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권리와 의무 (4) >
던전에 떨어졌을 때는, 나 혼자였다. 숨이 벅차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오랜만이다. 빨리, 빨리 찾아야 한다. 숨이 벅차면 숨을 끌어 쓰면 그만이다.
"오랜만에 레이드 하는 느낌 나네."
눈을 감았다가 뜬다. 진지해질 필요가 있다. 레이드라는 건, 항상 진지하며 긴장된 상태로 해야 하니까.
【스킬 : 신속한 움직임 Lv MAX 사용 중】
【스킬 : 정신집중 Lv 9 사용 중】
【스킬 : 사고 가속 Lv 8 사용 중】
【스킬 : 전술적 움직임 Lv MAX 사용 중】
【스킬 : 소검 마스터리 Lv MAX 사용 중】
【스킬 : 고속이동 Lv 8 사용 중】
스킬을 여니 몸이 삐그덕댄다. 스킬은 열면 열수록 과부하가 걸린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는 어쩔 수 없다. 나는 최선을 다하지 못했을 때 남는 한이 얼마나 차갑고 깊은지 알고 있다.
나는 흰 검을 들었다. 이 검의 장점은 마나 전도율. 하지만 지금은 내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난 최대한 마나를 아껴서 쓸 예정이니까.
"캬아아악!"
어둠 속에서부터, 구울이 날아온다. 난 흰 검으로 그것의 뺨을 쳐서 부숴버렸다. 구울의 두개골이 부셔지며 뇌수를 벽에 흩뿌렸다. 칼날이 아닌 몽둥이로 맞았으니 당연한 거다.
【고유스킬 : 초감각 Lv MAX 사용 중】
난 최대한의 감각을 열었다. 사람이 느껴지는 곳으로 달려야 했다. 가만히 있으라고는 했지만, 가만히 있으면 몬스터가 공격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니까.
내 기감에 여러 사람들이 걸려든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싸우고 있다.
이들은 어떻게 던전이 합쳐진지도 모르겠지. 그저 내 독단적인 판단이다. 그리고 판단에는, 분명한 의무가 따랐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헌터의 의무였다.
이들 중 한 명이라도 죽일 수는 없다. 난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파티장의 덕목이니까.
"···공녀님?"
마구잡이로 끌려들어간 던전에서, 아이리는 그 음성에 눈을 떴다. 던전에 빨려 들어갈 때의 압력에 잠깐 기절한 모양이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은 시험관의 옷을 입고 있는 칸나 카라모프였다. 이번 등위시험의 시험관이 칸나였군. 아이리는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흙냄새와 마기의 압박감이 몸을 무겁게 만들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손톱 밑에도 흙이 잔뜩 꼈다.
"···던전이 왜 이렇게 된 거죠? 검은 나무가 던전을 합친 건가요?"
"아니. 아니야."
혼란스러워하는 칸나를 보며 아이리는 사실관계를 정리했다.
"에퍼리가 한 짓이야."
"일개 사람이 숲의 던전을 하나로 합칠 수 있다고요?"
"그렇더라고."
칸나는 경악했지만, 다시 침착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녀 역시 이 사태의 위중함을 아는 만큼, 당황하고만 있을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에퍼리가 남긴 말이라도 있습니까?"
"가만히 있으라던데. 자기가 찾아오길 기다리라고."
그때, 어둠 속에서 몬스터 한 마리가 나타났다. 아이리가 검을 꺼내려고 하는 순간, 칸나의 섬광 같은 검날이 몬스터를 갈랐다.
칸나는 불 스킬을 써서 주변을 밝히고, 자신이 가른 몬스터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아이리는 밝아진 주변에서 몬스터 사체를 보지 않고 벽의 균열을 봤다.
"칸나 영애."
"아이리 공녀님."
둘의 입이 동시에 열렸다. 서로가 눈을 마주쳤다. 서로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원래라면 말을 양보할 사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여기서 빠져나가야 돼."
"여기서 도망쳐야 합니다."
그녀들은 순식간에 합이 맞았다. 바로 둘의 진영이 갖춰졌다. 어디로, 어디로 떠나야할지.
"하이플이라는 늑대형 몬스터입니다. 절대 혼자 다니지 않죠. 피 냄새를 잘 맡는 놈들이라 아마 달려올 겁니다."
"벽의 균열이 나고 있어."
칸나와 아이리는 핵심적인 정보를 공유했다. 그녀들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때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왼쪽 벽의 균열이 커진다.
