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마리나 스미노프 (1) >
우리의 계약은 이랬다. 내가 검은나무의 레이더를 할 수 있으니 마리나 대신 검은나무를 모두 잡는 거였다.
대다수들의 헌터들은 몬스터를 싫어한다. 그저 일이니까 잡는 것일 뿐. 사람을 싫어하면, 싫어하는 행동을 해주면 된다.
내가 독단으로 검은나무를 잡았을 때 허겁지겁 달려오던 그녀. 지금까지 왜 피했을까, 싶을 정도로 패도적인 화력. 나는 짐작하는 바가 있었지만 넘겨짚기를 그만하기로 했다. 마리나는 내가 넘겨짚을 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내가 여기가 그저 '소설'처럼 흘러 갈거라고 착각할 정도의 캐릭터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마리나는 처음부터 내게 낯선 느낌을 준 사람이다. 그녀를 다룰 때는 최대한 조심스러워 해야 했다.
"이게 성녀한테 자극이 된다면 좋겠지만."
또 검은나무를 처치한 가테스가 나왔다.
"도움이 될 겁니다."
"무슨 근거인지는 끝까지 얘기하지 않을 셈이군."
그건 마리나에 대한 내 최소한의 예의였다. 유일하게 걸리는 점이기도 했고.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더라, 이걸 함부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가테스와 나는 조용히 천막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검은나무를 잡을 때는 언제나 새벽이었기 때문이다.
초소를 서고 있는 원정대원들의 감각을 속이기는 쉬웠다. 가테스는 먼저 원정대장의 천막으로 들어가고, 나도 5분대장의 천막으로 들어가려 했다.
"음."
나는 잠깐 침음을 흘렸다.
이 새벽 시간대에 내 천막에 누군가가 있는 것이었다. 기도가 없다시피했다. 그렇다면, 누구인지는 명확했다.
내가 천막을 열자 풀어헤쳐 삐죽삐죽 나온 금발의 여자가 날 바라보았다.
"왔어요?"
"음. 다녀왔습니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서 그렇게 대답했다.
마리나 스미노프. 지금 내가 제일 경계하고 있는 사람이 왔다. 그녀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도 의자에 앉아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쁘기는 진짜 너무 예뻤다.
"여긴 왜 왔어요?"
"오기 싫었어요."
"그러면 나가세요."
내가 천막을 열어주자 그녀는 피식 웃었다.
"내가 들은 에퍼리 자작이라는 사람과는 다르네요. 내 앞에서만 달라지는 건가?"
"원래 사람이란 게 어떻게 한 면의 모습만 보여줘요."
"그건 그러네요."
마리나는 권태로운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예요. 검은 나무인가, 냄새나는 거 잡는 거 그만둬요. 어떻게 알고 잡는지는 몰라도. 이거 성녀만 추적할 수 있다더니, 순 구라였네."
"알고는 계셨네?"
"성녀라는 게 알기 싫어도 알게 되더라고요."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뻔뻔할 수 있을까. 내 생각은 이것이었다. 난 내가 짐작한 바를 물었다.
"뭐, 내가 협상의 여지를 안 들고 온 건 아니에요. 꽤 설득력 있을 걸요. 들어보세요."
마리나는 의자에서 빙글거리며 말했다.
"당신이 아끼는 칸나 소령을 놔줄게요. 솔직히 엄청 갈굴 수도 있거든요? 내가 옛날에 아르바이트를 많이 해서 진상질을 배운 게 있거든요. 별의 별 거를 다 갈굴 수도 있죠. 차 온도가 왜 이러냐, 반찬이 왜 이러냐, 의전이 왜 이러냐, 이러면 진짜 사람 정신 나간다니까? 그걸 안 하겠다는 의미예요."
"아하."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난 솔직하게 내가 궁금한 걸 물었다.
"혹시 미쳤어요?"
"아뇨."
"다른 걸 물어봅시다."
나는 말했다.
"설마 검은 나무를 피하는 건, 그냥 피하고 싶어서, 그 이유 하나밖에 없는 건 아니죠?"
"맞는데요?"
나는 그 대답을 듣고 절망했다. 정말, 아무 이유도 아니었던 것이다. 이 세계는 그녀의 변덕에 달려있다니, 참 웃겼다.
"그래서 대신 잡아주잖아요. 지금 당신이 검은 나무를 피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손해가 발생해요. 이 원정대원들은 그렇고, 국민들도 피해를 볼 텐데."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할까요?"
"그러시던가."
마리나는 무감각하게 말했다. 난 그게 화났다.
"특별함이라는 권리는 누리고 싶고, 성녀의 의무는 저버리고 싶다 이거 맞아요? 내가 검은나무를 잡으면 성녀의 특별함마저 사라지니까?"
"정확하시네요? 근데 왜 그래요?"
