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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58화 (58/150)

58화 리바이어던 (1)

그다음부터 칸나를 향한 감싸고도는 상황은 더 심해졌다. 원래 이런 법이다. 기대를 하지 않았던 사람이 기대 이상을 보여 주면 그 차이만큼 기특한 법.

물론 성녀에 대한 존중심을 다들 가지고 있지만, 원정대원들이 보다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건 칸나였다.

"칸나, 이것 좀 더 먹어라."

"아뇨. 괜찮습니다."

"칸나, 힘들지 않느냐? 내가 대신 마차 몰아 주랴?"

"괜찮습니다."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화기애애했다. 원정대원들은 성녀가 엄청난 신위를 보여 줬을 때도 시답잖은 걸로 말을 걸지 못했으니까. 칸나는 내가 볼 때 사람을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매력이 있었다.

딱딱한 껍질 안에 있는 너무 말랑말랑한 속살이랄까. 기본적으로 얼음으로 점철된 기사의 얼굴이지만 좀만 간질이면 얼굴을 깨고 부끄럽다는 표정을 짓는 칸나는, 원정대원 모두에게 미소를 짓게 했다.

"이것도 인연인데, 원정대원들이 다 같이 칼 대령 영지로 가서 회식이라도 해야겠어."

"아니, 그건 좀 부담스럽습니다."

"부담스러우라고 가는 거야."

원정대원들은 칸나를 놀리며 큭큭 웃었다. 칸나는 그저 아무 말도 못 했다. 기분 나쁜 놀림은 아니었기에 나도 그냥 보고만 있었다.

그나저나 엄청 불편하겠네. 칸나의 아버지는 대령인데,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엔 준장, 소장이 즐비하다. 다 가면 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칸나도 그 고민을 하는지 얼굴이 팍 굳었다.

다채로운 표정 변화는 칸나를 놀리는 주요 원인이었다.

"에이, 우리도 바쁜 사람인데 설마 칼 대령 영지에 모일 시간이나 있겠어?"

"맞습니다."

칸나가 표정을 확 풀며 동의했다. 그녀는 진짜 고민했던 모양이다. 내가 볼 때는 1군단이 해체되지 않는 이상 칼 대령의 영지에 이 사람들이 다 모이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도 다 은퇴하고는 모일 수 있겠지."

"…아."

칸나의 표정이 다시 굳고, 원정대원들은 크게 웃었다. 그만 놀려라, 아저씨들아.

나는 마차를 슬쩍 보았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하면 할수록 고립되는 건 마리나일 것이다. 그녀는 애초에 이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으니까.

지금까지는 그게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들이 인간적인 면모를 보인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

인간적인 면모는 개인적인 교류에서 나온다. 지금의 부대는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칸나라는 구심점이 있기에, 모든 분대가 스스럼없이 친해지고 대화를 나누고 활기를 띠고 있었다. 가테스도 그걸 딱히 막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저 이렇게 분위기가 화기애애할 때 내게 스윽 다가와 한마디 물어봤을 뿐이다.

- 이게 자네의 전략이었나?

난 아무 말도 안 했지만, 그는 다시 떠나갔다. 무슨 의도로 한 질문인지 몰라서 가만히 있었던 것뿐인데, 알아서 납득을 했거나 이미 확신을 하고 질문을 한 거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 이후로도 토벌은 계속해서 쉽게 진행됐다. 마리나도 힘을 되찾았고, 그녀는 기계적으로 검은 나무를 불태웠다. 물론 예전만큼 마리나에게 관심이 돌아가지는 않았다. 원정대원들도 그저 마리나가 할 일을 하고 있다 정도로만 인식하는 느낌이었다.

하긴, 화려한 건 한 번 봤을 때나 소름이 돋지, 두 번 보면 그냥저냥 감흥이 없다. 원래 곱씹어도 맛있는 게 진짜 맛있는 음식이다. 자극적인 건 금방 질린다. 원정대원들은 칸나를 놀리는 재미에 푹 빠져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었으니.

특히 같은 분대원인 5분대원들은 칸나를 놀리는 데 거의 혈안이 되어 있다고 해도 모자를 정도였다.

그럴 때면 칸나는 내게로 도망쳐 오고는 했다.

"에퍼리, 너는 분대장이니까 막아 줘야 할 의무가 있다."

