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성녀 (3) >
모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이렇게 황제의 전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 마탑의 비밀무기인 투명망토까지 입고 들어왔으니.
그리고 그걸 아무도 감지하지 못하다니. 가테스는 문이 열릴 때 알아차린 것 같다만.
"···보안이 엉망이군."
황제가 탄식했다. 하지만 그 역시 마리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정욕을 떠나서, 인외지경의 아름다움을 봤을 때는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리나는 그 정도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결국 이 중차대한 보안 문제는 마리나의 외모에 가려져서 뒤로 미루어지게 됐다.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마리나가 예를 갖췄다. 이미 우리 앞으로 나선 마리나의 곡선이 아름답게 땅에 깔렸다. 그 뒤를 바라봐도 심장이 뛸 정도인데, 옆에서 바라보는 대신들은 어떨까.
"아니, 안 된다. 성녀는 지금 여기 있으면 안 된다. 애초에 황궁을 둘러보고 있어야 할 자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뭐긴 뭐야. 내가 호출장치로 불렀거든. 이런 상황이 있을 것 같아서. 보험이라고 해야겠지.
마리나가 짜증난다는 듯이 말했다.
"제가 있을 곳은 제가 정해요."
"그게 황제전이라면, 우리는 제국법을 얘기할 수밖에 없다."
"제국이 저를 필요로 해서 끌고 올 때는 언제고 협박이죠?"
가테스와 마리나의 신경전이 벌어진다. 아, 이거지. 난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로맨스판타지에서는 이런 싸움이 있어야지. 당찬 여주와 차가운 남자의 충돌. 로맨스판타지 팬으로서 소원성취 했다.
"···성녀께 말을 높여라. 가테스. 신어(神語)의 해설자이자 우리들을 이끌 인도자이시니."
황제가 말했다. 그렇다. 당금 성녀의 위치는 황자보다 높다. 가테스는 끙, 하고 뒤로 물러났다. 굉장히 아니꼬운 표정이었다.
마리나 역시 아니꼬운 표정인 건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그녀는 가테스가 불편하다고 했으니까.
내가 이랬던 이유는, 원작에서 가테스는 가토스에게 마리나의 의전을 떠맡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와 가티스한테도 떠넘길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준비한 안배일 뿐이었다.
"그래. 성녀 마리나. 어떻게 여기로 왔는지 모르나, 그건 차후 우리 호위계에 물을 문제고. 우리가 어떤 회의를 하는지 알고 있는가?"
"제 의전 상대를 정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내통하는 자라도 있나보군."
"에퍼리 남작입니다."
마리나가 날 웃으며 바라보았다. 이걸 말하네. 맥이려는 의도가 다분한 말이었다. 하긴 여자주인공, 끌려 다니기만 하는 성격은 아니겠지.
그래도 난 내가 원하는 목표만 이루면 되었다. 시선이 좀 쏠리는 건 감수해야겠지. 생각보다 더 쏠리는 것 같다. 저 놈은 뭔데 성녀와도 알고 있지, 하는 눈빛이다.
"그래. 의전받기 원하는 상대라도 있는가?"
황제의 그 말에 웃고 있던 마리나의 표정이 싹 굳었다. 그래, 넌 이러려고 온 거지. 날 먹이는 건 순간이라고 쳐도, 중요한 건 의전 상대라는 거지.
마리나는 입술을 씹고는 곁눈질로 살짝 날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되는 질문을 내게 던지는 듯하다. 이번엔 내가 웃어줬다.
"가테스 1황자입니다."
마리나의 그 말과 동시에 가테스 황자는 얼굴을 구겼다. 그리고 게임 끝.
무도회. 모든 로맨스판타지에 나오는 클리셰이자, 꽃봉오리를 갓 틔워낸 어린 데뷔탕트들의 풋내 나는 축제.
클럽과 비슷하지만 그 격은 완전히 다르다. 클럽과는 다른 품격이 있으며, 이곳은 여자들이 주인공인 곳이기 때문이다.
