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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51화 (51/150)

< 51화 검은나무 원정대 - 뿌리 (2) >

"칸나!"

지금껏 기가 죽어있는 칸나를 부른다. 이 원정에서 나도 그녀의 이름은 처음 부른 것이었다. 칸나는 이 부대를 행군하면서 제일 앞에 나올 수 없으니 나와 마주치고 얘기한 적도 없다. 대령들이나 준장, 소장들이 잔뜩 있으니 기도 죽었겠지. 그래서 그녀의 존재감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허나 이제부터 그렇게 기죽어 있어서는 위험하다. 내가 볼 땐 이 원정대에서 가장 위험한 건 칸나였다.

성녀가, 일부러 검은 나무를 피하고 있다는 게 명확해진 다음에야 난 이 원정대의 진실을 알 수 있었다.

그저 마리나가 가테스와 여행을 오고 싶어 했다는 것을. 그럼으로 그녀는 의무를 행하고 있지 않다. 성녀로서 평민들을 구원을 행해야 하는 의무를.

칸나는 조용히 돌아서 내 앞으로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며 다가왔다. 아무리 백작 영애에 2황자 근위대장이어도 기라성 같은 장군들을 보니 기가 죽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응, 에퍼리···아니, 분대장님."

"그냥 에퍼리라고 해. 넌 특별대우야."

원래라면 안 하려고 했지만, 분대원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질러버렸다. 사실 칸나를 지금까지 못 챙긴 이유도 내가 지금까지 분대원들을 무력으로 다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와 칸나가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면, 나보다도 칸나에게 악영향이 끼칠까봐. 그런데 이제 분대원들이 날 인정했으니 내가 어떤 짓을 해도 받아들일 것이다. 칸나를 특별대우 하는 것 정도야.

"일단, 검은나무를 처치하기 전에 칸나를 제 근위장교로 두겠습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네."

분대원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칸나는 깊은 투구를 쓴 채로 어리둥절해 두리번거렸다. 투구 끝을 찰랑거리는 백금발이 귀여웠다.

뭐긴 뭐야, 제일 약하니까 내가 좀 케어해주겠다는 거다. 칸나는 이내 그 뜻을 알아차린 듯 얼굴을 붉혔다.

"이건 기사의 수치야."

"괜찮아. 괜찮아."

내가 칸나의 어깨를 두드렸지만 칸나는 그래도 뚱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도 알고 있으리라. 자신이 여기서 제일 뒤쳐진다는 것을.

"내 옆에 딱 붙어있어."

사실상 내가 칸나의 근위기사인 셈이다. 칸나를 공주님 대하듯 해야 한다.

"잠깐, 분대장."

"네."

"근데 성녀님을 데리고 와야 하는 것 아닌가?"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저희끼리 해결할 수 있습니다."

마리나는 애초에 검은 나무를 해치울 생각마저 없다. 물론 마리나가 온다면 쉽게 해결 되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내가 있으면 웬만한 검은 나무를 잡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궁금한 점은 여전히 있다. 내가 옛날에 검은 나무를 잡았을 때는 반응하지 않다가, 지금 반응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아직 알 수는 없다.

"갑시다."

거의 하나의 군단과 같은 소드마스터들이 진형을 잡자 자연스레 아우라가 피어올랐다. 검은 나무는 소름이 돋은 듯 털을 꼿꼿이 세워 올렸다.

저 멀리서 굉음이 느껴졌다.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5분대 전력이라는 게 느껴질 정도로 패도적이고 강력했다.

"분대별로 좀 힘을 뺄 필요가 있겠어."

타락한 나무 하나에 쏟아 붓기에는 너무 강력한 마나다. 저 멀리서 마나가 대기에 흩어지는 게 보일 정도면 얼마나 짙은 마나를 쏟아붓고 있는 것일까.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이 귀찮은 여자는 그것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가테스는 알 수 있었다. 이 여자는 기본적으로 포커 페이스를 잘하는 편이지만, 한 번 무너질 때는 순식간에 무너진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그녀의 표정은 아주 무너져 있었다.

"가테스."

마리나가 말했다.

"잠깐 갔다 와야겠어요."

"어딜?"

"화장실 좀요."

"거짓말 하지 마라. 저기를 갈 심산이잖나."

"알면 됐고요."

"당신은 또···"

이렇게 막무가내로군. 가테스는 한숨을 쉬었다. 이 여자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만 한다는 점에서 에퍼리 자작이랑 다를 게 없었다.

"내가 같이 간다."

"혼자 갈 거예요."

마리나는 초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뭐에 이렇게 불안해하고 있는 걸까. 가테스가 옆에서 바라본 바로는, 그녀는 어딘가 불안정한 사람이었다. 에퍼리 자작과의 차이점은 그것이었다.

에퍼리 자작은 어디로 튈지는 모르지만, 불안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리나는 달랐다. 어디로 튈지 모르고 불안했다. 그녀는 가끔 이상행동과 충동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요즘은 많이 줄어든 모습을 보였지만, 다시 그것을 보여주려 하는 것이다.

