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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57화 (57/150)

< 57화 마리나 스미노프 (5) - 여기까지 무료였습니다. >

"너의 몸에 추적 마법을 달아놨지. 네가 도대체 어떻게 움직일지 알아야지. 그렇다고 검은 나무랑 이렇게 친근하게 대화하는 걸 볼 줄은 몰랐는데."

난 그런 걸 감지하는 스킬이 없나. 하긴 여기 스킬은 약간 마법과도 같다. 헌터는 무투파에 가깝고. 내 세계는 그나마 현실적이어서, 디버프를 걸고 하는 건 없었다. 마법 같은 것도 없었고. 그저 마나만 있었을 뿐.

난 혹시나 해서 물었다.

"설마 반역죄의 범주에 들어갑니까?"

"아니, 이런 건 말도 안 돼서 법령으로 지정도 안 해놨지."

"그러면 무죄입니다."

"···너야 원래 상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가테스가 침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볼 때는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 검은나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 둘째, 네가 검은나무를 추종하는 검은무리다. 셋째, 검은나무가 바보다. 하지만 검은나무는 역사를 함께 한 지성이니 바보일리는 없다."

가테스는 날 노려보았다. 이 상황이 그렇게 추리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난 그제야 알았다. 하긴, 너무 검은나무가 친절하게 주절거리기는 했다.

내가 뭐라 변명하기도 전에 검은나무가 낄낄 웃었다.

"어린 영웅아, 네가 내 생각을 따라잡을 생각마라. 너희 족속들은 필연적으로 나보다 멍청하니."

"뭐라?"

가테스가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 자기가 멍청하다는 소리도 살면서 처음 들었을 거다.

"다만, 난 내가 말해주는 게 나한테 도움이 되어서 그런 것이다. 너무 착각하지 말도록."

"그런 정보를 다 퍼주는 게 너한테 도움이 된다고?"

내가 물음을 표했지만 검은나무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 비틀린 웃음에 본능적인 불쾌감이 확 치밀어 올랐다.

"그래. 언젠가는 알게 될 터이니."

"그래. 언젠가는 알게 될 거면 굳이 지금 알 필요는 없다는 말이지 않은가."

내가 무어라 검은 나무에게 대답하기도 전에 가테스의 검극에 금색 원이 뭉쳤다.

"아니, 황자 전하!"

더 물어볼 게 있는데. 이왕 물어보는 거면 끝까지 들어야지.

하지만 가테스는 가차 없이 금색 마나를 둘러 싼 환(環)을 검은 나무의 얼굴에 날렸다. 금색 마나구체는 검은 나무의 얼굴에서 사라지지 않고 얼굴 앞에서 빠른 속도로 비비고 들었다.

곧 커다란 원심력에 의해 분해된 듯 검은나무의 얼굴이 조각조각 나 동굴 여러 군데로 파해됐다. 피나 내장이 없어서 망정이지, 만약 검은나무가 그런 존재였다면 굉장히 잔인한 광경이 됐으리라.

"사특한 말을 듣지 마라. 여신님은 검은나무의 간사한 입을 믿지 말라고 했다. 여신님이 이르시되 검은나무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곧 검은무리가 되나니."

가테스가 차갑게 말했다.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 줄은 몰랐다. 이 제국에는 내가 모르는 원칙들이 많았다.

"복귀한다."

가테스가 말하고 눈을 살짝 움찔거렸다. 왜냐하면 기시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역시 내가 느낀 것과 같은 기시감을 느꼈던 거다. 난, 아주, 오래 전부터 느낀.

"이런."

나는 가테스가 바라보는 곳을 똑같이 바라보았다. 우리를 둘러싼 벽에는 균열이 좀 나있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검은 나무가, 하나 더 있었다. 하얀 검이 계속 웅웅거리고 있었다.

마리나는 혼란스러웠다. 딱 봐도 심상치 않았다. 원정대원들은 기세를 피어올리고 있었다. 옆의 칸나라는 여기사도 마찬가지였다.

"성녀님, 바깥으로 피해계십시오!"

"안 나가면 위험해 집니다."

"빨리 나가십시오!"

원정대원들은 자신을 보면서 그리 말했다. 참으로 웃기는 노릇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추앙하기도 바빴던 사람들이 이제는 애물단지 취급인가.