"오른쪽!"
아이리와 칸나는 순식간에 검기를 발사해 오른쪽 벽을 부쉈다. 잠자고 있던 벌레형 몬스터들이 여러 마디로 된 허리를 뱀처럼 들어올렸다. 끔찍한 모습이었지만, 여기로 돌파하지 않을 수 없다.
쾅!
벽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늑대형 마수들이 그녀들에게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이픈이 컹컹거리는 소리가 신호탄이라도 된 듯, 칸나는 소리쳤다.
"달려요!"
칸나와 아이리는 징그러운 벌레들에게로 뛰어들었다.
S급 헌터끼리 모이면 주제는 대략 정해져있다. 누가 제일 강할 것인가? 난 이런 주제에는 별로 끼지 않았다. 어차피 S급 헌터끼리 싸울 일은 없으니까.
내가 자주 낀 주제는 이렇다. S급 헌터는 보통 레이드 공대장이 되기 마련인데, 레이드가 우선인가, 파티원들의 안전이 우선인가?
난 첫 레이드의 트라우마로 안전을 우선 삼은 사람이다. 물론 대다수의 S급 헌터들은 대개 오만하기에 레이드가 우선이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난 벽 하나를 부숴서 떨고 있는 시험자들을 찾아냈다. 모두 초면인 사람들이었다.
"까, 깜짝이야."
"내 뒤로 붙어요."
내 말은 그게 끝이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대개 귀족이었지만, 내 말을 따랐다. 공포의 순간에, 누군가 이끌어준다는 건 안정감을 주니까. 난 그것을 알고 있다. 위압 스킬도 켜놓은 상태니까, 내게 반항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모두, 몬스터 보면 나한테 알려만 줘요. 내가 다 처리할 테니까. 자잘한 몬스터들 처리해주면 좋고. 그렇다고 무리는 하지 마요."
내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벽을 파괴하고 밑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내 뒤에 붙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내가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있을까? 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른 벽을 깨나갔다.
"오늘, 시험자가 별로 없어서 다행이네요."
"이게 없는 거야?"
아이리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뒤에는 사람이 많았다. 그녀들이 뚫고 오는 길에 많은 사람들을 마주친 탓이었다.
"이 정도면 평소의 반도 안 되는 수준입니다."
"불행 중 다행이네."
아이리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마주친 사람들 중 강자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인기척이 느껴지면, 혹시 에퍼리일까 기대를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무리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아이리의 부담감은 커졌다. 그들 중에는 왜 시험을 보러 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약자가 많았다. 검 하나도 제대로 못 휘두르는 것들.
지금 현재 이 무리의 리더는 아이리와 칸나가 암묵적으로 맡고 있었다. 아이리는 공녀여서, 칸나는 감독관이어서 그랬다.
"이 정도로 무리가 쌓이면 진영을 만들어서 움직여야 해요. 일렬로 움직이면 몰살당할 수도 있습니다."
칸나가 결국 결단을 내렸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있었다.
"전방은 제가 맡겠다고 해도, 후방을 맡을 사람이 필요해요."
모두 검을 들어본 사람이라서 칸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다만 모른 척하고 있을 뿐이었다. 전방의 또 다른 이름, 후방. 이런 균열 투성이의 던전에서는 전방이나 후방이나 똑같이 위험했다.
과연 그 멍에를 누가 질지, 모두가 눈치를 보고 있을 때 누군가 손을 들었다. 칸나 바로 옆에 있는 아이리였다.
"내가 할게."
"···공녀님은 좀."
칸나가 난색을 표했다. 아이리는 이 부대에서 가장 중앙에 있어야 할 사람이었다. 공녀라는 직위는 응당 지켜야 했으니까. 사실 모든 시험관은 이번 시험에서 아이리 공녀가 다치지 않게 하라는 주의사항까지 받기도 했다.
"다 하기 싫어하는 것 같은데, 뭐."
"공녀님은 제 옆에 있으셔야 됩니다."
"왜? 내가 공녀라서?"
아이리가 직구를 날렸다. 그 말에 칸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칸나 영애. 미안하지만, 그러니까 더 나가야 되는 거야."
"공녀님, 공녀님은 본인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지금은 더욱. 칸나가 알기로는 공작가의 아들인 예프린이 도망갔다고 했다. 지금 아이리 공녀는 라피테스 공작가를 이을 직계 후손. 그녀가 사고라도 당한다면 정치적으로까지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가는 거야."
