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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44화 (44/150)

< 44화 괴리감 (3) >

어쩌다 남은 시간이 일주일이 되었다. 난 솔직히 지금 자신이 없다. 질 자신이. 근데 문제는 아이리와 칸나였다. 어쩌다 나를 타겟팅으로 한 작전에 같이 빠지게 됐으니.

마리나의 의중은 뒤로 두고, 일단 이 둘이 어떻게든 시험에 통과하게끔 해야 했다.

"어때요? 자신 있어요?"

"솔직히 난 소드 엑스퍼트 3 급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나도 소드 엑스퍼트 5는 아니라고 생각해."

난 이 등위의 정확한 기준을 모르지만, 그녀들이 말하면 그렇다는 거겠지. 아이리와 칸나는 의외로 공통점이 있다. 자신을 꽤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이 그렇다.

지금 우리는 황도에 있는 공작 저택에 있다. 라피테스 공작은 공작령에 있으니, 어쩌다 아이리의 집에 초대된 셈이 되었다.

"공녀님, 집이 참 좋네요. 저희 집은 북부지방이라 춥기만 한데."

"백작령은 북방의 방위를 맡고 있으니까. 칼 백작은 그래서 존경받아 마땅하지."

아이리와 칸나는 서로 차를 마시며 덕담을 해주고 있었다. 나로서는 낯선 광경이라고 할까. 소설에서는 투닥거리는 것밖에 못 봤는데, 같은 위험을 겪다 보니 서로에게 친밀감이 생긴 듯했다. 아이리도 원작만큼 개차반도 아니니.

"칸나 소령님. 진급하면 휴가 받죠?"

"응, 14박 15일. 아마 안 쓸 것 같아. 난 대위 때도 안 썼어. 할 것도 없는데 괜히 쉬어서 뭐해."

"그러면 휴가 많이 쌓였겠네요?"

"지금 한 달 정도?"

"6박 7일만 쓰세요."

"왜?"

내가 칸나에게서 얼굴을 돌리고 아이리를 바라봤다.

"공녀님은 뭐 일정 딱히 없죠?"

"아니. 뭐, 티타임 몇 개 있지."

역시 사교계하면 공녀지. 원작에서 그녀는 사교계의 제왕이었으니, 그 초석을 지금부터 밟아나가고 있는 듯하다.

"1주일만 미뤄주세요."

내가 말했다. 이제 아이리와 칸나를 동시에 바라보았다.

"일주일 안에 끌어올려드리겠습니다."

"뭐?"

아이리와 칸나의 황당한 목소리가 겹친다. 나는 바로 뜨거운 차를 원 샷으로 마신 다음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시간이 없으니 오늘부터 하죠."

"···야, 차는 다 마시고."

"그럴 시간 없어요."

아이리와 칸나는 내가 풍기는 위압에 눈치를 보며 차를 불어서 최대한 빨리 마셨다. 그녀들은 서로 입천장이 까졌다며 나를 흉봤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진짜 시간이 없었으니까.

역시 공작저의 사택. 별장 같은 곳이지만 있을 곳은 다 있었다. 수영장부터, 티타임을 즐길 수 있는 정원, 연무장 등. 물론 우리가 갈 곳은 연무장 밖에는 없겠지.

"오케이. 나 훈련하기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어."

아이리가 말했다.

"뭔데요?"

"넌 대체 어느 정도로 강한 거야? 강한 건 알겠는데, 얼마 정도인지 모르겠단 말이야."

"솔직히 제가 여기 기준을 몰라요. 소드마스터 3이든, 4든. 소드마스터 1은 이겨봤습니다."

난 담백하게 사실만을 말했다. 그녀들은 그것만으로도 놀란 듯 했다.

"소드마스터 급인 줄은 알았지만."

"진짜 내 나이 대에 소드마스터가 있긴 하구나. 난 가테스 황자 전하가 마지막인 줄 알았는데."

아이리와 칸나는 서로를 위로하며 우울해 했다. 비교가 되면서 자신의 수준을 한탄하는 듯하다. 특히 칸나는 더했다. 그녀는 거의 평생을 검에 바친 군인이었으니까. 심지어 나보다 여기 기준으로 나이도 많고.

내가 여기서 동안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거울로 보면 거의 중학생, 고등학생을 왔다 갔다 하는 수준이니까. 그래도 나이를 스물이라고 잡은 건 다행이다.

"저도 그러면 하나만 물어도 됩니까? 아이리 아가씨한테만."

"뭔데?"

"성녀가 아이리 아가씨한테 왜 그랬는지 감이 잡히세요?"

아이리는 고민했다. 칸나의 표정은 미묘해졌다. 칸나는 그 연회에 없었지만, 그 사실은 전해 들었다고 한다. 지금 근위병들 사이에서도 우리의 등위 시험 결투는 좋은 안주거리라고 했다.

"모르겠네. 난 그때 화장실 앞에서 마주친 게 마지막이어서."

