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별장을 태우다 (1)
리바이어던은 내가 급소를 때려 놔서 아직 일어나려면 먼 것 같다. 지금 패도 어차피 죽진 않을 거다. 계속 싸우면서 느꼈다. 리바이어던이라는 놈, 엄청나게 단단하다.
"난 너처럼 오만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습니까?"
"트라프비체 제국이 옌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고는 해도, 저변 아래 깔린 인식을 바꿀 수는 없지. 많은 부침을 겪었을 텐데도 기세가 꺾이지 않고 오히려 제압하는 모습을 보며 네 생존 전략이 오만함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오만하지 않으면 저렇게 뻔뻔하게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한 거지."
가테스는 냉정한 얼굴로 점점 올라왔다. 그가 이용하는 건 스킬이 아니었다. 무식하게 유형화된 마나를 발아래 쌓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실력을 보니 오만한 게 아니었군. 그 정도면 모든 사람을 발아래에 두고 있다 생각할 만하다."
"저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허락, 아니 허락 안 해도 할 테니. 해 봐라."
"죽고 싶지 않으면 다시 내려가시죠. 사람 잡는 취미는 없습니다."
나는 여전히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도 역시 그런 스킬이 없어서 무식하게 마나를 쌓아서 올라왔기 때문이다.
"아니구나, 넌 여전히 오만하구나. 하지만 인정은 할 수 있다. 너 정도면 일국을 세울 만한 강함이구나. 하지만 지혜로운 건 아직 모르겠다."
"마치 저보다 강하다는 말투십니다."
"막을 정도는 된다. 이기는 건 장담하지 못하겠지만. 난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고 있다."
"그렇다면 저도 놀라야겠습니다."
나는 바로 가테스의 눈앞으로 다가갔다. 가테스의 동공이 살짝 커졌다. 멀리 초점을 두고 있던 내가 바로 눈앞으로 다가가니까 어쩔 수 없는 작용이었다.
"제 앞에서 저를 막는다는 말을 한 사람을 한 번도 못 봤거든요."
"오만하긴."
가테스가 검을 선을 긋듯 깔끔한 자세로 빼어 들었다. 그가 검을 빼어 들면서 막은 내 검격은 자그마치 20번. 난 당연히 기다려 줄 생각이 없었다. 리바이어던이 언제 다시 회복할지 모르니까.
"허."
"빠르군."
내 감탄에 가테스가 말했다. 역시, 소드 마스터 3이라기엔 너무 강하다. 난 궁금한 걸 물었다.
"혹시 등위가 어떻게 되십니까?"
"소드 마스터 3인데."
"분명히 그건 아니겠습니다."
"날 평가할 만한 사람이 없을 뿐이다. 그리고 너도 소드 마스터 3 아니냐."
아, 그럴 수도 있나. 하긴, 로판 세계의 남자 주인공에게는 라이벌이 잘 나오질 않는다. 그렇다고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는데. 솔직히 난 사람한테 져 볼 거란 상상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가테스가 금색 마나를 검을 태울 듯한 기세로 둘렀다. 나도 하얀 마나를 둘렀다. 하얀색과 금색이 부딪쳐 다른 형질의 마나가 서로 타들어 가는 냄새가 났다.
"특이한 마나, 아니 신성력인가."
"신성력은 아닌 것 같고, 좀 이상합니다. 신성력과 제 마나가 이 검에서 뒤섞이는 느낌……."
"그러면 검이 너를 잡아먹고 있는 거구나."
우리는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싸웠다. 서로 죽일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다. 가테스는 리바이어던에게서 나를 막는 게 목표였고, 나는 당연히 남자 주인공을 죽이면 안 되니까. 성녀마저 맛이 가 있는 상태인데, 그나마 멀쩡한 남자 주인공까지 가면 이 세계가 어디까지 무너질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저를 막으면 리바이어던은 황도를 전부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좋습니까?"
"그것도 여신의 뜻일 테다. 만약 여기서 네가 신수를 죽이는 걸 방관한다면 트라프비체 제국은 모두 저주를 받겠지."
맹목적인 추종, 나는 그것에 대해서 어떤 희망을 잃는 걸 느꼈다. 이건 바꿀 수 없다. 여신이 황도에 불바다를 쏟아부어도 이들은 불을 전신으로 맞을 사람들이었다.
"여기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라 여신의 꼭두각시입니까?"
"조용히 해라. 넌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계속 칼을 부딪쳤다. 나는 알고 있었다. 가테스와 힘을 합치면 리바이어던을 잡을 수 있다. 나 혼자서도 제압이 가능한 수준이라면, 나와 대등한 가테스라면 충분히 리바이어던을 잡을 수 있었다.
