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권리와 의무 (5) >
"뒤로 빠져!"
아이리는 누군가의 그 외침에도 빠지지 않았다. 지금은 빠질 때가 아니니까. 다시 자신의 눈을 벤 스켈레톤 검사가 빠르게 다가온다.
얼굴의 한 쪽 면이 피로 덮인 것 같다. 울컥거리는 피. 그르릉거리는 두려움. 오른쪽 눈을 뜨려고 했지만 고통만 느껴졌다. 그때 알았다. 자신의 눈이 베인 것을.
그녀는 간신히 스켈레톤의 검을 막으며 밀려났다. 출혈로 인해 정신이 멍했다. 그래서, 누군가가 자신 앞에 섰을 때 누구인지도 몰랐었다.
그는 단칼에 스켈레톤 검사를 뼛조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왔다. 흐린 한 쪽 눈에 비친 사람은, 에퍼리였다. 그의 표정은 완전하게 굳어 있었다.
"정신 안 차려요? 누가 그렇게 혼자 싸우라고 했습니까? 다 같이 싸워야 될 거 아닙니까. 뒤에 사람들은 검사 아니에요? 아니면 당신이 그렇게 강해요?"
나는 화가 났다. 내가 일갈하자 아이리 뒤에서 벌벌 떨고만 있던 사람들이 움찔댔다. 그러나 내가 화를 내고 있는 건 아이리였다.
그녀의 눈에는 피가 여전히 쏟아지고 있었다. 난 옷의 천을 찢어서 깨끗하게 하는 스킬을 쓴 다음, 그녀의 눈을 덮어주고 바닥에 눕혔다. 내가 응급처치를 하고 있을 때, 아이리가 문득 입을 열었다.
"모두가 하기 싫어할 때, 나가는 게 귀족의 의무야. 넌 모르겠지."
"병신 같은 의무에요."
"귀족을 모욕하지 마라. 넌 심지어 남작 아니냐?"
아이리가 말했다. 아픔을 참는 목소리였다. 그녀는 멀쩡한 한 쪽 눈으로 나를 명확하게 보고 있었다.
대체 왜 그녀는 여기서 다친 것일까. 그녀는 한 쪽 눈을 잃었다. 이걸 복구할 수 있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내가 오지 않았다면 그녀는 죽었을 거라는 거다.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가 죽었겠지.
"귀족 작위 같은 쓸모짝에도 없는 건 당장에라도 뗄 수 있어요."
"넌 의무를 모르는구나."
왜, 이 나라 귀족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말을 하는 걸까.
"당신이야말로 의무를 등한시하는 사람입니다."
"귀족의 의무를 멋지게 지켰다고 생각한다만?"
아이리가 피식 웃었다.
"귀족은 타고나는 것. 타고나는 권리에 대한 의무는 누구나 져야하는 것. 너는 태생이 귀족이 아니라 모르겠지."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내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내 두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완전히 고정시킨 것이다. 그녀의 아름다운 한 쪽 눈에 화가 난 내가 비친다.
"사람이 선택할 수 없는 건 단 하나. 생명이에요. 그 권리를 받은 사람은 그걸 지키는 게 의무라면, 생명부터 지키고 말하세요. 난 당신같이 생명가지고 장난치는 사람들을 제일 싫어하니까. 목숨을 내놓고 가져가라고 흔드는 게 귀족의 의무라면, 난 그걸 지킬 생각도 없습니다."
숨이 찬 나도 말이 헐떡거리며 나온다. 나도 이제 슬슬 한계에 도달했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놓아줬다.
아이리가 가만히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언제부터 넌 그렇게 진지했지?"
"뭐가요?"
"넌 이 세상을 장난으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공작저에서는 특히 그랬지."
아이리가 말했다. 그녀의 눈은 진지했다. 내가 공작령에서 봤던, 철없는 아가씨가 아니었다. 몇 주가 지났다고, 바뀌었는지.
"난 권리를 누릴 때, 의무를 행할 때를 알아. 구분해서 행동할 줄도 알지. 네가 생이 권리라고 한다면, 그 역시 진지하게 임해야 되는 것 아닌가?"
그녀의 말이 내 가슴에 박힌다. 그녀에게 이런 말을 들을 줄이야. 왜 가슴에 박혔냐면, 실제로 그랬기 때문이다.
