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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35화 (35/150)

< 35화 권리와 의무 (3) >

나는 아이리를 보면서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하긴 짐꾼 때 들었었지. 던전에서 연습했던 것도 등위시험을 위해서였잖아. 소드 엑스퍼트 2가 목표라고 했던가.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3명의 조연 영애가 날 감쌌다.

"가티스 황자님의 근위기사 맞으시죠? 저와 비슷한 나이인데 정말 대단하세요!"

"기사라고 안 느껴져요, 피부가 너무 깔끔하신데요?"

"아버지께 들었어요. 황제님을 직접 알현하셨다면서요. 나중에 언제 티타임을···"

아름다운 그녀들이 나를 보며 눈을 반짝거리고 있다. 어, 뭐야. 내가 바랐던 게 이런 거라고. 아일린, 시에나, 히아나가 나를 둘러싸고 조잘거렸다. 벌써부터 행복해지는 기분이었다.

다른 남자들끼리의 조는 나를 질투하는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난수니까 어쩔 수 없다는 눈빛. 미안하지만 이건 다 조작이다.

"인기가 많네? 짐꾼아?"

"짐꾼이라니요. 귀족한테 무슨 말씀이세요."

"네가 요즘 황도에서 좀 핫해. 그래서 어떻게든 비벼보려는 여자들이니까 너무 기대하지는 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아, 얘 악역영애였지. 내가 반박하려하자 이미 우리의 대화에 관심이 생긴 영애들이 우리 둘을 감쌌다.

"어머, 공녀님. 에퍼리 남작을 이미 알고 계셨나요?"

"짐꾼은 무슨 말이죠?"

하. 말하긴 싫었는데. 그래, 말해라, 말해. 아이리는 날 슬쩍 보고 비웃듯이 영애들에게 말했다.

"원래, 몇 주 전만 해도 짐꾼을 하던 애였어요. 내가 참 잘 챙겨줬는데. 갑자기 황도로 가더니 운 좋게 작위를 챙겨갔죠."

참나. 악역영애 아니랄까봐. 남 조지는 건 잘하네. 그러나 반응은 아이리가 원하던 것과는 좀 달랐다.

"어머, 그러면 그렇게 빨리 인정을 받으신 건가요?"

"애초에 엄청난 능력을 가지셨던 분이군요!"

"공작저에서 많이 아깝겠어요. 황제님의 눈에 들기 전에 채가야 할 인재였군요!"

"어, 어···"

영애들의 다른 반응에 아이리는 혀를 씹고 말을 제대로 못했다. 아이리가 어떻든, 영애들은 다시 날 싸고 감돌았다. 난 아이리를 몰래 보고 비웃음을 갚아주었다. 아이리는 이빨을 꽉 깨물었다. 애초에 잘 챙겨주긴 뭘 잘 챙겨줘. 콱.

"지금은 1년에 한 번 등위시험이에요. 친교는 무도회나 티타임에서 하는 거 아닌가요?"

내가 영애들과 재밌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와중, 아이리가 찬물을 끼얹었다. 맞는 말이라 영애들과 나는 말을 멈추게 되었지만, 정작 눈치가 보이는 건 아이리일 거다.

"아가씨가 원래 저런 분이 아닌데, 등위시험이라 긴장하신 모양이에요."

"아하, 그런가요?"

그래도 난 아이리의 평판을 살짝 만져줬다. 아직 그녀에 대한 평가를 보류할 때라서. 무도회에서 보여준 모습이 소설에는 완전히 없었던 내용이라. 그런데 지금 보면 또 원작과 성격이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조연들과 나름 안면을 터놨으니, 만족스럽다. 리얀, 만세. 리얀과 동맹을 맺은 건 아주 잘한 일이었다.

"자, 시험이나 합시다."

아이리가 툴툴거렸다. 작위가 상관없는 등위시험이라고 해도, 그래도 여전히 공녀라는 위치는 무시할 수 없다. 아이리의 말에 영애들이 조용히 진열을 짰다.

"탄탈로스 숲의 아무 던전이나 들어가면 돼요. 어디로 들어갈 거예요? 공녀님이 선택하시겠어요?"

히아나가 아이리에게 물었다. 아이리는 살짝 어물거렸다. 그래, 소드 엑스퍼트 2가 목표인 네가 뭘 알겠냐.

"저만 따라오시죠."

"어머."

내가 강하게 말하자 히아나가 살짝 놀랐다. 방금 좀 남자다웠나? 난 어깨를 으쓱거리고 그녀들을 숲으로 이끌었다. 아이리는 뭔가 주도권을 뺏긴 것에 불만을 가진 듯했지만, 그냥 넘어갔다.

이 던전 레이드가 끝나고 아이리를 제외한 모두의 호감도를 한 번 다시 확인해봐야겠다. 내가 얼마나 잘했는지.

