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29화 (29/150)

< 29화 성녀 (1) >

"가테스 황자님이 나도 궁금해졌다라고 해서, 궁금했습니다. 저를 누가 먼저 궁금해 하셨는지."

내가 바로 무릎을 꿇고 예를 취했다.

"바로 성녀님이셨군요. 가티스 황자의 근위기사, 에퍼리 남작이 인사 올립니다."

"···내가 성녀인 건 어찌 알았죠?"

마리나가 당황하듯 말했다. 난 소설 읽었으니까. 그리고 마리나의 얼굴 묘사를 질리도록 봤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솔직히 나도 당황했다. 아직 소설이 시작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칸나는 아직 소령(진)일 뿐이니까. 그런데 마리나와 가테스가 같이 있을 줄이야.

"황자님과 같이 계시는데 황녀님은 아니고, 귀중하디 귀중한 마탑의 완성된 투명망토를 가질 분이 성녀님밖에 어디 있겠습니까."

"고작 그런 걸로 추리가 가능하다라. 음. 그래도 전 성녀가 맞으니까, 할 말은 없네요.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마리나 스미노프입니다. 그냥 마리나라고 불러요. 성녀님은 좀 듣기 거북해서."

"마리나, 이런 놈한테 정체를 밝힐 필요까지는 없다."

가테스가 심기가 불편한 듯이 말했다. 그냥 진상을 부리는군. 하긴 마리나 옆에서는 가테스가 아예 다른 사람이 되긴 하지만. 근데 그게 벌써라는 건 놀라운 일이다.

"성녀님이 어째서 여기 계신지, 전 궁금합니다. 온 나라가 성녀님을 찾고 있는데."

"이봐, 그건 일개 근위기사가 알기에는 주제넘은 정보로군."

"아뇨. 상관없어요. 가테스."

마리나가 웃고는 가테스의 허리를 슬쩍 찔렀다. 역시 사랑스러운 사람이네. 로맨스판타지 여자주인공답다.

"지금은 늦었으니, 내일 아침 입궁 전에 만나도록 하죠. 리얀 황녀의 거처에서 볼까요. 어차피 거기 사람도 없는데."

"그래도 좋겠습니까?"

"나도, 나도 간다. 마리나."

가테스의 성급한 끼어듦과 동시.

"나도 갈래!"

가티스가 뜬금없이 끼어들었다. 하긴 성녀를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알기 적합한 위치는 오히려 나보다 가티스다. 한 나라의 황자니까. 내 위치가 남작이라지만 보잘것없다는 게 더욱 실감난다.

"아니, 둘 다 오지 마세요."

마리나가 보기만 해도 황홀해지는 웃음을 지으며 거절했다. 그 웃음에 난 아름다워서, 가테스와 가티스는 거절당할 줄 몰랐던 듯 얼굴 표정을 고정시켰다.

나는 가씨 형제가 또 진상을 부리기 전에 선수를 쳤다.

"리얀 황녀의 거처라면 도서관을 말씀하시는 거 맞습니까?"

"네. 그럼 거기서 봐요."

마리나는 불만이 많아 보이는 가테스를 억지로 잡아끌고 황궁으로 돌아갔다. 나는 역시 불만이 많아 보이는 가티스를 바라보았다.

"황자님, 잘 시간이 다 됐습니다."

"진짜 나 안 데리고 갈 거야?"

"제가 안 데리고 가는 게 아니고, 성녀님이 오지 말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하, 진짜. 성녀가 뭐라고."

가티스는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도 성녀의 지엄함은 알고 있는지 더 이상 군말은 하지 않았다.

"황자님, 주무실 시간이시겠습니다."

"그럼. 아, 또 나 기절시키려고?"

가티스는 뒤로 물러나면서 연약한 손으로 방어태세를 취했다. 내가 대제와 만날 때 기절한 걸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역시 황족은 뭐가 달라도 달라. 그걸 어떻게 알았지.

"이제 제가 근위기사인데 그럴 필요 있습니까. 당당하게 가겠습니다."

"응, 그래야지. 내가 앞에 설 테니 날 따라오너라."

가티스는 위풍당당하게 황궁으로 걸어갔다. 역시 아직 다리가 짧아서 내가 따라가기엔 보폭을 맞춰야했다.

나야 좋았다. 생각할 시간이 많았으므로. 지금 이 소설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마리나는 알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녀 역시 내가 불러일으킨 날갯짓에 휘말린 것뿐인 걸까.

