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노을의 숲 (1)
"뭐야, 인간들이다!"
"인간들이 여기는 왜 왔지?"
저 위를 바라보니 작은 요정들이 마스크를 쓰고 총 같은 걸 손에 들고 있었다. 요정들은 작아진 내 손바닥만 한 크기였다. 저번에는 내가 저 정도 크기였다는 말이지. 새삼 요정들의 장난이 실감 났다.
"인간들은 무시하고, 일동 사격!"
어느새 벌 떼처럼 모인 요정들이 우리 위에서 총을 겨누고 파파팡, 쏴 댔다. 아니, 이런 중세 시대에 총기가 왜 나오는지는 둘째 쳐야 했다. 첫째로 쳐야 할 건 우리에게 날아오는 바위들이었다. 나는 바로 앞으로 나가서 우리 쪽으로 날아오는 바위들을 모두 쳤다.
콰콰쾅.
바위들이 땅에 박히는 소리가 입체적으로 울린다. 물론 크기로 보면 조약돌이 땅에 떨어지는 것 같겠지만. 우리가 발로 차는 조약돌에 벌레들은 이렇게 느낀단 말이지. 왜 벌레들 중엔 청각이 없는 것이 많은지 알겠다.
"인간들! 너희가 돌에 맞아 죽을 놈들은 아니니까 들어온 거겠지? 그렇게 믿는다!"
이미 돌 쏴 놓고 뭔 개소리들이야. 하여튼, 요정들 이기적인 건 여전하다.
우리가 무언가 말을 하기도 전에 다시 조약돌과 같은 바위 세례가 우리를 퍼부어 댔다. 난 차라리 검막을 만들어 모든 걸 튕겨 내기로 했다.
투두둥 하는 소리가 우산을 때리는 굵은 빗방울의 소리와도 같았다.
"차라리 돌 맞고 기절하고 싶어. 내려 줘."
아이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차갑게 말했다.
"밑을 봐."
"아, 씨, 반말… 읍."
아이리는 내 말에 태클을 걸려다가 밑을 보고 바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하얀 목이 길게 뻗었다. 그녀는 더욱더 하늘을 바라보고 싶은지 푸른 정맥까지 솟아날 정도였다.
왜냐하면 땅 밑에는 곱등이가 우글우글하고 있었으니까. 칸나와 리얀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버렸고, 그녀들 역시 하늘을 바라보기로 했다. 솔직히, 나도 잠깐 아래로 눈을 돌렸다가 꽉 감아 버렸다.
"진짜 어떤 씹새끼가 곱등이 알 묻혀 들어왔는지 몰라도 꼭 죽인다!"
저 멀리서 입이 험한 요정의 욕이 들려왔다. 휴, 난 아니네. 다행이다. 난 곱등이 알을 묻혀 온 게 아니라 곱등이를 타고 왔으니까.
"네 짓이구나, 에퍼리."
"무슨 소리?"
"오라버니가 말하기 창피해했거든. 이런 일이면 창피할 수밖에 없겠다."
"무슨 소리냐고?"
"내가 오라버니보다 눈 하나는 좋아."
내가 계속 시치미를 떼자 리얀이 새침하게 말했다. 그래, 그랬지. 난 그냥 묵언 수행을 하기로 했다. 아이리와 칸나가 날 진심으로 원망하는 모습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진짜 난 이럴 줄은 몰랐는데.
내가 곱등이를 푼 게 거의 네 달 전인데, 네 달 동안 곱등이와의 방역 전쟁을 하고 있었다니. 이쯤 되면 아무리 나라도 미안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성장한 곱등이들은 굉장히 커져 있었다. 사람 발만큼의 크기로 커져 있으니 이렇게 혐오스러울 수가 없었다.
"인간들! 왜 들어온 것이냐!"
4개월 동안의 묵혀 온 분노가 우리에게 향한다. 분명 부조리한 분노였다. 왜냐하면 요정들은 내가 이런 짓을 했다는 걸 모르니까. 하지만 그 분노의 방향은 우연찮게도 적중했다고 볼 수 있다.
난 당연히 내가 했다고 인정할 생각이 없다. 그건 자살행위니까.
"요정님들을 도와주러 왔습니다."
"뭐? 뭔 소리야?"
요정들이 어리둥절해하는 소리를 할 때, 나는 그녀들을 곱등이에 놔두고 하늘로 붕 떴다. 그다음에 몸을 거꾸로 돌려서 공중에서 물구나무를 섰다.
그리고 그녀들이 탄 곱등이만 피해서 검기로 된 비를 만들어 떨어트렸다. 바위를 교묘하게 피하던 곱등이들도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검기를 피할 수는 없었다. 곱등이는 큰 배와 머리에 구멍이 난 채로 피식피식 쓰러졌다.
"뭐야? 강하잖아, 인간! 아주 좋아!"
