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마리나 스미노프 (4) >
"에퍼리 자작, 잠깐 이리로."
레이드가 시작되기 전, 가테스가 날 앞으로 불렀다. 그는 바로 우리 둘만 들을 수 있을 수 있는 차폐막을 쳤다. 나는 바로 선수를 쳤다.
"살살 하겠습니다."
"···음. 말귀가 너무 빠르군."
내 말과 가테스의 말은 똑같았다. 어차피 검은 나무를 같이 처치했던 동료. 서로 검은 나무의 힘 정도는 알고 있다. 솔직히 지금 나와 가테스가 달려서 뿌리만 제거해도 검은 나무는 스러질 터였다.
허나 지금 이 흥분한 원정대원들을 보라. 사실 호위가 임무인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검 한 번 휘둘러본 소드마스터들. 그야말로 몸이 달아오를 수밖에 없다. 그들은 오랜만에 활약할 생각에 마치 싸움 직전의 황소처럼 푸르릉 거리고 있었다.
"제가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가테스가 한숨을 쉰다. 골치가 아주 아프다는 표정이다. 난 좀 억울하다. 얘한테 밉보일만한 적은 없는데. 오히려 내가 막무가내로 시험 받았으면 받았지.
"어차피 너는 네 멋대로 하는 사람이니까. 알았다."
알면 왜 부른 거야. 난 대충 예의를 갖추고 떠나갔다. 5분대원들 역시 흥분해 있었다.
"분대장, 슬슬 대형 짭시다."
5분대원 중 한 명이 손을 들었다. 빨리 검을 휘두르고 싶어 죽겠다는 눈빛이다. 내가 볼 때는 이럴 때 가장 효율적인 대형이 있다.
"자, 여기서 소드마스터 미만이신 분?"
다행히 아무도 손을 들지는 않았다. 소드 스페셜리스트 정도면 내가 데리고 갈라 그랬는데. 가테스가 날 시험하려고 쌓은 1군단의 정예들이 오히려 지금 도움이 되고 있었다.
"없으면 다들 알아서 놀다 오세요. 전 신경 끕니다. 자기 목숨 하나 정도는 간수할 수 있잖아요? 조 짜시려면 알아서 짜시고."
난 자유로운 사람이야. 내 자유를 존중하는 만큼 남의 자유를 보는 것도 재밌다. 소드마스터 정도라면 상위 0.04퍼센트라고 했었지.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이 검은 나무의 마인은 몰라도, 검은 나무에서 나오는 마수들에 다칠 것 같지는 않다.
"이런 병법은 처음 보는 군."
"하지만 만족스러워."
그들은 나를 인정하긴 하지만, 솔직히 본능적으로 나오는 거부감이 분명히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건 이들의 문제가 아닌 세계의 문제였다.
난 그들과 다른 옌시 사람으로 취급되었고, 귀족 작위를 받은 지 한 달 즈음 된 사람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들을 부리려면 더 부릴 수 있다. 왜냐하면 나도 레이드를 한 두 번한 게 아니니까. 그래도 이들에게는 좀 자유롭게 풀어줄 수 있는 게 필요했다.
"그러면 저도 갑니다."
나는 성녀 옆에 붙어있는 칸나를 일별했다. 잘하라는 뜻의 눈짓을 보냈다. 그녀는 날 보지도 못하고 내 검로를 손으로 작게 연습해보는 중이었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자세. 아주 기사의 귀감이다.
"자, 이제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가볼까."
콰콰콰쾅!
나한테만 들리는 커다란 소리. 나도 차폐막을 쳐서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게끔 해놨다. 원래 모든 건 직선거리가 빠른 법.
난 뿌리를 먼저 만나러 가야 했다.
"이봐, 오랜만이야."
"안녕."
검은 나무의 뿌리, 나는 이 자식을 잘 모른다. 왜냐하면 말을 하는 건 소설 속에 안 나왔기 때문에. 난 일찌감치 직선로를 파서 그와 마주했다.
"바깥이 시끄럽군."
"응. 아마 친구들이 올 거야."
"그래서?"
"오늘은 내가 널 없애진 않을 거고."
그걸 증명하기 위해 핵심 앞에서는 스킬을 끄고 왔다.
"그래, 왠지 오늘은 투기가 없군. 나도 그래서 마기를 축적중이다."
