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스페셜포스 (1)
"흑마법을 사용하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뇨. 웬 흑마법?"
"부활은 검은 무리나 쓰는 흑마법이에요. 그렇게 살아난 성녀님이 신성력을 다시 쓰실 수 있을까요?"
내 말에 리얀의 얼굴이 완전히 차가워졌다.
"만약 흑마법으로 하신다고 하면… 제가 도움을 어느 정도 드릴 수는 있지만. 물론 제가 흑마법을 쓴다는 건 아니에요. 연구는 하고 있으니까."
"리얀, 황족으로서 굉장히 부적절한 발언이다."
"지금 황족이 중요한가요? 제국이 중요하지."
뜻밖에 리얀과 가테스가 붙었다. 나도 리얀이 이렇게 숙이고 들어올 줄은 몰랐는데. 국경까지 앞당겨진 마당이니 나한테 뭐라 하면 제국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에퍼리, 진짜 흑마법인가?"
"아닙니다. 흑마법은 사용할 줄도 모르고."
"그렇군. 그럼 설명할 수 있겠군."
"그건 또 아닙니다."
가테스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내가 굳이 가테스와 신경전을 하고 싶은 건 아니다.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마리나는 가테스를 우연치 않게 살린다. 그러니까, 성녀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 자체는 안 알려져 있다는 것. 내가 여기서 그 과정을 밝히게 되면 난 또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겠지.
"…그럼 어떻게 살리겠다는 뜻인가?"
"저한테 시간을 좀 주시면 됩니다."
어쩌면 가테스는 다루기 쉬운 사람일 수도 있다. 물론 제국을 잡고 뒤흔들 영향력이 있는 사람에 한해서.
"1군단장의 임무를 맡지 않고 나돌아 다닌다는 뜻인가?"
"네."
내가 당당하게 말하자 가테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1군단을 등지는 후작 겸 군단장이 있다니. 솔직히 나는 제국의 길로틴에 묶여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볼 때는 이게 맞았다.
내가 군단장의 역할을 잘한다고 해도 트라프비체 제국의 멸망을 뒤로 미루는 것일 뿐, 제국의 멸망을 막을 수는 없다.
어쨌든 닥친 내 목표는 트라프비체 제국을 살리는 것. 그러고 성녀를 살리는 것. 살릴 수 있을까? 모르겠다. 그래도 도전하지 않는 것보다 도전하는 게 낫다.
"그럼 1군단장직과 후작 작위를 반납하겠다는 뜻인가?"
"아뇨, 그건 아니죠. 그건 가지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미친 건가?"
이건 내가 생각해도 뻔뻔해서 웃음이 나왔다. 물론 가토스와 리얀은 발바닥 가죽이 벗겨진 채로 갈대밭을 걷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왜요?"
"…그래."
가테스도 알고 있겠지, 나라는 사람을 놓치면 제국은 더 위태로워진다는 걸. 가테스는 제국이라는 왕을 지키고 있고, 난 지킬 왕이 없는 퀸이다. 당연히 내가 더 막 나갈 수 있는 거다.
"모르긴 몰라도 신성력을 사용하는 거겠지?"
"네."
"알겠다."
역시 가테스는 명석하다. 내가 검은 나무와 대화할 때 들었던 키워드를 기억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면 허가하지. 신성력을 어떻게 모으는지는 몰라도."
"감사합니다."
"다만."
가테스가 손을 들었다. 그래, 이렇게 날 순순히 보내 줄 사람은 아니긴 했다.
"너 혼자 보내는 건 불안하다."
"제가요?"
"그래."
무슨 소리야. 나랑 같이 싸워 봐 놓고 그런 소리가 나오나 싶었다. 재수 없는 소리인 건 알지만, 지금 나를 단독으로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장담할 수 있다. 난 지금 S급 헌터 때보다 강하니까.
"지금부터 네 부대를 붙여 주겠다. 아이리 라피테스, 칸나 카라모프. 이렇게 둘이랑 같이 가라."
"뭔 소리……."
난 반박하려다 의중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내가 불안하다는 건 도망갈까 불안하다는 거겠지. 그러니 나랑 친한 사람들을 붙여 주겠다는 거고.
참 가테스다운 수가 아닐 수 없었다. 서로 체크메이트를 한 번씩 한 셈이었다. 그래도 뭐 상관없다. 어차피 도망갈 생각은 없었으니까. 나도 친한 사람이랑 같이 가면 좋지 뭐.
솔직히 칸나, 아이리는 내가 마음이 좀 있으니까. 아니, 아이리는 좀 뺄까. 사실 아이리는 사랑스럽다기보다 뭔가 친구 같다. 날 설레게 하는 건 칸나가 더 맞으니.
근데 이것도 다 김칫국이지 뭐. 그렇게 생각하니 살짝 우울해졌다.
"근위병, 아이리 공녀와 칸나 소령을 불러와라."
