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성녀 (4) >
"아이리 공녀님. 에퍼리에게 용건이 있느니 제가 먼저 봐도 되겠습니까?"
"음, 아니. 내가 먼저 보고 봐. 나도 할 말이 있거든."
"제 부하였던 사람입니다. 군의 일입니다. 공녀님."
"여기는 데뷔탕트의 장소야. 군대가 아니잖아."
아이리와 칸나가 다투기 시작했다. 친교의 장이라는 목적에 완전히 맞지 않는 둘이 붙었다. 원작에서도 이 둘은 상극이었다.
마리나를 싫어하는 아이리, 마리나를 보호하는 칸나. 붙을 수밖에 없지만, 두고 싸우는 상대가 다르다는 것뿐이다.
"칸나 카라모프, 딱딱한 건 알고 있었지만 보니까 더 그렇네."
"죄송합니다. 천생 군인이라."
군인이 명예인 이 제국에서는 칸나에서는 최선의 리시브였다. 그러니까,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당신과 다르다 이거지. 아이리가 그걸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칸나 백작 영애, 지금 공녀한테···"
"그만, 그만. 아이리 아가씨. 아니, 공녀님. 칸나 대위님 먼저 뵙고 올게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
내가 말하자 의외로 아이리가 멈추었다. 웬일이야. 이 망아지 같은 아이가.
"그래. 그렇다 이거지. 내가 거둬준 은혜는 기억 못하고."
네가 언제 날 거둬줬어. 날조 봐. 아이리는 삐진 듯 내 손을 놓고 가버렸다. 그 작은 뒷모습이 서운하다는 기운을 잔뜩 풍기고 있어 미안했다.
"가자, 에퍼리."
칸나는 다시 나를 잡아끌고 구석으로 갔다. 난 끌려가며 아이리가 간 쪽을 봤지만 이미 그녀는 숲 사이로 도망친 고양이처럼 사라져있었다.
"아이리 공녀와는 어찌 아는 사이냐?"
"옛날 공작저에 잠깐 몸담았었죠."
"귀족 됐다고 다나까도 안쓰고."
"무도회잖아요."
내가 웃자 칸나는 나를 흘기며 바라보았다. 그래, 그래도 칸나와 할 일이 있었지.
그 전에 할 것도 있고. 난 마치 화투패를 쪼듯 칸나를 느리게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름 : 칸나 카라모프
나이 : 21
호감도 : 51
가장 사랑하는 사람 : ???」
음, 51이라. 좋은 거야, 나쁜 거야? 비슷한 수치인 가티스가 날 잘 대해주는 것 보면 50대 숫자가 나쁘지는 않은 거 같은데. 그래도 칸나가 날 아끼고 있었구나.
"죄송합니다. 대위님."
"뭐가 죄송한지는 알고 있어?"
"말도 안 하고 전출 간 걸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정확하게 아니까 더 열받네."
열받는다고? 안 돼! 나는 다시 창을 켰다.
「이름 : 칸나 카라모프
나이 : 21
호감도 : 52
가장 사랑하는 사람 : ???」
뭐야, 올라갔네. 사람의 화법은 다 다르다지만 칸나의 화법은 너무 어렵다. 어느 장단에 맞춰줘야 되는 걸까.
"네 꿈이 그쪽이라면, 내가 막을 수는 없지. 원래 인생이란 게 그래. 일직선으로 달리게 되어있지만, 달리는 도중 불가피하게 주변 사람들과 부딪치며 갈 수밖에 없잖아. 나도 아버지가 이른 나이에 임관하는 걸 반대했었지."
"알아주시니까 고맙네요."
"시답잖은 이유로 간 건 아니지?"
"그럼요."
시답잖은 이유라. 난 연애가 절대 시답잖은 이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정확하게 말할 수 있다.
"그래, 그러면 마음이 놓이네. 어쨌든 그럼 아이리 공녀님께 가봐."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내가 말을 늘이자 칸나가 날 빤히 바라보았다. 칸나와의 대화 때문에 집중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드레스 차림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발끝까지 내려오는 품이 넓은 하얀 드레스, 드레스색깔과 비슷한 진주색 초커. 그러면서 이 데뷔탕트와는 전혀 맞지 않는 전투적인 녹색 눈빛과 짧은 백금발. 그것이 어우러져 엄청난 매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아름다우시네요. 칸나 대위님.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말했다. 내가 말해놓고도 놀랐다. 이렇게 느끼한 멘트가 나올 줄 몰라서. 그래도 그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올 정도로 예뻤으니.
칸나도 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 몰랐다는 듯 당황했다.
"그, 그래. 고맙다."
"그럼 전 이만."
난 자연스럽게 칸나의 호감도창을 봤지만, 호감도는 그대로였다. 그래, 호감도를 올리려고 한 말은 아니니까.
난 아이리를 찾으려고 했지만 내 본분은 가티스를 호위하는 것. 너무 놀다가 보직 3일차에 해임되는 수가 있으니 가티스 옆에 섰다. 계속 영애들을 지켜봐도 아이리는 보이지 않았다.
"성녀가 뭘 대단하다고 저렇게들 꼬일까."
