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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55화 (55/150)

< 55화 마리나 스미노프 (3) >

내가 볼 때는, 칸나는 마리나의 완벽한 대체재가 될 수 있다. 일단, 원정대의 모든 이가 칸나를 좋아한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아저씨들이 모인 치킨집에 딸 한 명 나타나면 화기애애해지는 거. 딱 그런 느낌이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칼 대령과 동년배인 사람들이거나 더 높은 사람들, 칸나는 원정대원들에게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칸나, 어릴 때 봤는데 언제 이렇게 숙녀가 됐을꼬."

"전 이제 소령입니다."

"본인은 소장이다만?"

"아, 네. 죄송합니다."

"허허, 내가 무슨 짬으로 누르려고 하는 것 같네. 칼 대령은 잘 지내지?"

"···네, 아버지는 잘 지내십니다."

뭔가 군인처럼 꿋꿋하게 대하지만 계급에서 나오는 어쩔 수 없이 짬 차이를 못 당하는 게 귀여운 포인트다.

"성녀님이 이 귀여운 아이를 어찌 밉볼까. 난 이해할 수가 없네."

"귀여운 아이가 아닙니다. 제국군 소령입니다."

"으휴."

칸나는 바로 아버지뻘의 원정대원에게 뺨을 잡아당겨졌다. 말랑한 하얀 피부가 길게 늘어난다.

"아잇, 하지 마십시오!"

"큭큭."

나도 한 번 칸나 볼 만져보고 싶은데. 저런 이상한 노인네 같으니라고. 뭐, 칼 대령하고 절친한 사이라니 어쩔 수 없다. 어린 시절부터 봐왔겠지.

어쨌든, 칸나가 대체될 수 있는 두 번째 이유. 현재 마리나는 원정대원들에게 추앙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거리감이 있다. 왜냐하면 가끔 거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

- 거기 아저씨, 나가지 말랬잖아!

그녀의 본성은 이제 드러나고 감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가테스를 좋아하면 가테스에게 잘 보여야 되는 것 아닐까? 아니면 그녀 나름의 공략 방법인가? 나는 모르겠다.

아니, 오히려 마리나는 가테스를 홀대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한테 작게 뭐라 하는 것도, 가테스에게는 크게 뭐라고 했다. 분명, 칸나의 편제를 바꾼 뒤로 그랬으니까 그것에 대한 앙심이었다.

- 황자님! 뭐하는 거예요! 내가 할 테니까 들어가라고 했을 텐데?

- 원정대장의 할 일을 할 뿐이다.

- 당신 지금 나보다 쓸모없으니까 들어가시라니까요?

확실한 건, 그와 그녀의 관계 변화는 내가 일궈낸 것이라는 거다. 아마도 내가 없었다면 마리나는 계속 가테스에게 치근덕댔겠지.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일까. 엘파힘의 심안을 다시 띄워봐도 그녀는 가테스를 사랑하고 있다. 나는 모르겠다.

나는 내 할 일만 하면 된다. 현재 마리나의 인성 상태를 좀 만져주는 것.

"칸나는 제가 좀 데려가겠습니다."

"오, 에퍼리 자작. 혹시 칸나 소령을 노리는 건가?"

"네."

난 대충 그 아저씨의 말을 받아넘기고 칸나를 데려왔다. 지금 이미 앞에서는 마리나가 빵빵 터뜨리고 있다. 이제는 주목받는 재미까지 느꼈는지 하얀 불꽃으로 쇼도 해준다.

그래, 그렇게 해라.

"나도 구경하고 싶은데."

"안 돼."

우리는 그냥 그 하얀 불꽃을 불꽃놀이 삼아서 수련을 했다. 우리를 보는 사람은 어차피 아무도 없었다. 가테스도 마리나에게 딱 붙어서 호위하고 있었고. 내가 알려주는 건 단 한 수. 내 검술의 일부분이었다.