싫은데. 나도 놀리는 건 보기 좋은데. 칸나의 울상은 왜 이렇게 보기 좋은지. 소설에 나오지 않는 장면을 만들다니, 괜한 뿌듯함이 올라온다.

마리나는 오늘 치 검은 나무를 처치하며 우리 쪽을 아주 고깝게 바라보았다. 내가 눈을 맞춰 주자 그녀는 똑같이 눈을 마주하며 날 노려보았다.

원정대원들이 우리의 눈싸움을 눈치채자 우리는 동시에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마리나가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가는데, 어쩐지 힘이 없어 보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할까. 삶을 삶이라 생각하지 않고 있고, 게임처럼 외부의 칭찬이나 관심 같은 것이 마리나를 유지하고 있는 생명이었으니.

이제 마리나는 어떻게 나올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회군해요."

마리나의 행동은 아주 빨랐다. 원정대원들이 다 모인 아침점호 시간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삐죽삐죽 솟은 금발이었지만, 잠을 설쳤는지 더욱 산발이 되어 있었다. 물론 그 아름다움을 감추지는 못했지만.

"무슨 소리지?"

"회군이요, 회.군. 황도로 돌아가서 좀 쉬고 싶어요."

그 말에는 모두가 아연했다. 지금 성녀는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리나는 막무가내였다.

"내 힘도 점점 떨어져 가는 게 느껴져요. 제국의 땅을 설마 한 번에 다 돌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지금도 느껴지는 검은 나무가 너무 많다고요. 저희가 지금까지 처치한 것보다 최소 두 배는 더 처치해야 해요."

마리나는 나름 논리적인 근거를 내세웠다. 하지만 그 논리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보름달을 제외하면 성녀의 마력은 거의 무한하다고 알고 있을 테니까. 나 역시도 그렇고.

"성녀, 단순히 쉬고 싶다면 근처 영지에서 여독을 푸는 것도 나쁘지 않다. 굳이 황도까지 돌아갈 이유가 있는가?"

"황도가 편해요. 좀 쉬게 해 줘요. 날 언제까지 부려 먹을 셈이에요?"

가테스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사실 이 원정대에는 큰 결함이 있었다. 성녀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는 만큼 성녀가 없으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내 하얀 검은 검은 나무가 근처에 있을 때만 반응할 뿐, 성녀처럼 제국 전체를 추적할 정도는 안 되는지라 성녀가 빠진다면 우리의 원정도 무산될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쯤 돌아가는 게 맞기는 하다. 왜냐하면 원작에서도 세 달 동안의 원정만을 마치고 돌아가니까. 한 두 개 에피소드 정도? 물론 꽁냥거리는 게 주 에피소드지만.

그렇지만 내게 더 이상 원작을 따질 이유는 없다. 사실, 이제는 안 따라가도 그만이다. 그렇게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원정대장의 천막 깃발이 강한 바람을 맞은 듯 펄럭펄럭 움직였다. 다른 천막은 흔들리지 않았다. 바람도 없었다.

저 움직임은, 황도로부터의 긴급 호출이었다. 가테스는 황도와 계속 통신을 나눌 수 있는 장치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잠시 다녀오겠다."

가테스는 휘리릭 사라졌다. 원정대장 천막의 문이 펄럭였다. 원정대원들이 웅성거릴 틈도 없이 가테스는 냉정한 표정으로 바로 나왔다.

"회군한다, 당장. 자세한 건 돌아가면서 설명해 주지."

이건, 또 무슨 일일까.

설명할 틈도 없이 회군이라. 이건 원작대로의 흐름을 만들려는 세계의 억지력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볼 때 이 세계는 작위적이다. 그 증거는 명확하다.

내가 있음으로써 검은 나무의 수가 많아진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보통 세계의 핵심적인 부분은 명확한 인과관계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 나쁜 짓을 하면 천벌이 내린다라는 말이 있지만, 언제 나쁜 놈들이 지나가다 벼락을 맞던가.

이 세계는 적어도 웹 소설의 법칙을 따르고 있다. 강함의 균형.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설마, 이것도 내가 있기 때문에 작위적으로 생겨난 일인 것일까? 아니면 원래 이 세계가 이따위로 생긴 것일까? 알 수 없었다.