내가 딴생각을 하는 데 쓴 시간은 아주 짧았지만, 가테스 같은 강자 앞에서는 큰 구멍을 만들어 냈다. 서로 짧은 견제용 검격만 날리다, 내가 틈을 보이자 그는 바로 검에 금색 고리를 겹겹이 휘감았다.
곧 가테스의 검에서 고리가 풀리면서 일자로 된 황금색 검기가 강하게 쏟아졌다. 그것들을 모두 쳐 내니 가테스가 내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래도 지는 게 예상이 안 되나?"
"네."
S급 헌터들과 대련을 많이 해 봤지만 고수들의 싸움은 오히려 단조롭다. 왜냐하면 속도와 힘이 이미 경지에 올랐기 때문에 잔수작을 부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그런 사람들을 가테스보다 많이 상대해 봤다.
"움직임이, 지금보다 두 배는 빨라야 합니다."
난 그렇게 말했다.
제압한다는 생각은 이제부터 버렸다. 어차피 죽일 기세로 상대해 봤자 내가 이 사람을 일 합에 죽일 수는 없었다. 나는 그를 믿었다. 그래서 죽일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죽일 기세로 접근하면 제압되는 순간이 올 것이다. 난 그렇게 빌었다.
"…읏."
가테스의 당황한 침음이 흘렀다.
내 이명의 환영살인마(幻影殺人魔)에는 왜 인(人) 자가 들어갔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었다. 왜 헌터는 마수를 상대하는데 살인이란 말이 들어간 걸까? 사람을 죽여 본 적은 있지만, 그 대상은 헌터의 힘을 악용하는 수배자였다. 그런 의뢰는 많이 받는 것도 아니었고. 이건 구공환 아저씨가 지어 준 이명이었다.
- 너는 마수와 싸우는 것보다 사람하고 싸울 때 더 무서워. 만약 게이트가 없었으면 넌 살인마가 되었을걸. 그렇게 아크로바틱 하게 사람을 상대하니 죽일 맛 나겠지.
- 사이코패스구나, 아저씨.
난 그렇게 받아치고 말았었지. 하지만 나는 내 움직임을 거울로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가테스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다.
"지금까지도 전력이 아니었나?"
"사람하고 마수를 대할 때 스타일이 다른 거죠. 전 거대한 괴수하고는 상성이 잘 안 맞아서."
그 목소리는 아마 가테스의 등 뒤에서 들렸을 거다. 그리고 가테스는 내 목소리를 이제부터 무조건 등 뒤에서 들을 것이다.
"음!"
가테스가 등을 돌리면 내가 등을, 뒤를 잡는다. 물론 머리 위를 잡을 때도 있고 발바닥 아래를 잡을 때도 있다. 완전 정면으로는 가지 않는다. 가테스의 사각(死角)은 점점 넓어진다. 내 움직임에 가테스의 시야는 갈라져 간다.
"몇 번 멀리서 보긴 했지만."
"전 한 번도 본 적 없습니다."
"넌 네가 얼마나 괴물인지 모르겠군."
"이걸 막는 것도 충분히 괴물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무시받는 건 처음이군."
가테스가 헛웃음을 흘리며 계속 방어만 하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가 붙은 지는 1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때, 리바이어던이 고개를 벌떡 들어서 입에 무언가를 모았다. 우리가 막을 겨를도 없이 리바이어던의 입에서 날카로운 이빨을 포함한 마나가 하늘을 받칠 기세로 솟구쳤다. 붙어 있던 우리는 좌우로 흩어졌다.
리바이어던이 뿜어낸 불에 하늘에 구멍이 뚫리고 근처의 구름이 모두 걷혔다. 빨리 피했음에도 피부가 따끔거렸다. 분명히 화상이다.
"파충류야, 진짜 죽고 싶어?"
"인간 따위……."
리바이어던이 지면을 흔드며 일어섰다. 꼬리를 날카롭게 치켜든 것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려 주고 있었다.
"넌 나중에 죽여 주마."
리바이어던이 말했다.
리바이어던이 강하게 몸을 요동쳐 꼬리까지 힘을 전달하고, 뻗어진 꼬리의 뾰족한 끝이 가테스를 향했다. 뜬금없는 공격이었다. 리바이어던도 귀가 있고 사람 말을 알아들으니 알고 있을 텐데, 가테스는 자신의 편이라는 걸.
"너 진짜 개 막 나가는구나? 하긴, 짐승 새끼니까."
