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검은나무 원정대 - 뿌리 (3) >
땅이 내려앉을 때 지면 위로 올라온 먼지가 걷어지고, 점점 사람들의 형태가 보이기 시작했다. 고작 땅이 무너진 것으로 갇힐 하수는 여기에 없었다.
아, 칸나 정도 있겠구나. 그래서 칸나는 내가 지금 옆에 보호하고 있다.
"···으, 에퍼리?"
칸나는 아직 정신을 못 차렸는지 혀를 꼬부랑거리며 나를 반쯤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최대한 막아줬지만 힘의 반탄력으로 그녀의 투구마저 떨어진 상태였다. 그 때문에 그녀의 부드러운 짧은 백금발이 내 팔을 간질였다.
기분이 좋긴 한데, 지금은 그거에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켁, 켁!"
"칸나, 숨참아. 아직 먼지가 떨어지고 있어."
당황하는 칸나를 제외하고서는, 지금 모두가 이 상황을 알고 있었다. 서로 다른 성질의 기 하나 간파 못할 하수는 없었기 때문.
하늘 위에 있는 마리나는 망연하게 내려왔고, 그 뒤에 가테스를 필두로 한 부대가 전부 따라왔다.
"···이 무슨."
어떤 이의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아마 모두가 같은 심정일 것이었다. 지금 지면은 내 마나와 성녀의 성화로 인해서 완전히 쑥대밭이 된 상태. 마치 신화에서 거인들이 전투하고 난 이후의 모습인 것 같았다.
어떤 지면은 꼿꼿이 서 바위가 되어 있었고, 성화와 내 마나의 문양이 겹친 곳은 묘한 프랙탈을 이뤄 기묘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분명 이곳이 보존된다면 후대에 두고두고 연구거리가 될 만큼.
"뭐하는 짓이죠, 에퍼리 자작."
성녀가 천천히 나에게 걸어왔다. 나는 그녀와 비슷한 키였기에 곧 우리는 서로를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보게 되었다.
"성녀님의 할 일을 대신 해줬을 뿐입니다."
"내 할 일을 가로챈 거죠."
"일을 하실 생각이 없는 것 같아서요."
내 말에 마리나의 말문이 턱 막혔다.
"검은나무를 피하는 성녀가 무슨 일입니까?"
나도 몰랐겠지. 이 하얀 검이 검은나무의 위치를 알려주는 무구가 아니었다면. 물론 이 말은 다른 사람에게까지는 안 들렸을 터다. 아, 칸나는 들었겠지.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것 같던 칸나는 그 말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 씨발."
그때, 마리나가 얼굴을 돌리면서 아주 작게 욕을 내뱉었다. 그녀 나름에는 자기 혼자에게만 들리게 욕을 했다고 생각했겠지만, 내 초감각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지금 욕하셨어요?"
"안 했는데요?"
"하셨잖아요."
마리나와 나는 갑자기 불이 붙었다. 주변 사람들은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난 좀 나를 가라앉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건 전형적인 지구인들의 싸움이었다. 이런 명예와 예법이 난무하는 중세시대에서는 이렇게 갑자기 싸움으로 치닫는 극단적인 상황을 봤을 리가 없었다.
"그만하시죠."
"그러시던가."
마리나는 내게 적대적인 표정을 하고 몸을 홱 돌리고 걷다가, 다시 등을 돌렸다.
"이봐요, 주환영 씨."
"···뭐요?"
"당신, 나 진짜 싫어하나보네."
마리나는 차갑게 말했다. 나는 갑자기 울분이 솟구쳐 마리나의 뺨이라도 한 대 후려갈기고 싶었다. 여기서 본명을 꺼내는 건 금기의 위반이었다. 칸나는 내가 주환영이라고 불린 것을 듣고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없는 이름의 형식이었으니까. 영어가 옌시어인 이 세상에서, 한글은 없는 언어였다. 내 품에 안긴 칸나도 역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눈치였다.
"···가자."
내 무거운 말투에 칸나가 아무도 물어보지 않고 대열을 갖춰 섰다. 이제 다리의 힘이 어느 정도 돌아온 모양이다. 저 멀리서 성녀가 혼자서 말을 타고 가고 있었고, 더 멀리서는 한 무리의 군대가 말을 타고 천천히 오고 있었다.
"칸나 카라모프를 내 호위기사로 할 게요."
가테스, 성녀, 5분대가 합쳐질 때 마리나가 뜬금없이 뱉은 말은 그것이었다. 아마도 내 눈썹은 위로 올라갔을 거다. 마리나가 엮이면 조금 비이성적으로 된다. 같은 지구인이라 그런 걸까.
"칸나는 제 근위장교입니다."
"원정대장. 어떻게 생각해요?"
내가 거부하자 마리나는 가테스에게 달라붙었다. 점점, 선을 넘고 있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마리나는 내가 경계한다는 걸 눈치 채고, 나를 적대하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어쨌든 결단력이 빠르다는 건 소설과 같다.
