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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46화 (46/150)

< 46화 괴리감 (5) >

작은 연무장.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시험이었지만 참관하는 사람은 적었다. 귀족들은 명예가 중요한 법. 나는 그렇다 쳐도, 아이리는 공녀, 칸나는 백작 영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기 단상 옆의 계단에 근엄하게 앉아있는 일단의 무리들은 나만을 오롯이 노려보고 있다.

"검성회 사람들이야."

아이리가 내게 속닥였다. 굳이 안 말 해줘도 저들이 풍기는 기도에서 느낄 수 있었다.

"저렇게 검성회 사람들이 많이 모인 것도 처음봐."

"전 다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요."

애초에 검성회라는 집단은 「장미꽃이 흩뿌려진 침대」에는 쥐뿔도 안 보인 집단이니. 저런 무리는 로맨스판타지보다는 무협지에 어울린다.

단상 위에 올라선 건 가테스 트라프비체, 등위심사평가위원장 겸 1군단장 겸 1황자.

"먼저 대결은 목검으로 합니다. 살수를 쓰면 몰수패가 됩니다. 첫 번째 대결은 칸나 소령과 소드 엑스퍼트 5인 레이 백작입니다."

칸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리얀이 알려준 그대로였다. 리얀 역시 단상 옆에 우리의 대결을 지켜보려고 앉아 있었다.

레이 백작은 소설에 나오지도 않는 사람이지만 중검으로 꽤 유명세를 떨치는 남자였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칸나는 나와 같이 레이 백작의 싸움법을 연구했다.

어쩌면 비겁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있는 정보를 안 쓰는 건 바보 같다고 볼 수 있다. 가끔 어떤 헌터 중에서는 전력분석팀의 브리핑을 듣는 건 약한 사람들이나 듣는 거라고 깝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내가 알기론 대부분 죽었다.

하지만 칸나 역시, 그런 부분에서 은근히 고지식해서 레이 백작의 뒷조사를 하는 걸 은근히 꺼려했다.

- 칸나, 적에게는 동정과 배려가 있어서는 안 돼.

- 대련 상대가 적인가?

- 적이야.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최선을 다할 수가 없어. 언제나 네가 칼을 들 때는, 칼끝에 정신을 집중시키란 말이야.

- ···네가 하는 말이면, 그래.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나도 괜한 자존심을 부려 삶을 버려버린 안타까운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칸나 소령과 레이 백작은 나와라."

칸나의 2배는 될 법한 커다란 거한이 무거운 검을 들고 등장했다. 칸나는 고개를 꺾어 레이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체구는 압도당했지만, 기백은 전혀 죽지 않았다.

내가 자연스럽게 킨 위압 스킬에 대한 저항이 어느 정도 생긴 것이다. 이제 칸나는 웬만한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할 스킬을 가졌을 거다. 아이리도 마찬가지고.

"칸나 카라모프 소령, 평소 존경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대련하는 걸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도 레이 백작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좋은 대련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레이 백작은 가테스가 데려온 사람답게 인간됨이 된 사람이었다. 뒷조사를 할 때도 그랬지. 강직한 사람이라고. 이들은 정면승부다.

"자, 그럼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들어오시죠."

귀족들의 정식적인 싸움은 나로서는 처음 보는 것. 난 주의깊게 칸나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칸나는 최대한 빠른 발놀림으로 레이의 커다란 행동을 유도했다. 보통 검사들이 싸울 때는 좌우로 움직이는 경향이 강한데, 나는 상하로 움직이는 법도 가르쳐줬다.

레이의 검은 중검치고 빨랐다. 그가 가진 힘이 칸나가 있는 곳을 쓸어간다. 목검인데도 마나가 살짝 담겨져 있어 그녀의 안 그래도 짧은 머리칼이 잘렸다.

칸나는 계속 그의 큰 몸을 이용해 근접전으로 붙은 다음 그의 체력 소모를 유도했다. 레이 백작은 계속 떨어지려고 했지만 칸나는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단 한 순간, 레이의 팔이 내려오고 그의 상단이 빌 때가 있었다. 칸나는 바로 그의 가슴팍에 목검을 박아 넣었다.

"윽!"

진검이라면 누가 봐도 죽었을 위치. 칸나의 기본기와 전략의 승리였다. 칸나가 만약 고지식하게 정면승부를 고집했으면 이기지 못했으리라.

"한 수 배웠습니다. 칸나 소령님."

"감사합니다."

그들의 싸움은 역시 깔끔하게 끝났다. 매너 있는 귀족들의 싸움이다. 그 후에는 아일린과 아이리의 싸움이었다. 이름도 생각해보니까 비슷하네. 아일린도 녹색 머리칼이 예쁜 미녀이기는 하지만, 아이리의 주연급 미모에는 따라오지 못했다.