적어도 그녀는 이런 세계에서까지 할 말을 못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지구에서는 모두가 그렇듯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의 반수는 자신의 목구멍 안에서 폐사된다. 아르바이트를 할 때, 자신의 엉덩이를 남 몰래 만지고 아닌 척하던 할아버지를 말할 때도 그랬고, 사장이 일부러 하루치 월급을 빼고 준 걸 알았을 때도 무던한 척 넘어갔다.

자신은 소심한 바보였다. 이제는 안다. 이타적인 것과 바보적인 것의 차이를. 소심함과 착함의 차이를. 그 차이를 죽어서야 깨달았다.

"됐어요. 나도 그렇게까지 약해진 건 아니에요."

"성녀님?"

옆에서 누가 쫑알거린다. 듣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저희한테 맡겨주십시오!"

"나설 때가 아니십니다. 약해지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설 때라. 사실 나서는 게 무리라는 건 안다. 자신의 힘은 많이 미약해진 게 사실이니까. 하지만,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시원하게 살아볼까. 언젠가, 막무가내로 살아보고 싶었다.

왜냐하면 막무가내로 살면 손해 보는 건 자신이 아닌 타인이니까, 그 피해를 끼치는 기분은 어떤지 궁금해졌다. 이들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반응은 사람 같으니까.

"자, 갑니다."

"성녀님!"

마리나의 손에서 미약하지만, 하얀 불꽃이 실처럼 뻗었다. 하얀 불꽃의 실은 검은 나무의 얼굴을 올가미처럼 드리웠다. 그 다음, 마리나는 확 하얀 불꽃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끌어왔다.

화륵!

타는 냄새가 나며, 연기가 자욱하게 펼쳐졌다. 단순한 화기가 아니었다. 신성력과 마기가 부딪쳐 올라오는 연기였다.

마리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방금 엄청난 민폐를 끼쳤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저 연기 안에서 꿈틀거리는 마기가 해치워졌을 리가 없다는 사실을.

시야가 순간 가려진 건, 원정대원들에게 큰 방해였다. 물론 시각 이외에 많은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역시 시야는 무시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한 순간 차단된 시야에서 원정대원들은 갈피를 잃었고, 그때 연기를 확 걷어지면서 모든 뿌리가 날카로운 창의 형상을 하면서 마리나에게 들이닥쳤다.

"읍!"

마리나는 그저 비명을 삼켰다. 앞에 트럭이 빠른 속도로 달려오면 빠르게 피해야 한다고 다들 생각은 하지만, 모두 몸이 굳어서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한다. 그녀는 몸이 단련된 사람이 아니었다.

좌우로 넓게 펼쳐져 있는 원정대원들의 칼이 급격하게 마리나를 보호하려고 들이닥쳤지만, 당사자인 마리나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늦는다.

"성녀님!"

원정대원들의 소리가 먼저인가, 자신이 죽는 게 먼저인가. 마리나는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죽음을 구경하기로 했다.

챙!

쇠끼리 부딪치는 날카로운 파열음, 허나 그녀의 얼굴을 간지럽힌 건 짧은 금색 단발이었다. 뒤에서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꼿꼿하게 굳어있었다.

그녀의 앞을 지킨 건 순식간에 나타난 백금발의 여기사였다. 마리나는 말했듯, 그녀를 에퍼리를 조종할 도구로써 가져온 것이었다.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칸나 카라모프 소령. 얼굴은 반반하고, 표정은 꼿꼿하다. 하지만 에퍼리랑 있을 때는 꽤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는 사람. 그게 마리나에겐 그리 고깝지 않았다. 특히 에퍼리와 척이 진 이후로는 더.

"···칸나?"

원정대원들이 얼빠진 목소리로 외쳤다. 칸나라는 여기사는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또 다시 들어오는 뿌리의 공격으로서 성녀를 지켰어야 했으니까.

그녀는 기묘한 곡예와 닮은 움직임을 보여주며 뿌리의 움직임을 막아냈다. 분명 그녀의 움직임의 뿌리는 하나였다. 마치 그렇게밖에 스텝을 못 밟는 듯.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뿌리의 여러 방위로 들어오는 공격을 모두 쳐냈다.

눈을 찡그리면서 집중을 하는 칸나라는 여기사의 모습. 마리나는 그것을 뒤에서 보고 있었다. 정말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 모습은 멋있었다.