우리는 탄탈로스 숲을 헤쳐서 들어갔다. 사실 내 목표는 따로 있다. 대제가 말한 탄탈로스 숲의 요정반지도 찾을 거거든. 그게 프러포즈할 때 좋다며. 난 대제 믿을 거야.

"요정 숲으로 들어가는 거야?"

내가 깊숙이 들어가자 아이리가 옆에 붙었다.

"네, 왜요?"

"요정의 숲은 시험 외지역이잖아. 너 같으면 위험 지역에서 시험을 보겠니?"

요정의 숲이 위험 지역인 건 처음 알았는데. 영애들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요정의 숲은 지금 제 능력으로는 위험하겠네요. 에퍼리 남작님을 믿지만···"

"시험 외면 어쩔 수 없죠."

그래, 그래. 그럼 다음에 하지, 뭐. 아직 프러포즈 할 사람을 정하지도 않았으니까. 난 최대한 구석진 곳으로 가서 아무 던전이나 들어가기로 했다. 숲의 외곽보다는 안쪽에 있는 것이 던전의 랭크는 높을 것이다.

"여기 정도면 B랭크 정도는 되겠는데요."

"···긴장되네요."

영애들이 속닥거렸다. 나도 B랭크 정도 되는 던전인 건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참 고민이 되는데, B랭크로 소드마스터의 기질을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인지. 적어도 B랭크를 한 번에 박살내야 소드마스터 아닌가.

근데 리얀은 내게 흔들다리 효과를 알려줬다. 그러면 나보고 뭐 어떡하라는 거지.

"자, 그럼 들어갑니다."

고민을 안고 들어가려는 순간, 난 땅 밑에서 무언가를 감지했다. 타락한 나무와 비슷한 느낌이지만, 뭔가 더 거친 느낌.

"잠깐."

난 일단 일행을 멈췄다. 그리고 대제에게 받은 하얀 검을 꺼내들었다. 그와 동시에 땅바닥에서 털이 달린 검은 뿌리가 거꾸로 치는 번개처럼 쩌적 소리를 내며 치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이건, 소설 속에서 묘사만 봤지만 뭔지 알 수 있다. 아이리의 목소리가 떨리며 그 정체를 내게 확인시켜주었다.

"···검은 나무."

등위심사평가위원장이자 제국의 1황자는 가테스는 황궁으로 돌아와 있었다. 시험 시간은 대략 2시간. 그 시간을 전부 대기하는 데 쓸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제국에서 제일 바쁜 사람 중 하나니까. 30분 거리의 황궁을 달려서 온 다음, 1시간동안 밀린 서류를 결재하고 다시 30분을 거쳐 평가장으로 갈 생각이었다.

"서류는 아무리 처리를 해도 끝이 없군."

가테스는 잠깐 관자놀이에 손을 짚었다. 왼쪽에는 반려한 서류, 오른쪽에는 결재한 서류가 책상 위에 두 개의 탑처럼 마주보고 있었다.

그래도, 해야 할 것은 해야 하는 법. 이건 사실 황제가 해야 할 일이기는 하지만, 그도 언젠가부터 일정 부분 맡아서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테스는 이것이 의무라고 생각했다. 황제가 되기 위해서라면.

그는 다시 사명감으로 도장을 들었지만, 누군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누구냐."

"급보입니다."

"들어와."

가테스가 도장을 잠시 내려놓았다. 들어온 자는 땀을 뻘뻘 흘리고 간략한 예를 갖췄다.

가테스는 그때부터 심상찮음을 느꼈다. 자신에게 간략한 예라. 얼마나 급한 일일지 벌써부터 긴장이 되었다.

시종이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평가장에 검은 나무가 나타났습니다."

그 다음, 휙 하고 강풍이 시종의 옷깃을 스쳤다. 시종은 머리를 살짝 들었다. 의자에 앉아있던 가테스 황자는 없었고, 자신이 닫고 왔던 문도 어느새 열려져 있었다.

사실 지금 우리는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있으니까. 문제가 되는 건 이미 던전 안에 들어간 사람들이다. 던전 외부에서, 외부의 마력으로 일그러지거나 훼손이 되면, 던전 안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 사실을, 당연히 나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하죠? 빨리 나가서 감독관을 불러야 될까요?"

"그러면 늦어요."

나는 냉철하게 말했다. 검은 나무의 뿌리가 올라오는 속도가 심상치 않다. 이런 사건이 있었나.

"일단 던전 안에 있는 사람들을 구출해야할 것 같아요."

아이리가 말했다. 지금은 얘가 악역영애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일단 내 파티원이라는 게 중요한 거지.

그때, 검은 나무가 외곽에서부터 뿌리를 올려댔다.

척, 척, 척, 하는 소리가 마치 숨어있던 병사들이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그 사이에 있던 던전들이 가시에 찔려 안쪽으로 굴렀다. 던전이 붕괴되며 마나가 새어나가고, 검은 나무의 기가 들어갔다.