"아이리 공녀님, 전 당신이 소드 엑스퍼트 3이라는 걸 인정하지 못하겠습니다. 공작가의 힘을 이용한 건 아니온지요."

아일린은 생각보다 독한 말투로 아이리를 쏘아댔다. 아이리는 생각보다 유연하게 받아쳤다.

"인정하지 마세요. 인정해달라고 말한 적 없어요."

어, 살짝 성격이 나온다. 요즘 내게 유한 모습만 보여줬지만 원래 아이리는 약간 성격이 있었다. 그녀가 말했었지. 예의를 지킬 때와 안 지킬 때를 구분한다고. 지금 그녀는 안 지키는 모드인 것 같다.

"그리고 아일린 영애. 말씀을 함부로 하지 마세요. 전 제가 원해서 소드 엑스퍼트 3을 부여받은 것도 아니고, 그것마저 지금 당신과의 대련으로 불투명한 상태잖아요. 아니면, 저를 질투하시나요?"

아이리의 독사같은 말투에, 난 순간 기시감이 들었다.

- 내가 원해서 성녀가 된 게 아니랍니다. 그걸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그런 말씀을 하신다는 건, 설마, 질투?

소설 속에서 마리나가 엑스트라 악역에게 한 말. 대체 이 말이 겹쳐 보이는 건 왜일까.

"대련을 시작한다."

가테스의 근엄한 말에, 아이리가 깃발이 휘두른 걸 본 기사처럼 잽싸게 달려 나간다. 그녀 역시, 칸나에 비해 기본기가 없었다 뿐이지 공작저에서 좋은 교육을 받은 터라 내 교육을 흡수하기에는 좋은 재목이었다.

순식간에 아일린의 아래를 점한 그녀는 검을 위로 올려쳤다. 아일린은 급하게 내려쳤다. 아일린은 그러나 그녀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악!"

아이리가 아일린의 손목을 쳐내면서, 아일린의 새된 비명이 대련장에 울려 퍼졌다.

사실, 이 일주일동안 실력이 더 늘었다고 할 만한 사람은 아이리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원래 강한 사람을 더 강하게 하는 것보다, 약한 사람을 강하게 하는 게 빠르니까.

"아이리 공녀가 이겼군."

가테스가 무표정으로 말했다.

"속도와 힘이 확실히 소드 엑스퍼트 3급이라고 할 만하군. 전보다 훨씬 늘었어. 많이 연습한 모양이지?"

"네, 그렇습니다."

목검을 대각선으로 휘둘러 다시 검극을 밑으로 내린 아이리는 내가 봐도 멋있었다. 아직 벗지 않은 안대도 뭔가 비장한 장군 같았다.

"그래. 이제는 이프림과 에퍼리 자작의 차례군."

생각보다 내 차례가 빨리 다가왔다. 내가 나가려고 할 때, 칸나가 뒤에서 조그맣게 말했다.

"열심히 해."

"그럼."

아직 반말이 익숙하지는 않지만. 차차 익숙해지겠지.

난 걸어 나가면서 연무장에서 빠져나오는 아이리와 엇갈렸다. 그때, 아이리가 내게 스치듯 말했다.

"힘내."

내가 뭐라 대답하려 했지만, 이미 아이리는 빠른 걸음으로 다 빠져나간 뒤였다. 그래, 돌아가서 얘기하면 되지.

뚜벅뚜벅 걸어간다. 내 발걸음에 연무장의 흙이 점점 크게 인다. 내가 스킬을 켰기 때문이다.

【고유스킬 : 환영살인마 Lv 6 사용 중】

【스킬의 규모가 한 번에 개방되지 못합니다. 천천히 개방됩니다. 】내 앞에는 이프림이 나와 있었고, 온갖 위압을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내 스킬이 점점 개방될수록, 그의 표정이 굳어갔다.

이제, 나는 그와 마주하고 섰다. 스킬은 전부 열렸다.

가테스는 느꼈다. 이 싸움, 아이리와 아일린의 싸움보다 일찍 끝난다. 1초? 2초? 더 볼 것도 없다. 기세에서 이미 압도적인 차이가 난다.

앉아있는 검성회의 사람들도 느끼고 있었다. 그들 역시 소드마스터의 강자들. 남의 기도도 가늠이 안 될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에퍼리 자작은 가만히 있었다. 몸집이 작은 에퍼리를 이프림 장군을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그의 무표정은 그저 먼지를 보는 것 같은 무감각했다.

에퍼리는 지금 이프림을 도발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프림도 느끼고 있을 것이었다.