"···난 부대의 편제를 담당하고 있지만, 그래도 근거는 있어야 한다."
마리나는 그 말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근거 하나. 저에게는 근위기사가 필요해요. 전 성녀잖아요."
"내가 하고 있지 않은가?"
"원정대장은 근위기사가 아니잖아요. 정확한 편제가 아니죠. 군대는 편제가 필요하잖아요?"
가테스는 뭔가 불만이 있는 듯했지만 마리나는 두 번째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근거 둘. 저 에퍼리라는 사람은 자기가 칸나를 보호한다는 생각을 하는 모양인데, 그렇게 따지면 이 부대에서 제 곁보다 가장 안전한 곳은 없어요."
"···그건 틀린 말은 아니군."
가테스가 말했다. 나도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단순히 타락한 나무에서 나온 마수들은 그냥 원정대원들이 처치할 거고, 검은 나무는 성녀가 일거에 태울 힘이 있으니까.
"근거 셋. 난 성녀예요. 여기서 가장 존중받아야 할 사람이고, 이 원정대의 핵심이에요. 근위장교 정도는 제가 직접 정할 수 있게 해줘야지 제 마음이 덜 상하지 않겠어요?"
"아주 막무가내시군요."
내가 결국 한 마디를 꺼냈다. 마리나는 날 노려보았고, 나 역시 마리나를 노려보았다. 그렇지만 이 싸움에서 내가 이길 수는 없었다. 난 고작 분대장이고, 마리나는 원정대장보다 더 위에 있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그녀의 근거 역시 맞았다. 마리나 옆에 있으면 칸나는 더욱 편해지겠지. 일단, 이렇게 해주자고.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다.
"그러면 칸나는 성녀님께 맡기겠습니다."
"흥, 그래야죠."
마리나는 이제 대놓고 내게 싸가지 없게 굴었다. 그래, 그래라. 미안하지만, 난 날 적대하는 사람을 보고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물론 그전에 그녀의 진심과 이 사람이 원작 속 주인공인지, 정연서인지 알고 싶었다.
그렇기 위해서는 오히려 칸나가 없는 편이 좋았다. 이제는 나도 좀 막나갈 거거든.
"어째 눈빛이 보기 좋지 않네요? 칸나 영애를 좋아하기라도 하셨나?"
"칸나는 좋은 사람이에요. 잘 대해주세요."
나는 마리나의 시비를 무시하고 5분대를 이끌고 본대 속으로 들어가 진열을 다시 갖췄다. 칸나의 불안한 시선이 내게 왔지만 난 몰래 고개를 끄덕여줬다. 가테스가 옆에 있으니 막 나가진 않을 것이다.
난 눈을 감았다. 하얀 검의 진동을 더 느끼기 위해서.
하얀 검의 민감도는 왠지 모르겠지만 더 늘어났다. 나도 이제 검은나무의 레이더가 된 거다. 난 이걸 적극적으로 이용할 생각이다.
이미 원정대원들은 다 지쳤고, 칸나를 인질로 묶어두는 등 마리나의 패악질은 도를 넘고 있다. 이제는 그냥 그녀가 싫다고 단언할 수 있다. 마리나가 내 최애캐이고, 뭐고, 상관없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캐릭터가 아니고, 난 마리나라는 사람이 싫은 거니까.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굴려야 제 맛이다. 헌터에서 싸가지 없이 구는 것들이 가끔 있는데, 그들한테 몬스터를 과하게 흘려주면 헥헥대는데, 아주 그게 볼만하다. 그 전략을 이 시공간을 넘어선 트라프비체 제국에서 다시 한 번 사용되려 하고 있었다.
난 조용히 모두가 잠을 잘 때 나섰다. 외곽에는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그림자는 내가 저 멀리서 걸어오는 데도 일찌감치 뒤를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아주 늦게도 나오는 군."
내가 말을 걸려고 할 때, 누군가의 차가운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목소리만으로도 대기를 차갑게 만들 수 있는 건, 가테스 트라프비체뿐이었다. 부른 건 당연히 나였다.
"무슨 일로 날 불렀지?"
"제안을 할 게 있습니다."
"뭔 제안?"
"성녀가 너무 태업해서 말입니다. 이대로 가면 지금까지 맛있는 황궁 밥을 먹인 것이 너무 손해 아닙니까."
"황가의 재정은 그렇게 부족하지 않다."
농담을 농담으로 못 받아들이는 이 사람. 진짜 재미없다. 이런 데도 여자들이 막 꼬인다니. 아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어쨌든, 성녀가 태만하다는 사실은 원정대장 입장에서도 부정할 수 없군."
"저희가 먼저 검은나무를 잡고 다니면 됩니다. 그러면 성녀는 알아서 일을 할 겁니다."
당연하다. 그녀는 지금 검은나무를 잡는 게 목적이 아니라 가테스의 관심을 얻는 게 목적이니까.