"당신. 어디서 왔어요?"

"네?"

내가 마주한 건 아이리 영애도 아니고, 그 누구도 아니었다. 바로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마리나였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이런 마리나를 소설 속에서 본 적은 없으니까.

"당신, 어디서 왔냐고 내가 묻고 있어요."

"당신은 누굽니까?"

난 역질문으로 받아쳤다. 내가 아는 마리나가 아닌 것 같아서. 하지만 마리나는 똑 부러지게 대답했다.

"마리나 스미노프. 이 세계의 성녀. 이 정도면 확실하게 대답했잖아요."

"그렇긴 그렇네요."

"내가 상냥하게 말하니까 우스웠어요?"

뭐야. 이 소설과의 괴리감은. 내가 당황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그녀의 공격이 기관총처럼 쏘아져 나왔다.

"내가 가테스 옆에 있었다고, 투명망토 하나 쓰고 있었다고 바로 성녀로 추측하는 것도 그 자리라서 넘어간 거지. 그 연결고리라고는 뭣도 없는 추리에 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정도로 내가 호구로 보였어요?"

"아니, 그건 아닌데요. 내가 아는 마리나랑 달라서 좀 당황스럽네요."

"당신이 아는 나는 뭔데요?"

착하고, 상냥하고, 따뜻하고, 예쁘고, 뭐 그랬지. 그래도 머리는 잘 돌아가고. 머리 잘 돌아가는 건 맞아 보이네. 머리는 똑같은데 입만 바뀐 건가. 난 혼란스럽다.

"당신의 고향친구를 알죠. 나리 수. 그 친구를 제가 좀 알거든요."

"···뭐요?"

뭐긴 뭐야. 1권 완전 극초반에 나왔던 엑스트라지. 내가 얘 이름까지 꺼낼 줄은 몰랐다. 이제 좀 당황하네. 난 더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걔 아직도 붉은 쌍갈래 머리 땋고 다녀요? 주근깨는 여전하고요? 머리 땋은 거 안 어울리니까 풀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어, 어···음."

나리에 대한 묘사는 이게 끝. 그냥 마리나를 잘 챙겨주던 동네 급사(給仕)였을 뿐이다. 나도 그 이상은 잘 모른다. 마리나가 이제는 살짝 당황한 것 같다.

"진짜 놀랐어요. 나리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친구라니까요?"

"아, 거짓말 좀 하지 마요."

그녀가 짜증난다는 듯 말하고는, 입을 가리고 속삭였다.

"당신 이방인인 거 다 아니까."

"···허어."

내가 정곡을 찔려서 한숨을 쉬었다. 헤으응. 폐에서 이런 소리가 나는 것 같다. 솔직히 나도 직감만 했다. 대제가 이방인이 두 명이라고 했을 때, 남은 이방인은 마리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별 건 없고, 그냥 주인공이니까 그렇지 않을까 한 단순한 추리였다.

"너도 이방인이세요? 그럼?"

당황해서 말이 아주 헛나온다. 성녀한테 너라고 하는 근위기사라,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네. 아, 진짜 짜증난다."

뭐가.

"난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요. 이 세계에 들어왔을 때 얼마나 행복했던지. 근데 당신이라는 사람이 생기면서 내가 더 이상 유일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어서 싫어요."

구체적으로 예의가 없는 친구네. 내가 아는 마리나가 아니다. 확실히.

"도대체 누구세요?"

"나요? 마리나라니까요. 성녀."

"아니, 본명이 있을 거 아닙니까."

"아, 정연서예요."

어, 한국 사람이네. 그럼 나를 모를 리가 없지 않나. 난 살짝 거들먹거리면서 말했다.

"난 주환영인데. 아니, 내 얼굴을 보고서도 몰라요?"

"누구신데요?"

"S급 헌터, 한국 랭킹 9위. 나를 모른다고요? 텔레비전 꺼놓고 산골에서 살았나?"

"헛소리하지 마요. 유명한 척 쩌네."

"이 나를 모른다고요? 환영살인마, 주환영을?"

"와, 오글거려. 환영살인마는 또 뭐예요?"

뭔가 사슬이 안 돌아가는데. 태엽에 철판 하나 끼인 느낌. 나는 계속 조용히 물었다.

"몇 년 생이세요?"

