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마리나 스미노프 (2) >
마리나는 오만한 얼굴로 좌중을 돌아보았다. 그 한기가 드는 얼굴에 노련한 원정대원들도 살짝 몸을 떨었을 정도였다.
"뭐, 난 근위기사 필요 없으니까. 일단, 움직입시다."
명백한 하대체로 바뀐 말투. 그 변화에 다른 사람들은 적응하지 못했지만, 마리나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마리나는 이 세계를 게임 내지는 꿈으로 보고 있는 게 분명해졌으니까. 내 걱정은 이거였다.
난 가티스에게 그녀가 죽는 예언을 들었다. 그렇다면 그녀를 죽게 놔둬야 하는 것일까? 확실히 말하면 그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검은나무는 모두 제거하지 않으면 암처럼 계속 퍼진다. 내가 제거를 할 수 있고, 레이더의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그건 한정적인 것.
결국 검은나무 핵심을 처치할 건 성녀여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리나를 살려둬야 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의 생각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기도 했다.
왜냐하면 나 역시 그랬으니까. 그녀처럼 냉혹하지는 않았지만 농담처럼 이 세계를 받아들였고, 난 그걸 반성하고 있었다.
일단 그녀의 콧대를 꺾어주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그래, 움직이지. 성녀가 스스로 움직이다니 해가 서쪽에서 뜰 노릇이군."
가테스는 그렇게만 말했다. 그는 그저 검은나무를 빨리 처치하고 돌아갈 생각만 하고 있을 것이다. 이건 그에게 주어진 미션 같은 것이었으니.
마리나는 별 말도 안 하고 굳게 닫힌 입으로 진영을 옮길 준비를 했다. 원래라면 걷어줬던 천막도 알아서 자기가 잘 접었다. 그녀가 자취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는지 해체하는 손놀림이 야무졌다.
"자, 갑시다."
마리나의 호쾌한 외침으로 원정대는 어리둥절하며 움직였다. 나는 그저 마리나를 주시했다. 마리나도 이제 틈틈이 나를 보고 있었다.
입으로 뭔가 욕을 하는 것 같긴 한데, 모르겠다. 아마 내 세대의 욕이 아닐 수도 있다.
그녀는 착실히 검은나무를 따라가고 있었다. 내 강해진 레이더에도 슬슬 잡히고 있었다. 내 것이 한 구역만 감지할 수 있는 레이더라면, 마리나는 광역 레이더. 신성력의 응집인 마리나를 내가 쫓을 수는 없었다.
"자, 500M 앞에 검은 나무가 있어요. 여러분."
마리나는 마치 유치원생을 다루듯 부대원들에게 말했다. 부대원들은 이렇게 리드를 하는 성녀를 처음 봐서 그저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난 일단 성녀의 신위를 보기로 했다. 마리나는 100M 앞에서, 검은 나무의 뿌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섰다. 그녀의 몸에서 흰 빛이 뿜어져 나왔다. 흰 빛이 응집되면서 몸이 천천히 부유한다.
그 모습은 마리나의 본 모습을 알고 있는 나도 성스럽게 느낄 정도로 아름답고 품격이 있었다.
곧 그녀의 손에 하얀 빛이 뭉친다. 하얀 빛은 실처럼 그녀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손아귀에 있는 작은 공은 실이 엮이고 꼬이며 점점 큰 구체를 만들어갔다.
그에 반응해 검은 나무의 뿌리가 저 멀리서 올라오는 게 보였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가 하얀 구체를 하늘로 쏘아 올렸다. 이미 해가 뜬 아침. 하얀 구름은 빛나는 구체를 쏙 받아먹었다.
그와 동시에 하늘이 열리고, 하늘이 열린 곳에서 네이팜탄처럼 하얀 불꽃이 검은 나무의 뿌리가 있는 쪽으로 쏟아 내렸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악!"
이미 검은나무는 반 마인화까지 진행된 모양인지 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하지만 하얀 불꽃은 꺼질 생각을 안 했다. 검은 나무의 뿌리가 잠든 곳에서 땅의 갈래를 비집어가며 하얀 불꽃의 불길을 더욱 확대하고 있었다.
곧 검은 나무의 소리가 찢어질 듯한 싫은 소리가 멈췄다. 모두가 그 신위에 입을 다물었다. 모든 원정대원은 물론이요, 가테스 마저. 그만큼 압도적인 신위였다.