당연히 내 검술을 전부 알려줄 수는 없다. 그게 내 아이덴티티를 침범해서라기 보다는, 실질적으로 그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 고유스킬의 전승은 굉장히 복잡하다. 황족의 눈처럼 피를 타고 나야한다거나, 몇 십 년간의 계승 과정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니까 힘들지.

"근데 이 한 동작을 반복하는 의미가 뭐야?"

"어떤 한 순간은 영원을 책임지거든."

"뭔 소리야."

그녀는 투덜거리면서도 내가 알려주는 자세를 반복했다. 물론 발이 꼬여서 넘어질 때가 많았고, 검로는 희미할 때가 많았다.

"이런 움직임을 어떻게 따라하라고."

"할 수 있어."

내가 가진 검로의 극히 일부분이지만 어려울 것이다. 나도 그걸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을 해내야 했다. 그리고 내가 본 칸나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다시."

내 말에 칸나가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수련은 계속 됐다. 그녀는 해도 해도 나아지는 게 없다고 한탄했지만, 내 눈에는 검로가 희미하게 짙어지고 있었다.

며칠에 걸쳐 검로 하나는 완벽하게 알려줬다. 사실 검술이라는 건 참 묘한 것이다. 한 방만 잘 찌르면 이긴다. 난 그 한 방을 알려준 것이었다.

"내가 알기에는 너무 훌륭한 검법인데. 이거 네 검법이지?"

"응. 일부."

그녀 역시 검사. 내 검법의 수준을 넘겨짚을 정도는 되었다. 물론 전부를 알 수는 없겠지만.

"가끔 나는 네가 되게 궁금할 때가 있어."

칸나가 말했다. 그녀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난 당황스러웠다.

"어떤 내력을 가진 사람인지, 어떤 과거를 가진 사람인지, 어떻게 이렇게 강한지를 떠나서···"

"그, 그래?"

칸나는 당황한 나를 앞에 두고 말을 이었다.

"이런 말하는 게 무례라는 걸 알아. 원래 남의 과거는 캐묻지 않는 법이지. 귀족이라면 말이야, 내 명예가 있는 것처럼 남의 명예도 지켜줘야 하거든."

음. 난 그 말에 잠깐 고민했다. 그래, 무례라고 할 수 있지. 남의 과거를 함부로 물어보는 건 실례니까. 하지만 지구에서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래도 친해지면 그런 과거 정도는 술자리에서 얘기하고는 하니까.

그런데 이 세상은 예의와 규칙으로 그것을 막아두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이 세계에서 느끼는 근원적인 답답함도 이런 것들이 쌓여서 된 것이리라.

"아니야, 방금 말은 잊어줘. 너무 귀족답지 못했다."

칸나가 뭔가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난 거기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과거를 말하는 것도 터부가 된 이 시대에서, 그 터부를 과감히 깨부수고 싶었지만 내 과거는 정말 말 못할 것이니까.

난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여기서 연애는 할 수 있을까. 근본적인 태생이 다른 곳에서, 나는 누군가와 진심을 공유할 수는 있을까. 그런 생각들.

"미안, 내가 괜히 신경 쓰게 했지?"

"네 잘못이 아니야."

난 그렇게만 말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오늘은 보름달이 뜨는 날이었다. 나는 이 의미를 안다. 성녀는 보름달에서 힘을 못 쓴다. 마기와 가까운 음기가 가장 충천되는 날이기에 그렇다나.

아마 마리나는 이 사실을 절대 모를 거라고 생각된다. 그저 그녀는 이 말만을 믿고 있을 테니까.

- 나의 어린 아이야, 내가 말하노니 넌 마수를 두려워하지 마라. 어떤 마수도 널 해하지 못할 것이니.

여신님, 아이를 보내려면 좀 제대로 된 아이를 보내시지 그러셨어요.

나는 한탄했지만 잘못된 아이라도 이미 마리나가 여신의 간택을 받은 건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이 날은 내가 가장 경계하는 날이기도 했다.