데뷔탕트들의 무도회에 오는 남자파트너는 오로지 귀족 영애가 선택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리나에게도 파트너가 필요했고, 그게 가테스로 선정됐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뭐해?"
"그냥 앉아계세요."
"지겨운데."
"권리의 진정한 근원은 의무입니다."
가티스와 나는 시답잖은 관찰자의 역할이다. 황자라서 그냥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하고, 나는 그 옆의 셋트메뉴 근위기사.
"그래서 이거 언제 시작하는데?"
우리는 지금 분장실에 있다. 가티스는 작은 인형 같이 분장되어 있고, 난 별다른 화장은 없다. 난 지금 파트너가 아닌 근위기사니까.
"성녀님 꾸미는 거 끝나면요."
"언제 끝나는데? 벌써 두 시간 째라고."
"원래 여자들은 꾸미는 데 오래 걸려요."
특히 이런 중세시대에서는 거의 장난 아니겠지. 내가 책에서 읽었던 분장실의 묘사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서민이어서 헐렁하고 편한 옷만 입던 마리나가 답답한 꽉 조인 드레스를 몇 번이고 갈아입는 장면. 이것도 클리셰지. 근데 난 독자의 입장에서 벌써 기대가 된다.
마리나는 꾸미지 않아도 예쁜데, 꾸몄을 때는 얼마나 예쁠지. 책의 묘사로는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고 했는데.
"어, 뭔가 밖이 소란스럽다."
"시작했나보군요."
드디어 연회장에 사람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아마 낮은 작위의 영애들부터 들어오겠지. 왜냐하면 높은 작위의 사람들은 소개받고 칭송받으면서 들어와야 되니까.
"잠깐 봐도 돼?"
"떽. 손 떼십시오."
가티스는 커튼을 들추려고 했지만 절대 안 된다. 황족의 피는 성녀와 함께 마지막에 등장해야하는 하이라이트니까.
곧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시끌거리기 시작했다. 아직 10대 후반의 20대에 막 들어선 여자아이들. 귀족들은 면이 있는 경우가 많으니 서로 재잘거리는 게 커튼을 뚫고 들어온다.
"준비됐나? 가티스, 에퍼리."
누군가 뒤에서 내 어깨와 가티스의 어깨를 짚었다. 지금 내 상황에서 가장 불편한 사람이었다. 난 뒤를 돌며 인사를 했다.
"가토스 황자님."
"음. 에퍼리, 근위기사가 되더니 신수가 훨씬 나아졌군."
"아, 네. 감사합니다."
가토스가 뻔한 칭찬을 했다. 난 불편해서 먼저 선수를 쳤다.
"죄송합니다. 말씀도 없이 이렇게 근위대를 떠나서."
"아니다. 자네의 선택인 것이지. 그래도 황도와 공작저 중에서는 황도를 택한 것 아닌가. 자네는 약속을 지켰네."
가토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 웃었다. 진짜 평민으로 태어났으면 돈 엄청 꿔주고 다녔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미안했다.
"그나저나 칸나 대위를 한 번 찾아가보게. 좀 서운해 하거든."
"아, 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가티스의 근위기사가 어쩔 수 없이 되기는 했지만 걸린 건 역시 칸나였다. 그래도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말도 없이 떠났으니 서운할만하겠지.
"아마 칸나 대위도 오늘 무도회에 참여할 걸?"
"네? 그건 처음 들었습니다."
"사교계 데뷔가 늦은 영애들도 그냥 다 한 번에 해치우려는 거지. 원래 군인 신분이라면 데뷔탕트가 미뤄지지만, 지금은 사실상 국란 상황이니까. 칸나 대위도 이른 나이에 입대를 해서 데뷔를 못했지."
아. 그런 게 있었나. 분명 무도회에 칸나 얘기는 없었는데. 나 때문에 검은 나무의 속도가 빨라서 그런가. 무도회가 이렇게 묶여서 진행된다는 건 소설 속에서 묘사되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어쨌든. 가티스를 잘 돌봐주게. 시끄럽지만 좋은 아이야."