그녀는 별 것도 아니었다는 듯 맨 선두에서 다시 세워놓은 말로 갔다. 그 와중에 나를 스쳐갈 때, 그녀는 내게 말했다.
"별 거 아니네. 벌레 잡는 거. 고작 이런 것 가지고 쟀냐."
그녀는 침을 이빨 사이로 찍 뱉고 말에 탔다. 좀 놀았나. 칸나는 내 옆에서 성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물어보았지만, 난 말해줄 수 없었다. 성녀가 생양아치라고 어떻게 말하냐고.
"가테스, 다시 다른 곳으로 가요."
"안 쉬어도 괜찮겠나?"
"어머, 이제야 날 걱정해주는 거예요?"
마리나는 웃었다. 가테스가 살짝 민망도 할 것이다. 솔직히 성녀가 태업하지 않으면 검은 나무를 잡는 효율은 나보다는 훨씬 좋았으니까.
"됐어요. 난 마수에 한해서는 무적이니까."
"그래."
가테스는 다시 마리나 옆에 붙었다. 나는 마리나를 힐끗 보았다. 그녀는 지금 본능에 한해 움직인다. 어쩌면 소설 주인공처럼 움직이겠지.
소설 주인공의 지식은 그녀의 지식일 것이고. 내가 가장 공략하기 쉬운 상대는 역설적이게도 마리나였다. 이제 그녀의 본성을 안 이상 추파를 던지기도 싫지만.
미안하지만, 이 세계가 소설 속임을 아는 건 여전히 나 하나였고, 난 그 소설의 애독자였다.
애초에 그녀는 소설 자체도 잘 읽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소설에서 '무적'이라는 설정은 의외로 잘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서사가 무뎌지기 때문에. 물론 이 「장미꽃이 흩뿌려진 침대」에서 마리나는 반 무적에 가깝지만, 반이라는 접두사에 주목해야 한다.
그녀는 무적이 아니다. 그녀가 완전한 사람이라면, 사랑도 필요 없을 것이고 가테스도 필요 없을 것이니까. 분명 가테스가 채워줘야 할 마리나의 결핍된 점이 있어야 할 것이었다.
왜 그녀는 그걸 모르는 걸까. 생각해보면 모르는 게 당연한가. 그녀는 이 세계를 게임처럼 여기니까. 랭킹 1위가 PVE에서 죽을 거라는 생각은 보통 안 하지 않는가. 하지만 나처럼 치열한 세계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면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나라는 사람의 약점은 무엇이고, 내 결핍된 점은 무엇일까. 그녀는 지금의 스탠스를 견지한다면 절대로 그걸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난 그걸 알려줄 용의가 있다. 물론 어떻게 알려주는지는 내 자유였다.
그녀는 거의 힘을 뿌리고 다녔다. 그녀가 보여주는 신위에 난 할 것도 없었다. 원래 벌레는 한 번 잡는 게 어렵지, 두 번 잡는 건 쉽다. 그녀는 마치 RPG 게임의 사기캐같았다.
어쩌면 내가 이상한 것에 눈을 뜨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녀는 몬스터의 목에 하얀 불의 고리를 두르고 가만히 있었다. 몬스터가 결국 답답해서 움직이면 몬스터가 목에 잘리는 느낌이었다.
도대체가 깔끔하게 해결하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완전히 아이로 돌아간 것 같았다. 아이 같은 순수함이 아닌 잔혹성의 얘기다. 잠자리의 날개를 아무런 생각 없이 뜯고, 개구리의 비명을 덮는 웃음을 지으며 배를 가르는.
어쩌면 이게 그녀의 본성 아닐까? 인간의 본성은 인터넷이나 가면 속에서 드러나니까. 그녀는 지금 마리나라는 아바타를 씌운 정연서였고 게임을 하고 있었다.
"성녀, 신성력을 너무 이상하게 낭비하고 있다."
가테스는 그것을 지적했지만 마리나는 그냥 손사래를 치고 말았다.
"아, 됐어요. 도움도 안 되는 황자 전하는 빠져계세요."
가테스 황자가 이런 취급을 받았던 적이 있었을까. 당연히 없었겠지. 마리나가 마수 퇴치에는 지나치게 유능할 뿐이다.
가테스는 얼굴을 붉히며 마리나 뒤에 섰다. 그 역시 그녀의 압도적인 신위에 겸손해진 모양이다.
"아, 에퍼리 자작도 할 일 없나 보죠? 그냥 먼저 황도로 돌아가셔도 돼요!"
