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노을의 숲 (3)
그런 것이었다. 요정들의 교감계와 곱등이의 교감계가 겹치고 있다. 그리고 그 교감계의 혼선은 놀랍게도, 신성력이라는 근원을 바탕으로 한다.
놀라운 것 하나, 이해 안 되는 것이 하나가 있다.
놀라운 건, 곱등이 역시 신성력을 부여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들을 썰면 신성력이 나온다는 거다. 이득인 부분이다. 굳이 요정들한테 신성력을 안 받아도 된다는 뜻이니까.
이해가 안 되는 건, 왜 똑같이 신성력을 사용하면서도 곱등이와 요정은 교감을 하지 못하는가? 분명히 혼선이 생기는 건 신성력을 공유하고 있어서 그러할 텐데. 그렇다면 나는 왜 이 둘의 얘기를 모두 들을 수 있는 것인가. 알 수 없었다.
"빨리, 빨리 도서관으로 가라! 인간아!"
"아, 네."
요정들의 성화에 난 대충 기막을 움직였다. 난 이미 요정들에 대한 마음을 굳혔다. 개만도 못한 것들이라고.
대체 요정이라는 건 뭐고 여신의 총애라는 건 무엇이기에 이렇게 오만한 걸까. 황족이라는 건 뭘까. 이런 세계에 적응하는 내가 진짜 씹덕인 건가 싶다. 그냥 마리나처럼 관조하는 게 어쩌면 맞았던 걸까. 살짝 회의감이 든다.
만약 그녀가 살아난다면 이런 회의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을 텐데. 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난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흔쾌한 죽음에. 아니다.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어떻게든 살릴 생각을 해야 한다. 신성력을 모아야 한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도서관으로 움직이자 아이리가 내 손목을 잡았다. 난 그녀를 돌아보았다.
"야, 너. 뭐 문제 있어?"
"왜요?"
"표정이 안 좋아."
아이리가 말하자 리얀과 칸나가 날 돌아보았다. 맞다. 난 표정 관리가 별로 안 되는 성격이지.
"그러게."
"그렇네."
나는 억지로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이리는 손가락으로 내 등을 찌르고, 칸나는 얼굴을 틀어 날 바라보고, 리얀은 내 손을 잡아 주었다.
"걱정하지 마."
그녀들의 말이 내게 와닿는다. 사랑, 일까. 모르겠다. 세 명이 날 전부 사랑하는 건 아닐 테지. 그저, 친한 느낌이겠지. 나도 아직은 그렇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따뜻함은 전해졌다. 이 따뜻함은 인간과 인간만이 나눌 수 있는 무언가였다. 분명히, 느낄 수 있다. 난 마리나가 아니다. 여기는 세계고 이들은 인간이다.
그러나 이 요정들은 정말 띠껍기 짝이 없다. 이 세계도.
"달려라, 인간아! 이리야!"
요정들은 내 기막이 단단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나대기 시작했다. 꼴 보기 싫다. 애초에 신성력을 안 나눠 줄 걸 알았으니, 내가 할 건 명확했다.
"요정님들, 죄송합니다. 제가 힘이 부족하네요."
"뭔 소리야?"
기막이 요정이 있는 뒤쪽에서부터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다. 곧 열기구 같은 기막이 추락하고 곱등이들과 노을 헌드레드들이 달려들기 시작한다. 나는 그녀들을 내 품 안에 모두 챙겼다. 그리고 떨어지는 유성처럼 추락하기 시작한다. 저 뒤에서, 요정들의 비명 소리가 들린다.
"뭐야, 어디 갔어?"
"어디 갔지?"
"안 보여!"
"야, 원래 우리는 안 보여. 우리한테 시각이 어디 있냐?"
곱등이들의 찌직거리는 소리가 울린다. 그녀는 숨을 참고 있었다. 조그맣고 투명한 천 안에서 그녀들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나는 검지를 펼쳐 손에 대었다. 작은 머리 세 개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귀엽다. 색깔도 달라서 보는 맛도 있다.
'뭐야?'
아이리가 입 모양으로 물어본다. 난 일단 검지에 손을 댔다. 지금, 나는 투명 망토를 쓰고 있다. 가티스가 쓰던 짝퉁이 아닌 마리나가 썼던 진퉁.