"1995년생인데요? 스물여섯."

"아, 안녕하세요."

난 93년생 스물여덟 이기는 한데 자동으로 인사가 나왔다. 나는 2093년생이니까. 우리 고조할머니 세대잖아. 1990년대에서 여기에 왜 온 거야. 이 소설이 나오지도 않았을 텐데.

나는 생각한다. 이 세계는 그럼 어떻게 된 것인지.

"몇 살인데요?"

"93년생, 스물여덟입니다."

"뭐야, 오빠였네. 말 터요. 그나저나 환영살인마는 뭐야."

"농담이에요."

그럴 수밖에 없지. 헌터와 게이트의 등장은 2050년대부터니까. 얘는 모를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알려주기는 뭐하지.

내가 숙이고 들어가자 그녀는 환영살인마라는 단어를 곱씹으며 날 크게 비웃었다. 그나저나 말을 함부로 트기 힘든데. 조상이 꿈속에서 말 놓으라는 느낌이잖아.

"전 존댓말이 편해서요."

"그러세요. 그럼."

아, 뭐 왜 이렇게 된 걸까. 나는 모르겠다. 호칭은 내가 편하니까 그냥 이렇게 가고, 대신 내가 궁금한 걸 물어보기로 했다.

"언어 문제로 고생하진 않았어요? 전 아직도 배우고 있는데."

"전 언어 스킬 있던데요. 그래서 웬만한 언어는 다 알아요."

"뭐야. 난 없던데."

불공평하네. 같이 떨어져도 이렇게 차이나기 있냐. 그러나 태생부터 불공평한 걸 어쩌랴.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것. 다른 궁금한 걸 물어보기로 했다.

"내가 이방인인 건 어찌 알았어요?"

"그냥 그런 스킬이 있어요. 현지인인지, 이방인인지 알아볼 수 있는 고유 스킬이. 진짜 처음 써보는 스킬인데. 이방인은 주변에 이상한 아우라 같은 게 있어요."

"당신은 이 세계에 대해서 뭘 알죠?"

"당신이 강하다는 걸 알아요. 상태창 같은 게 나오거든요."

음. 내가 볼 때는 얘는 철이 좀 없다. 보통 그런 걸 막 말하고 다니지는 않을 텐데. 일단 난 최대한 나를 숨기기로 했다.

"나에 대해 뭐가 나와요?"

"스테이터스가 수치화 되어서 나오죠. 근데 지금 ??? 가 많아요. 내 스킬 레벨로 아직 못 읽는 수치라면 되게 강하다는 건데. 상하차라도 많이 하셨나."

"···비슷한 거 했어요."

뭐지. 이 말이 통하면서도 안 통하는 것 같은 느낌. 나는 넌지시 물었다.

"혹시 「장미꽃이 흩뿌려진 침대」 알아요?"

"몰라요. 연극 이름이에요?"

"모르면 됐어요."

모르네. 하긴 1995년생이라니까. 장미꽃이 흩뿌려진 침대는 2118년에 나온 작품이거든. 그럼 대체 얘는 뭐야. 마리나의 능력은 다 가지고 있는 건 맞는지. 나는 시험해 볼 필요가 있었다.

"여긴 언제 어떻게 떨어진 거예요?"

"그쪽부터 말하시든가."

나는 깔끔하게 말해줬다. 내가 S급 헌터인 것만 빼고. 그 정도면 말해주지 못할 것도 없지. 어차피 내 행적이야 황자한테 물어보면 다 나올 텐데, 뭐.

"음, 그래요? 그러면 그 정도 강한 힘은 어디서 얻은 거예요?"

"그냥 떨어지니까 받았던데요?"

거짓말하기. 오히려 난 힘을 제약받았다고.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아, 힘을 희망하셨구나. 그러면 그럴 수 있죠."

나는 눈을 빛냈다. 뭔가 핵심적인 말이 나오려고 하는 것 같다. 이 철 없는 성녀한테서.

"전 특별함을 희망했거든요. 물론 이런 특별함은 예상 못했지만."

그녀는 뭔지 모를 한숨을 쉬고는 그 이후에 자신의 행적을 말했다. 놀랍게도, 그녀의 행적은 소설의 마리나와 아주 똑같았다. 침대에서 일어난 첫 장면, 나리 수와의 세부적인 묘사, 여행 묘사.