가테스의 그 말과 함께 안대를 찬 아이리와 제복 차림의 칸나가 바로 들어왔다. 수배를 해서 데려온 게 아니라 이미 준비시켜 놨다는 거겠지. 대체 몇 수를 앞서 봤기에 칸나와 아이리를 밖에다 대기시켜 놨을까.
"그나마 너를 억제할 사람들이라 생각해서 미리 불러 놨지. 이 정도로 막 나갈 줄은 몰랐지만."
"…아이리 라피테스입니다, 황자 전하."
"칸나 카라모프입니다. 황자 전하를 알현합니다."
그녀들은 자기들이 왜 불려 왔는지도 모르고 있는 얼굴이었다. 가테스는 바로 그녀들에게 말했다.
"아이리 공녀, 외곽에 있는 백성들을 많이 구했더군. 황자로서 자네 같은 귀족이 있다는 게 정말 자랑스럽네."
"귀족의 의무를 다했을 뿐입니다."
아이리는 얼굴을 붉혔다. 아, 맞다. 난 이제야 떠올렸다, 아이리가 가테스를 좋아한다는 걸.
"칸나 소령도 원정대원으로서의 의무를 다해 주고 황도에서 일어난 재난에도 엄청난 공적을 세웠다."
"저도 그저 군인의 의무를 다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가테스가 이렇게 단순히 칭찬만을 해 줄 스타일이 아니란 걸 나는 안다. 그의 화술이란 건 냉정하게 보면 비겁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어떻게 보면 말발이 좋다는 거겠지.
"내 그런 자네들에게 현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를 맡겨도 되겠나?"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영광입니다."
"저 역시, 영광입니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무슨 일이냐고 먼저 물어보지 않을까. 내가 이들과 다른 점을 인지하고 있는데도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여기 있는 에퍼리 후작을 따라서 작전을 같이 수행하도록. 작전 지휘는 에퍼리 후작이 알아서 할 것이네."
그와 동시에 아이리와 칸나가 날 쳐다보았다. 뜻밖에 내가 악역이 된 기분이다. 이게 로판 남주한테 주먹 한 번 못 뻗어 보고 당하는 귀족 느낌인가.
"야, 뭔 작전인데?"
"내가 무슨 도움이 돼?"
"아니, 그것보다 네가 왜 후작이야?"
"잠깐만, 그건 1군단장 패인데?"
아이리와 칸나는 집무실에서 나오자마자 내게 질문 세례를 쏟아 내었다. 내 입은 하나밖에 없었기에 차례차례 답해 줄 수밖에 없었다.
"첫째, 성녀 살리기. 둘째, 넌 그냥 도움이 돼. 셋째, 갑자기 가테스 황자가 줬어. 넷째, 그것도 갑자기 가테스 황자가 줬어. 끝."
내 정확한 답변은 그녀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아마 지적할 게 한두 개가 아닐 것이다. 귀족 작위가 갑자기 후작으로 업그레이드된 거나 1군단장을 맡는 거나. 말도 안 되는 일로 가득하다.
그녀들은 그 선택이 내려진 배경을 모르니까 당연히 어리둥절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들이 맨 처음 물어볼 건 정해져 있었다.
"성녀님이 돌아가셨어?"
"응."
"…허."
"제국에 암운이 드리우는구나."
칸나는 그저 입을 벌렸고, 아이리는 탄식했다. 나는 황급히 말했다.
"가토스 황자한테 들었어. 자기 팔까지 태워 가면서 보내 달라고 협박했다며. 칸나 잘못은 아니야."
그러나 칸나는 눈에 띄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호감은 없다고 해도, 몇 달 동안 붙어 있던 사람이 죽었다는 건 큰 충격인 듯했다.
"괜찮아, 칸나 네 잘못이 아니야."
"맞아, 칸나."
칸나는 그래도 정신적인 충격이 큰 것 같았다. 평생 근위, 호위를 한 사람이었다. 호위 대상이 죽은 건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봐야 되는 걸까.
이 세계는 계약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다. 만약 호위 대상이 호위자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계약은 파기된다, 이런 조항도 없는 것이다. 지금 칸나가 느끼는 죄책감은, 내가 볼 때는 부조리했다. 그렇지만 칸나가 느끼는 죄책감을 내가 덜어 줄 수는 없을 테다. 그건 그녀와 나의 본질에서 나오는 간극이었다.
난 그게, 너무나 멀어 보였다.
빨리 마리나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개차반이기는 하지만 그녀는 이런 간극 속에서도 사랑을 찾아냈다. 물론 다른 사람을 캐릭터처럼 보기는 했지만, 그녀가 사랑에 빠지게 된 이유는 뭘까.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하면 연애를 못 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아가씨, 언제까지 안대를 하시는 겁니까?"
생각해 보면 몇 달 만의 아이리와 해후였다. 하지만 그다지 어색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잘 지내셨습니까? 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몰라, 계속 시큰거리네."
"곧 실명하겠네요."
"미쳤구나. 네가 하인이었으면 목이 당장 날아갔을 게야."
"전 이제 후작입니다."
