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모여봐요 요정의 숲 (1) >
"요정의 숲이군···"
가테스가 침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는 바로 아이리를 바라보았다. 요정의 숲이라면 오히려 황도에서 반대편으로 떨어졌다. 참 얄궂기도 한 던전이다.
나도 이 시험을 보기 전에 지도를 살짝 봐놨으니 알 수 있다. 여기서 내가 최고 속도로 아이리를 업고 간다면 1시간 정도 걸리겠지. 나도 이런 부상은 많이 봤다. 이미 던전에서 시간이 많이 걸렸기 때문에, 아이리의 눈을 살리기 위해 남은 시간은 고작 30분 남짓일 것이다.
그리고 가테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큰일났군."
"대안이 필요한 순간이군요. 황자님."
내가 가테스에게 말했다. 직접 말하면 주변의 기사들이나 기사단장이 뭐라 할 줄 알았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저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볼의 흉터가 험악해서 그런지는 모를 일이다.
"···한 가지 있긴 하다."
"뭡니까?"
"근데 우리의 힘으로 되는 건 아니야. 운에 맡겨야 할 일이지."
가테스가 말했다.
"탄탈로스 숲의 요정반지를 얻으면 되지. 요정이 새벽이슬만 먹은 풀을 엮어 만든 반지인데, 그걸 빻으면 엄청난 약초가 되거든. 하지만 그게 있을 지도 모르고, 줄지도 모르네. 보통 20년에 한 번씩 만든다고 하니."
탄탈로스 숲의 요정반지? 이걸 또 여기서 듣게 될 줄 몰랐다. 대제는 이런 거 얘기 안 하고 그냥 프러포즈 용이라고만 했었지.
"일단 가보면 되겠습니다. 다른 대안이 없으니."
"그래야겠지. 너랑 나, 둘이 간다."
"그건 또 왜요?"
뭔 뜬금없는 소리일까. 하지만 가테스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요정들은 우리보다 여신의 총애를 많이 받는 존재. 그들의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 돼. 그들은 시끄러운 걸 싫어해서 우리 무리가 다 가면 있는 요정 반지도 안 줄 거다."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바로 출발하지."
가테스는 기사단장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부대를 맡기는 듯한 한 마디만 건넸다. 별도의 설명은 안 한 듯했지만 기사단장의 표정에 의구심은 없었다.
나는 그 사이에 아이리와 칸나에게 다가갔다.
"아가씨."
"왜."
"괜찮아요?"
"난 모르지. 눈을 감고 있으니."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다. 피는 여전히 흐르고 있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아이리의 손을 잡아줬다. 아이리의 몸이 깜짝 놀라서 떨린다.
"조금만 기다려요. 요정의 숲에 약초가 있대요."
"···요정반지?"
"알고 계시면 다행이네요."
"그래, 빨리 갔다 와. 나 지금 무서워 죽겠어."
용기를 버리고 두려움에 직접 맞서고 있으니 무서워 죽겠지. 하지만 이겨낼 수 있을 거다. 내가 알았던 아이리라면 힘들겠지만, 내가 본 아이리면 충분하다.
"대위님, 갔다 올게요."
"그래. 요정님들은 짓궂은 장난이 많다고 해. 조심해."
"장난질 칠 시간은 없을 텐데."
나는 농담을 하고 아이리와 칸나를 일별했다. 이미 중갑을 벗고 경장만 입은 가테스가 검 하나만을 찬 채 기다리고 있었다.
"가지."
"네."
우리는 별 말도 없이 바로 숲이 우거진 곳으로 들어갔다.
탄탈로스 숲 속에 있는 요정의 숲 입구. 나도 요정의 숲은 책 속에서 읽어서 잘 알고 있다. 칸나의 말대로 짓궂은 장난을 치는 아이들이다. 하지만 마리나에게만큼은 친절했지.
요정의 숲은 탄탈로스 숲에 숨겨져 있다. 내가 본 요정의 숲 묘사는 이게 끝이었다. 이번엔 가테스를 믿고 따라가는 수밖에 없겠지. 가테스는 남자주인공인만큼 유능하니까.