같은 지구인은 미친놈이고, 다른 사람들과는 보이지 않는 벽을 느끼고 있는 가운데 은근히 말이 통하는 놈은 검은 나무였다. 내가 빌런하고 이렇게 말을 많이 나눌 상대가 될 지는 몰랐지만.
"오랜만에 말 좀 하게 두려나? 난 호사가라서, 말을 많이 하는 걸 좋아하거든."
"나야 환영이지. 물어볼 것도 있고."
"오호, 이방인이 질문이 있다라. 그건 또 안 들어줄 수 없지? 요즘 성녀 때문에 말을 안 한지 꽤 돼서 말이야. 너랑 할 때는 그래도 한 마디씩 섞었는데."
검은 나무 마인은 낄낄 웃었다.
S급 헌터인 나를 이렇게 대화받이 취급하는 것도 다 마리나의 사기적인 능력 때문이다. 나는 어처구니 없어서 웃었다.
"성녀가 강하다는 건 알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래. 뭐가 좀 이상해?"
"유도심문을 하는 구나. 굳이 안 그래도 다 말해줄 의향은 있다."
검은 나무 마인은 대체 무슨 생각일까.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에서 가장 지식이 많은 사람은 가테스 황자도, 리얀 황녀도, 황제도 아니었다.
바로 이 검은 나무 마인의 존재였다. 제국의 원죄라는 이름으로 퍼져있는 검은 나무. 검은 나무의 마기가 도를 넘어 축적이 되면 '악마'가 나타난다고 한다는 설정이 있다. 각 제국들도 그 나름의 업보가 있고.
옆의 제논 왕국은 아마 화산지대일 텐데, 주기적으로 활화산들이 미칠 듯이 활동할 때가 있다고 한다. 그걸 진화(鎭火)하지 않으면 멸화(滅火)가 된다고 하고. 뭐, 소설 속에서는 나오지 않는 설정놀음이다. 아, 물론 결말까지는 내가 다 안 봤기에 악마가 나오는 지는 모른다.
근데 마리나는 중반부에 검은 나무를 일찌감치 처치하고 타 제국과의 싸움에 휘말렸으니까.
"그래. 나를 이용해봐라. 나는 역사의 호수이니, 네가 겁먹지 않을 만큼만 발을 집어넣어라. 아니면 네가 역사에게 잡아먹힐 수 있나니."
"나는 이방인인데?"
"아하. 그렇군. 내가 말을 잘못했어. 역사도 아는 자에게 의미가 있고 무겁지. 자네에게는 무서움이 없겠군."
검은 나무는 흰 선으로 그려진 입을 길게 늘어뜨렸다.
"그래, 무엇이 궁금한가?"
"이 하얀 검은 뭐기에 성녀가 가진 힘의 편린이 있지?"
난 하얀 검을 들이밀었다. 전에는 가테스와 같이 있어서 못 물어봤었다. 난 어쩐지 믿음이 있었다. 검은 나무 마인이라면, 어쩐지 내 말을 들어줄 것 같다는.
"백천을 모르는가?"
"모르지."
"음, 그렇군."
검은 나무 마인은 웃었다. 어떡하냐면 그걸 모르냐는 식이다. 하지만 내가 볼 때는 가테스도 모르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내가 그와 같이 레이드를 잠깐 뛰었을 때도 아무 반응도 없었으니까.
굳이 따지자면, 날도 없는 검을 뭐하러 들고 다니냐고 묻기는 했었다. 가테스는 애초에 말이 별로 없어서.
"네가 손에 들고 있는 건 무기가 아니야. 의식용 검이지. 칼날만 봐도 모르겠나."
검은 나무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렇긴 한데. 마나 전도율은 좋아서 검으로 쓸 법도 한데.
"요즘 시대 사람은 백천을 모를 수도 있겠군. 넌 이방인이니까 특히 그렇겠고. 역사와 함께한 나만이 알고 있을 수도 있겠구나."
"백천이 뭐하는 검인데?"
"네가 직접 사용해보면 알 것이다."
"사용하고 있잖아?"
"아직은 힘이 덜 찼다."
이 정도면 거의 걸어 다니는 도서관에 전자사서까지 붙어있는 격이다. 친절하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다. 빌런이 아무리 주절거리면서 정보를 얻는 게 클리셰라고 해도 좀 노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힘?"
"신성력이다."
아주 부는 데로 말해준다. 모든 범죄자가 얘와 같다면 경찰들이 고생할 필요도 없겠다 싶었다.