내 농담에 아이리는 그저 킥킥 웃었다. 살짝 놀랐다. 내가 아이리를 진짜 편하게 생각하고 있나 보다. 이런 미친 농담까지 무의식적으로 날리다니. 그것보다 아이리가 받아 준 게 더 기분이 좋았다.
"그나저나 뭐, 무슨 작전인데?"
"아까도 말했지만, 성녀 살리기요."
"…뭐?"
그 말에 기죽어 있던 칸나가 화들짝 놀랐다. 칸나는 바로 내 어깨를 붙잡았다.
"그게 가능해?"
"가능은 해."
나 대신 아이리가 말했다.
"흑마법을 쓰면."
그리고 아이리와 칸나는 날 경멸하듯이 바라보았다. 흑마법은 여기서 검은 무리라는 것들이 쓰는 마법이다. 마기를 사용하는 마법이라나. 물론 난 검은 무리를 본 적도 없고, 그들이 쓰는 흑마법도 본 적이 없으니 뭔지도 모른다.
"아니, 그건 아니죠. 제가 흑마법을 쓸 줄 모르는데."
"그럼 어떻게?"
"몰라요. 일단 신성력을 이용해 보려고 하고 있어요."
"…신성력?"
아이리가 물었다.
마리나가 가테스를 어떻게 살렸었지. 자신의 몸 안에 있는 신성력을 완전히 끌어모아 여신급의 신성력을 만들고, 신의 힘을 일시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자 가테스를 살렸었지. 그 이후 성녀는 잠시간 보통 사람이 되고 만다.
그럴 정도로 많은 신성력을 모아야 되는데, 애초에 신성력을 타고난 마리나가 그렇게 끌어모았던 거니, 내가 그만큼의 신성력을 모을 수 있을까는 다른 문제다.
"…신성력, 신성력이라."
칸나는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아이리도. 얼토당토않은 말인데 생각보다 수긍이 빠르다. 이 말을 하고서 몇 분은 내가 부가 설명을 해 줘야 될 것 같았는데.
"일단 신전을 찾아가 봐야겠네. 해설자님께 여쭤보면 되지."
"그래. 그러는 게 낫겠다."
"다들 수긍이 빠르십니다."
내 감탄사에 아이리와 칸나가 날 동시에 돌아봤다. 좌우에서 미녀들이 동시에 날 쳐다보니 아찔하다.
"내가 너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 있어."
먼저 아이리가 말했다.
"넌 터무니없는 얘기를 하지만, 터무니없는 행동도 하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네 입에서 나오는 터무니없는 얘기는 터무니없는 얘기가 아니라는 셈이지."
뭔 말이야. 길어진 문장에 내 머리로 잠깐 해석을 해야 했다. 먼저 해석을 끝낸 칸나는 풋 웃었다.
"그냥 믿는다는 말을 엄청 어렵게 하시네요."
"아, 아무튼!"
아, 그런 거였구나. 아이리는 이렇게 빨리 해석할지 몰랐다는 듯 짜증을 부렸다.
"어쨌든 나도 마찬가지야. 에퍼리, 난 널 믿어."
칸나가 말했다.
"가자, 신전으로."
칸나의 표정이 그나마 풀려 있었다. 난 그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신전은 우리에게 무슨 답을 줄 수 있을까. 우리는 기대감을 가지고 신전으로 향했다.
"여신님께서 계시를 안 내리십니다. 저희는 이걸 침묵이라고 합니다."
"침묵이요?"
"신성력은 여신님께 빌려서 쓰는 것, 사제들은 여신님께 기도해서 신성력을 충전합니다. 물론 성녀님은 여신님의 힘을 무한히 빌려 쓰지만, 저희 사제는 일반인이라 다르거든요. 하지만 침묵 상태에서는 저희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신전의 최고 책임자, 해설자라는 직책을 맡은 하얀 옷의 남자가 우리에게 말했다.
칸나는 한숨을 쉬었다. 난 왠지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분명히 그랬었지. 신수를 죽이면 여신의 미움을 받는다고.
아이러니하게도 성녀가 신수를 죽였다. 그래서 괜찮을 줄 알았지만 여신은 이미 화가 난 모양이다. 아마, 제국의 국경이 강제로 좁혀진 것도 여신의 신권 행사겠지. 트라프비체 제국은, 미운털이 박힌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신성력을 구할 곳이 있을까요?"
"글쎄요. 신성력은 여신님의 주관적인 총애라, 저희로서도 드릴 말씀이 없네요."
"그래요, 알겠습니다."
쓸모없는 신전 같으니라고. 사실 여신한테 빌어먹고 사는 것 아니야. 난 속으로 욕을 뱉으며 나왔다.
"뭐야, 벌써 난관 봉착이야?"
아이리가 한심하다는 듯 물었다. 그럴 리가.
"아니. 보험은 있죠."
"무슨 보험?"
"여신의 총애를 받는 다른 분들을 알고 있거든요."
"누구?"
"가시죠, 탄탈로스 숲으로."
요정의 숲은 지금 어떻게 됐으려나. 나는 휘파람을 불며 선두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