그건 너무 순식간이라 내가 막을 수도 없었다. 심지어 던전과 던전이 샴 쌍둥이처럼 합쳐지는 경우도 있었다. 저러면 던전의 등급이 올라가는 건 당연하고, 함정도 많아진다.

급박하게 흘러가는 상황에 영애들은 입술만 꽉 깨물 뿐이었다. 울음을 멈추려는 것이었다. 그나마 당찬 건 아이리였다. 그녀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무언가를 할지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와아아악!"

저 멀리서 아직 던전에 들어가지 못한 우리 같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우리쪽으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털이 달린 혐오스러워 보이는 뿌리에는 점점 마나가 물풍선처럼 불고 있다. 난 그걸 느낄 수 있다. 이제 몬스터가 나올 것이다.

던전, 던전 안에 들어간 사람을 어찌 구출할까.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난다. S라는 등급을 받고, 파티장으로 첫 레이드를 뛰었을 때.

- 주환영 헌터님, 살려주세요!

- S급 헌터라며, 뭐라도 좀 해봐! 이 새끼야!

그때, 나는 너무 치기 어렸다. 그저 같이 있던 B급 헌터 힐러가 예뻤고,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던전 보스에 들어가기 전 너무 많은 힘을 써버렸고, 정작 힘을 써야할 곳에서 못 써 두 명의 사망자를 내고 말았다.

그것도 B급 던전에서. 오랜만에 나온 S급 헌터라고 대한헌터협회에서 고르고 고른 데뷔전이었는데, 내가 망치고 만 것이다. 내 욕심 때문에, 다른 사람의 목숨까지.

웃음이 나온다. 대체, 이런 내가 일부러 이 사람들을 위험에 끌어들여서 흔들다리 효과 같은 걸 노리는 꼴이라니. 전혀 배운 게 없지 않은가.

"모두 내 뒤로 모여요."

나는 여전히 공격적으로 뻗어오는 검은 나무에 맞서며 그녀들에게 말했다. 그녀들은 아무 말 없이 내 뒤에 모였다.

던전들은 파괴되거나, 구르거나, 합쳐지거나. 제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차라리, 이럴 거면 이러는 게 낫다. 던전의 랭크업을 하는 이상이 있더라도.

나는 검을 땅에 꽂고 마나를 강제로 불어넣었다. 내 스킬은 모두 꺼놓았다. 스킬은 백그라운드 어플리케이션 같은 것이라, 켜놓아도 마나의 소비가 조금씩 들기 때문이었다.

완전, 깡으로 밀어붙이는 거였다. 검이 박힌 땅이 회전무늬로 오그라들었다. 곧 우리가 있는 지면이 물결 문양으로 부서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떠있었다. 내가 마나로 그녀들을 받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 너 뭐하는 거야?"

아이리가 물었다. 난 고개를 저었다. 말 시키지 말라는 뜻이었다.

"너, 이렇게 쏟으면 탈진···"

걱정도 하지 말고. 난 다시 고개를 저었다. 스킬도 없이 마나를 쏟아 부으니 효율도 없다.

그때, 스킬창에 무언가가 떴다.

【스킬 : 선풍(旋風) Lv MAX 개방】

【스킬 : 선풍 Lv MAX 사용 중】

그나마 마나를 쏟기가 편해졌다. 회오리라는 단어였지, 아마. 무슨 비행형 마수들한테나 있을 법한 스킬이다. 그나마 그것 때문에 마나를 회전시키는 게 조금 더 효율성이 있어졌다.

쿠콰콰콰쾅!

나무와 지면, 모든 것들이 내 검 아래 한 데 모인다. 검은 나무의 뿌리들도 마찬가지고, 던전들도 마찬가지다. 던전들은 내 거친 마나의 위압 때문에 서로 합쳐서 자신들을 보호하려고 했다.

이 숲에 있는 던전들은 내가 쏟아낸 회오리로 모두 가둬져 합쳐지고, 심지어는 요정의 숲의 던전까지 합쳐지고 말았다. 이 던전은 이제 얼마만큼의 랭크가 되는지 모른다.

던전 안에 있는 자들을 구출하려면 이 방법 밖에는 없었다. 한 군데 모이게 한 다음 레이드를 하는 것이었다.

던전이 점점 커지고 있다. 던전의 깨진 곳에서는 복구를 하려고 어떤 힘이든 끌어 모으려 모든 것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선택은 언제나 그렇다.

"들어가면, 나를 기다려요. 나만 기다려요. 괜히 혼자 다니지 마요. 알았죠? 내가 구해줄 테니까."

내가 헐떡거리며 말했다. 지금, 내 상황도 좋은 편이 아니다. 그걸 눈치 챈 아이리가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던전의 아가리는 생각보다 우릴 더 빨리 삼켰다.

난 눈을 감았다. 지친 내가 어느 정도 버텨줄 수 있을까. 이제부터는 나와의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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