"따라오지 마세요. 웬만한 마수들은 나 혼자 처리 가능하니까."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

"불가능하다고요?"

마리나가 가테스를 바라보았다. 그건 가테스도 섬뜩할 정도의 무기질적인 눈빛이었다. 말을 안 들어준다면 당장이라도 사라지겠다는 눈빛. 가테스가 그녀의 말을 순순히 따라주는 건 가끔 보여주는 이런 모습들이었다.

"그럼."

마리나는 가테스를 간단하게 제압하고, 가테스를 떨구고 기가 피어오르는 곳으로 말을 타고 갔다.

등을 돌리고 혼자 말을 타고 가는 그녀의 승마술은 꽤 자연스러웠다.

"호치 대령."

기사단장인 호치 대령을 부른다. 가테스의 근위기사로 참여한 그는 바로 가테스 옆으로 다가왔다.

"진을 넓게 펼쳐서 성녀 쪽으로 간다."

"성녀님이 아신다면···"

"모르게 하면 되지 않은가?"

가테스가 입술 안쪽을 씹은 다음 씹어 나온 걸 모래밭에 뱉었다. 피가 살짝 머금어진 살집이 모래를 붉게 물들였다.

검은 나무가 있는 곳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하얀 검은 웅웅거리고 자체발광을 하고 있다. 난 마나를 최대한 빼고 힘만으로 그것을 잡았다. 손끝에 진동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건 무슨 검이야?"

"몰라."

칸나가 묻자 난 조용히 대답해줬다. 칸나는 나와 둘이 있었다. 내 실력은 어느 정도 증명했으니 다른 사람들은 정석대로 5인 1조로 검은 나무의 뿌리들을 공략하고, 난 핵심을 처치하러 깊숙이 들어가는 중이었다.

"넌 얼마나 강한 거야?"

"몰라."

"아는 건 뭐야?"

칸나가 불퉁하게 물었다. 난 솔직하게 대답했을 뿐이다. 그때, 벽 사이에서 균열이 생기면서 몬스터 한 마리가 내게 달려들었다. 난 슬쩍 피했다. 칸나는 반사신경으로 그 몬스터와 싸웠다. 너무 빠르게 나와 힘이 실리지 않아 한 번에 베이지는 않았지만, 몇 번의 합 끝에 몬스터가 쓰러졌다.

"이건 또 무슨 짓?"

칸나가 물었다. 난 쉽게 대답해줬다.

"훈련 2탄."

"왜?

"그냥, 강해지면 좋잖아?"

"그렇긴 하지."

이렇게 모를 세상에서는 최대한 변수를 줄여야 했다. 칸나는 내가 아는 한 원작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부드럽지만 강직한 성격, 기사도, 상냥함, 강함에 대한 열망.

그렇기에 난 칸나를 돌볼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왜곡된 세계에서는 왜곡되지 않은 사람이 위험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난 네가 궁금해."

"뭐가?"

"대체 무슨 내력을 가지고 있는 건지. 어떤 과거를 살았는지."

"그건 말해주기 힘든데."

"왜?"

칸나가 물었다.

"우리 이제 좀 친하지 않아?"

"친하지."

"근데 왜? 난 정말 다 말해줄 수 있는데."

칸나가 진심으로 섭섭하다는 듯 얘기했다. 투구를 써서 그녀의 그림자 진 눈이 내 죄책감을 더 강하게 찔렀다. 미녀가 나한테 섭섭하다는 건 그것 자체로 사죄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나도 내 사정이 있었다.

칸나는 지금까지 내 내력을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근위병 시험을 봤을 때, 그녀를 넘는 신위를 보여줄 때도, 마더 트리를 일거에 제거할 때도. 그냥 그녀에게 나는 강한 남이었다.

그런데 칸나는 이제 진짜 날 궁금해 하고 있었다. 서로가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을 넓혀가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S급 헌터라는 것과, 지구라는 세계와, 게이트가 있는 세계는 그녀가 공감할 수 없었다.

"···미안."

"그래."

칸나는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때 마침 몬스터가 나와서 칸나는 그것을 보다 거칠게 해결했다. 뭔가 칼질에 감정이 담긴 것 같았다.

마리나는 말을 달렸다. 에퍼리는 강한 사람이다. 검은 나무와 던전을 한 번에 해결했다는 전적도 있었다. 마리나는 에퍼리를 생각했다.

그는 같은 지구인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꺼려하고 있었다. 그건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어디선가부터 바뀐 걸까. 에퍼리가 자신을 처음 봤을 때는 적어도 부정적이지는 않았다.

'내가 뭘 잘못했었나.'

마리나는 생각했지만, 그와 마주친 적도 별로 없는데 어찌 알겠는가.

"에휴, 썅."

답답하다, 답답해. 그녀는 욕을 뱉었다. 가슴 속에 있는 욕을 뱉어대니 그나마 속이 시원해졌다. 여기는 욕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세계. 이렇게 혼자 있을 때 빼고는 할 수 없다.