여기가 소설인 줄 알았을 때, 난 사실 게임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살면서 그렇게 속으로 혼잣말을 많이 한 적은 처음이었을 거다. 마치 PC게임을 플레이하고, 평가하는 듯이. 난 여기 소설 속에서 삶을 산 게 아닌 롤플레잉 게임을 한 것처럼 대했다.
"어떻게 꿰뚫어보셨는지는 몰라도, 그건 부정할 수 없네요."
"그렇지?"
아이리가 날 보며 흐흐 웃었다. 나는 이왕 꿰뚫린 것, 그녀에게 내 본모습을 살짝 귀띔해줬다.
"난 원래 가벼운 성격은 아니에요."
"그래? 넌 한없이 가벼운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부터는 달라요."
사선을 항상 드나드는 사람이 가벼울 리가 없지. 그것도 죽음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게 소설 속의 거짓 삶이 아니고, 내게 주어진 또 하나의 진짜 삶이라면 진지해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심지어 방금도 난 여기서 원작과의 괴리를 하나 더 발견했다. 권리를 누릴 때와 의무를 행할 때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라. 악역의 입에서 나올 리가 없는 말이었다. 그녀가 집사 앞에서 어리광 피운 게, 그저 친해서 부린 어리광이었다면.
"내가 아는 아가씨가 맞아요? 난 그저 철부지 어리광쟁이인 줄 알았는데."
"집에서나 편하게 지내지. 바깥에서는 안 그러거든?"
"그랬어요?"
그렇다면, 아이리는 악역영애가 아니다. 그럼 대체 그 소설은 뭘까. 그저 전개의 큰 줄기만 맞을 뿐. 물론 그것만으로도 도움이 되지만.
나는 그때, 그녀에게 물어볼 거리를 찾았다. 이 소설과 아이리의 캐릭터성에 대한 핵심적인 질문.
"혹시, 성녀 싫어해요?"
아이리가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 느리게 입이 열렸다. 난 그녀의 입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그녀의 입에서 비로소 말이 나왔다.
"내가 왜 싫어하겠어? 싫어할 이유가 없는데."
"그래요?"
"솔직히 아무런 생각을 안 해봤는데."
"하긴, 그게 정상이긴 하죠."
내가 그렇게 말하자, 아이리가 웃었다.
"내가 비정상으로 보였나보네?"
"살짝요."
"사실 난 널 싫어해."
"그건 알아요."
어쩌다 호감도 1로 알게 됐거든. 내가 그렇게 말하자 아이리는 한 쪽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농담이었는데."
"농담 아니잖아요."
"너 피해의식이 좀 있구나."
그녀가 웃었다. 그러자 흐르는 피가 입에 들어갔다. 그녀는 입에 고인 피를 퉷하고 뱉었다. 그 웃음이, 어쩐지, 진심과 같아서 난 그녀의 호감도창을 다시 봤다.
「이름 : 아이리 라피테스
나이 : 19
호감도 : 63
가장 사랑하는 사람 : ???」
난 그 창을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언제 이렇게 오른 걸까. 내가 그새 오를만한 행동을 한 적이 있었나.
"나 되게 싫어하지 않았어요?"
"별로, 없는데? 싫어할 이유가 없잖아. 내가 무슨 인간 혐오도 아니고."
"···그때, 무도회 때 나를 되게 싫어하는 것 같았는데."
그때 호감도 1이었을 때.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는 듯 하다가 입을 열었다.
"너 그때 나 버리고 칸나 영애 따라갔잖아. 그건 좀 별로였지. 그래도 난 선물까지 준 사람인데. 나부터 챙겨야지."
"그때 잠깐 그랬다고요?"
"그러면?"
그녀가 되물었다. 그녀가 되묻는 게, 내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난 이 세계뿐만 아니라, 세계에 있는 사람들마저 하나의 캐릭터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조직되어 있고 바뀔 여지가 없는, 확실한 컨셉트의 캐릭터.
하지만 인간의 감정이란 어찌 그러한가. 사람에게 섭섭할 때도 있고, 좋을 때도 있다. 그녀는 내가 살던 세계의 사람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난 입술 껍질을 씹었다. 내가, 다른 사람을 그런 식으로 보고 있었다라. 이 세상에 대해서 진지한 적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진지한 적이 없던 거다.
"제가 착각했으면 죄송하네요."
"알면 됐고."
아이리는 웃었다. 그때, 스킬창이 내 눈 앞에 갑자기 떴다.