"그러면 얘기가 되네. 신성력과 검은 나무의 마기는 상충한다고 했으니, 내 검이 반응할 수 있는 것도 말이 되네."
나는 추리를 시작했다. 난 더 궁금한 걸 물어보기로 했다.
"그러면 내 몸에 신성력이 쌓이는 건가? 원래 처음에는 검은 나무에 반응하지 않았는데."
"성녀랑 같이 다니잖나? 성녀한테서 흡수한 거지."
나는 눈을 살짝 찡그렸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그때, 쾅! 소리가 들렸다.
"아주 재밌는 소리들을 나누고 있군."
···가테스. 왜 몰랐지?
아, 스킬 끄고 있었지. 미친.
마리나는 분노했다. 자신을 기만한 에퍼리, 아니, 주환영이라는 미친놈 때문이었다. 자신이 볼 때는 알고서 겁준 게 분명했다. 미친 씹덕 같으니라고.
"성녀님,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됐어요. 어차피 당신이 여기서 제일 약하잖아."
칸나의 말에 마리나는 손을 도리도리 저었다. 그 모욕적인 말에도 별 다른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이 진짜 NPC 같았다. 머리채라도 잡아볼까. 아니다, 그 정도까지 하기는 싫었다.
"하여튼, 여기 있는 놈들은 다 나사가 빠져있어."
마리나는 짜증을 냈다. 가테스도 갑자기 볼 일이 생긴 것 같다며 잠깐만 자리를 비우겠다고 했지. 가만히 있으라고. 그는 자기가 성녀의 힘을 잃으니까 다시 오만해졌다.
그때, 자신이 얼마나 모욕감을 느꼈던지.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고? 이딴 곳에서 살아남아주는 것만으로도 의무를 지키는 것이 아닌가? 대체 사는 것 이외에 무슨 의무가 있는 거지? 마리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주환영의 외침이 떠올랐다.
- 그럼 너는 왜 가테스를 사랑하는데?
자신이 가테스를 사랑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냥 반반하니 옆에 두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런 세계에서 무슨 진심으로 사랑할까, 딱 봐도 모태솔로 같이 생긴 게 사랑을 알기나 할까. 쯧.
그녀는 자신의 내부에 맥동하는 힘을 느껴보았다. 확실히 약해져있다. 하지만 한 방 정도는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실 화력을 너무 낭비한 것 같기도 했다. 좀만 비축해둘 걸 그랬나.
아니, 그 주환영이라는 놈이나, 가테스나 보름달에 자신이 약해지는 걸 알면 좀 알려주지.
"하여튼, 쌍으로 열받네."
"네?"
"아, 됐어요. 혼잣말이니까."
그나저나 칸나라는 사람은 왜 이렇게 예쁜 건지. 솔직히 이 사람은 좀 괴롭히고 싶다. 반응이 없는 것 같으면서 있으니까.
- 그래도 여기 있는 사람들은 사람이야. 네가 그렇게 취급할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지랄도 그런 지랄이 있나. 마리나는 생각하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쿵, 쿵, 쿵!
그때, 벽들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그건 저 멀리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리나와 원정대원이 있는 동굴 입구의 천장이 흔들리고 흙이 떨어졌다. 칸나가 제일 먼저 긴장한 듯이 검의 기수식을 취했다.
마리나의 호위를 맡은 호위기사들도 검을 들었다. 마리나는 별 것이 아닌 줄 알았다. 어차피 가테스도 자신을 놔두고 갈 정도이기도 했고, 여기는 동굴의 입구니까.
그렇지만 벽의 흔들림이 강해지고, 무엇보다 소드마스터인 원정대원들의 표정이 먼저 굳고, 그 다음엔 칸나가 굳었다.
쿵.
그리고 그들 바로 앞에 있는 벽이 무너졌다. 벽에 있는 촉수는 바로 다가오지 않았다. 마치 해바라기의 꽃잎처럼 펼쳐져 있는 수많은 촉수 같은 뿌리들.
마리나는 짐작했다. 저건, 강하다.
"···"
뿌리는 가만히 있다가 자신들끼리 꼬았다. 마치 하나의 구체를 만들 듯.
그 다음, 순식간에 펼쳐 괴물의 입 형상을 만들었다.
"카아아아아아아아악!"
뭉친 촉수를 마치 두 손바닥을 펼치듯 뻗어내는 사이, 흰색 페인트로 그려진 듯한 검은 나무의 얼굴이 비명을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