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노을의 숲 (2)
"어쨌든 곱등이만 다 쓸어 주면 되는 일 아닙니까?"
"아니.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곱등이들이 생각보다 강해. 그리고 요정들이 함부로 못 들어가는 이유가 있어. 우리도 죽기 살기로 탈환하려면 탈환할 수야 있겠지만……."
"있겠지만?"
요정들이 우물쭈물했다. 그때, 리얀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요정들에게 말을 건넸다.
"요정님들, 미천한 인간들이 요정님들의 수족이 되고 있사옵니다. 손발과 머리가 맞지 않으면 곧 발걸음이 꼬여 넘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가?"
"하, 하긴, 지금은 인간들이 우리의 수족이지!"
"그래, 그래. 맞는 말이야!"
달콤한 리얀의 말에 요정들이 감화가 되기 시작한다. 요정들은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며 해야 할 말과 해야 하지 않을 말들을 고르는 듯했다. 결국 요정 중 한 명의 대표가 나와 어깨를 당당히 펴며 말했다.
"그래, 수족들아, 너희에게만 긴밀하게 말하지. 이 말이 인간 세상으로 퍼지면 우리가 너희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우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요정은 우리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작게 속삭였다.
"사실은… 음, 아, 진짜. 이걸 말해야 하나, 인간들한테."
요정이 뒤의 요정들을 돌아보았다. 요정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뭔 말이기에 그러는지 우리는 알 수 없었다. 대표 요정은 한숨을 쉬며 정말 하기 싫은 말을 꺼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요정왕님이 곱등이들의 손아귀에 계신다. 먼저 요정왕님은 곱등이들을 자비로운 마음으로 풀어 주려고 하셨다. 하지만 이미 사특해진 곱등이들의 간악한 계략에 걸려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신 게야."
"아, 그렇군요."
나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요정들은 비를 맞은 파리처럼 철퍼덕 땅에 떨어진 채로 눈물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아이고, 자비로우신 요정왕님……."
"어쩌다 그런 고초를. 끔찍해라!"
"마마, 마마!"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따로 없네. 갑자기 울음바다가 되어 버린 요정들에 우리 파티의 멤버들은 당황했다. 요정왕이면 이들의 황제 같은 거겠지. 그들에겐 요정왕이 있는 곳이 곧 나라고, 요정왕이 나라님일 테니까.
"그만 고정하십시오, 요정님들."
"그, 그래야지."
"인간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여 줬어."
요정들은 그런 말을 하면서도 추스르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지금 '요정왕'이라는 단어를 한 번만 더 언급하면 울음바다가 될 정도였다.
사실 난 요정왕을 알고 있었다. 요정왕은 확실히 자비로운 요정이지, 이런 띠꺼운 요정들과는 다르게. 뭔가 현자 같은 느낌이 났었던 걸로 기억한다. 성녀에게 조언 같은 것도 하는 역할이었고.
"그래서, 요정왕님을 구해 주고 곱등이들을 내쫓으면 된다는 거죠?"
"그렇지! 이 추악한 것들을 내쫓아 줘! 우리의 신성력을 다 나눠 줄 테니까!"
요정들은 아주 저자세로 나왔다. 인간을 아무리 깔본다고 해도 자신들의 왕이 사로잡혀 있는 꼴은 도저히 못 보는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 여신이 '침묵'까지 하니 요정들로서는 곱등이의 뛰어난 번식력을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어쨌든, 그러면 요정왕님은 어디 계십니까?"
"몰라. 요정왕님이 돌아가시진 않았을 거야. 교감계에 약하게 잡히니까. 근데 방향은 모르겠어."
"그래요?"
"내가 볼 때는 도서관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아. 우리 교감계를 혼란스럽게 하는."
요정들이 말했다. 교감계는 안다. 여기 있는 몬스터들의 설정이니까. 헌터계에 있는 마수들에도 그런 특징을 가진 몬스터들이 있었으니까. 즉, 몬스터들끼리 정신체가 연결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었다.
요정들은 떨어져 있어도 한 몸처럼 느낀다, 그 뜻이겠지. 대신 내가 못 알아듣는 건 도서관이었다.
"도서관은 뭡니까?"
"넌 가 봤잖아?"
"네?"
내가 물어보자 요정이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 탄탈로스 숲의 요정 반지가 있던 곳. 그건 곱등이가 먹어 치웠을 거야. 안 그러면 곱등이들이 그렇게 강할 리가 없어. 거기가 도서관이야."