이런 싸움은 귀족의 방식이 아니었다. 귀족은 언제나 전력을 다해 부딪쳐야 한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농락을 하는 건 귀족의 방식이 아니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지?"

"본 실력이 얼마나 되는 지는 몰라도 너무 오만하군!"

검성회의 몇몇은 이미 심기가 불편한 듯했다. 가테스는 불안하게 에퍼리와 이프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어있던 이프림이 간신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더 이상 모욕을 견딜 수 없다는 식이다. 하지만 에퍼리는 칼을 무심하게 쳐내고 뒤로 물러난다.

"무슨 생각이냐, 너 이 자식!"

이프림이 결국 이성을 놓고 외쳤다. 소드마스터 쯤 되는 사람이 검성회 앞에서 공개적인 모욕을 당하니, 버틸 수 없던 것이다. 그는 엘리트 코스를 밟은 후작이자 장군이기에.

에퍼리는 처음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것도 이프림을 향해서가 아닌, 검성회를 향해서.

"난 당신들의 규칙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내 규칙대로 상대합니다."

내가 느낀 게 있다. 원래 세상은 내가 모르는 것투성이라고. 세상을 전부 안다는 건 불필요한 일이며,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나에 대해 알면 된다. 원작은 참고할 지침서가 될 뿐, 세상이 적혀있는 해답지가 아니다.

난 나의 선택을 할 뿐이고, 이 선택의 끝에 기다릴 나의 사람과 만날 뿐이다. 억지스럽게 날 바꾸며 살아가다가 사람을 마주치면, 결국엔 나와 헤어질 게 분명할 것이다.

내가 검을 쳐내고 피하자, 다른 사람들의 야유가 들렸다. 이건 내가 하수를 상대할 때 하는 방식이었다.

S급 헌터들은 시비도 많이 걸린다. 시기, 질투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냥 무던하게 넘어가줬다. A급 헌터들 중 호승심이 강한 자들은 나와 싸우고 싶어 내 얼굴에 침을 뱉은 적도 있다.

그때는, 그 사람들이 안타까워 적당히 상대해주고 말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A급 헌터들의 시비는 더욱 심해졌다. 그 시비를 해결하는 방식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리얀의 책에서 이프림에 대해 적혀있던 게 있었지.

- 자신감과 자존감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라, 한 번 밟으려면 진짜 제대로 밟아줘야 될 거예요.

"갑니다. 내 규칙대로."

검을 흘려내면서 자연스럽게 등 뒤를 잡는다. 이미 이프림은 내 잔상에 홀려 여전히 검을 휘두르고 있다. 이 정도의 차이인 것이다. 나와 그는.

나는 그의 등을 돌려차서 균형을 무너뜨렸다. 그가 바닥에 넘어가려 할 때, 다시 앞을 잡아 검병으로 가슴을 쳐서 올린다. 숨이 잠깐 멎어 몸이 굳은 그의 팔과 다리를 목검으로 일시에 두드린다. 목검이 좀 깊이 들어갔다. 근육이 파열되는 느낌이 검으로 느껴졌다.

"아악!"

처음 느껴볼 법한 고통에 이프림이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지른다. 나는 바로 주먹으로 명치를 내질러서 그 비명을 막아냈다. 지금, 이 자는 고통을 해소할 무언가도 하면 안 된다. 비명은 고통을 경감시키니까.

난 그때, 가테스의 입을 보았다. 가테스의 입 모양은 이제 그만 두라고 하라고 외칠 것 같았다.

파파파파파파파팡!

그래서 나는 전속력으로 목검을 휘둘러서 뼈가 안 다치는 모든 부분을 타격했다. 땅바닥에 엎어지지도 못하고 내 모든 검격을 전부 맞은 이프림은 공중에 살짝 떠있는 채로 기절했다.

"그만!"

내 예상대로 가테스의 외침이 들려오고, 털썩 하는 소리가 들렸다. 거품을 물고 눈이 뒤집힌 이프림이 몸을 간헐적으로 부르르 떨었다.

"···뭐하는 짓이지, 에퍼리 자작?"

"제 방식대로 했을 뿐입니다."

나는 가테스의 분노한 목소리를 차가운 목소리로 덮었다. 내가 지금까지 느끼던 괴리감은 세계에 대한 괴리감이기도 했지만, 나에 대한 괴리감이기도 했다.

이곳은 여러 중세 문화가 짬뽕된 시대. 하지만 나는 그 시대 사람이 아니었기에 수없이 트라프비체의 예를 갖춰도 트라프비체 사람이 될 수 없었다.

난 트라프비체의 기사가 아닌, S급 헌터였다. 그리고 이건 S급 헌터의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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