"근데 왜 그러냐니···"
난 말문이 턱 막혔다. 역설적으로, 난 마리나가 사람이 아니라 캐릭터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말이 안 통하는, 단면적인 얼굴을 가진.
내 얼빠진 얼굴을 보니 마리나가 박수를 살짝 쳤다.
"아, 대충 우리가 어디서 어긋나는지 알았어요."
난 넋을 놓고 그냥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내 스킬이 갑자기 열렸다. 이건 마치 반사적인 거부반응이었다. 내 위압이 강해지는 게 느껴졌지만 마리나에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를 못했다. 마리나 역시 주인공인 만큼, 다양한 스킬을 가지고 있겠지.
"그래, 그나저나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뭐요."
"제가 거짓말을 했다고 했잖아요. 뭔 거짓말을 했다는 거예요?"
그녀가 웃었다.
"설마, 사람을 이유 없이 싫어할 수 있냐는 거요? 난 진실을 얘기했어요. 당신 같은 싸이코가 날 갑자기 싫어하는 거지."
"아니, 그건 아닌데요."
내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내가 거짓말이라고 한 건, 당신이 마리나 스미노프냐, 정연서냐, 라고 했을 때 거짓말을 한 걸 말하는 거예요."
"뭐?"
"난 참 오래 기다려줬어요."
내가 의자에서 일어나 검을 뺐다. 그녀는 날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두려운 기색도 없었다.
"당신이 이 사람들을 사람으로 보는지, 그저 장난감으로 보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그리고 오늘 확실해졌네요."
"개소리하지 말고 정확하게 말해주시지?"
"지금 당신은 이 사람들을 그냥 다룰 수 있는 장기말로 보고 있잖아요. 칸나의 얘기도 그렇고. 안 그러면 당신이 안 나서는 게 말이 안 되죠."
나는 말을 이었다.
"당신은 지금 정연서야. 마리나 스미노프가 아니라. 그냥 마리나 스미노프의 얼굴을 닮고 싶은 거지, 본질은 그냥 정연서라고. 별 볼 일 없는 지구인, 정연서. 내 말이 틀려요?"
"당신은 뭐 그리 잘나서 그런 말을 하는데요?"
마리나가 으르렁거렸다. 나는 칼을 그녀의 어깨에 들이밀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하얀색 반탄력에 내 검이 튕겨져 나갔다.
"이렇게 힘이 남아있는데도, 가만히 있는 다라."
"하."
마리나는 비웃듯이 말했다. 이제 그녀는 완전히 스위치가 바뀌었다. 내게 반말로 말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고작 그런 거 때문에 날 싫어하는 거였어? 너 완전 씹덕새끼 그 자체네?"
말이 거칠다. 내가 반말을 섞으니까 이제 반말을 넘어 모욕적인 언사까지 쏟아내고 있다.
"그건 무슨 소리?"
"여기는 그냥 우리한테는 보너스 스테이지 같은 곳이야.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세계가 있을 리가 있어? 난 어쩌면 꿈을 꾸는 걸 수도 있지."
마리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방금 칼로 찌르려던 건 아예 잊은 듯했다. 그녀는 머리칼을 벅벅 긁으면서 완전 머리를 산발로 만들었다.
"트라프비체의 예를 갖추라느니,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기사, 이 지랄하는 세계가 넌 정상이라고 생각해? 사실 네가 영광스럽게 쳐 들고 다니는 자작이라는 작위는 없는 작위인 것도 넌 모르지? 여기 세계가 중세인 주제에 집은 바로크, 로코코, 고딕 양식에 무슨 근대 건축기법까지 쓰더라? 여기는 그냥 판타지 속 망상의 세계야. 몬스터? 마수? 씨발, 이건 말할 것도 없잖아. 이딴 곳에 과몰입하는 네 문제라고. 나 원 참, 같은 지구인이 떨어졌으면 좀 정상적인 새끼가 떨어지지, 뭔 덜 떨어진 새끼가 와가지고."
나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와 나에게는 엄청난 간극이 있었다. 나는 2050년, 게이트가 열린 이후를 살았지만, 그녀는 그 전을 살았다는 것.
난 그나마 마수가 익숙했고, 이 세계가 소설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녀에게는 완전히 동떨어진 세계였다.
그러니 이렇게 반응하는 게 맞는 것일까. 그렇지만 난 그녀가 여전히 다르지 않고 틀리다고 생각했다.
"내가 자취를 했었거든? 자랑은 아니지만, 작은 거미만 나와도 에어졸로 절인 다음에 고무장갑을 끼고 밖으로 버렸던 사람이야. 보기만 해도 토 나오는 마수를 잡으라니, 세계의 패악질도 정도가 있지 말이야."
그녀는 분노하면서 말을 이었다.
"넌 오픈월드 게임에서 내가 무슨 영향력을 끼칠 거라고 생각하고 게임해? 이 퀘스트들을 받지 않으면 이 NPC들은 고통에 빠질 거야! 이러면서? 그럼 네가 미친 거지, 내가 미친 건 아니잖아?"