"그렇습니까? 제가 봤을 때는 집이었는데."
"집 맞아. 요정은 종이가 방이고 책 표지가 지붕이거든. 도서관이 요정들의 연립주택 내지는 아파트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돼."
중세 시대에 연립주택, 아파트라는 말을 쓰면 누가 알아들을까? 이래서 마리나가 적응을 못 했던 걸까? 난 한숨을 쉬려고 했지만 리얀과 칸나, 아이리는 뜻밖에도 알아들었다.
"연립주택, 음. 옌시의 시공법이군요."
"맞아. 솔직히, 너희는 너무 건물에 쓸데없는 공간도 많고 천장만 넓어. 물론 옌시 땅이 좁아서 그런 식으로 지은 게 많긴 하지만."
"황족으로서도 인정하죠. 근데 저희는 건물을 그렇게 오밀조밀하게는 못 지어요. 보통은 스킬로 짓다 보니까 큼직큼직하게 짓는 거죠. 그러다 보니까 천장도 높고."
갑자기 웬 건축시공 얘기야. 그래도 옌시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는 좀 감이 왔다. 그래도 좀 현대에 가까운 건지. 스킬을 못 쓰니까 그런 쪽으로 발달이 된 건가. 물론 안 가 봤으니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지금 알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때, 숲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동시에 숨을 참았다. 우리는 분명히 외곽으로 돌아왔다. 내가 기감을 밝혀서 곱등이가 없는 쪽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이쪽이라고 하셨지?"
"응, 맞아."
곱등이들 특유의 지지직거리는, 덜 만들어진 성대의 목소리가 우리 근처에서 울렸다.
갑자기 곱등이의 기척이 느껴진다? 내 기척을 속여 가면서? 이건 말도 안 된다. 나는 실수를 깨달았다. 이건 인간을 상대하는 게 아니었다. 벌레를 상대하는 것이었다.
나는 땅 밑까지 기감을 확장했다. 그 순간 난 아찔해졌다. 땅 밑에서는 이미 수많은 곱등이가 흙을 파면서 가고 있었던 거다. 이미 요정의 숲 곱등이는 그저 동굴을 기어 다니는 그런 벌레가 아니었다. 팔로 흙을 헤칠 정도의 강건함을 가지게 된 것이다.
아니, 근데 그렇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다. 난 곱등이 한 마리를 처단했을 뿐이다. 대체 어떻게 우리를, 어떤 근거로 추적할 수 있었던 거지?
"385호가 죽었다고?"
"그놈은 약한 개체였지. 충분히 그럴 만해."
"근데 그의 죽음을 느끼기에는 너무 빨리 죽었단 말이야. 그만큼의 강자가 있는 걸지도 몰라."
"신경 안 쓴다. 우리는 하나니까."
그때 요정이 속닥거렸다. 나를 의심하던 미야라는 요정이었다.
"곱등이에게는 교감계가 있어."
"그걸 왜 진작 말 안 해 주셨을까?"
"그러게? 그래도 아직 들키지는 않았잖아."
"아니, 들켰습니다."
난 요정들과 우리를 감싸는 원을 만들고 붕 띄웠다. 내가 하늘에 떠오르는 것과 같은 원리지만, 기의 막 두께를 고르게 펼치는 건 더 힘든 일이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서 그걸 끌어 올렸다. 끌어 올리자마자 우리가 서 있던 땅의 주변 모두에서 곱등이들이 뛰어올라서 머리를 부딪쳤다.
"와아아아악!"
아이리가 비명을 지르며 다가왔다. 정면에서 보는 곱등이들도 혐오스러웠지만, 위에서 보는 빼곡한 곱등이들은 징그러움이 곱이 아닌 제곱이 되는 것 같았다.
요정들은 작은 입에서 구토를 흘리기도 했다.
"들켰구나!"
"크르르아아앙!"
곱등이인지 육식 맹수인지 모를 이빨 가는 소리와 함께 곱등이가 내 기막에 부딪치고 떨어진다. 너무 높이 올라 떨어져 내장이 터지는 곱등이들도 있었다.
그때 칸나가 내 어깨를 잡았다.
"에퍼리! 위를 봐라!"