"뭐?"
시끄럽다는 말에 가티스가 발끈했지만, 난 바로 마나 차폐막을 쳐서 커튼을 가렸다. 자칫하면 커튼 밖으로 소리가 샐 뻔했잖아.
"가티스의 근위기사로는 딱 맞군. 아이를 다루는 데는 임기응변이 중요하지."
서서히 준비를 마친 신사들이 나오고 있군. 이번엔 가테스의 차례다. 안 꾸며도 잘생긴 로판 남주의 얼굴과 몸을 꾸미니 더욱 빛이 난다. 그냥 안 보련다.
"아이 아니거든?"
"조용히 좀 해라."
"차폐막 둬서 괜찮긴 합니다."
"버릇을 잘 들여야지."
그래. 가족일은 가족이 더 잘 알지. 난 호위가 임무지 교육이 임무가 아니니까.
곧 무도회의 문지기가 슬슬 사람들의 이름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이름들도 몇몇 나왔다. 조연들의 이름.
아일린 후작 영애, 시에나 백작 영애, 히아나 백작 영애 등. 모두 마리나의 든든한 친구가 되는 이름이다.
"칸나 카라모프 백작 영애님 입장하십니다!"
그때 내 귀에 그 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커튼을 쳐서 볼 뻔했다. 칸나의 드레스 차림은 원작 소설에서 안 나온 레어한 장면이라서.
그 다음 몇몇 고위 귀족들의 영애가 들어오고, 마지막에 익숙한 이름이 또 들렸다.
"아이리 라피테스 공작 영애님 입장하십니다!"
후. 이제 들어올 사람 다 들어왔다. 이제 시작이다.
"···오늘은 제국에서 가장 많은 데뷔탕트들이 탄생하는 날입니다. 이 날을 모두 축복합시다."
이 연회를 금전적으로 지원한 라피테스 공작이 먼저 축사를 했다.
"귀하디귀한 영애들의 사교 데뷔날이라 제가 다 기분이 좋습니다. 다들 눈치는 채고 있고, 어쩌면 알 수도 있지만 오늘은 황제님과 황자님도 참여하십니다. 어쩌면 황자님과 연이 될 수 있는 행운의 영애가 여기 있을 수도 있겠군요."
라피테스 공작의 짓궂은 농담에 영애들이 얼굴을 붉히며 웃음을 지었다. 가테스, 가토스 황자의 외모는 이미 정평이 나있으니 모두 아닌 척하면서 다 노리고 있을 거다. 물론, 가테스는 임자가 있지만.
"오늘은 제 딸의 사교계 데뷔 날이기도 해서, 구경도 하고 싶지만. 데뷔탕트의 파트너로 선택되지 않은 남자는 모두 나가야 하는 게 법이죠. 이 늙은이를 누군가는 선택해줄 줄 알았지만, 다들 눈이 높으십니다."
부장님 축사 특징. 재미없고 사람 눈살 찌푸리게 하는 농담만 하고 떠난다. 가장 분위기가 핫할 때는 그가 떠날 때일 거다. 억지로 웃음을 짓는 불쌍한 귀족 영애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좋은 친교 나누시길."
그래도 라피테스 공작은 제국의 2인자. 그는 우레와 같은 영애들의 박수를 받으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떠나갔다.
이제, 황족들이 나올 차례다. 커튼 바깥의 조명이 어두워지는 게 느껴진다. 곧 만들어 놓은 단상 위의 커튼이 확 쳐진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영애들이 모두 단상 위에 앉아있는 황제에게 예를 취한다. 우리가 있는 쪽은 단상 아래쪽이고, 커튼이 덜 쳐져서 보이진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주인공은 아니니까.
모든 조명이 황제를 가리킨다. 황제는 또 지겨운 축사를 했다. 사교 데뷔의 중요성 어쩌고, 귀족 영애의 의무와 권리 어쩌고.
