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괴리감 (1) >
"공녀님, 괜찮으십니까?"
"뭐, 괜찮아."
"아까 에퍼리한테는 무서워 죽겠다고 말하셨으면서, 저한테는 왜 괜찮다고 하십니까?"
아이리가 눈을 번쩍 뜨더니 칸나를 흘겨봤다. 아이리는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 말이 정곡이었기 때문이다.
"에퍼리는 한 번도 작전에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제 수하였으니 알고 있죠."
"이상한 놈이야. 참."
아이리가 그렇게 말하자 칸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이 많죠. 이상하리만큼 강하고, 옌시 사람이라고 해도 너무 자유롭고 개방적이에요. 가끔 에퍼리가 말하는 걸 보면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답니다."
"왜 이렇게 에퍼리 얘기를 많이 해? 칸나 영애."
"에퍼리 얘기를 해야 그나마 공녀님이 안정을 가질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뭐, 뭔 소리···"
아이리는 부정했지만 칸나의 말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실제로 그의 얘기를 할 때는 눈의 고통도 사라진 것 같았으니. 하지만 이제는 다시 아프다. 눈의 감각이 점점 옅어지는 게 느껴진다. 고통을 잡고 있지 않으면, 이내 자신의 손아귀를 떠나 사라질 것만 같은 미약함.
그럴 수록 아이리는 눈을 감았다. 눈에 대한 미약한 감각이 더욱 실감나지만, 그것이 자신의 마음을 단단해지게 하고 있었다. 공포를 마주하라는 뜻은 바로 이런 뜻인가. 아이리는 계속 기다렸다.
"이제 올 때가 됐는데요."
칸나가 초조하게 말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로켓을 꺼내 그 안의 회중시계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장교 시험을 칠 때 각 부분의 상처에 대한 골든타임 정도는 알고 있다. 이제 슬슬 위험할 때인데.
그때, 아이리와 칸나의 눈앞에 뜬금없이 나뭇잎으로 엮은 반지가 공중에 떠서 나타났다.
진짜 죽기 살기로 달렸다. 왜냐면 소형화가 되어 있어서 보폭이 너무 짧았기 때문이다. 크라켄의 촉수 같은 풀잎, 켈베로스 같은 개미, 괴수 같은 사마귀들을 모두 베면서 달렸다.
가테스와 마주 달리면서 난 가테스에게 살짝 놀랐다. 역시 남자주인공은 먼치킨이라는 설정답게 내 속도에도 무리 없이 따라오고 있었다.
물론 가테스는 나한테 놀라고 있었다.
"자네의 뒷배경이 정말 궁금해지는군."
"뒷조사 하시지요."
"사실 이미 시켰네."
뒷조사를 하겠다고 말하는 당당함. 하지만 나는 당당하다. 아무 것도 안 나올 테니까. 내가 빙의하기 전에는 짐꾼으로 빌어먹는 인생이었으니 추레한 것만 나오겠다.
저 멀리 방위를 지키며 경계를 서고 있는 기사단들이 보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 기사단들을 빠르게 제쳤다. 그들은 땅 밑의 먼지 같은 우리까지 경계할 수는 없었으니까.
"경계가 소홀하군요."
"안 그래도 질책할 예정이다."
너무한 거 아닌가. 이렇게 소형화 됐는데 검문이라도 해야 된다는 건지. 가테스는 물론 한다면 하는 사람이기에 진짜 질책할 거다. 내가 그의 근위병이 되지 않은 게 다시금 다행이라고 생각됐다.
우리는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아이리와 칸나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녀들은 꽤 편하게 대화를 하고 있었다. 원래 전장에서 같은 위기를 겪으면 빠르게 친밀해지는 법이다.
그녀들 사이에서는 무도회에서 보였던 첫 만남의 어색함, 서로간의 간극에서 왔던 충돌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난 마지막으로 내가 꼈던 반지를 봤다. 이게, 그 프러포즈 백 프로의 반지라 이거지.