"여기는 또 다른 세계야. 다른 사람들을 보면 모르겠어?"
"모르겠어. 코스플레이어들 같은 사람들한테 내가 몰입하는 게 이상하지."
마리나는 말했다.
"그래도, 여기 있는 사람들은 사람이야. 네가 그렇게 취급할 이유는 없는데."
"세계가 병신인데, 사람 취급이 돼?"
"그럼 넌 가테스를 왜 사랑하는데?"
내 말에 마리나의 입이 꽉 다물어졌다. 마리나가 신성력을 강하게 일으켰다. 그때는 그녀도 살짝 놀란 것 같았다. 내가 스킬이 열린 것처럼 그녀도 본능적인 거부반응이었던 것 같다.
"난 걔 사랑 안 해. 그냥 잘 생겼으니까 옆에 두고 싶은 것일 뿐. 트로피 같은 거라고 할까? 원래 남자들은 예쁜 여자 사귀면 자랑하잖아? 여자도 마찬가지야."
"뭐?"
"한 번 더 내 마음을 꿰뚫는 것 같은 재수 없는 말투 쓰지 마."
마리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완전히 불쾌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공기가 바뀌었다.
"내가 그나마 착해서 여기까지 참아준 거라고 생각해. 너 같은 씹덕한테는 달리 생각해야 된다는 걸 느꼈어. 그나마 같은 지구인이라고 좀 친해질 수 있겠나 싶었다고 생각한 내가 병신이다."
그녀는 그렇게만 말하고 천막을 발로 박차고 나갔다. 걷어진 천막에서 그녀가 머리를 산발로 하고 악을 질렀다.
"원정대, 다 나와! 검은나무를 발견했다!"
빛을 뿜어내며 악을 지르는 그녀가 정말 광적인 존재로 보였다. 그녀에겐 이 세계가 그렇게 우스워 보이는 걸까. 나는 바로 달려가 그녀의 입을 막았다.
"진짜 미친년이냐?"
"내 몸에 손대지 마라."
우리 둘이 짧게 실랑이 하는 동안, 한 번의 악에도 군기가 확실한 원정대원들은 삐걱대며 천막에서 나왔다. 아직 안자고 있었던 것 같은 가테스는 놀란 눈으로 마리나를 봤다.
"무슨 일이지?"
그녀는 가테스를 일부러 무시했다. 내가 가테스를 사랑했냐는 말을 아직 담아두는 것 같았다.
"칸나, 칸나 소령은 어디 있지?"
마리나는 말했다. 그 독기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지구에서도 정신병을 앓는 많은 헌터를 많이 봤다. 보통은 PTSD로 인해 같이 따라오는 압박감과 우울증에 쫓기는, 현대인의 독기.
"네, 성녀님. 여기 있습니다."
"내가 오라면 바로 내 옆에 서야지. 내 근위기사 아니야?"
마리나가 칸나에게 악을 쓰자 다른 원정대원들의 눈이 커다래졌다. 아무 것도 안 하던 성녀가 갑자기 패악질을 부리자 놀란 듯했다. 칸나도 어리둥절하지만 당혹스러워하며 그녀의 곁으로 갔다.
내가 마리나보다 우월한 것은 신체 반응이었다. 마리나는 바로 칸나의 머리채를 잡으려 했다. 마치 폴리곤 덩어리를 잡으려 하는 무감각한 손짓이었다. 나는 바로 마리나의 따뜻한 손을 채었다.
"가테스 황자 전하, 칸나 카라모프의 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마리나는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성녀는 마수에 대한 공격력을 제외하면 일반 여성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가테스는 급격하게 돌아가는 상황에도 냉정했다.
"전 제 부하를 이런 상관 아래에 두고 싶지 않습니다. 허락하지 아니하신다면, 제가 원정대를 나가겠습니다."
마리나는 비웃었다. 마치 성녀 앞에서 어디서 헛수작을 부리냐는 듯. 하지만, 그녀는 모른다. 내가 가테스와 함께 레이드를 다녔다는 것을. 그녀는 그저 검은나무를 내가 처치하고만 다녔다고만 알 것이었다.
가테스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테스는 효율주의자이자 제국주의자. 내가 검은나무를 추적함으로써, 나의 가치를 다시 매겼을 것이고 또 성녀가 검은나무를 피하고 다녔다는 것도 유추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선택할 건 당연히 하나였다.
"칸나 카라모프는 5분대로 다시 편제를 바꾸지."
"가테스 황자."
마리나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가테스를 휘감았지만, 가테스는 끄떡없었다.
"문제 있나?"
"하."
아침과 새벽 사이, 가장 어두운 시간대, 가장 추운 공기가 떠다니는 시간대, 싸늘한 바람이 평원을 가르고 원정대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