아이리가 등을 돌려 후위로 가자 칸나가 급하게 그녀의 옷깃을 잡았다. 아이리는 성질을 내며 칸나의 손을 뿌리쳤다.
"칸나 영애, 한 번만 경고한다. 본 공녀의 행동에 더 이상 간섭하지 말라."
아이리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녀는 직감했다. 그녀는 당연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부렸던 어리광이나, 책임져야 할 의무.
"후위는 내가 담당한다."
그때, 아이리의 머릿속에 에퍼리 남작의 경고가 떠올랐다. 그라면 지금 자신의 행동을 막았을까? 가만히 있으라는 걸 보면 그럴 수도.
"최대한 움직이지 않되, 몬스터가 없는 쪽으로만 나아가자."
아이리가 말했다. 그녀는 에퍼리의 경고를 숙지하고 있었다. 이 던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본 사람 중의 하나다. 이 던전은 수많은 던전들이 합쳐진 괴물 같은 존재였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지만, 최대한 움직이지 않고 에퍼리를 기다려야 했다.
"후."
아이리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끔 한숨을 쉬었다. 귀족의 의무이기는 하지만, 긴장이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때, 아이리가 있는 쪽에서 천장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고, 땅에서는 열기가 치솟아 올라 지면이 붉게 물들었다. 아이리의 심장이 덜컹했다.
"모두 뒤로 빠져!"
아이리의 외침에 모든 진영이 물러서졌다. 하지만 훈련되지 않은 자들이라 물러나는 것도 힘들었다. 발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 먼저 벗어나려고 다른 사람의 어깨를 밀치고 가는 사람. 정돈되지 않은 진영에 아이리가 물러설 곳은 없었다. 그녀는 후방을 지켜야 했으니까.
그녀의 눈앞에서 땅과 천장이 깨졌다. 땅에서는 샐러맨더가 고개를 서서히 내밀었으며, 천장에서는 날카로운 칼날을 든 푸른 스켈레톤 검사가 아이리와 눈이 마주쳤다.
설상가상 뒤에도 소란이 이는 걸 보니 칸나 쪽에서도 몬스터가 나온 모양이었다. 아이리는 이빨을 꽉 깨물었다.
'싸울 수밖에 없어.'
그녀는 눈을 감고 마나를 정돈시킨 다음, 모든 스킬을 열었다. 귀족의 긍지가 유형의 아우라가 되어 피어올랐다.
느낄 수 있다. 저 멀리 한 무리가 있다는 것을. 모여 있는 사람들은 최대한 빨리 구해야 했다. 사람 수대로 어그로가 끌리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좀, 천천히 가면 안 되나? 에퍼리 남작?"
살찐 어떤 백작이 헥헥거린다. 지금 구해야 할 사람이 산더미인데, 이 속도도 못 따라오다니. 이런 게 시험관이라니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다.
"구할 사람이 많습니다."
"구할 사람만 구하면 되지 않는가."
백작의 그 말에, 나는 그의 목에 칼을 즉각 겨누었다. 그의 땀에 절은 흰 목이 부르르 떨린다.
"구할 사람이 누구인지는 구하는 제가 정합니다. 구함 받는 당신이 정할 게 아니란 말입니다."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나도 모르게 검을 꺼내고 말았다. 난 분명 실수를 했지만, 백작은 그저 고개를 얕게 끄덕였다. 지금까지 내가 몬스터를 해치우는 걸 보면서 뭔가 느끼는 바가 있었을 거다.
"숨이 차서 죽을 것 같을 수도 있겠지만 좀 참읍시다. 실제로 죽을 사람을 생각하면서."
쾅!
그때, 벽 너머에서 무언가가 크게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싸움이다. 그것도 꽤 큰 싸움. 마기와 마나의 충돌. 하지만 상대하는 마나는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빨리, 빨리 가야 했다. 저 무리는 위험하다. 난 뒤따라오는 사람들을 계속 재촉하며 그쪽으로 향했다.
"악!"
가까워지자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 비명 소리는 익숙했다. 아이리 라피테스의 비명. 나는 곧바로 디딤발을 딛고 벽 세 개를 한 번에 부쉈다.
내 눈 앞에 우리보다 많은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대개는 겁먹은 표정이었고, 앞에 나서서 싸우는 사람들은 몇 명 없었다.
그리고 맨 앞에는 아이리가 있었다. 눈이 베여져, 피를 줄줄 흘리고 한쪽 눈만 간신히 뜨고 있는 그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