"그럼 다시 한 번만 물을게요."

내가 말했다.

"성녀가 미워졌어요?"

"음, 아니. 충분히 할 수 있는 지적이라고 생각해."

난 마지막으로 물으려다가 물음을 그만두었다. 그녀에게 지금 하기에는 좀 웃긴 질문이었으니까. 그리고 이 질문을 할 사람은 따로 있기도 하고.

"그러면, 시작할까요?"

"잠깐만."

"또 뭐요."

훈련하기 싫어서 시간 끄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리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말했다.

"너 왜 공녀님이라고 안 불러? 난 사교계 데뷔해서 이제 공녀라고."

···아. 하지만 나는 웬만하면 호칭을 잘 바꾸지 않는다.

"제 입에 붙은 게 그거인 걸 어떻게 해요?"

"떼고 다시 붙이면 되잖아!"

아이리가 버럭 했다. 아이리 공녀님이라, 입 안쪽에서부터 굴려 봐도 뭔가 입에 붙지 않았다. 그리고 왜일까, 그냥 그렇게 부르고 싶었다.

"가르쳐주는 데 조건 하나만 걸어도 돼요?"

"뭔데."

"호칭에 불만 표하지 않는 걸로."

"하, 참나."

아이리는 어이없다는 듯 손부채질을 했지만, 내 말에 반박은 하지 못했다. 그녀는 사교계 사람이지만, 그래도 높은 등위는 명예. 그 명예를 가지고 싶을 것이었다.

"됐죠. 아가씨?"

내가 쐐기를 박자 그녀가 날 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다가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면 호칭 문제는 끝···"

"잠깐만."

"아."

이제는 칸나가 손을 들었다.

"나는 이제 칸나 소령님이라고 안 불러도 돼."

"그럼 뭐라고 불러야 드려야돼요. 근위대장님?"

"그냥, 칸나라고 불러. 어차피 타 부대 사람인데 뭘."

이건 또 뭔 상황이야. 칸나는 씩 웃었다.

"작위도 차이 나는데요, 뭘."

"자작이나, 백작이나. 난 백작도 아니야. 백작 영애일 뿐이지."

"그러면 칸나 누나라고 불러드려요?"

내가 여기서 스무살이니까 그렇게 부르는 게 맞지 않나. 칸나는 그렇지만 질색했다.

"뭔 누나. 네가 내 친동생도 아니고. 그냥 칸나라고 불러."

"그래, 그건 맞지. 뭔 누나야."

아이리가 거들었다.

내가 또 간과한 게 있었다. 여긴 서양식 배경이지. 서양에서는 웬만하면 다 이름 부르지 않는가. 나는 심지어 여기서는 칸나와 한 살 차이밖에 안 된다.

"그러면, 음. 카, 칸나?"

다시 멍청해지는 기분이다. 여자 이름을 막 불러본 적이 없어서.

"응, 에퍼리."

윽. 칸나의 웃음 때문에 녹는다. 이러면 훈련을 제대로 못할 것 같기도 하다. 다스리고 지도하는 건 엄하게 하는 게 내 철칙인데.

난 S급 헌터라 군입대를 뺀 대신, 헌터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걸로 대체복무를 한 사람이다. 그래서 교육하는 건 자신 있다.

이미 환영살인마라는 내 고유 스킬에 통합이 됐지만, 교련이라는 스킬도 5렙짜리가 있었으니까.

"자, 자. 칸나, 아이리 아가씨. 그럼 시작해볼까요?"

"그래."

길고 긴 말꼬리잡기가 끝나고, 이제 진짜 훈련이 시작됐다.

아이리와 칸나가 나란히 서서 목도를 잡고 기수식을 펼쳤다. 역시, 둘은 차이가 많이 난다. 지금 칸나가 소드 엑스퍼트 3이라고 했지.

만약 이게 소드 엑스퍼트 3의 평균이라면, 아이리는 소드 엑스퍼트 1, 많이 쳐봐야 2다.

그렇지만 다행이다. 어차피 내가 볼 때는 고쳐야 할 게 둘 다 많았으니까. 아이리는 그냥 경험이 없는 관계로 자세가 엉성하고, 칸나는 오랜 실전 경험으로 인해 자신만의 방법을 고수한 나머지 잘못된 자세를 꿋꿋하게 잡고 있다.

"자, 둘 다 가만히."

내 말에 칸나와 아이리가 밀랍이라도 끼얹어진 듯 완전히 굳었다. 환영살인마 스킬이 꽤 답답한 게 뭐냐면, 내가 가진 모든 스킬들이 통합해서 나오니 위압 같은 스킬을 ON/OFF 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지금 내 위압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힘들 것이었다. 내가 죽도로 그녀들의 몸을 툭툭 건드렸다. 먼저 아이리부터.

"팔은 살짝 위로, 허리는 살짝 빼세요. 발은 땅에 십자가 있다고 치고, 1사분면과 3사분면을 밟으세요. 배에 힘을 주시고, 무릎은 살짝 굽히시고."