그러나 그 중에서는 중요한 얘기도 분명 있었다.
"다들 귀족들의 자식이니, 나라의 사태가 엄중한 건 알고 있을 테다."
황제가 말했다.
그 말에 영애들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아무래도 검은 나무가 전국에 속출하고 있으니 영지를 가지고 있는 귀족들은 모를 래야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 오늘, 자네들은 축복 받았다. 신어의 해설자, 여신의 대행자인 성녀가 오늘 무도회를 같이 할 것이니."
황제의 깜짝 발표에 모두가 놀랐고,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감히 황제 앞이라 수군대는 사람은 없었지만 모든 영애들이 놀란 눈치였다.
"그래서 성녀 호위를 맡고, 이 많은 영애들도 지킬 겸하여 각 군단장인 황자들도 이 데뷔탕트를 지킬 것이니 영애들은 안심하고 친교를 나누라."
"황제님의 은혜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영애들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곧 우리 앞의 커튼이 쳐지고, 황제는 떠났다. 이제 영애들의 시선은 박수소리가 우리에게 몰렸다.
특히 가티스가 뚱한 표정으로 나올 땐 더욱 큰 박수소리가 쏟아졌다. 여자아이들은 귀여운 거에 사족을 못 쓰니까.
마지막으로 성녀 마리나가 나올 때가 되었다.
"성녀, 마리나 스미노프님 나오십니다!"
누군가의 목소리와 함께 황제의 의자 뒤로 마리나가 천천히 드레스를 이끌며 나왔다. 드레스를 처음 입었는지 불편한 발걸음이었지만, 모두가 박수를 치는 것도 잊었다.
그만큼 그녀는 빛나고 있었으니까. 발자취 없는 새하얀 눈밭 같은 피부와, 그녀의 가뜩이나 또렷한 이목구비를 부각시키는 색조는 마치 여신의 현신과도 같았다.
마리나는 그런 시선이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살짝 돌렸다. 곧 띄엄띄엄 박수소리가 나고, 곧 그 박수소리는 우레가 되었다. 성녀, 한 작품의 주인공이 치룰 만한 화려한 데뷔였다.
"영애들은 친교들을 나누시면 되겠습니다."
문지기가 그 말을 하고, 연회장의 문을 닫았다. 남은 남자는 성녀의 호위를 맡은 가테스, 가토스, 그리고 그냥 병풍인 가티스, 그 병풍을 호위하는 나 넷뿐이었다.
나는 무도회에서 일어날 사건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2부 이후의 이야기. 난 가만히 영애들을 보며 힐링을 하려 했지만, 내 계획은 무참히 박살났다.
드레스를 손으로 잡아서 올리며 총총거리며 걸어오는 영애가 있었기 때문이다.
"···칸나 대위님."
"야, 너···아, 가티스 황자님을 뵙습니다."
"응, 난 신경 쓰지 말고 얘기해."
가티스는 준비된 의자에 턱을 괴고 관심 없다는 듯 과자를 집어먹었다.
칸나는 내 손을 잡고 구석으로 끌고 갔다. 그렇게 끌려가는 동안, 다행히 영애들의 시선 집중 되는 일은 없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그때, 누군가가 내 남은 손을 휙 잡았다.
순간적인 힘의 반작용으로 인해 칸나와 나는 우리의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영애들 사이에서 뻗어져 나온 하얗고 작은 손의 정체는···
"···아이리 아가씨."
"사교계 데뷔했거든? 이제부터 공녀라고 불러."
아이리가 호칭이 마음에 안 드는 듯 정정 요구를 했다.
"···공녀님께 인사드립니다. 칸나 카라모프입니다."
칸나가 아이리를 보며 얜 뭐야, 라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그리고 눈이 나를 향한다.
"뭐지? 에퍼리?"
내가 알 리가 없잖아. 이제야 영애들의 궁금증이 담긴 시선이 날 집중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