하지만 말이다. 난 자만추다. 헌터 때도 돈이나 능력을 과시하면 내가 여자를 만나지 못하지는 않았을 거다. 이런 아이템에 기대는 건 내 취향이 아니다. 심지어 지금 이게 필요한 사람이 있지 않은가.
나는 바로 반지를 빼서 그들 눈앞에 띄워줬다. 반지가 바로 제 크기로 커졌다. 아이리와 칸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들 입장에서는 허공에서 반지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일 터다.
"뭐, 뭐야?"
아이리와 칸나가 깜짝 놀랐다. 난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말했다.
"빨리 빻아서 아가씨 눈에 뿌려요!"
"뭐, 뭐? 에퍼리야?"
"네. 반지 밑에 있거든요?"
칸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푸른색 보석 같은 커다란 눈동자가 우리 앞에 떡하니 나타났다.
"···황자 전하? 에퍼리?"
"곧 돌아올 거예요. 일단 빨리."
"아, 알았어."
칸나는 반지를 받아들고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가테스와 나는 바로 주저앉았다. 거인처럼 보이는 아이리는 우리를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재미있는 눈빛이군. 공녀. 긴장이 풀렸나보지?"
"죄송합니다. 전하. 소형화 마법을 처음 봐서···"
"요정한테 잘못을 치른 대가지."
"···요정님들께요?"
"물론 이놈이."
가테스가 날 가리켰다. 아이리는 뭘 했는지 궁금한 표정이지만, 알려줄 수는 없지. 요정의 숲을 곱등이의 숲으로 만들었다는 건 비밀 중의 비밀이었다.
칸나가 요정반지를 빻고, 아이리에게 뿌리고 헝겊으로 덮어주고 끈을 만들어 메었다. 아이리는, 그 순간 긴장이 풀렸는지 잠에 들고 말았다. 지금까지 맞서왔던 공포가 씻겨나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이제, 황도로 가야겠군."
그와 동시에 가테스와 내 몸에 걸린 소형화 마법이 풀리면서 같이 커졌다. 가테스가 기사단으로 돌아가기 전에, 내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고생했다. 에퍼리 남작. 이 건은 황제 폐하께 보고하도록 하지."
"요정의 숲도요?"
"···그건 비밀이고."
그렇게, 시험에서 시작된 길고 긴 모험이 끝났다.
지금은 황제의 집무실이었다. 황제의 개인 집무실은 두 번째. 시험장에서 벌어진 검은 나무의 사태에 대해서 제국은 해명할 필요가 있었고, 주요 참고자인 사람들을 부른 것이었다.
주요 참고자로 참석한 건 나, 칸나, 아이리, 가테스 이 넷이었다. 우리들은 사실만 얘기했지만, 제국의 기록관은 최대한 제국의 책임은 없고, 우연히 벌어진 사건이라는 것이라는 프레임을 이미 짠 것 같았다.
가테스는 따로 황제와 얘기할 게 있어서 남고, 아이리와 칸나, 나는 먼저 사정청취를 마치고 나왔다.
"아가씨, 눈은 괜찮아요?"
"응, 뭐. 눈의 신경이 느껴져. 되게 신기한 느낌이야."
그녀는 아직 눈을 보호하려고 검은 천의 안대를 끼고 있었다. 여전히 무리한 후유증이 남아있어 아이리는 칸나가 부축해주었다.
"공녀님, 제가 싸우는 걸 봤을 때 소드 엑스퍼트 3은 충분하실 것 같습니다. 시험은 다시 치면 되니까요."
"그래."
아이리는 시험을 제대로 못 마친 게 못내 아쉬운 듯 살짝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도 눈이 옛날만큼 좋을까 걱정이네. 안대는 다음 주에 신관이 풀라고 하던데."
"괜찮을 겁니다."