"여기가 요정의 숲 입구다. 이제부터는 말소리를 줄이고, 최대한 겸손하게 행동해라."
가테스는 정말 뜬금없이 숲의 중앙에서 멈췄다. 주변을 둘러봐도 입구같이 보이는 곳은 아무 것도 없었다. 가테스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때, 무언가 반짝이는 가루가 우리 주변으로 내려왔다. 그 가루는 떨어지지 않고 몸을 계속 돌았다.
"황자네? 여긴 왜 왔어?"
"얜 누구야?"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조잘대는 목소리. 난 청력을 최대한 돋궜다. 그때, 가테스가 무릎을 꿇었다.
"여신님의 총애를 받는 위대한 요정님들을 뵙습니다. 가테스 트라프비체입니다."
가테스는 그렇게 말하며 날 바라봤다. 그는 눈으로 내게 압박을 가했다. 같이 무릎을 꿇라는 얘기지. 하지만 마리나는 이렇게 대응했다.
"안녕, 귀여운 요정들. 난 에퍼리 션이야."
"···"
가테스가 날 미친놈을 쳐다보는 듯이 봤다. 가루처럼 보였던 요정들이 요리조리 내 몸을 둘러봤다. 마리나에게도 이랬었지. 그때는 뭐랬더라, 너, 좋은 냄새가 난다! 그러면 내 친구가 될 수도 있지! 무례를 참아주마, 라고···.
"뭐야, 이상한 냄새가 나!"
"마기의 냄새가 이렇게 짙은 놈이 우리를 하대해?"
뭐야. 내가 예상한 반응이 아닌데. 이렇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거 아니었나. 내가 착각하고 있었네. 난 여자주인공이 아니잖아. 심지어 당장 검은 나무와 맞짱을 까서 몸의 냄새도 심할 거다. 땀 냄새와 검은 마기의 냄새까지.
"너, 불쾌한 놈을 데리고 왔구나! 얍!"
가루가 시끄럽게 말하면서 가테스와 내게 빛을 쏘아댔다. 순식간에, 풀 냄새와 흙냄새가 짙게 났다. 그리고 요정이 크게 보였다.
【상태이상 : 소형화】
나는 고개를 꺾어 요정들을 바라보았다. 가루처럼 보였던 요정들이 커보였다. 곤충과 닮은 몸이었지만 얼굴은 아름다웠고, 날개에서는 내가 가루로 인식했던 날개들이 벌처럼 쉬지않고 움직이고 있다.
"흐흐. 요정왕께서 하지 말라고 한 마법이지만, 이런 무례한 인간에게 이 정도는 괜찮겠지?"
"그럼, 그럼!"
떠드는 요정들 사이에서 가테스가 날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내가 잘못한 건 맞는 것 같네.
"요정의 숲은 알아서 찾아와! 작으니까 문은 보일 거 아니야? 너희들을 안내해주러 왔지만, 이런 놈일 줄은 몰랐어! 아, 그리고 소형화 마법은 한 시간 정도 뒤에 풀릴 거야! 너무 걱정하지마! 우리도 그렇게 나쁜 요정들은 아니거든."
요정들은 깔깔대며 어딘가로 사라졌다. 가테스의 주먹이 꽉 쥐어지고 흔들린다. 눈을 감고 있는 게 아주 많이 참고 있다. 그나저나 요정들이 이렇게 짜증나는 것들인지는 몰랐네. 마리나에게는 친절한 모습만 보여줘서, 내가 너무 방심한 모양이다.
그때, 개미가 우리에게 집게 같은 입을 들이밀었다. 가테스는 검으로 그 개미의 입을 썰어버렸다. 반달 모양의 개미의 갈라진 입이 운석이 떨어지듯 쾅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흙먼지가 뿌옇게 올라왔다.
나와 가테스는 동시에 소매를 들어 사막의 흙먼지를 막아냈다.
"···아주 고맙군. 요정의 문을 찾을 수 있게 됐으니."