요정들은 순식간에 내게 다가와 주변을 둘러쌌고, 계속 내 주변을 맴돌았다. 죄책감이 들기는 한다.
"인간, 아주 마음에 들어! 이름이 뭐지?"
"에퍼리 션입니다."
"오, 에퍼리. 아주 발음도 좋아!"
요정들은 내 이름을 발음하면서 싱그럽게 웃었다. 좀 아이 같은 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덜 띠껍다. 왜냐하면 곱등이를 해치워 줬기 때문에. 그 곱등이를 푼 게 나라는 사실은 절대 알려 줄 수 없겠다.
"내 이름은 미야야! 어, 너 저번에 왔던 걔 아니야?"
"맞습니다."
미야라는 요정이 날 알아보고 말했다. 그때 나한테 띠껍게 대했던 그 녀석이다.
"어, 근데 너랑 그 차가운 황족의 피가 온 다음부터 곱등이들이 창궐하기 시작했는데."
미야가 갑자기 날 의심하기 시작했다. 내 등골에 식은땀이 차갑게 고이기 시작한다. 내가 변명거리를 찾는 동안 다른 요정들이 미야를 혼내기 시작했다.
"미야, 무슨 말이야! 이 인간이 기분 상해서 가면 어쩌려고 그래?"
"미야, 빨리 사과해! 사과해!"
성난 요정들의 집중포화를 받은 미야는 땀을 삐질 흘렸다. 그는 여전히 날 의심하고 있었지만,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음. 미, 미안하다, 인간."
"괜찮습니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고 하죠."
내가 뻔뻔하게 말하자 요정들은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그들 입장에선 내가 구원자로 보였나 보다.
"안녕하세요, 요정님들. 트라프비체 제국의 황녀, 리얀 트라프비체입니다."
"응, 알고 있어. 황족의 피는 느낌이 오니까."
"외람되지만, 몇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리얀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녀 역시 가테스와 본질은 비슷한 사람이다. 내가 요정의 숲에 곱등이를 풀었든 뭘 했든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제국의 안위만 걱정할 뿐.
"뭔데, 넌?"
"아까 인사드렸는데, 전 리얀……."
"아니, 네가 뭘 해 줄 수 있냐는 거지. 여기 에퍼리는 좀 쓸모가 있어 보이는데."
어떤 요정이 싸늘하게 말했다. 리얀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저는 여러 고급 스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에요. 요정의 숲에 방역에 도움이 되는 진을 설치할 수도 있죠."
"오?"
그녀는 바로 작은 진 하나를 그려 보았다. 그곳에 갑자기 분홍색 안개가 끼더니 달큰한 냄새가 풍겼다. 그때, 풀숲에 아직 남아 있던 곱등이가 튀어 올라 안개 속으로 폭 하고 들어갔다.
"무슨, 무슨 역할이야?"
"이 진은 곱등이를 유혹하는 안개의 진입니다. 곱등이는 여기서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에 갇혀 굶어 죽어 갈 거예요. 안개를 잠시 해제할 수 있는 진도 드릴 테니, 한 달에 한 번씩 시체 청소를 하세요."
"오. 너 쓸모가 있구나!"
"그럼요."
리얀은 입을 가리고 후훗 하고 웃었다. 나를 맴돌던 요정의 반은 리얀에게로 붙었다. 간사한 요정들 같으니라고.
"읏……."
그때 아이리가 안대를 가리면서 주저앉았다.
"아가씨!"
칸나가 아이리의 어깨를 감쌌다. 아이리는 여전히 안대를 부여잡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나와 리얀도 아이리에게 다가갔다.
"아이리, 괜찮아?"
"으… 지금은 좀 괜찮다."
리얀이 걱정스럽게 묻자 아이리는 끙 소리를 내며 다시 일어났다. 그녀는 검은 안대를 계속 문질렀다. 지금은 그렇게 아픈 것 같지 않았다.
"일단 저 친구는 쓸모가 없을 것 같네?"
요정들은 그사이 아이리에 대한 냉혹한 평가를 내렸다. 역시 띠꺼운 요정 중심주의는 여전했다.
"됐어. 그럼 일단 도시로 가자."
"왜요?"
요정의 당연하다는 듯한 말에 나는 되물었다. 요정들은 당황해했다.
"응? 우리 도와주려고 왔다며?"
"그래도 저희가 받는 게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내 말에 요정들이 멀찌감치 물러나서 속닥거렸다. 물론 내 귀에는 다 들렸다.
"요정을 돕는 것 자체가 명예가 아닌가?"
"맞아, 맞아."
헛소리들 하기는.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원하는 걸 말했다. 이런 곱등이의 숲에서는 한시라도 더 있고 싶지 않으니까.
"신성력을 좀 나눠 주십사 합니다. 요정님들은 여신의 총애를 받으니 신성력으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신성력은 우리의 생명력이야. 우리의 생명력을 나눠 달라는 거야?"
