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짐꾼 쟁탈전 - 해답 (3) >
"네가 뭐하는 놈인지, 나도 궁금해졌다."
가테스가 말했다. 라피테스 공작은 바로 무릎을 꿇고 황족에 대한 예를 갖췄다. 사테와 오츠카 남작은 황자가 나왔는데도 무례하게도 누워있었다. 하지만 가테스 황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지하 던전을 한 번 가봤다. 완전 폐허가 되어 있더군. 거기서 본 건 부서진 대제님의 석상이었다."
"던전이 무너지면서 같이 무너졌다고 생각합니다."
"싸움의 흔적도 내가 모를 것 같은가?"
가테스는 나를 노려보았다. 나도 그건 어느 정도 생각해봤지만, 그래도 대제에 대한 예의는 갖춰야 될 것 같아서 남겨둔 거다. 그걸로 걸렸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고.
"어린 나이, 옌시 사람, 트라프비체로 넘어왔으면서 간단한 언어도 공부 안하고 왔다. 그리고 공작저에서 스킬을 써서 발현했다. 아주 이상한 행적이야."
벌써 그는 내가 이 소설에 들어온 이후의 행적을 처음부터 끝까지 꿰뚫고 있었다. 가테스 황자의 능력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우스운 공작저와 황도의 줄타기도 이제는 무의미해졌다. 네가 어디를 선택하는 건 의미가 없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도 못 알아들은 건 못 알아들은거지만, 더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은 라피테스 공작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상황은 라피테스 공작도 모르는 상황이라는 거다.
근데 라피테스 공작이 여기에 나올 줄은 알고 있었다, 라. 그러니까 나는 가테스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었던 거다. 라피테스 공작과 춤을 추면서.
"넌 내가 생각한 위험인자다. 황자이자 군단장의 권한으로, 너를 가두마."
"명분이 없는 겁박이라니. 너무 하지 않습니까?"
"명분은 있지. 오츠카 남작이 말한 것처럼, 하관은 상관을 소집할 수 없으며, 또한 평민과 귀족과의 결투는 금지되어 있다. 앞의 법이야 군법이라 가벼운 감봉에 해당하는 징계지만, 뒤의 법은 대제님의 명을 따른 대제법. 구속하기는 충분한 이유지."
가테스가 씩 웃었다. 나도 따라서 웃었다. 난 사실 이 무기를 라피테스 공작이 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상황에 대한 대비도 해놓았지.
물론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이지만.
"나오셔도 됩니다. 이제."
내가 말했다.
그리고 가테스를 바라보았다. 가테스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미안하지만, 나도 이런 명분지상주의의 세상에서 보험 하나는 만들어 놨다.
숲이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무도 눈치를 못 챘을 거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의식하지 않으면 나도 그것을 못 느낄 정도였으니까.
곧 숲이 부스럭거리면서 작은 발자국이 찍힌다. 그리고 무언가 스르륵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며 작은 신형이 나타난다.
"···가티스?"
"안녕, 형."
가티스의 눈은 순수한 녹색으로 가득 차있었다. 나는 바로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
"가티스 황자님의 근위기사, 에퍼리 션이 인사드립니다."
"응, 그래, 그래."
가티스가 장난스럽게 앞에 무릎 꿇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황자의 근위기사는 황자만이 임명할 수 있으며, 근위기사는 자작 이상의 작위를 가진 사람이 임명받을 수 있다."
내가 말했다.
"전 가티스 황자님께 작위를 수여받고, 이미 귀족이 된 사람입니다."
난 그리고 품에서 나무로 된 귀족임을 증명하는 남작패를 꺼냈다. 가테스가 느리게 고개를 꺾었다. 머리가 아픈 모양이었다.
하루 전 밤. 내가 오츠카 남작, 라피테스 공작, 사테 장군을 부르기 전에 나는 조용히 가티스의 방으로 갔다.
가티스의 방은 저번에 던전을 나오고 방까지 데려다주면서 알게 되었다. 원래 황도 내에서도 황자의 방은 몇몇 시종들만 알고 있는 대외비지만, 난 그렇게 알고 있었다.
황도의 경계는 삼엄하지만, 솔직히 못 뚫을 건 없었다. 난 황도를 돌아다닐 수 있는 근위병이었고, 정말 마음 먹고 기척을 숨겼을 때 날 멀리서 알아채는 정도의 고수가 황도에 없었기 때문이다.