가티스는 과자를 우적거리며 말했다. 난 바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찾을 필요도 없이 마리나의 주변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마리나는 진짜 외모만으로도 자체발광이다.
내가 여자주인공이라서 의식해서 그런 걸 수도 있었다. 외모로 치자면 아이리가 그렇게 꿀리는 건 아니었지만, 뭔가 아우라가 있다고 해야 하겠다.
"아버지 들어가셨지?"
"네."
"형들은 뭐하는 것 같아?"
나는 가토스와 가테스를 봤다. 사실상 호위라지만 데뷔탕트의 건실한 남자에 황족. 사람이 안 꼬이려야 안 꼬일 수가 없었다.
"여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넌 뭐해?"
"전 호위해야죠."
가티스가 날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난 대충 체면 차린 것 같으니까 아무 방 들어가서 문 잠그고 자고 있을 게. 필요하면 호출 부를 테니까 너도 좀 쉬어."
가티스가 기지개를 한껏 핀 다음 하품을 하면서 일어났다.
내가 느낀 점. 황족의 아이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 원래 아이라면 어른들이 노는 곳에 끼는 건 싫어하고 질리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쉬고 싶어서 보통 떼를 쓰는데, 얘는 명분을 만들어서 쉬려고 한다.
황자니까 막을 수도 없고, 어찌 보면 나한테 이득이다. 무도회 2부 때는 좀 움직여야 하니까.
"네, 그럼 그러세요."
"난 간다."
가티스 황자는 과자 한 움큼을 주머니에 넣고 하나씩 빼먹으며 커튼 뒤쪽으로 퇴장했다.
난 아이리를 찾으려고 했지만 아이리는 여전히 없었다. 뭐, 때 되면 알아서 마주치겠지. 그렇게 난 눈 호강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제, 무도회 2부의 시작이었다.
나는 마리나를 주시했다. 마리나는 언젠가 이 무도회 중간에 빠져나온다. 으레 여자주인공들은 그렇지 않은가. 테라스로 가거나, 잠깐 쉬러 복도에 가거나.
그래야 남자주인공을 마주치든, 서브남주를 마주치든 할 것 아닌가.
근데 이 작가님은 여기서 한 번 더 꼬았다. 마리나에게 위기를 한 번 준 것이다. 남자주인공과의 만남을 극적으로 하기 위하여.
"어? 마리나 성녀님이 어디 가셨지?"
"잠깐 화장실 간다고 하셨어요."
"정말 외모만큼 성격도 아름다우신 분이에요!"
마리나는 칭찬 일색. 원작과 같다. 이미 절친이 된 것 같은 아일린 후작 영애, 시에나 백작 영애, 히아나 백작 영애. 확실히 조연들이지만, 품위가 있으면서 아름답다.
"그런데 화장실을 가신지 좀 오래 되셨는데."
"길을 헤매시는 건 아닐까요? 아무래도 황도가 익숙하지 않으신 분이니."
난 그 말을 듣고 일어났다. 슬슬 나갈 때가 됐다. 다행히 아직 주머니에 있는 호출기는 울리지 않는다. 가티스는 아직 자고 있다는 뜻이겠지.
"자, 어디 있을까."
나는 중얼거리며 최대한 마리나가 있는 곳을 찾아야했다. 마리나가 악역들을 마주치는 건 화장실 앞 복도에서. 하지만 여기는 황궁. 화장실이 적을 리가 없다. 나는 그러니까 최대한 많이 돌아다녀야 한다는 거다.
어쨌든 가테스가 구해줄 것이기는 하지만, 그 장면을 좀 보고 싶거든.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애니메이션이나 영화에 나오는 배경들의 성지순례. 나도 그런 걸 하는 거다. 굳이 말하자면 성지순례보다 더하다. 직접 그 장면을 보는 거니까. 벌써 기대가 된다.
"당신이 성녀라는 걸 그래서 어떻게 증명할 수 있죠?"
요리조리 황궁을 탐사하던 와중, 나는 웅성거리는 복도를 찾았다. 사람들 몇몇이 모여 있고, 마리나가 틈 사이로 보였다.
앙칼진 목소리는 아마 아이리의 부하 정도 되는 역할이겠지. 나는 마리나를 괴롭히려는 아이리를 보려고 했지만, 사람들에게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아마, 마리나는 그때 이렇게 답했었지. 로맨스판타지의 여자주인공 답게.
- 제가 신전에서 받았는데, 뭐 문제라도 있나요?
크, 벌써부터 사이다네. 하지만 내 귀에 들린 건 완전 다른 소리였다.
"신전에서 받았다니까, 미친년아."
"뭐, 뭐? 미, 미친년?"
내가 들은 게 맞나? 이게 바로 성녀의 입에서 나올 소리인가? 내가 생각하는 사이다가 아니잖아. 확실히 마리나의 목소리는 맞는데. 네가 욕을 여기서 왜 해. 곱고 좋은 말만 들었을 귀족 영애들은 마리나의 거친 언행에 혼비백산하는 듯했다.