"네. 어차피 여신님이 충전해 주시지 않을까요?"
"음. 그건 그렇지만."
요정들은 낄낄 웃었다. 신성력이 요정의 생명력의 근원인 줄은 몰랐지만, 그들은 그렇게 신경 쓰지는 않는 것 같았다.
"뭐, 그 정도면 괜찮지. 근데 신성력을 담을 그릇은 있어? 일반인들은 신성력을 담아 봤자 느끼지도 못하는걸."
난 요정의 오만한 말에 내 검을 빼어 들었다. 사실 마리나가 죽으면서 엄청난 신성력과 괴이한 기운을 뿜어냈을 때 그리고 리바이어던과 베히모스가 신성력을 뿜어냈을 때, 내 검은 그걸 많이 흡수했었다. 그래서 나도 조절할 수 없었던 신성력을 조절할 수 있게 되고, 갈무리까지 할 수 있게 됐다.
내가 신성력을 흘리자 요정들이 놀랐다.
"어, 뭐야? 신성력을 담을 수 있는 물건이 있네."
"진짜다. 이런 건 처음 보는데?"
"그러게. 이런 물건이 있어도 되나?"
요정이 좀 찜찜한 말을 해서 물었다.
"있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신성력은 선택받은 사람만 쓸 수 있어. 근데 신성력을 담는 물건이라면 누구나 쓸 수 있잖아. 그건 여신님의 뜻과 어긋나."
"그런가요?"
어쩌라고. 들어 보니 내가 신경 쓸 말은 아니었다. 여신의 뜻이 뭐 그리 중요한가. 내 뜻이 더 중요하지.
"그래. 근데 일단 그게 나왔다는 것 자체가 여신의 뜻일 수도 있으니. 우리가 할 말은 아니겠네."
요정은 뜻밖의 진지한 말투를 하고 우리를 도심으로 데려갔다.
"도심의 곱등이는 우리가 처치하지 못해."
"왜입니까?"
"보면 알아."
요정이 참담한 목소리를 했다. 왜, 도심의 곱등이는 다른가 하고 생각할 때쯤. 우리 몸 크기만 한 곱등이가 쿵 하고 떨어졌다.
"요정은 들어올 수 없다."
"왜?"
"우리의 땅이니까."
곱등이가 말할 수 있던가. 당연히 아니지. 이게 판타지 세계라는 거라는 걸 감안해도 아닌 건 아닌 거다. 분명 요정의 숲 도심이 신성력이 제일 집중되어 있는 곳이니 곱등이들에게 이상 현상이 벌어진 것일 터였다. 이 비정상적인 크기도 그렇고.
"인간이라면 들어갈 수 있다는 건가?"
"인간은, 들어오지 말라는 말씀은 없으셨다."
"누가 지시하는 사람, 아니 곱등이가 있나 보지?"
"우린 곱등이가 아니다. 노을이다."
"노을?"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곱등이는 자랑스럽게 뒷다리로 몸을 일으키며 섰다. 배의 주름들이 너무 통통해서 역겨웠다.
"우리의 이름은 노을이다."
"미친."
난 바로 기억을 떠올리고 욕을 뱉었다. 노을이. 기억나네. 그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오는지는 몰라도, 이 역겨움은 참을 수 없다. 물론 내 업보긴 하지만, 내 업보는 내가 지워야지.
"노을아, 정신 차리자."
"뭐라고?"
거대하게 몸을 키운 곱등이가 나를 경계했다. 곱등이의 확실한 머리, 가슴, 배가 삼 등분이 됐고, 징그러운 더듬이와 다리를 다 잘라 버렸다. 순식간이었다.
푸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곱등이의 분해된 몸이 떨어졌다.
"들어갑시다."
내 빠른 손속에 요정들이 환호를 했다. 난 바로 차갑게 요정들을 침묵시켰다.
"조용히 하시지요. 원래 곱등이는 청각이 없지만, 얘는 있었으니까."
"…그래."
요정들은 시무룩해하면서 우리를 파닥거리면서 따라왔다.
어둠 속에서 음침한 목소리가 울린다. 공동에서 그들의 목소리는 웅장하게 울렸다. 그들은 빛이 없는 곳에 있었다. 신성력 때문에 모든 감각이 살아났지만, 시각만큼은 살아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시각은 초감각을 가진 곱등이에게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노을이 385호가 죽었군."
"그렇습니다. 느낄 수 있습니다."
"침입자가 있군."
"조치하겠습니다."
"빠른 놈이다. 조심하도록."
"저희보다 빠를까요?"
"그건 아니겠지."
둘은 큭큭 웃었다. 순간, 마치 어두운 동굴 벽에서 우거진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처럼 파스슥 소리가 났다. 벽에 붙어 있는 수많은 곱등이의 더듬이가 동굴 속으로 들어온 바람 한 줄에 스쳐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