난 가티스의 방 창문을 슬쩍 열었다. 방 앞에는 경계병들이 있어서. 창문이 잠겨있으면 마나로 방음막을 만들고 깨려고 했는데, 다행히 잠겨있지는 않았다.
가티스는 세상모르게 배를 까뒤집고 이불을 걷어 찬 자세로 자고 있었다. 창문이 열리고 바람이 불어오자 가티스는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움츠렸다. 추운데도 이불을 안 걷어올리는 건 모든 아이들의 특성인 모양이다.
나는 무릎을 꿇고 천천히 가티스의 몸을 흔들었다.
"가티스 황자님."
"왜에."
눈을 감은 채 가티스가 대답했다. 아직 꿈 속에서 헤매는 듯하다.
"일어나시지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가티스는 반사적으로 몸만 일으켜 일어났다. 하지만 눈은 여전히 감은 상태였다.
"잘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 안 듣는 아이를 다루는 방법을, 난 칭찬이라고 배웠다.
"이제는 눈을 뜨시면 됩니다."
"그래."
가티스는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에 금빛이 맴돌았다. 녹색이었던 눈이었는데. 스킬을 이렇게 발현하는 건가 싶었다.
"넌··· 에퍼리네."
"네. 에퍼리입니다."
"밖의 근위병들한테 허락받고 들어온 건 아닌 것 같고."
"맞습니다."
내 당당한 말에 가티스는 눈을 반쯤 뜬 채로 헤헤 웃었다.
"왜 왔어?"
"황자님의 근위기사가 되고 싶어서 왔습니다."
"음. 너무 갑작스러운데. 난 아직 근위기사가 필요하지도 않고."
"저에게 필요한 일입니다."
"당당하네. 그럼 나한테는 무슨 이득이 되는 거야?"
가티스가 물었다. 이제 잠이 완전히 깬눈빛이었다. 냉정한 황족의 눈빛. 아이가 지금 실시간으로 어른의 문턱을 넘보는 걸 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여전히 눈은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지금 가티스는 자신이 스킬을 발현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눈치다.
"강해지게 해드리겠습니다. 그 나이대, 누구보다도 더."
나는 가티스의 목적을 안다. 가티스는 멋있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가테스나, 가토스나 각자 멋있는 사람이니까.
그런 사람들의 동생이 된다면, 그 역시 멋진 걸 희망하지 않을까. 그래서 마리나가 가티스를 좋아하는 거겠지. 꿈이 있는 사람은 빛나고 있으니까.
"난 황자야. 작위 수여도 할 수 있고, 내 근위기사는 내 마음 대로 임명할 수도 있지."
"그걸 알기 때문에 온 것입니다."
가티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만큼의 권리에는 의무가 따르는 법. 난 너를 개인적으로 괜찮은 사람이라 평가하지만, 그거로는 부족해. 좀 더 명확한 근거가 내게는 필요하단 말이야. 지금 네가 내게 보여준 것보다, 더 확실한 무언가를."
난 살짝 놀랐다. 가티스가 거부할 것도 어느 정도 생각했지만, 이렇게 명분을 들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이게, 태어날 때부터 진 명예의 무게인지.
기특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난 살짝 웃었다.
"지금의 황자님이라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 근거를."
"뭐?"
【고유스킬 : 붕괴 저항 Lv MAX 사용 중지】
그와 동시에 난 가티스와 눈을 마주쳤다. 가티스의 금색 눈이 날 빨아들이는 듯하다. 대제와 마주쳤을 때와 똑같은 느낌.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가티스가 눈을 마구 손으로 비볐다.
곧 다시 뜬 가티스의 눈은 다시 녹색이 되어 있었다.
"이거 신기하네. 아버지가 언젠간 뜰 거라고는 했는데, 지금일 줄은 몰랐어."
"대답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가티스는 내 진심을 봤다. 그리고 내 강함을 봤다. 나도 내가 어디까지 뚫렸는지 대략 알 수 있다. 전생 직전까지, 그는 나를 꿰뚫어보았다.
"근위병 에퍼리 션, 네게 남작을 수여하노라. 남작패는 내가 쪽지를 써줄 테니 내일 아침에 인사부에서 가져가. 음, 잠깐만. 아버지가 작위를 수여할 때 늘 하던 말이 있었는데."
가티스는 살짝 고민하다가 끝내 입을 열었다.
