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리바이어던 (2)
황도에서 벌어진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원작에는 없던 일이었다. 황도 자체가 위협을 받은 적도 소설에는 없다. 황도는 원작의 주요 배경이다. 로맨스 판타지에서 주요 배경이 위협받는 건 흔히 있는 일이 아니다.
오묘한 건, 그녀가 원작에서 원정에서 돌아왔을 때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세상의 규칙 같은 게 있는 것일까.
이 세계가 마리나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걸까? 아니면 내가 새로운 중심의 축이 되어 재앙을 불러오는 것일까?
"에퍼리."
칸나가 갑자기 말을 붙여 왔다. 어차피 이제는 대형도 거의 없었다. 빨리 달리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내게 칸나가 붙는 걸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왜?"
"의무를 지켜. 그럼 세상의 고민이 해결돼."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네가 고민하는 얼굴을 하고 있어서. 나도 도움이 돼야지. 너한테는 도움만 받았는데."
칸나는 살짝 미소를 띠고 내게서 멀어졌다. 의무라, 세계가 변했다고 내 의무가 변할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S급 헌터의 등위를 받고 나서 생각했던 의무는 뭐였더라.
곧 황도가 눈에 보였다. 황도에는 커다란 핑크색 반구가 떠 있었다. 저건 또 뭔가 싶을 때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황도 방위 장치가 작동한 건 오랜만에 보는군."
아마 마법 스킬로 발현된 방위 장치 같았다. 역시 판타지 세계라 이거지. 이 세계가 로맨스가 주이긴 하지만 판타지 세계이기도 하다는 거지. 난 어쩌면 로맨스 판타지에서 로맨스보다는 판타지에 집중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보통 단어 두 개가 조합된 거면 뒤쪽이 본뜻인 경우가 많으니까.
"이쯤이면 말을 버리고 가는 게 낫겠군."
저 멀리 황도가 보이자 가테스가 한 판단이었다. 나도 동의했다. 장거리를 움직일 때는 하루 밤낮을 달릴 수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말을 이용한다고 쳐도, 지금 같은 거리에서는 뛰는 게 나았다.
"악! 에퍼리!"
나는 칸나를 업었다. 칸나가 원정대원과 우리의 속도를 맞추기는 힘들다. 가테스는 당연히 마리나를 업었다.
"내, 내려 줘요!"
"시끄럽다."
마리나도 칸나도 둘 다 당황하며 움찔거렸다. 그때 황도의 땅이 크게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마치 천둥이 하늘이 아닌 땅에서 치는 것 같았다.
핑크색 반구에 균열이 생겼다.
그제야 칸나는 조용히 자신의 두 팔을 내 목에 감았다. 그녀의 따뜻한 체온이 직접적으로 느껴졌지만, 지금 그걸 감상할 때는 아니었다.
"빨리 가야겠군."
가테스의 혼잣말은 명령과도 같았다. 그와 동시에 원정대원이 모두 화살처럼 나아가기 시작했다. 맨 뒤에 뒤처져 있던 가테스와 나는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우리가 이들을 역전한 건 3초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10분이나 지났을까, 우리는 곧 도착했다. 성문의 병사들은 경계를 하고 있었지만, 선두에 선 가테스의 무서운 얼굴 때문에 곧바로 성문을 열었다.
땅이 흔들리고 있었다. 명백히 황도만을 노린 흔들림이었다. 심상치 않았다.
"으아아아아악!"
"엄마!"
황도 외곽은 일반 백성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고, 그들은 집 자체에 방호막을 깔 여력이 없었다. 시공조차 날림으로 된 그 집들은 작은 흔들림에도 속절없이 무너졌다.
"1분대, 2분대, 3분대는 건물에 깔린 백성들을 구출하고 황도 중앙의 공공 방호 지역으로 이동시켜라. 4분대, 5분대는 날 따라와!"
가테스는 순식간에 명령을 내렸고, 1분대부터 3분대까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순식간에 기둥이 무너져 가라앉은 건물의 지붕이 공중에 뜨고, 부서졌다.
우리는 그걸 구경할 틈이 없었다. 그저 건투를 빌어 줄 뿐. 빠른 속도로 무너진 건물들을 지나간다. 가테스는 빠르게 달려가면서도 자신이 치워야 할 법한 거대한 기둥 같은 건 세워 주면서 달려가고 있었다. 칸나는 보지도 못할, 빠른 속도였다.