"황도에만 지진이 나고 땅의 균열에서 열기가 피어오른다는군."

이건 또 무슨 상황일까. 난 이런 전개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마리나도 마찬가지로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하필이면 황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때."

가테스는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머리가 아프다는 모양새다. 원래 게이트나 마수는 급작스럽게 나타난다. 나는 그렇게 당황스럽지 않았다. 왜냐하면 헌터의 세계에서는 이런 게 일상적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이 세계에서는 정상적인 건가? 그건 알 수 없었다.

'이 세계에는 내가 아직 모르는 게 많다.'

난 경계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 세계를 이상하게 돌아가게 하는 무언가, 악의라고 불릴 법한 것이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아이리 라피테스는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안대를 벗지 못하고 있었다. 의사의 말로는 나을 때가 됐다고 하는데, 계속 눈에서 통증이 가라앉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어쩌면 자신의 눈이 실명할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에퍼리가 열심히 해 주었지만, 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녀의 명예는 지켜졌으니까.

"오늘 아일린 후작 영애가 2시에 방문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알아."

그녀는 사교계의 유명 인사였다. 공녀로서 모든 책임을 다하고 눈까지 다친 아름다운 소녀. 그녀와 친해지고 싶지 않은 사교계의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그녀와 등위 시험 대련에서 갈등을 빚은 아일린 후작 영애 측에서도 교류를 청해 올 정도였으니까. 다른 영애들과 달리 아일린 후작 영애가 무슨 말을 할지 아이리는 궁금해졌다. 그때 그녀는 자신에게 뭔가 억하심정이 있는 듯했지.

근데 오면 무슨 말을 할까. 아이리는 시계를 바라봤다. 1시 30분. 30분이 왜 이렇게 안 가는지 모르겠다.

"공녀님, 오늘은 스물두 개의 연서(戀書)가 들어왔습니다."

"다 찢어. 어차피 의미 없어."

아이리는 무심하게 말했다.

이렇듯 그녀에게는 구애도 많이 들어왔다. 하지만 연애는 아버지인 라피테스 공작이 하지 말라고 했다.

그녀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예프린이 도망쳤으니 자신이라도 공작으로 만들려는 것이겠다. 아니면 적어도 라피테스 공작의 눈에 드는 사람과 짝을 맺어 주겠지. 공녀란 그런 사람이니까.

아이리는 그게 원망스럽지 않았다. 사실 처음에는 꺼려졌다, 자신의 인생이 그렇게 휘둘린다는 사실에. 하나, 그녀는 그렇게 아버지에게 반항할 때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의무는 회피될지언정 없어지지는 않는다고. 결국 그 굴레는 하나뿐인 동생 예프린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귀여웠던 예프린의 말수가 적어진 건 자신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그녀는 그래서 이번에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의무를 회피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고, 공녀님! 지금 황도에서 비상이 울렸습니다! 모든 귀족 저택은 방호벽을 가동하라고 합니다!"

그녀는 시녀의 외침과 동시에 땅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땅의 흔들림은 곧 멎었지만, 튼튼하게 지어진 공작저의 물건들이 떨어져 유리 공예품들은 이미 구르고 깨진 뒤였다.

"뭔가 있긴 한가 보구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계를 보았다. 한 시 사십 분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저택의 지하로 가서 마력구를 만졌다. 커다란 마력이 수도 공작저를 보호하는 게 느껴졌다. 이제 어떤 흔들림에서도 공작저는 무사할 것이다.

"아일린 후작 영애의 마차가 빠졌을지도 모르겠는걸."

그녀는 연무장의 균열이 난 땅을 툭툭 치며 말했다. 시녀가 그녀에게 달려왔다.

"공녀님, 안쪽으로 들어가시죠. 모두에게 외출 금지 권고가 떨어졌습니다. 방호시설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아이리는 생각했다. 아일린 후작저는 같은 수도에 있다고 하지만 멀다. 그녀는 지금쯤 자신의 집에 거의 도착했을 터다. 그렇다면 돌아가기도 뭐할 터.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니.

"넌 들어가 있어."

아이리는 생각을 마치고 경장과 검을 챙겼다.

"난 잠깐 나갔다 올게."

"공녀님! 외출 금지 권고라니까요?"

"그냥 권고잖아."

아이리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손님을 맞는 건 주인의 의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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