나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가테스 역시 이해하지 못할 상황에 피하면서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리바이어던은 여전히 짧은 팔과 다리, 긴 몸통으로 가테스를 압박해 갔다.
"너희가 어찌 큰 뜻을 이해하겠느냐."
"파충류 새끼가 미쳤나."
"한 번 더 파충류라는 소리를 하면……."
리바이어던이 이빨을 갈았다.
리바이어던은 모종의 이유로 가테스를 노리고 있다. 가테스는 리바이어던에게 쫓기고 있고, 난 리바이어던을 잡으려고 한다. 그러니까, 지금 난 프리 딜 상태이다.
대놓고 큰 기술을 쓴다고 해도 날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죽어, 이 파충류 새끼야!"
"이 새끼가 진짜……."
내 온몸에 가득 찬 기가 발끝부터 폭발하고, 끝내 심장에서 크게 터진다. 폭발한 기가 파괴적인 마나가 되어 다시 손발 끝에 몰린다. 난 그 기세로 리바이어던에게 쏘아져 나가 1km에 육박하는 리바이어던의 몸에 칼집을 내 주었다.
츠지지직!
비늘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리바이어던의 어느 때보다 커다란 비명 소리가 난다. 뭐야. 이 새끼 별것 아닌 것 같다. 아니면 내가 강해진 걸 수도 있다. 환영살인마라는 스킬이 업그레이드됐으니까, 확실히 파괴력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크르으으으아……."
난 순식간에 리바이어던의 몸을 따라 회전해 베었다. 리바이어던의 길쭉한 머리에까지 왔을 때는 그야말로 롤러코스터라도 탄 기분이었다. 이럴 때 이런 얘기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신이 났다. 늘 새로운 경지는 신나는 법이니.
내 칼과 몸이 지나간 자리는 마치 불판 위에 올리기 전의 장어처럼 엄청나게 칼집이 나 있었다.
"신수를 정녕 죽일 셈이냐?"
"그 신수가 지금 당신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가테스와 나의 대화는 더 이어질 수 없었다. 리바이어던이 크게 울부짖었기 때문이다. 단순한 울부짖음이 아닌 파형이 날카롭게 잡힌 공격이었다.
리바이어던의 몸에서 푸른 기운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마름모를 담은 뱀의 눈이 빨간빛으로 번쩍거렸다.
"크으으……."
내 칼이 지나간 자리, 벌어진 가죽에서 하늘색 뿔이 쿵, 쿵, 솟았다. 리바이어던은 이제 눈이 붉어지고 인간의 말을 못 하는 것처럼 침을 흘리고 있었다.
"크르으르르……."
미쳤다. 저건, 분명히 나보다 강하다. 리바이어던은 고개가 노골적으로 가테스를 향해 있었다. 리바이어던은 바로 가테스를 향해 짧은 다리를 뻗었다. 저건, 안 닿을 것 같은데? 하고 생각했다. 가테스도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컥!"
가테스의 심장 바로 앞에 세운 검에 리바이어던의 커다란 발바닥이 부딪쳤다. 저 녀석, 팔과 다리 길이를 임의로 조절할 수 있었다. 리바이어던은 발바닥을 오므렸다. 위협적인 발톱이 가테스의 가슴팍을 찌르려 한다. 난 그것을 바로 쏘아져 가 쳐 냈다.
리바이어던은 날 쳐다보지도 않고 가테스에게 성큼성큼 걸어가면서 계속 공격을 했다. 내가 공격을 해서 리바이어던의 몸에 상처를 내고는 있었지만, 몸을 비틀며 거칠게 움직이는 리바이어던의 급소를 노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모든 생명의 본능, 살고 싶다는 뒤틀림은 어떤 의식적인 움직임보다 빠르고 거칠었다.
"이 새끼야, 좀 가만히 있어라."
"크르르……."
이제 인간의 말을 잃어버린 듯하다. 비늘만 덮여 있던 등에 뿔이 뾰족뾰족하게 솟아 있으니 산사태가 일어나는 움직이는 산을 상대하는 것 같다.
가테스는 답답하게도 피하고만 있었다. 분명히 받아치면 더 수월할 것일 텐데.
리바이어던의 공세가 격하긴 하지만 가테스도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다. 문득 밑을 바라보았다. 가토스가 어련히 대피시켰겠지 생각하면서.
당연히 리얀, 칸나를 비롯한 많은 병사는 모두 빠져 있었다. 가토스 역시 황자니까. 유능한 사람이니까.
하나 내 눈에 들어오면 안 될 사람이, 고개를 뻣뻣하게 치켜세우고 리바이어던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리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