"형님!"
그때 황도에서 병사들을 통제하던 가토스를 사거리에서 마주쳤다. 아마 가토스가 온 것이리라. 패도적인 기세를 뿜는 일단의 무리가 들어오니 놀라서 온 것이리라.
"가토스, 상황은 어떻지?"
"모릅니다. 계속 지면이 흔들리고만 있습니다. 리얀이 말하기를, 지면에 흘리는 마나가 튕겨져 나온다고 합니다."
"튕겨져 나온다고? 마기인가?"
"마기는 아니죠. 내가 여기 뻔히 있는데."
가테스에게 무력하게 업혀 있는 마리나가 말했다. 그제야 가토스와 마리나는 인사를 했다.
"아, 성녀님. 오랜만입니다."
"네. 인사를 오래 나눌 시간은 없을 것 같아요."
"맞습니다."
업혀 있는 상태로 인사하는 게 조금 비참했는지 마리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마리나 말은 맞았다. 마리나는 마기를 감지할 수 있었으니까. 마리나가 감지할 수 없다면 마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때, 땅이 더 크게 흔들렸다.
너.
너. 그래, 너.
움직여. 모든 걸 파괴해.
왜 그래야 되냐고?
글쎄. 왜라는 건 나한테 의미가 없어.
내가 곧 개연성이야.
"꺄아아아아아아악!"
"뭐야, 마수다!"
"어디서 나타난 거지?"
갑자기 지하가 부서지면서 마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마수들은 정상적인 모양새가 아니었다. 여기 세계의 마수는 잘 모르지만, 딱 봐도 기형적인 형태였다.
원래 하나의 개체라면 일정한 선이 있기 마련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어진 선. 사람으로 치자면 머리끝부터 발끝에 이르기까지의 자연스러운 굴곡이 있다.
하지만 나오는 마수들은 선이 허리 부분에서 끊겨서 다른 선이 이어지는 식이었다. 아예 핑킹가위 같은 걸로 팔을 난도질을 하고 다른 부분으로 봉합한 티가 나는 것도 있었다.
"다 죽여!"
가토스가 외쳤다. 그의 생글생글하던 웃음이 아예 없다. 그 역시 얼음 인간 가테스의 형제. 차가운 얼굴을 하면 충분히 한기가 나올 법한 턱선을 지니고 있었다.
"콰아아아악!"
마수들은 병사들의 창에 꽂히고 칼에 잘리면서도 잘 죽지 않았다. 그 마수들은 잘 보니 키메라 같았다. 어떤 마수는 손바닥에 입이 달려 있어 손바닥으로 비명을 질렀고, 심장이 팔뚝에 달려 있는 마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그 마수들이 죄다 약했다는 것이다. 일반 병사들의 녹슨 창날에도 쓰러질 정도였다.
"잠깐, 가토스!"
"왜 그러십니까, 형님."
"일단 놔둬 봐라."
가테스의 말에 가토스가 모든 병사의 움직임을 멈췄다.
마수들은 반항할 생각도 안 하고 그저 한 방향으로만 달리고 있었다. 무언가에 쫓기듯 몸을 과도하게 출렁이며, 접합이 제대로 되지 않은 부분은 떨어뜨리며 계속 달려 나갔다. 황도 바깥으로 가는 방향이었다.
"이제 다 죽여라. 그래도 혼란스러움을 야기하니."
그 말에 원정대원들이 움직였다. 가토스 휘하 일반 황도 근위병들과는 다른 움직임이었다. 한 원정대원의 칼날 아래에 마수 셋은 기본으로 고혼이 됐다. 한 마수에 여러 다른 마수의 부위가 붙어 있어, 실제로 가른 마수의 수보다 훨씬 더 많은 마수가 죽은 듯했다. 대학살의 광경이었다.
그때 황도에서 하얗고 긴 가운, 즉 의사 같은 복장을 한 리얀이 뛰쳐나왔다. 그녀는 일반인이었다. 황궁에서 이 도로까지 나오려면 15분은 족히 쉼 없이 달려야 했을 터.
그녀의 머리와 얼굴에서는 땀이 번들거렸고, 숨이 폐 끝까지 차오른 듯 거품이 끓는 소리가 났다.
"…하악. 오라버니, 마수들은……?"
"다 죽였다."