"별 일 아니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답하자 가테스가 눈을 감고 다시 주먹을 쥐었다.
난 그를 무시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요정의 문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숲의 공중에 뜬금없이 떠있었다. 만약 내가 원래 크기였으면 허리 정도에 걸칠 높이. 하지만 소형화가 된 지금은 까마득하게 멀리 보인다.
"나무라도 타야 하나."
"가능할까요?"
"모르겠군."
요정의 숲 입구에는 타고 갈 풀이나 나무 같은 것도 교묘하게 없었다. 들어가는 것부터 문제가 생겼다.
가테스가 고민하고 있을 때, 나는 옆의 풀숲에서 삐져나온 갈대 같은 걸 보았다. 갈색 갈대는 이상한 모양으로 흔들거렸다. 난 그걸 쓸 요량으로 점프해서 갈대를 잡았다.
그 순간, 갈대가 움직이며 치솟아 올랐다. 난 깜짝 놀라 갈대를 두 손으로 잡고 몸을 돌았다. 내가 밑을 바라보자, 검은 눈과 줄무늬가 있는 통통한 배, 강인하게 꺾인 다리가 있었다.
···곱등이네. 내가 지금 곱등이 더듬이를 갈대로 착각한 거야?
【스킬 : 승마 Lv 4 개방】
【스킬 : 승마 Lv 4 사용 중】
뭐야, 이건 또. 내가 승마 스킬을 하자 뛰어오른 곱등이가 착지하고 조용해졌다. 난 굉장한 찝찝함을 느끼고 곱등이의 등에 안착했다.
"···뭐하나?"
곱등이 등에 탄 나를 보며 가테스가 물었다. 이거, 어쩔 수 없지.
"타시죠. 얘 정도면 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싫은데?"
싫겠지. 나도 싫어. 비주얼이 타고 싶은 비주얼은 아니지. 심지어 커보여서 더 끔찍하다. 나는 곱등이의 더듬이를 두 손으로 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마치 내가 연가시라도 된 것 같다. 옛날 제주도에서 배운 승마 기술이 이렇게 발현되다니.
"타세요. 그냥."
"···황자한테 벌레 탈 것을 권하다니. 정말 넌 무례한 놈이다."
"시간 끌 때가 아닙니다."
나도 이러기 싫어. 지금은 아이리의 눈을 구하는 게 먼저다. 가테스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난 곱등이의 더듬이를 조종해 곱등이가 바닥에 납작 앉게 했다. 가테스는 곱등이의 배를 잡고 내 등 뒤로 올라탔다.
"끔찍하군."
가테스가 곱등이의 촉감을 느꼈는지 한탄했다. 나야 뭐 벌레는 휴지로 그냥 잡는 사람이라 그렇게까지 혐오감은 들지 않지만, 가테스에게는 충격이겠지. 황자가 벌레를 탈 일이 어딨겠어.
"갑니다."
나는 곱등이의 더듬이를 잡아당겼다. 곱등이가 펄쩍 뛰어올라 요정의 숲 문을 가볍게 통과했다.
요정의 숲에는 생장의 기운이 가득한 곳이었다. 신기한 곳이었다. 나뭇잎이 자라는 게 눈에 보이고, 나무가 눈에 띄게 길어지고 있다. 만약 인간의 크기였다면 느끼지 못했겠지만, 우리가 작아서 느낄 수 있었다. 가테스도 곱등이의 등이 어느새 편안해진 듯 주위를 감상했다.
"대단하군. 생명의 신비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야."
"그러네요."
나와 가테스는 요정의 숲을 구경했다. 적당히 말랑거리는 젖은 흙은 좋은 냄새를 풍겼고, 갓 자란 나무에서는 새순의 풋풋함이 느껴졌다.
"그나저나, 요정들은 벌레 좋아해요?"
"좋아하겠나?"
나는 겸허하게 내 지식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곱등이의 등에서 내렸다. 가테스도 얼른 내렸다. 난 곱등이의 더듬이를 잡고 이끌어 풀숲 구석 안 보이는 곳에 파킹했다. 내 승마 스킬이 작동하고 있는 한 곱등이는 내 전용 말이어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아주 부럽군."