어쩌면 가티스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날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녀가 가장 약해지는 날, 죽기도 가장 쉬운 날일 것 아닌가. 칸나에게도 안배를 시켜놨고, 나도 여차하면 나설 생각이다.

"자, 가자!"

여전히 대장놀이에 심취한 마리나는 꼴 보기 싫다. 그냥 내가 마리나가 싫어진 걸 수도 있다.

"검은 나무 전방 300M!"

마리나가 외쳤다. 하얀 검이 웅웅거리는 게 느껴진다. 그녀의 말버릇이었다. 전방에 몇 M 검은 나무.

나는 그것으로 내 하얀 검의 성능을 계속 확인하고 있다. 원래라면 300M 앞이라면 하얀 검은 울지 않았을 터다. 그러나 오늘은 하얀 검이 울고 있다.

하얀 검은 이상하게도 점점 강해지고 있다. 이 원정대에 와서부터. 곧 이 힘이 무엇인지 확인하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 정도였다.

"음?"

마리나의 당황스러운 음성이 울릴 찰나, 검은 나무의 뿌리들이 모두 땅 속으로 일제히 들어갔다. 굉장히 빠른 속도였다.

검은 나무는 모두 연결된 지성체다. 학습하는 것도 당연하다. 저 멀리서부터 하얀 불꽃을 뿜어대 반항 한 번 못해보고 불살라진 검은 나무가 몇 그루였던가.

바로 땅이 원뿔형으로 푹, 하고 솟아올랐다. 그 끝을 뚫고 나온 건 당연히 검은 나무의 마인이었다. 맨날 마인화가 되기 전에 불타오른 꼴만 보다보니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반갑지는 않았지만.

"반가운 얼굴들이 많군."

검은 나무는 원뿔의 끝에 쭈그려 앉아 둘러보았다. 그는 나를 보며 윙크까지 했다. 좀 역겨웠다.

"아, 오늘은 보름달이구나."

검은 나무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오늘만큼은 쉽게 가줄 수 없겠는 걸."

검은 나무는 그렇게 말하고 땅 속으로 다시 파고들었다. 마리나는 손을 뻗어서 목에 핏대가 나올 정도로 힘을 줬지만 나오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난 그때, 뒤에서 가테스의 비릿하게 스쳐가는 웃음을 캐치했다. 가테스는 나와 눈을 마주치고 바로 표정관리를 했지만 이미 들킨 건 어쩔 수 없었다.

그제야 난 알 수 있었다. 가테스도 마리나를 좀 교육시켜주고 싶었던 거였다. 수많은 역사서를 읽어 본 그가 보름달에 성녀가 힘을 못 쓰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마리나에게는 일부러 안 알려준 것이었다.

"자, 검은 나무가 밑으로 들어갔군. 원정대원들이 오랜만에 힘 좀 쓰겠어."

가테스가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하지만 마리나는 녹록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케이, 내가 선두에 설게요."

힘이 없는데도 선두에 서겠다는 마리나. 그래, 그러면 나야 좋지. 가테스 역시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마리나는 아직 자신의 힘을 잘 모른다. 이 세계가 게임이라면 적어도 게임 설정 정도는 다 꿰고 와야지. 그녀는 막말로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선택하는 비겁한 사람인 거다. 난 그렇게 생각했다. 자기가 유리한 상황에서는 세계고, 자기가 불리한 상황에서만 게임인 거겠지. 권리는 취하되 의무는 등한시하려 했던 것부터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 자체를 욕할 수는 없다. 모두가 그러고 싶어 하니까. 하지만, 그게 남들에게 피해를 끼친다면 문제가 되는 거다.

"자, 가자. 칸나."

칸나는 내 옆에 딱 붙었다. 원정대원들이 검은 나무 마인이 숨어든 땅 속으로 들어갔다.