"으… 그것들의 가치를 아시면서."
리얀은 허리를 굽히며 숨을 거칠게 뱉었다. 가테스가 싸늘한 눈빛으로 리얀을 바라보았다. 리얀은 몸가짐을 바로 하고, 숙였다.
"트라프비체 마수 연구소장으로서, 실험체 누출에 대한 책임을 지겠습니다."
"그래. 보니까 4단계 개체까지 나왔더군. 진작 폐쇄를 안 하고 뭘 했던 거지? 백성보다 마수가 더 소중하더냐?"
"…죄송해요. 하지만 그건 소중한 제국의 자산이었어요."
리얀과 가테스의 말에 나는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저것들은 마수학을 연구하는 연구소에서 뛰쳐나온 개체들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나니 그런 괴상한 모양도 설명이 되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놈들이 어째서 도망을 치고 있었는지에 대한 문제. 어떤 마수는 발바닥에 심장이 달려 있었는데, 자신의 심장을 짓밟으면서까지 달렸다. 물론 그 마수는 원정대원이 베기 전에 심장의 모든 혈관이 터져 거무죽죽한 모습으로 죽었다.
"…흠. 전 모르는 얘기였군요."
"넌 아직 비밀 인가 1급이 아니지 않느냐."
살짝 한탄하는 가토스의 목소리에 가테스가 답해 주었다. 하나 이런 걸로 실망할 때도, 질책할 때도, 놀라워 할 때도 아니었다.
"마수가 왜 도망을 쳤지?"
"지진으로 인해 실험체를 가두는 곳에 균열이 생겼어요. 그로 인해 일부가 빠져나갔어요."
"내가 물은 건 그게 아니다."
가테스가 말했다. 지금 그는 나와 똑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마수가 무서워하는 건, 내가 알기로 한 가지밖에 없다."
"신성력이죠, 물론."
가테스는 리얀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제야 리얀은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챈 것 같았다. 나는 아직 무슨 말인지 정확히 따라가지 못했다.
이건, 소설에서 배경으로도 언급되지 않은 완전한 비하인드였다. 하긴, 마수 연구소라는 끔찍한 곳이 로판에 나올 리가 없지만.
"그렇다면, 지금 땅속에서 움트고 있는 건……."
"그래."
가테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신수(神獸)다."
신수는 무엇인가. 이건 배경에서 설명이 된 것이었다, 전설로서. 그제야 난 대화의 흐름을 따라갔다.
각 나라에는 나라를 망치는 업보와 나라를 지키는 신수가 대립한다. 그러나 그 신수는 그냥 전설적인 존재였다. 한 번도 소설 내에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
"신수가 움직이는 건 좋은 겁니까?"
"아니."
가테스는 단언했다.
"검은 나무가 마기를 모두 흡수하여 악마가 되었다는 뜻이다."
"말이 안 되는데."
나는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다. 악마가 완성되었다고? 성녀가 원정을 나갔는데? 물론 중간에 돌아오기도 했고 성녀가 초반에 태업을 하기도 했지만.
하나, 머릿속에서 소설의 내용이 그제야 겹쳤다. 마리나는 원작에서 세 달 만에 돌아온다.
그게 만약 아슬아슬하게 검은 나무를 퇴치했던 거라면? 검은 나무 원정대에는 시간 제한이 있지만 소설에서는 그 시간이 나오지 않는다. 이건 스릴러 소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3개월간의 에피소드도 하나로 압축되고, 그 후에는 가테스와 마리나의 이야기로 서사가 진행된다.
문제점 하나 더. 마리나는 최소 두 배 이상의 검은 나무가 있다고 했다.
만약 대제가 말한 것처럼 이방인이 검은 나무의 생성에 영향을 끼친다면? 마리나는 자신 몫의 검은 나무를 간신히 해치웠는데, 내가 나타나 생긴 몫은 해치울 시간이 애초에 안 되었던 것이다.
"미친."
그렇게 생각하니 욕이 절로 나왔다. 근데 그 와중에 신수는 왜 황도를 망가뜨리고 있는 것일까. 이해할 수 없다.
"…모두를 대피시켜라, 가토스.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나?"
"대제전에 계십니다."
"빨리 대피시켜라."
가테스가 말했다. 그 말의 절박함에서 난 느꼈다, 신수라는 존재의 의미를.
"신수는, 사람에게는 악마보다 무서운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