나는 바로 위를 보았다. 이번에는 또 너무 아래만 신경 쓰고 있었다. 아까는 내 실수였다 쳐도,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곱등이들이 부딪치는 만큼 기의 막을 균일하게 보충해 줘야 했으니까. 안 그러면 이 막이 떨어진다.
난 위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아주 끔찍한 혼종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날개가 달린 곱등이였다.
"이 세계가 선을 많이 넘네."
솔직히 날개 달린 곱등이가 지구로 나왔으면 지구를 정복했음이 분명하다. 그만큼 압박감은 대단했다. 심지어 크기도 크다.
곱등이들은 날개를 푸드득거리며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땅의 곱등이들이 죽어 가면서 자랑스럽게 외쳤다.
"왔다, 노을 헌드레드!"
"노을 헌드레드가 나온 이상 너희는 끝이다! 하하!"
노을 헌드레드는 뭐야? 내가 요정을 바라보자 요정들이 좔좔좔 설명을 해 주었다.
"곱등이들에게는 각자 달린 번호가 있다. 1번부터 100번까지는 날개가 달려 있지. 그게 노을 헌드레드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내 입에서 욕이 나오자 요정들의 눈이 커진다. 아니, 욕이 안 나오려야 안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이다. 곱등이한테 날개라는 이 생각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만들어 내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순수한 '악의'의 결정체다. 대체 저 끔찍한 걸 누가 만들어 낸 걸까.
노을 헌드레드 중 하나가 우리에게 울부짖듯 말했다.
"얌전히 포박되어라, 인간들! 너희를 죽일 생각까지는 없다."
"요정들은 죽일 겁니까?"
"우리는 불살한다. 그건 우리들의 철칙이다."
"얼씨구."
곱등이들끼리 뭔 철칙까지 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무시하고 기막을 움직였다. 최대한 빨리. 나도 힘들다.
"인간들, 잘못된 선택을 했군!"
노을 헌드레드가 투두둥 하면서 몸을 부딪치고, 어떤 노을 헌드레드는 침까지 뱉었다. 끈적한 누런 침이 내 하얀 기막에 모욕적으로 흐른다. 나한테 묻은 것도 아닌데 진짜 죽여 버리고 싶다.
도서관이라. 나는 일단 그 모욕을 참고 그쪽으로 기막을 움직였다. 땅에서는 두두둥, 하늘에서는 투두둑. 요정들과 내 파티원들은 벌벌벌이다. 아주 개판이 따로 없다.
그나저나, 요정과 곱등이들의 교감계라. 나는 헌터니까 마수들의 교감계에 대해서도 공부한 적이 있다.
교감계를 공부하는 핵심은 이것이다. 마수의 언어 체계를 해석할 수 있는가? 정답만 말하면, 가능하다.
박쥐계의 마수는 초음파를 교감계로 사용하고, 개미계의 마수는 페로몬을 교감계로 사용한다. 그것을 해석할 수 있다면 말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교감계는 무엇일까. 난 설마 하고 생각했다. 이건 완전히 내가 살던 세계의 지식이고, 여기서는 나오지도 않은 설정이니까. 근데 연립주택까지 나온 마당에 뭐가 없으랴 싶어서 한번 시도해 본다. 밑져야 본전이니까.
나는 검의 신성력을 역류시켜서 받아들였다. 온몸에 간질거리는 느낌이 난다.
- 아, 저 새끼 갑각 더럽게 딱딱하네.
- 죽이고 싶다. 그래도 불살은 규칙이니까.
- 야, 이번 상황 끝나면 교미할래?
- 너 알 한 번에 몇 개씩 낳아?
- 300개.
- 그새 늘었다? 운동 좀 했냐?
- 피지컬 늘었지. 내 배 봐라, 빵빵해진 거.
- 줄무늬도 좀 진해졌는데? 너 산란기야?
아니, 미친. 이런 소리가 대체 왜 들리는 거야. 아주 역겨웠지만 그래도 난 그들의 소리를 감청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난 역겨움을 참고 계속 들었다.
거기서 난 아주 이상한 신호를 포착했다. 미약하지만, 확실한.
- 신성력, 나눠 줄 거야?
- 아니. 미쳤니? 고작 인간한테? 우리의 것을 왜 나눠 준다는 말이야?
- 그렇지, 그렇지. 난 네가 갑자기 나눠 준다고 하기에 네가 미친 줄 알았잖아.
난 뒤를 홱 돌아보았다. 요정들은 깜짝 놀라서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이 새끼들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