그녀의 시체에서 가장 가까이 있었던 건 나니까, 그때 몰래 시체 파밍을 잠깐 했지. 원래 헌터는 이렇다. 옆의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사람의 무기가 더 좋다면 가져다 쓰는 게 빈번하다. 그런 습관이 아직 남아 있었던 게지.
"츳, 놓쳤군. 인간이 아주 재빠르군."
"귀환한다."
곱등이들 주제에 아주 규율이 잘 짜여 있다는 생각이다. 곱등이들이 사라지자 나는 투명 망토를 걷었다. 그와 동시에 여자들의 각양각색 한숨이 나왔다.
"후와."
"헤엑."
"하아."
그녀들은 숨을 갑자기 참아서 그런지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했다. 리얀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투명 망토를 가지고 있었군요. 반출 기록은 성녀밖에 없었는데, 사라져서 찢어졌나 했더니."
"죄송해요. 아니, 미안해."
나는 리얀에게 말했다. 리얀이 마탑의 연구원이라고 했었나 부탑주라고 했었나.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관련인이니 민감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괜찮아. 황녀 구했으면 됐지."
"쿨하네."
"그럼."
리얀은 웃었다.
"반납은 안 해도 돼. 이미 손망실 처리 했어."
"진짜 쿨하네?"
"그럼 안 믿었어?"
리얀은 살짝 샐쭉거렸다. 아이리는 왠지 못마땅한 얼굴로 나와 리얀 사이에 섰다.
"아. 일단, 계획이 뭐야?"
"뭔 계획?"
"넌 계획 없이 이러는 사람이 아니잖아."
칸나도 고개를 끄덕거린다. 리얀은 아직 어리둥절해한다. 칸나와 아이리는 서로 알고 있다는 느낌의 눈빛을 교환한다.
"왜 너희만 알아?"
"황녀 전하는 몰라도 되십니다."
"리얀은 몰라도 돼."
칸나와 아이리는 서로 마주 보며 싱긋 웃었다. 리얀은 살짝 뿔이 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계획이 있다는 걸 용케 눈치챘다. 사실, 내가 그들을 감청하고 있으니 굳이 도서관에 꼬라박을 필요가 없는 거다. 계획의 급변이라고 해야 하나. 물론 요정들이 짜증 나서 일부러 그렇게 계획을 변경한 것도 있었다.
"계획이 뭔데?"
"기다림."
나는 다시 투명 망토를 뒤집어썼다. 그리고 그녀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난 눈을 감았다. 아이리와 리얀, 칸나가 다시 옹기종기 모였다. 그녀들로서도 곱등이를 보기 싫으니 어쩔 수 없던 거다.
"무슨 기다림?"
"그냥. 기다림."
"꼭 눈 감고 있어야 되는 거야?"
"그건 아닌데. 얘기하고 있으세요, 아가씨."
나는 아이리에게 말할 때 한 눈을 떴고, 말이 끝났을 때 다시 감았다.
"뭐야, 우리끼리 얘기하라고?"
나는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리얀과 아이리와 칸나는 띄엄띄엄 얘기를 하다가 순식간에 왁자지껄해졌다. 투명 망토에 음성 차단 기능까지 걸려 있다는 걸 안 이후로는 수다가 아주 종로 카페를 방불케 했다.
나는 그녀들에게서 차폐막을 쳤다. 너무 시끄러워서. 난 들을 게 따로 있었다. 감청을 하는 국정원 직원처럼 귀를 기울였다.
- 야, 이 자식들아! 내려! 혐오스러운 곱등이들아!
- 우, 우웨에에에엑!
- 조용히 해, 버릇 없는 요정들!
- 3암실에 가둬라.
- 야, 우리 집 201호가 왜 3암실이야!
- 조용히 해!
시끄러워. 이건 분명 방금 잡힌 요정들과 곱등이의 대화였다. 이상한 건, 곱등이의 대화는 더 선명하게 들리고 요정의 말은 계속 끊겨서 들린다는 점이다. 전파 상태가 안 좋은 듯. 물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더 깊이. 더, 더 깊이. 더, 더, 더…….
- 오늘도 나의 죄를 고백합니다. 나는 당신이 준 힘을 다스리기에 게을렀습니다.
- 사제님, 또 기도하고 계십니까?
- 그렇다.
-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요정왕이 또 폭주했습니다.
- 저런, 가장 신성력이 강한 곳으로 안내해라. 아직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미약한 모양이구나.