그러고 보니까 에퍼리는 자신에게 물었었지. 사람이 사람을 이유 없이 싫어할 수 있냐고. 자신은 솔직하게 대답해줬다. 대체 뭐가 불만인거지. 에퍼리가 자신을 이유 없이 싫어하기 때문에 그런 걸 물어본 건 아닌지.

"진짜 그러면 미친놈 아닌가?"

마리나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손에 하얀 불꽃을 일게 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쥐어진 힘을 보았다. 그녀는 손을 꽉 쥐었다. 하얀 불꽃이 그녀의 손바닥 안에서 삐져나와서 대기 속으로 흩어졌다.

사실 그가 물어본 질문은 꽤 흔한 질문이었다. 그런 질문은 쉽게 지구의 언어로 바꿀 수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할 때, 무작정 진상을 부리는 사람은 왜 존재하는가? 약한 자를 괴롭히는 일진은 왜 존재하는가? 갑자기 길거리에서 시비를 거는 사람은 왜 존재하는가? 왜 아무 것도 안 했는데 사장님은 아르바이트인 나를 못 살게 구는 것일까?

이유 없이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은 많다.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대신 하나는 배웠다.

이유 없이 사람을 싫어한다면, 싫어할 이유를 만들어주면 된다는 것. 특히 '이 세상' 에서라면 거리 낄 것도 없었다.

나는 최대한 돌아서 갔다. 칸나에게 최대한 많은 경험을 쌓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칸나의 원 포지션은 성녀의 근위기사. 근데 지금 칸나와 성녀의 접점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칸나, 혹시 성녀님 뵌 적 있어?"

"개인적으로는 없지."

"어떤 분 같아?"

"그냥, 뭐. 아름다우시던데?"

그게 평범한 감상이지. 제일 눈에 띄는 외모니까. 사실 지금 칸나와 마리나는 남남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같은 원정대에서도 얘기를 했던 걸 못 봤으니까. 애초에 마리나는 칸나를 신경 쓰지도 않는다. 칸나도 마리나를 신경 쓰지 않고 있고.

"칸나, 넌 평생 군인을 할 거야?"

"안 말해 줄 거야."

"왜?"

"너도 너 개인적인 거 안 말해주잖아."

칸나가 날 돌아보지도 않고 몬스터를 잡으며 말했다. 음, 이거 삐진 것 같다. 그런데 어떡하랴. 난 진짜 말해줄 수가 없는데.

"칸나, 삐졌어?"

"응."

그녀는 솔직하다. 보통 삐졌을 때 삐졌냐고 물어보면 안 삐졌다고 말하는데. 그래서 참 나는 칸나라는 캐릭터가 좋았고, 이제는 칸나 카라모프라는 사람이 좋았다. 아 물론, 이성적으로는 아직 모르겠지만.

"슬슬 숨 쉬기가 힘든데."

칸나는 목에 조여진 갑옷을 흔들어 살짝 헐렁하게 만들었다. 땅 깊숙하게 있으니 숨 쉬기가 힘들기도 할 것이다. 파면 팔수록 먼지가 나오니까.

"슬슬 검은나무 뿌리 제거하고 올라가자. 그러면."

"그건 네가 하는 거지?"

"음. 다른 분대원들도 이 정도면 만족 했겠지."

그때, 하얀 검이 울었다. 저 멀리서 성스러운 기운이 느껴졌다. 천장을 바라보니 하얀 불꽃이 하늘에서 떠돌고 있었다.

처음 봤다. 아마, 성녀의 힘이겠지. 성녀는 지금 검은나무를 태우려고 온 것이다. 뻔뻔하기도 하지. 지금까지 자신이 피해놓고, 이제 와서 무엇을 하겠다니.

"칸나. 내 손을 잡아."

"응?"

칸나는 내 뜻밖의 말에 얼굴을 붉히고는 내 손을 잡았다. 하얀 검이 울고 있다. 분명, 저 신성력에 더욱 크게 반응하고 있다. 나는 이 검이 어떤 작용으로 움직이는지 모른다. 다만, 내 검의 힘이 강해졌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검극이라기 하기도 뭐한, 뭉툭한 칼 끝에 내 모든 마나가 모인다. 그 순간, 칸나가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난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녀의 마나가 몸에서 급격히 빠져나가 현기증을 일으킨 것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녀의 마나를 대신 쓰고 있으니까. 칸나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저 성녀의 무지막지한 성화(聖火)에게 뒤처지고 말 것이다.

"칸나, 미안해."

"···으."

전신이 급격히 풀린 칸나의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오지 않고 침이 흘렀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콰콰콰콰쾅!

내 전력이 검은나무의 핵심으로 빠른 속도로 치달았다. 그 뒤로 하얀 불꽃이 따라온다. 하지만, 내 속도가 근소하게 더 빨랐다.

쾅!

아직 마인화가 되지 않은 검은나무 정도는 이렇게 원샷으로 잡을 수 있다. 물론 크기가 작아서도 그렇지만.

쿵!

검은나무의 핵심이 순식간에 가루가 되면서 땅 위로 촉수처럼 뻗어 나온 뿌리들이 모두 대기로 흩어진다. 땅이 무너지고 나는 칸나를 품에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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