상황은 맞는데. 이건 대체 뭐야. 내가 벽 뒤의 소리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을 때, 누군가 내 어깨를 쳤다. 난 반사적으로 그녀의 입을 막고 제압했다.
"읍, 읍!"
내 턱과 목을 간질이는 부드러운 땋은 은발. 이 머리의 주인공은 나는 알고 있다. 난 천천히 손을 뗐다.
"···아이리 아가씨?"
"켁, 켁. 너 미쳤어?"
"여긴 어쩐 일이세요?"
저기 있지 않고 여기 어쩐 일이냐고. 아이리는 내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화장실 가러 온 건데. 뭐, 문제 있어?"
"아뇨. 그건 아닌데."
내가 더 말을 하려하자 아이리는 손사래를 쳤다.
"아, 됐어. 넌 완전 칸나 카라모프만 쫓아다니는 애잖아. 너랑 얘기 안해."
그걸로 아직도 삐져있냐. 징하다. 아이리는 날 무시하고 복도로 쑥 빠져나갔다. 아, 여기서 아이리가 저들과 합심해 마리나를 괴롭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했었던 것도 잠시.
"너희들 뭐해?"
아이리의 낭랑한 목소리가 영애 무리를 움직였다. 영애들은 그제야 뒤를 돌아보고, 아이리를 알아보았다.
"아이리 공녀님이셨군요."
무리 앞에 서있던 사람은 평범하게 생긴 영애였다. 누구야. 뭔가 극적이지 않은데.
"에블린 백작 영애. 지금 뭐하는 거야?"
"네? 아니, 자기가 성녀라고 막 거들먹대는 것 같아서··· 귀족의 예의도 없고···"
"네가 뭔데 귀족의 예의를 성녀한테 따지지? 성녀는 평민일 수도 있고, 귀족일 수도 있다. 이건 상식 아니야?"
뭐야. 아이리 걸크러쉬 뭔데. 이건 완전히 내 예상과 다른 전개잖아. 아이리가 마리나를 구해주는 역할이라니. 이건 내가 아는 소설이 아니다.
"···죄송합니다."
"카히티 백작께 여쭤봐야겠군. 제국이 인정한 성녀를 일개 백작가가 의문을 가진다고. 그 말은 제국의 판단력을 못 믿는다는 거가 되니까."
"아니, 제 말은 그런 게 아니었어요!"
지금, 굉장히 소름 돋지만, 아이리의 대사는 소설 속 가테스의 대사와 거의 비슷하다. 남자 말투냐, 여자 말투냐의 차이지.
"···영애들은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나?"
복도 반대편에서 울리는 중저음의 목소리. 가테스의 목소리였다. 이게 대체 뭔 상황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가테스가 나오자 영애들은 깜짝 놀라며 모두 해산하고 말았다. 소설과는 다른 전개다. 어쨌든 가테스가 상황을 정리한 건 맞지만.
가테스는 남아있는 아이리와 마리나에게 다가갔다.
"아이리 공녀. 생각보다 멋지군."
"과찬이세요. 황자님. 황자님도 늘 그랬듯 멋지시네요. 괜찮으시다면 저와···"
"음, 나는 지금 성녀 호위를 맡고 있다."
아이리는 뭔가 가테스에게 제안을 하려 했지만, 그건 무참하게 까였다. 이 전개는 아주 나중에 나오는 전개인데. 아이리가 춤을 제안하지만 가테스가 차는 장면. 대체 이 소설은 어떻게 되어먹은 걸까.
"성녀님. 가시죠. 제가 의전하겠습니다."
"···네."
그나저나 가테스의 생각보다 멋지군, 이 대사는 마리나에게 쳤어야 되는데. 마리나가 당차게 대응하고, 그걸 가테스가 봤다는 내용이었으니.
아이리는 뭔가 아련하게 가테스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허나 돌아본 건 마리나였다. 아마, 아이리와 눈을 마주친 것 같았다.
아이리는 그저 얼떨떨해 보였다. 그게 조금 짠해서, 나는 곧장 아이리에게 달려갔다.
"아이리 아가씨."
내가 부르자 아이리는 깜짝 놀라며 뒤를 바라보았다.
"뭐야, 왜 왔어?"
"음, 그냥요. 의전할 사람이 필요해 보여서."
"그렇긴 하지."
"그나저나 가테스 황자님 좋아하세요?"
"뭐? 헉, 컥, 컥."
내 돌직구에 사례가 들린 듯 아이리가 기침을 바투 뱉었다. 아이리는 눈물이 맺힌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왜, 좋아하면 안 돼? 잘 생겼잖아."
"아뇨. 좋아할 수 있죠."
하긴 아이리는 가테스 황자에게 빠져있다는 설정이니까. 악역 영애라면 남자주인공을 노리기 마련이지.
그런데, 왜일까. 이 교묘하게 뒤엉킨 소설의 장면이 계속 거슬리는 건. 그리고 아이리의 아쉬운 눈빛이 거슬리는 건.
"됐어. 나 화장실 갔다 올 테니까 나 의전 준비나 하고 있어."
"아, 네."
아이리는 고개를 팽, 틀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래도 의전을 맡긴 걸 보면 삐진 건 풀린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