"우리가 잡으면 성녀가 알아서 일을 한다는 논리 구조는 어떻게 도출됐는지는 몰라도, 검은나무를 어떻게 먼저 잡는다는 말이지? 검은나무의 추적은 성녀만이 가능한 것인데?"
"저도 할 수 있습니다."
"···뭐?"
가테스의 눈이 커졌다. 아마 그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의 감정진폭일 것이었다. 로맨스판타지 남자주인공은 놀라지 않는 게 디폴트값이니까.
내가 하얀 검을 들자 웅웅거렸다. 지금껏 갈무리했던 검의 힘을 모두 개방한 것이다. 이상하게도 하얀 검은 이 원정대에서 점점 더 눈을 뜨고 있었다. 어떤 게 트리거가 됐는지는 아직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감이 잡히지 않았어도 결과적으로 쓸 수 있다면 쓰면 되는 것.
"네가 어떻게 그 힘을 가지고 있지? 검은 나무를 추적하는 건 성녀의 고유한 역할일 터인데."
"뭐, 두 명이 있으면 좋은 거죠. 제가 오늘 검은나무를 발견한 건 우연이 아닙니다."
"그런 이유로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니다. 이건 중대 사항이야."
"저도 모릅니다. 이런 힘이 저한테 왜 들어왔는지."
"난 네가 말하는 게 진실임을 알아야겠다."
나는 잠깐 스킬을 껐다. 그는 기세만으로 내가 스킬을 끈 걸 확인했을 것이다. 그는 날 유심히 보더니, 눈을 감고 조금의 시간이 있다가 떴다. 그의 눈 색은 황금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진짜로군."
그의 입에서 그 한마디가 흘러나온 순간, 난 바로 스킬을 켰다. 바로 가테스의 눈이 찌푸려진다.
"아주 비밀이 많은 사람인가보군."
"전 신비주의라서."
"어쨌든, 네 진실성 하나는 알았다."
그거면 됐다. 이제 내 계획을 말할 차례였다.
"이제 황자 전하는 성녀를 호위하지 마시고 저를 호위하시지요."
"그건 무슨 토 나오는 소리냐?"
"성녀에게서 떨어지라는 말입니다."
가테스가 얼굴을 찌푸리자 나도 같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 사람은 참 고지식한 면이 있어서 돌려서 말하면 잘 못 알아듣는 게 문제군. 하긴, 그런 단점이 소설 속에서 드러날 리는 없다.
왜냐하면 가테스 앞에서 말장난할 정도로 간 큰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래, 좋아. 어쨌든 우리가 검은 나무를 잡는 건 알겠어. 근데 그게 성녀가 일하는 거랑 무슨 연관이지?"
"음, 그건 좀 말하기 그렇습니다."
"뭐지, 찝찝하군."
왜냐하면 마리나가 널 좋아하기 때문에. 가테스는 눈치를 못 챘을 거다. 역시 로맨스판타지 주인공. 둔감 속성은 필수로 보유하고 있는 거겠지.
"중요한 건 제가 검은 나무를 추적할 수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른 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건 그렇다."
가테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극한의 효율주의자이자 제국주의자. 제국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면 내가 누구라고 해도 그 손을 잡을 것이었다.
"그럼 계약 성립입니까?"
"계약이라··· 그래. 뭐, 성립했다고 하지."
가테스는 계약이라는 단어를 입에 굴리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상호 간 동등한 입장에서 하는 계약이란 말은 황자 입장에선 쓸 일이 없었을 것이었다.
"황자 전하는 뭘 주실 예정이십니까?"
"무슨 소리냐?"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얘기했다.
"제가 성녀의 역할을 대신하는데 그에 상응하는 보답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지금 자네가 날 부른 것 아니었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아닙니까."
원래 헌터는 용병과도 같다. 이런 건 구두로라도 확실히 해놔야지. 사실 가테스에게 원하는 게 하나 있기는 했다.
가테스는 끙, 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래, 원하는 게 뭐지?"
"별 건 아닙니다."
내가 그리고 그에게 원하는 걸 말했다. 그는 듣자마자 바로 입을 열었다.
"진짜 별 거 아니군."
"전 양아치가 아닙니다."
내 말에 가테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이미 그는 나를 양아치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가테스는 이제 이런 얘기는 진저리가 난다는 듯 손사래를 치고 주제 전환을 했다.
"그럼 작전의 시작은 언제부터인가?"
"지금 당장부터입니다."
"그래?"
가테스는 슥 사라지더니, 다시 뿅 하고 나타났다. 그의 천막에서 경장과 병장기를 챙겨온 것이었다. 역시 그는 빨랐다.
"가지, 그럼."
"좋습니다."
지금까지 검은나무 레이드 없는 검은나무 원정대였다면, 이제는 원정대의 뿌리가 잡힌 느낌이었다. 그 뿌리는 두 명으로만 이루어져 있지만, 어떤 가지보다 강할 것이라고 난 생각했다. 모든 뿌리가 그렇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