검은 나무가 뿌리를 뻗은 곳은 우리에게 곧 길이 되었다. 마리나는 검은 나무의 추적만 할 수 있는 미약한 힘을 가진 상태였다. 이제 그녀도 자기의 힘이 제약됐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 터다. 하지만 그걸 내보이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오늘은 이런 것도 좋죠?"

저렇게 뻔뻔하게 말하는 걸 보면 우리는 알 수 있다. 미안하지만, 오늘만큼 마리나를 꺾을 좋은 기회는 없다.

"성녀님은 들어가 쉬시지요."

"왜요?"

"성녀의 힘이 다하신 것 같습니다만."

내 말에 마리나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잘 감추고 있었다고 생각했겠지만, 소설을 미리 읽은 나에게는 얄짤도 없다. 난 그걸 일부러 원정대원이 가장 밀집된 동굴의 입구에서 얘기했다.

"지금 저를 모욕하는 건가요?"

"음, 모욕은 아니고 사실을 말한 겁니다. 어쩌면 그 힘은 다시 복구되지 않을 수도 있죠."

난 마리나를 겁줬다. 마리나의 안색이 파리해지는 게 보인다. 물론 그렇지는 않다. 보름달에만 약해지는 것일 뿐. 하지만 마리나는 그런 사실을 모르니까.

다른 원정대원들도 그런 사실은 처음 알았는지 성녀에게로 시선이 모였다. 그건 마리나에게 굉장한 부담이 되는 듯했다.

"조금만 마수가 앞으로 나오고, 벌레만 자기 앞에 와도 화들짝 놀라시는 분이 굳이 마수가 가득한 이 동굴에 직접 들어오신 걸 보니, 성녀님의 힘이 소진되었음을 알아차릴 것만 같더군요."

내 신랄한 말에 마리나의 입이 굳게 다물어졌다. 여기까지 할까, 싶었을 때 가테스가 날 저지하고 나섰다.

"성녀의 힘은 보름달이 되면 약해진다. 그건 제국이 일부러 숨겼던 비밀이니까 제군들은 몰랐을 터. 성녀도 너무 겁먹지 마라."

"그렇군요. 전 몰랐습니다."

가테스는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으로 마치 퍽이나, 라고 하는 것 같다. 슬슬 가테스가 나에 대한 평가를 완전하게 수정했다는 걸 느낀다. 1호 경계대상으로.

그나저나 제국의 비밀일 정도로 위중한 설정인지는 몰랐다. 하긴, 성녀는 이 세계에서 완전무결한 존재여야 했다. 그 약점을 밝히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불안감을 주겠지.

내가 물러나자 마리나의 원망스러운 눈빛이 나를 쫓아온다. 분명 우리 둘만 있었으면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인 걸쭉한 욕이 한 사발로 쏟아져 나왔을 거다.

"그렇다면 호위 기사를 붙여드려야 하는 것 아닐까요? 가테스 황자 전하는 원정대의 주력이 아닙니까."

가테스는 날 무슨 꿍꿍이가 있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칸나 카라모프 소령을 호위로 추천합니다. 같은 여성이니까 불편하시지도 않을 거고. 저번에도 성녀님이 원하신 사람이니."

"아주 원정대를 혼자 쥐락펴락하려고 하는 건 성녀와 자네나 다름이 없군."

"전 적어도 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내 말에 가테스보다 마리나의 눈썹이 올라갔다. 지금 마리나는 해가 되고 있다는 걸 돌려서 말한 거니까.

"그래, 한 번 하고 싶은 거 다 해 보게. 나도 자네의 역량이 궁금한 터이니."

가테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칸나는 마치 팔려가는 사람처럼 나를 바라보며 마리나에게 붙었다. 내가 말을 안 해줘서 놀란 모양이었다.

내가 그녀에게 몰래 손으로 검로를 보여줬다. 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강한 여자야. 난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원정대를 지나고 2달 만에 원정대원들이 모두 참여하는 레이드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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