"빌려드릴 수도 있습니다."
"사양하지."
가테스는 곱등이를 끔찍하게 보면서 요정의 숲길을 나아갔다. 난 보다 보니까 곱등이가 좀 귀여운 것 같기도 했는데.
우리가 나무가 자라지 않은 대로변을 걷고 있자 아까 우리와 마주쳤던 요정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어? 소형화가 됐는데 어떻게 왔지?"
"저 가테스라는 사람이 되게 강한 사람이래. 어떻게든 왔겠지."
곱등이 타고 왔는데. 하지만 가테스도 나도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요정들은 자기들끼리 조잘대다 결국 우리 앞에 떨어졌다. 거기서 배가 통통하고 핑크빛 날개를 가진 요정이 우리에게 물었다.
"그래, 요정의 숲에는 무슨 일이지?"
"···죄송하지만, 요정반지를 얻으려고 왔습니다."
"응? 요정반지?"
요정들이 수군거렸다. 가테스와 나는 긴장한 모습으로 요정들을 바라보았다. 여기에, 아이리의 눈이 걸려있다. 요정들은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는 걸 멈췄다. 이번에는 무지개빛 날개를 가진 요정이 앞으로 나왔다.
그 요정은 허리에 두 손을 올리며 늠름하게 말했다.
"안 돼!"
"설마 없습니까?"
가테스가 물었다. 하지만 요정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있긴 있지."
"제가 요정님들을 위해 수많은 보상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든 안 되겠습니까?"
"뭐?"
"탄탈로스 숲에 공기청정 마법을 전부 걸어드리고, 요정님들이 싫어하는 벌레 퇴치를 전부 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가테스가 진지하게 말했다. 살짝 놀랐다. 가테스도 아이리를 중하게 생각하고 있구나. 이 정도면 됐겠지, 나는 요정들을 바라봤지만 요정들은 그저 가볍게 히히, 웃고만 있었다.
"해주면 생각해보지!"
"지금 시간이 없습니다. 전 이 나라의 황자입니다. 약속을 깰 사람은 아닙니다. 당장 주시면, 바로 황도에 가서 프로젝트를 시작하겠습니다."
"아, 뭐야. 시간이 걸린다는 뜻이네? 안 해, 안 해."
요정들은 서로 깔깔 거렸다. 띠껍네. 여신은 왜 이런 띠꺼운 존재들에게 총애를 주고 있는 걸까. 가테스도 역시 무표정이지만 상당히 띠꺼워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전능하신 요정님."
내가 말했다.
"그렇다면 가져가지는 않겠습니다. 구경만 하게 해주시죠."
"응? 구경? 그래! 엄청 멋있어서 턱이 빠질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괜찮습니다."
나는 요정들이 뒤를 돌자 가테스를 보면서 눈짓을 날렸다. 조용히 하라는 눈짓. 다행히 남자주인공이라 눈치는 있어서 조용히 있었다.
우리는 곧 요정들의 안내를 받아 큰 나무 안에 있는 굴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요정들이 참 많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뭐야, 인간이다!"
"소형화 된 인간이네! 귀엽다! 먹고 싶다!"
"요정왕님이 출장을 가서 다행이야! 인간은 소형화가 제 맛이지!"
이게 요정들이 할 대사인가. 우리는 무시하고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굴로 갔다. 그곳에는 찬란히 빛나는 나뭇잎이 엮여진 반지가 있었다.
이게, 탄탈로스 숲의 요정반지로군.
"보여줬으니까 됐지? 이제 가!"
요정들은 우리의 몸을 밀었다. 1초 봤는데. 진짜 끝까지 띠껍게 하네. 우리는 결국 요정들 등쌀에 밀려 나무 굴에서 쫓겨났다.
"무슨 생각이지?"
나오자마자 가테스가 물었다. 난 간단하게 대답했다.
"시간도 없는데, 훔치죠."
"···뭐?"
내가 말하자, 가테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