【원죄 : 엘파힘의 심안 Lv 2 업그레이드】
갑자기 이게 업그레이드가 되네. 나는 다른 사람의 호감도 창을 열어보려고 했지만, 그때 던전 바깥에서 엄청난 흔들림이 있었다. 내부의 준동이 아닌, 외부에서부터 침입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마수가 아니다. 훈련이 된 인간들이다.
곧, 우리 앞에 많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중갑으로 무장한 기사들과 가테스였다.
"···미치겠군."
가테스는 눈을 다친 아이리를 보며 탄식했다.
우리는 가테스와 함께 부대를 정리하면서 남은 사람들을 구출해나갔다.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다. 그래도 이 던전을 클리어해야 한다는 건 변함이 없었다.
"힐로 응급처치 안 되나?"
"자상이 눈 깊게까지 있습니다. 빨리 처치를 안 하면 실명까지 할 수 있습니다."
"최대한 이 던전을 빨리 클리어해야겠군."
아이리는 내 어깨에 기대고 있었다. 출혈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울 것이다. 눈이 안 보인다는 공포감도 분명 있을 것이다. 지금만큼은 그녀의 옆에 붙어있어야 했다.
"설마 그 지경이 됐는데도 앞으로 나가진 않겠죠? 귀족의 의무라고."
"지금 나가면 민폐야. 난 아무 것도 못하거든."
"그건 다행이네요."
내가 말하자, 아이리가 웃었다. 왜 웃는지 나는 몰랐다.
"넌 진짜 귀족하면 안 되겠다."
"왜요?"
"존재 자체가 귀족모욕죄야, 그냥. 너 아까도 나한테 반말했지? 뒤로 빠지라고."
그랬었지. 그때는 도무지 화가 나서 반말을 안 하고는 못 배겼었다. 원래 위험한 직종에 있는 사람들은 다 말이 짧다. 나도 레이드를 할 때는 반말을 자주 했었지. 너무 위급할 때 존댓말을 할 수 없으니까.
"그 정도는 봐줄게. 이 정도면 내가 너 싫어하지 않는 걸 증명한 거지?"
그 전에 난 내가 알아서 증명했지만. 난 고개를 끄덕였다.
가테스가 A급 기사들만 데려왔는지 던전의 마수들은 가테스와 그의 기사들로 인해 학살당하고 있었다. 벽이 균열이 나기도 전에 기사들이 벽을 뚫고 마수들을 죽여나갔다.
우리는 점점 지하로 갔고, 시험관과 시험자들은 중위에서 그들의 호위를 받았다.
나도 휴식이 필요할 때였으니 다행이었다. 모두가 긴장이 살짝 풀린 듯 시험자들끼리 농담을 나누고 있었다. 나도 그냥 편하게 아이리와 얘기를 하고 있을 때, 누군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어, 칸나 대위님. 시험관이셨어요?"
"응. 여기 있었구나. 아이리 공녀님, 괜찮으십니까?"
칸나는 역시 귀족답게 자신보다 위에 있는 사람을 챙겼다. 아이리는 손바닥을 뻗어서 괜찮다는 표시를 했다. 고개는 내가 최대한 움직이지 말라고 해놨으니. 안구가 다칠 때는 최대한 머리를 고정시켜놔야 한다.
"다행이다. 그래도 네가 공녀님을 구했구나."
"다친 것부터 다행이 아닌데요, 뭘."
"이제부터 공녀님은 내가 맡으마."
칸나가 말했다. 난 그녀와 시선을 교환했다. 무슨 말을 하는 지는 잘 알았다.
"빨리 던전을 클리어 해야 귀하신 공녀님이 실명을 면하겠죠?"
"그렇지."
나는 아이리의 어깨를 칸나에게 맡겼다. 아이리가 내게 말했다.
"뭐야, 지친 것 같은데. 좀 쉬지."
"의무입니다."
내가 답했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하는 지 모르는 눈치였다. 나도 힘에 대한 의무 정도는 알고 있다. S급 헌터 역시 내가 선택한 게 아닌, 선택받은 것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귀족과 좀 비슷한가. 내 생명을 우선적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좀 다르겠지.
"눈 최대한 만지지 마시고, 멀리 보세요. 알겠죠?"
"그래."
나는 아이리의 확답을 마지막으로 등을 돌려 전방으로 나섰다. 힘도 어느 정도 회복됐다. 레이드의 속도를 낼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