툭툭툭툭.

그녀는 내 말을 한꺼번에 따라하려다가 무게 중심이 무너져 넘어질 뻔했다. 내가 어깨를 잡아주지 않았으면 그대로 넘어졌을 거였다.

"하나씩 하세요. 하나씩."

"···천천히 알려주든가."

"기본은 빨리 가야죠. 1주일 날림 수업인데."

내 말에 아이리는 이빨을 꽉 깨물고 다시 기수식을 취하며 자세를 잡았다.

"칸나? 너도 한 번 내 말대로 해봐."

"음, 좀 불편한 자세인데 힘의 무게중심이 안정된 게 느껴지네. 신기한 자세다."

"그게 적응이 되면 힘을 더 낼 수 있지."

칸나는 알아서 잘 했다. 아무래도 몸을 더 많이 쓴 칸나니까 몸을 움직이는 데는 익숙해보였다. 문제는 아이리였다. 내가 죽도로 살짝 밀어주고, 그녀가 자세를 계속 고쳐잡았다. 내가 원하는 자세가 되기까지 20분은 걸린 것 같았다. 아이리의 몸은 자세만 잡았는데도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렇게 자세 10분만 잡아요."

"뭐? 10분이나?"

난 아이리를 무시하고 이미 내가 한 자세를 체득한 칸나에게 말했다.

"칸나 소···아니, 칸나. 칸나는 나랑 대련하자."

"그래."

"네가 나한테 했던 거 반대로."

"응?"

칸나는 눈을 위쪽으로 살짝 굴렸다. 내가 뭘 말하는지 기억을 더듬는 눈치였다.

"아, 근위병 시험."

"그래."

난 그리고 아이리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연무장 중심에 작은 원을 그렸다.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의 작은 원이었다.

"···내가 그려줬을 때보다 원이 더 작은데?"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마. 그 자세로만 받아쳐."

"자세? 아직 안 익숙한데, 읏!"

내가 바로 원에 막 들어간 칸나에게 칼을 내질렀다. 칸나는 원망스런 눈빛으로 내 죽도를 쳐냈다.

"연습은 실전답게."

"···괜히 말 놓게 했나."

"다시 간다!"

그렇게 난 아이리와 칸나를 동시에 봐주며 하루를 보냈다. 저녁 시간이 될 즈음에는 아이리와 칸나 모두 땀에 절고 눈이 풀릴 정도로 지쳤다.

난 연습을 더 해주고 싶었지만, 조금만 더 하면 귀한 귀족 영애들이 기절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연습을 마무리 할 때 즈음, 아이리 전담 시종이 연무장을 찾아왔다.

"공녀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허억, 누, 누군데."

아직 숨을 고르지 못한 아이리는 눈을 치켜 뜨며 시종을 바라보았다. 시종의 입에서 나온 사람은 뜻밖이었다.

"황궁도서관 사서님이시랍니다."

"···응?"

나와 아이리는 동시에 눈을 마주쳤다. 황궁도서관 사서라면, 설마 내가 아는 그 사람인가? 그때, 연무장이 보이는 복도에 핑크색 머리와 뱅뱅이 안경이 보였다.

"다들 여기 있으셨구나."

"어머, 여기는 공녀님의 개인 연무장입니다! 황궁도서관 사서님이라고 해도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그녀의 정체를 모르는 시종이 막아섰지만, 나는 그 광경이 얼마나 아슬아슬하게 보이던지. 시종이 죽여달라고 춤을 추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 같았다. 물론 황궁도서관 사서, 제1황녀 리얀이 그런 이유로 죽일 사람은 아니지만.

"베티. 들어가. 사서님과 할 말이 있으니까."

"···공녀님?"

난 대충 눈치를 챘다. 지금 황궁도서관 사서의 정체를 아는 건 아이리와 나뿐이었다. 칸나는 어리둥절하고 있었으니까. 아이리는 어떻게 아는지 모르지만, 공녀라는 높은 위치에 있으니 황녀와 안면도 있겠지.

베티라는 이름의 시종이 들어가고, 아이리가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제1황녀, 리얀 트라프비체를 아이리 라피테스가 뵙습니다."

"···음?"

칸나의 당황한 목소리와 함께, 리얀이 핑크색 가발과 안경을 벗었다. 칸나는 그것을 보자마자 칼 같이 바로 예를 취했다. 나 역시.

"어쩐 일이십니까? 황녀 전하."

"그냥, 훈련한다기에 와 봤어요. 도움도 줄 겸."

리얀이 웃었다. 아이리는 내가 리얀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에 놀라는 눈치였다. 칸나는 아예 정신이 없는 듯했고.

"훈련은 대강 끝난 것 같은데. 얘기나 좀 할까요?"

리얀이 웃었다. 아이리와 칸나도 그렇겠지만, 나 역시 당황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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