아직 불안하겠지. 나는 아이리를 안심시켜줬다. 아이리는 내 말에 살짝 웃었다.
"왠지 네 말은 신기한 마력이 있어. 뭔가 신뢰가 된다고 해야 하나."
아이리가 말했을 때, 난 살짝 얼었다. 분명 아무 생각 없는 말투였지만, 심쿵했다고 해야 하나. 이런 미인이 날 신뢰한다는 건 어쨌든 기분 좋은 일이었다.
나는 아이리를 슬쩍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엘파힘의 심안이 업그레이드 됐으니까, 뭐가 바뀌었는지 알아야 했다. 난 조용히 엘파힘의 심안을 켰다.
「이름 : 아이리 라피테스
나이 : 19
호감도 : ???
가장 사랑하는 사람 : 예프린 라피테스」
난 몰래 아이리를 훔쳐보다가 눈이 마주쳐 바로 얼굴을 돌렸다. 하지만 볼 건 다 봤다. 속으로 든 생각은 이거였다.
'뭐야. 레벨업 맞아?'
레벨업인데 오히려 호감도는 보이지 않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만 보인다. 이게 뭐야. 물론 이것만으로도 좋은 거긴 하지만.
그나저나 아이리가 예프린을 그렇게 좋아하는지는 몰랐다. 아이리와 예프린은 작중에서 겹치는 부분이 거의 없으니까. 예프린은 마리나가 모험을 할 때 마주친 사람이고, 아이리는 황도에서 마리나를 괴롭혔던 사람이니까.
물론 아이리가 이제 황도에서 마리나를 괴롭혔다는 전개 역시 이제는 의심해야 될 판이지만.
"뭐야, 왜 사람을 훔쳐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는 아이리에게 짐짓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생각할 게 많아져서. 아이리라는 캐릭터, 아니, 사람에 대하여.
지금 현재 원작과 가장 괴리를 보여주고 있는, 아이리의 입체적인 성격에 대해서. 나는 오늘도 아이리가 소설에서 보여주지 않은 모습을 하나 더 알았다.
"무릇, 영웅은 난세나 위기에서 빛을 발하는 법이다. 본 제국은 갑자기 황도 근처에서 치솟아 오른 검은 나무에 미래의 인재들을 모두 잃을 위기에 처했지만, 영웅들에 의해 위기를 슬기롭게 돌파할 수 있었다."
대제전. 미화된 대제의 석상 주변에 제국의 군인들이 전부 모여 있다. 지금 우리는 단상 위에서 연설하는 황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그 영웅들은 내 자랑스러운 아들이자, 1군단장, 가테스 트라프비체, 칼 카라모프 대령의 딸이자 훌륭한 근위대장, 칸나 카라모프, 공작가의 금지옥엽, 아이리 라피테스, 훌륭한 신위를 보여준 에퍼리 남작이다."
그에 맞춰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울려퍼진다. 이런 상황은 난 대략 알고 있다.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영웅. 제국의 책임을 묻는 시선을 돌리기 위해 띄워주는 것이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다.
"특히 에퍼리 남작은 던전에서 모두를 구한 영웅이다. 현재 에퍼리 남작은 제국에서 작위를 받은 지 2주도 안 된 자지만, 그가 가진 책임감과 신위에 비해 너무 작위가 미약하다고 판단했다. 본인은 여기서 에퍼리 남작의 작위를 자작으로 바꾸는 바이다."
다시 터지는 우레와 같은 박수. 나는 앞으로 나가 황제에게 자작의 작위를 증명하는 칼을 받았다. 예기는 하나도 없는 장식용 칼이었다.
또한 다른 이들에 대한 포상도 수여됐다. 가테스와 아이리는 금품과 비단을 받고, 칸나는 소령으로 조기 진급이 되었다. 그들이 무언가를 받을 때마다 역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 다음, 제국 측에서 주최하는 연회가 시작되었다. 황궁의 많은 요리사들이 대제전에 나와 음식을 만들었다. 그건 병사들을 위한 연회였고, 우리의 연회는 황궁 안에 있는 연회장이었다.