마리나는 가만히 있는 나한테 시비를 걸었다. 난 그저 쓰게 웃었다.
"아, 칸나 영애, 내가 미안해요. 그때는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죠?"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칸나 영애는 그래서 좋다니까. 저 꿋꿋함!"
분명히 말할 수 있지만, 마리나는 지금이 더 제정신이 아니다. 아니, 어쩌면 이게 본성일 수도 있지. 본성이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은 정말 발에 치이는 모래처럼 많이 봤으니까.
난 이제 마리나의 역량을 다 파악했다고 생각했다. 소설 속에서 그녀는 이런 상황에 마주친다.
자신의 힘을 쓰다가 안 나오는 상황. 물론 그때는 귀여웠다. 마법소녀가 왜 마법이 안 나오냐고 칭얼대는 느낌. 지금과는 많이 다르겠지.
- 앗, 이, 이게 왜 안 나오지? 가테스! 도와줘요!
약간 이런 분위기였는데. 과연 이렇게 광기를 뿌리고 다니면 가테스가 도와주기는 할는지.
"성녀님, 제가 조언하나 드려도 될까요?"
"흥, 자작 따위가. 뭐, 좋아요."
언제는 없는 작위라고 하더니. 아주 즐기는 자 모드에 돌입한 마리나는 광기의 레이서였다.
난 그녀의 귀에 살짝 붙이고 말했다.
"작작 나대세요. 그러다 뒤집니다."
"···뭐?"
마리나의 얼굴에 순식간에 악귀나찰이 됐지만 난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녀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오호호 웃었다.
"아하, 에퍼리 자작! 잘 들었어요, 정말 좋은 조언이네요!"
난 진심의 조언을 했다. 그녀는 자작을 강조하면서 나를 몰아세웠지만, 나도 그 작위가 감흥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날 아주 과몰입하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보는 모양이라 그게 모욕이 될 거라 생각한 듯했다.
나는 달을 바라보았다. 이제 달이 차고 있었다. 아주 흔한 설정이야. 난 그렇게 생각했다. 하긴 로판 작가님께서 전투에 관한 설정을 그렇게 치밀하게 짜셨을 리가 없지.
"성녀님, 대단하십니다."
"역시 성녀님이야, 신위가 대단하셔."
며칠 간 쌓아온 마리나의 신위에 대한 신뢰는 대단했다.
"흥, 당연한 거죠."
"맞습니다!"
원정대원들은 이미 마리나의 신위에 엄청난 감화가 됐다. 내가 봐도 놀랄 정도니까. 이해는 된다.
마리나는 아주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음, 아마 마리나가 주인공이면 이게 사이다겠지. 하지만 내 인생은 내가 주인공이니까, 저런 게 짜증나고 고구마다.
난 슬쩍 저 멀리 있는 칸나를 바라봤다. 칸나 역시 마리나의 힘에 감화된 모양이다. 기사가 강함을 동경하는 건 어쩔 수 없지. 그녀는 호들갑을 떠는 성격이 아니라 그저 멀리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난 칸나에게 슬쩍 다가갔다.
전투, 아니, 뭐 전투랄 것도 없다. 그저 마리나가 싸우는 걸 구경만 했을 터이니. 그래도 저녁이 되면 모래바람이 부는 곳에서 하루종일 있으면 사람이 꾀죄죄해지기 마련인데 칸나는 빛나고 있었다.
"칸나."
"응?"
갑자기 내가 다가오자 칸나는 놀랐다.
"놀랐잖아."
"놀랄 게 뭐 있어."
내가 볼 땐 더 놀랄 게 많다. 저 멀리서 마리나를 지켜봤다. 아주 가관이구만. 마치 아이돌이 된 자신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다. 내가 볼 때는, 저 자리에는 칸나도 충분히 어울린다.
이제 마리나의 볼 장은 다 봤다. 능력도 대충 다 파악했고. 어차피 알고는 있었지만.
"칸나, 너도 할 수 있어."
"뭐?"
"너도 저렇게 성녀처럼 사람한테 둘러싸여서 환호성을 들을 수 있다고."
"에이, 내가 뭘."
"가능해."
내가 볼 때는, 충분히 가능하거든. 내가 무슨 매니저도 아니지만, 칸나는 충분히 그 잠재력이 있었다.
칸나는 상징성이 있으니까.
"넌 오늘부터 나랑 수련이야."
"응? 갑자기?"
"어."
내가 말했다.
"내가 저 자리, 뺏어서 너한테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