마리나의 이만큼 생각한 건, 현실에서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이제 우리한테 맡겨라, 칸나!"

원정대원들이 자세를 지키고 마리나를 지키고 섰다. 마리나는 얼떨떨해 했다. 아직 놀란 가슴이 덜 가라앉았을 때, 모든 분위기를 차갑게 하는 기운이 땅에서부터 올라왔다.

이 느낌은.

"그럴 필요 없다."

옆면의 벽을 뚫고 나온 가테스 트라프비체가 원정대원이 구축한 진영을 순식간에 스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애초에 알고 있었다. 여기에 검은 나무가 두 그루였다는 것을. 이렇게 꼬일 수도 있나보지. 마기에 감응하는 것이 두 갈래였던 거다.

내가 이 상황을 이용할 수 있었던 건 달에 한 번뿐이었다. 보름달로 마기가 강해져서 추적하기가 힘들고, 마리나의 힘이 강하지 않을 때.

난 여유롭게 가테스를 따라왔다. 이미 검은 나무의 얼굴은 뭉개져서 그저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성녀, 제정신인가?"

이미 가테스는 마리나를 뭐라 하고 있었다.

나도 알 수 있었다. 마리나는 검은 나무와 극히 가까웠다. 여기 있는 원정대원들은 프로들. 이렇게 무리하게 전진 진영을 짤 리가 없었다. 특히 성녀 같은 중요 호위대상이 있을 때는.

이건 성녀의 무리라는 게 뻔히 드러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걸 감싸는 건 칸나였다.

"괜찮습니다. 성녀님은 지켜지셨지 않습니까."

그제야 칸나에게 가테스의 시선이 옮겨갔다. 저것까지는 생각 못했는데. 칸나는 알아서 득점을 하고 있었다. 저건 약은 게 아니었다. 저건 그녀의 천성이었다.

"칸나 소령. 팔이 긁혔군."

난 충분히 생각했다. 내가 검은 나무를 몇 번이나 상대하면서, 이 정도만 되어도 1분 정도는 막을 수 있다고. 당연히 이길 수는 없고. 아마 1분이면 나나 가테스가 도착할 수 있을 충분한 시간대이니.

"칸나, 대단하다! 정말 신묘한 검술이었어!"

"최소 소드 스페셜리스트 3은 되는 것 같은데, 등위 시험을 다시 봐야 하는 것 아닌가?"

"새로운 천재가 나타났군! 칼 대령이 아주 기뻐하겠어!"

중년 원정대원들은 칸나를 칭찬했다. 칸나는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굳은 얼굴을 풀었다.

"아닙니다. 좋은 스승이 있었을 뿐입니다."

"누구?"

"에퍼리 자작입니다."

칸나. 눈치 없기는. 난 바로 손을 저었다.

"그냥 한 마디씩 해준 겁니다. 이런 상황을 막은 건 오롯이 칸나 소령의 몫입니다."

"그건 맞지."

"칸나, 너무 다른 사람에게 공을 돌리지마라! 명예는 나눠가지면 가질수록 커진다지만."

칸나는 내 말에 졸지에 겸손까지 떤 사람이 되었다. 그 후로 칸나에 대한 칭찬은 계속됐다. 검은 나무의 뿌리가 사라져 동굴이 무너지고, 모든 대원들이 모였을 때도 그 칭찬은 멈추지 않았다.

"뭐, 칸나가 그런 대견한 일을 했다고?"

"솔직히 이번 원정에서 활약할 줄은 몰랐는데."

"대단하군. 칼 대령이 딸을 정말 잘 뒀다는 게 사실이었어."

칸나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오는 칭찬에 부끄럽다는 듯 내 옷소매를 슬쩍 잡았다. 나는 조용하게 물었다.

"어때, 기분 좋지?"

"아니. 부끄러워. 이게 네가 원한 거야?"

"응."

그때, 가테스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마리나의 곁에서, 칸나 쪽으로.

"잘했다. 칸나 소령."

그는 그 한 마디를 남기고 획 돌아가 버렸다. 칸나는 조금 더 부끄러워진 모양이다. 나는 물었다.

"지금은 기분 어때?"

"···나쁘지 않아."

솔직하지 못하긴. 부끄러워하는 칸나의 표정을 보는 것도 즐거웠지만, 저 멀리서 홀로 구겨진 표정을 짓고 있는 마리나의 표정을 보는 게 더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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