"권리의 진정한 근원은 의무이다."
그렇게 난 그 아침, 남작이 되었다.
가티스가 앞으로 나와 내 옆에 당당히 섰다. 마치, 큰 형을 먹였다는 사실에 아주 뿌듯해 하고 있는 듯하다. 아이들은 호승심의 화신이지. 그게 형제라면 말할 것도 없을 거고, 뛰어넘기 힘들어 보였던 큰 형을 이겼다면 더욱 뿌듯할 거다.
가테스가 말했다.
"가티스, 권리에 따른 의무를 생각해라. 네가 뭔 생각으로 저 사람을 근위기사로 썼는지는 모르지만. 넌 아직 너무 이르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가티스를 바라보았다. 가티스도 날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점점 금색으로 물들어갔다. 가테스도 그것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개안을 했군. 자네의 작품인가? 에퍼리?"
"개안이 어찌 누구의 작품이겠습니까. 본인의 성장인 것이죠."
"그래. 그렇다면야. 오늘은 내가 진 걸로 해야겠군. 다만, 내가 널 주시할 거다. 궁금해졌거든."
"귀중하고 지엄하신 황자님 생각의 일부가 되는 것에 영광스럽습니다."
"하 참, 웃기는 군. 나한테는 허락해주지 않겠지?"
가테스가 그러고서는 눈을 금빛으로 밝히고 나를 바라보았다.
【고유스킬 : 붕괴 저항 Lv MAX 사용 중】
당연히, 어림도 없지.
가테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오랜만에 재밌는 산책이었군. 라피테스 공작. 사테 장군과 오츠카 남작을 거둬주게. 오늘 일은 비밀에 붙여야 할 것이야."
"그래야겠습니다."
아직 꼬마지만, 황자끼리의 내부 다툼과도 비슷한 내용이었으니까. 공작도 감히 밝힐 수는 없겠지.
라피테스 공작은 먼저 떠나고, 가테스는 그를 배웅했다. 그리고 그도 떠나려고 했다.
이제 끝이다.
이게 이 기나긴 쟁탈전의 해답이었다. 내가 사건의 배경인 황도에 남아있으면서, 최대한 견제되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하나의 위치.
또, 원작에서 나오지 않은, 내가 비틀어버린 내용에 대한 책임까지 같이 질 수 있는 자리가.
불의 목걸이를 가지고 있는 가테스, 그는 그에 상응하는 불의 힘을 가졌다. 가티스도 어리지만 그 힘을 가지게 되어버렸다.
대제의 말대로라면 이 세계는 균형에 의해 움직이는 세계. 힘이 있다면, 그것을 써야 하며, 그것에 상응하는 반대급부가 올라올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가티스는 내가 지킬 수밖에.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이것 밖에 없었으니.
다만,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가테스 황자님. 어찌 안 가고 계십니까?"
"가야지."
나는 가테스가 떠나는 주변을 보았다.
여러 가지 궁금증은 하나의 해답이 된다.
왜 지금까지 안 가고 서있던 걸까.
그리고 이 나를 감시할 누군가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공작저의 과거야 물어보면 그만이지만, 내가 편지를 썼던 것, 보냈던 것은 모두 나 혼자 비밀리에 한 것이다.
이 나의 감각을 속일 사람이 있었단 말이 된다.
그리고 여기. 흙이 밟혀지는 소리, 나뭇잎이 부서지는 소리 하나 나지 않았지만 왜 대기가 허공에서 부딪쳐 올라가고 내려가는가.
지금, 이 상황에서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계속 불던 바람이 멈춘 이 한 순간. 가테스의 옆 부분, 나뭇잎이 흔들리지 말아야 할 곳이 흔들렸다.
난 곧바로 날아가 그 주변을 손으로 잡아챘다. 가테스의 입장에서는 막을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내가 벗겨낸 건, 가티스가 입고 다녔던 투명망토와 비슷했지만 더 정밀해 보이는 것이었다. 가티스가 입었던 건 불완전한 투명망토라고 했지. 이건 그렇다면 완전한 투명망토일까.
"···이런."
가테스가 진심으로 낭패를 한 목소리를 해보였다.
내가 벗겨낸 곳에서, 탈색한 금발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소녀가 날 놀란 듯이 뒤돌아보았다. 그녀의 정체는, 내 예상대로였다.
마리나 스미노프, 이 작품의 여자주인공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