그곳에는 황도에 있는 거의 모든 귀족들이 있었다. 나도 이런 무도회, 연회장을 와본 적은 있지만 그때는 가티스의 근위기사로 왔을 뿐. 지금 이 연회의 주인공 중 하나가 나다.
"에퍼리 남작, 아니 자작이라고 불러야겠지. 자네 아주 황제 폐하의 총애를 받는군!"
"에퍼리 자작, 언젠가 내 영지에 놀러오게나. 자네라면 내 친히 맨발로 나서서 맞아주겠네!"
웃긴 건, 나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귀족들 중에 내가 남작이 됐을 때 거품을 물던 귀족들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역시 정치판은 무섭다.
"내 자네의 남작 작위를 막았던 거에 대해서 섭섭함을 느껴도 좋네. 그 사과의 의미로 내 영지에 초대하겠네."
심지어 내가 귀족의 근간을 흔든다고 했던 알피스 후작마저, 내가 황제의 눈에 쏙 들었다는 걸 눈치 채고 사과의 손길을 건네고는 했다. 난 그냥 그 손을 잡아주었다.
"괜찮습니다. 알피스 후작님."
"역시! 황제 폐하가 인정한 사람답게 호탕하군!"
호탕하기는. 어차피 네 영지 갈 일은 없을 거다. 그래도 내가 이렇게 말이라도 하는 건 다 이유가 있다.
나도 전생에서 정치인들과 많이 알아서 아는데, 정치인은 많이 알면 알수록 좋다. 언젠가는 힘이 되니까.
나는 여러 곳에 불려다니면서 많은 사람과 인사를 하고 안면을 텄다. 이 사건 하나로 이제 완전 제국의 정치인이 된 느낌이다. 그게 만들어진 영웅이라고 해도. 나는 거절할 이유가 없다.
연회가 무르익어 갈 때, 여전히 냉정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가테스가 단상 위에 올랐다.
"가테스 군단장입니다. 여러 귀족 여러분. 연회를 즐기시는 와중 죄송하지만, 여러분께 공지드릴 일이 있습니다."
가테스가 입을 열고, 연회가 멈추었다. 모든 귀족들이 가테스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이번 시험에 자제분을 보내신 분도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하여 제국이 방위를 잘 못했다는 점 사과드립니다. 시험은 곧 따로 일정을 잡아 안전을 확인한 후 다시 열도록 하겠습니다."
가테스의 말에 귀족들의 짧은 박수가 일었다. 황자의 사과라. 꽤 의미가 있다. 물론 병사들에게는 하지 않고, 귀족들에게만 하는 이유는 있겠지. 황족의 명예라는 거겠지. 내가 볼 땐 반편이 사과다.
"그리고 또한 등위심사평가위원장으로서 다른 공지를 드립니다. 제가 같이 작전을 행한 결과, 아이리 라피테스 공녀의 등위를 소드 엑스퍼트 3으로 인정합니다. 또한, 칸나 카라모프 소령도 소드 엑스퍼트 5로 인정하겠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 등위가 그렇게 기준 없이 정해도 되는 건가 싶다. 아니면 단순한 배려를 너무 꼬아서 생각하는 건가 싶었다. 아이리는 눈이 다쳐서 시험 일정이 근시일내에 닥치면 참가할 수 없게 되니까.
하지만, 다음 말로 나는 가테스의 의중을 알 수 없게 됐다.
"저와 직접 같이 작전을 행한 에퍼리 자작은 제가 직접 옆에서 보고 평가한 결과, 소드마스터 3으로 인정합니다. 이상."
그 말에 연회장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내게 몰렸다. 가테스는 단상에서 내려가며 나와 슬쩍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이거, 영웅 만들기가 생각보다 심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