다만 마지막에 조금 비틀어졌는데, 갑자기 원작에는 없는 부분에서 검은 나무가 나타나서 방향을 틀었더니 가테스를 만났다는 것. 이건 분명히 내 영향이다. 대제한테 들은 바대로라면.

근데 얘는 내가 아는 마리나가 아니다. 이 괴리감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난 직구를 던지기로 했다.

"당신, 성녀는 맞아요?"

"보여줘요?"

그녀는 머리 왼쪽에 꼽은 머리핀을 빼더니 단칼에 자기 손을 베었다. 나도 깜짝 놀랄 정도의 결단력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연스럽게 힐을 했다. 금빛 색의 아우라. 성녀 맞네.

어쨌든 이 소설의 마리나는 이상하지만, 내가 큰 줄기는 알고 있다는 거 맞네. 얘는 모르고. 그렇다면 난 딜할 거리가 생긴다.

"저랑 딜 할래요?"

"무슨 딜요?"

"정보 교환."

내가 말하자 그녀의 눈이 살짝 가라앉았다. 아무리 철이 없어도 진지해질 필요성은 알 나이지. 스물 여섯이면 클 만큼 컸네. 물론 내 입장에서는 백 스물 여섯이지만. 정신연령은 스물 여섯 같으니.

"무슨 정보?"

"난 당신의 미래를 어느 정도 알죠. 그걸 알려줄게요."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요?"

"내가 나리를 어떻게 알았겠어요. 보지도 못했는데."

"그건 그렇네요. 어떻게 미래를 아는 지는···"

"당연히 안 알려주죠."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다.

"오케이. 해보죠."

"그래요. 일단 성녀 인증은 신전에서 받았겠죠? 황궁에 오자마자 받았을 텐데."

"맞아요."

내가 영향을 끼칠 수 없는 정보들, 그 정보들은 아직 살아있고 값어치를 가지고 있을 거다.

"곧 사교계에 데뷔할 거예요. 무도회라고 하죠. 그때 잘 꾸미세요. 뭐, 알아서 꾸며줄 거긴 한데. 그러기만 하면 돼요. 그리고 마음이 가는대로 행동해요."

나는 소설 한 장면을 기억해낸다. 무도회에서 어떤 엑스트라 악역이 성녀인 걸 인정하지 못하고, 마리나에게 까불다가 마리나가 나서서 사이다를 안겨주는 장면. 어차피 될 거긴 한데, 내가 당장 알려줄 건 이거밖에 없었다. 약간 내가 봉이 김선달이라도 된 것 같다.

"끝이에요? 그거야 너무 상식적인 것 같은데. 약간 번화가에서 사주보는 사람이 할 법한 말 아니에요?"

"다 까면 감질나잖아요. 언제 죽는지 알면 살고 싶겠어요?"

내가 말하자 마리나가 어이없다는 듯이 손부채질을 했다. 근데, 명확한 사실이지. 이 사실을 마리나가 미리 안다면 뭐가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미리 던져주기만 하는 거다.

"그래요. 어쨌든 그거 하나 알았다 치고. 나도 그럼 소소한 거 하나 알려주죠."

"저도 소소한 거예요."

나는 펜을 들어 종이에 글씨를 썼다.

【??? : ???? ???? 】

이 스킬이 뭔지 알아야겠거든.

먼저, 나는 앞에 붙은 ??? 을 썼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원죄라는 단어네요."

"원죄?"

그런 단어는 몰랐는데. 너무 문어체에서나 쓸 법한 단어잖아. 일상 회화에서는 안 쓰는. 근데 진짜 그게 맞았다.

【원죄 : ???? ???? 】

"그럼 다음은요?"

난 스킬창에 있는 나머지 물음표를 적었다. 그녀는 바로 읽었다.

"엘파힘의 심안이라고 되어 있어요. 엘파힘은 고대 사랑의 신이라고 알려져 있죠."

【원죄 : 엘파힘의 심안 Lv 1 개방】

그 정보가 내 스킬창에 열리자, 나는 바로 의자에서 뒤로 넘어질 뻔했다. 마리나의 이마 위로 이상한 게 보였기 때문이다.

"왜 그래요? 내 뒤에 귀신이라도 있어요?"

마리나가 물었다. 귀신보다 무서운 이상한 창이 있었다.

「이름 : 마리나 스미노프

나이 : 22

호감도 : 0

가장 사랑하는 사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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