다 이거지. 됐다. 그러면 오히려 시시하지. 내가 먼저 달려들었다. 어차피 이제 봐줄 생각은 없다.
시간을 끌 생각도 없고, 하이라이트는 아직 남아있으니까.
【스킬 : 환영검술 Lv 7 사용 중】
【스킬 : 환영그림자 Lv MAX 사용 중】
이 두 개만 일단 사용해볼까. 어느 정도인지. 내가 사테 앞에 잔상을 남기고 뒤로 스르륵 사라지니, 사테는 잔상과 내 뒤쪽을 거의 동시에 베었다. 잔상을 못 알아차리면 둘 다 베면 된다 이거지.
나는 횡으로 휘둘러져오는 그의 검을 막았다. 역시 소드마스터. 딛고 있던 발이 살짝 밀려 발밑의 흙이 얕은 파도처럼 올라갔다.
그러나 안 맞서면 그만. 나는 검을 맞서다가 흘려내고 몸을 한 바퀴 돌려, 그 회전력으로 그의 발목을 노려 베었다.
쾅!
서로 마나가 가득 담긴 검이 폭발했다. 우리는 서로 물러섰다.
"그 나이에 소드 마스터의 경지라고?"
사테가 물러서면서 놀랐다. 원래 그런 게 있다. 처음은 탐색전으로 맛보기만 보여주는 거다. 사테도, 나도 서로의 목숨을 뺏을 생각까지는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압도할 생각은 서로 만만하다.
사테가 바로 힘을 모두 끌어올렸다. 그가 쏘아대는 마나의 까칠거림이 내 살갗에 닿을 정도였다. 이게 그의 전력이란 말이지.
음, 그것만 알면 됐다. 내가 스킬창을 열고 하나씩 개방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한 성과를 여기서 내야지.
【고유스킬 : 초감각 Lv MAX 사용 중】
【스킬 : 신속한 움직임 Lv MAX 사용 중】
【스킬 : 정신집중 Lv 9 사용 중】
【스킬 : 사고 가속 Lv 8 사용 중】
【스킬 : 전술적 움직임 Lv MAX 사용 중】
【스킬 : 소검 마스터리 Lv MAX 사용 중】
···
···
내가 지금까지 배워온 약 30개의 스킬을 개방했다. 아직 전부 개방하기에는 다스릴 수 없다는 느낌이 직감적으로 들었다. 지금만으로도 뇌와 심장에 무리가 간다.
내가 눈을 감았다. 떴다. 이곳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스킬을 생각보다 더 오픈한 것 같다. 이것도 지금 벅차다. 아직 나는 100%의 상태가 아니다.
"···넌, 대체 뭐하는 놈이지?"
난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사테의 뒤를 잡았다. 사테가 그래도 소드마스터라고 즉각적으로 반응해 뒤를 돌아 내 검을 쳐냈다.
하지만 이미 검을 급하게 돌리느라 힘을 더 싣기가 부족한 상황, 무게중심을 다시 잡아 힘을 싣기 전에 몰아쳐야 한다. 나도 지금 제대로 된 상황이 아니었다.
내 눈에도 내 검이 5개 정도로 보일 지경이니, 사테의 눈에는 최소 10개 정도로 보일 것이다. 나는 급소가 아닌 곳들을 전부 베어냈다. 급소는 모두 막을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급소가 아닌 곳들도 모두 베이면 언젠가는 한 방울의 피가 급소를 건드리는 법. 사테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땅에 고개를 주저박고 쓰러졌다.
"후우."
난 사테를 쓰러뜨리고 한숨을 쉬며 스킬 몇 개를 꺼놓았다. 방금은 거의 내게도 오버클럭 수준이었다. 이걸 다스릴 스킬도 뭐 하나를 장착해놓던가, 고유 스킬에서 알아내든가 해야겠다.
나는 그리고 라피테스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의 무표정이 깨지고 맨 얼굴이 보였다. 분노한 것 같기도 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기도 하는 얼굴. 여러 가지 복합적인 표정이 담긴 얼굴이었다.
이제, 내 방정식을 완성시킬 마지막 미지수가 등장할 차례였다. 내가 스킬 초감각을 열 때, 내가 신경 쓴 건 사테 장군보다 어둠 속의 그였다.
내가 그가 있는 곳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곧 그가 달빛이 비치고 있는 우리 쪽으로 나왔다.
"어이가 없군."
그렇게 말하면서 나오는 사람은, 내가 예상한대로 제1황자, 가테스 트라프비체였다.
이 유치한 연극의 하이라이트가 나왔다. 내 관객은 어차피 라피테스 공작이 아니었다. 가테스 트라프비체였지.
가테스 트라프비체가 날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