그 소리는 아주 미약했다. 하지만 명확히 들렸다. 무슨 개소리, 아니 곱등이 소리일까. 모르겠다.
하나는 그래도 정확히 알았다. 신성력이 가장 강한 곳이라. 그건 바로 요정 도시의 중심, 도서관에서도 내가 탄탈로스 숲의 요정 반지를 털었던 바로 그 방일 것이다.
"가면 되겠다."
나는 차폐막을 제거하고 눈을 떴다. 그러자 그녀들의 입이 확 다물렸다. 눈치껏 분명 방금까지 엄청나게 많은 말이 오가고 있었다는 건 알겠는데, 왜 갑자기 입을 닫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으, 응. 가자."
"그, 그래!"
"깜짝이야. 기척 좀 내."
리얀, 아이리, 칸나는 서로 당황해하며 얼굴을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느낌 바로 왔네.
"내 얘기 하고 있었나 보네."
"아닌데? 아닌데?"
"무슨 얘기야, 참."
아이리가 발악하고 리얀이 웃는 걸 보아하니 딱 알겠네. 대체 뭔 얘기를 했기에. 이럴 거면 차폐막 치지 말걸. 난 아쉬움의 입맛을 다시면서 투명 망토를 벗었다.
그다음, 검과 나는 혼연일체가 됐다. 분명히 통한다, 이 작전은. 내 기도 아니고 검의 기도 아닌, 무언가 혼합된 기. 그 아우라가 우리를 덮었다. 회색의 마나였다.
"가자."
"뭐지, 이 이질적인 마나는……."
리얀이 말했다. 칸나와 아이리 역시 마나의 이질성에 당황하고 있었다. 아마 세상에서 처음 보는 마나일 것이다. 그때 난 느꼈다, 땅속에서 올라오는 곱등이들을.
"어이, 어이! 지금 네가 서 있는 경계 구역은 500번대 노을의 경계 구역이다! 넌 몇백 번대야?"
그 말과 함께 땅속에서 더듬이 열몇 개가 푸슉, 쏟아져 나왔다.
"난 300번대야."
"300번대? 왜 여기 있어? 마을 입구 쪽 아니야?"
"길을 잃었어."
"그럴 수가 있나? 하긴, 그럴 수 있지."
"그렇지."
난 목을 일부러 긁으며 말했다. 이제 얼굴까지 나온 곱등이들은 내 말을 듣더니 갸웃했다.
"목소리가 좀 이상한데?"
"그러게."
"감기 걸렸어."
"그래? 감기 조심해라!"
곱등이들은 다시 땅속으로 쑥 들어갔다. 내가 뒤를 돌아보니 입을 막은 그녀들이 날 굉장히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너 곱등이야?"
"아니, 인간인데."
"근데 어떻게 곱등이랑 말이 통해? 아니, 애초에 곱등이가 우리를 왜 못 알아봤지?"
그건 대답해 주기 좀 꺼려지는데. 왜냐하면 난 이제 알기 때문이다, 곱등이들이 풍기는 마나가 검과 내 마나를 섞은 것과 비슷하다는 걸. 아니, 애초에 슬슬 마나가 섞이고 있었으니 내 마나라고 해도 된다.
"아가씨, 저 차폐막 치고 있을 때 뭔 얘기했는지 알려 주면 말해 줄게요."
"그건 안 되는데……."
아이리가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면 나도 안 알려 주지. 굳이 말해서 좋은 것도 아니고. 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내 기막에서 벗어날 뻔한 아이리가 황급히 내 쪽으로 붙었다.
그때, 저 멀리서 노을 헌드레드들이 날아왔다. 대충 눈대중으로 봐도 100마리 가까운 개체 수였다. 잠깐, 그러면 전부인데.
내 작전이 잘못된 건가? 그렇게 생각할 때쯤, 노을 헌드레드에서 하나의 실이 길쭉하게 내렸다. 저건 연가시겠네. 뭐지. 저기서 내 마나와 비슷한 기운이 강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 실은 내게로 슬슬 기어왔다. 난 기막을 강하게 펼쳤다. 내 머릿속에 울음이 들렸다.
- 오셨군요…….
뭐지, 그 말에는 울음이 담겨 있었다. 감격스러워하는 울음이.
- 어째서 침묵하고 계십니까? 절 앞에 두고도 부정하시렵니까?
나는 애초에 이렇게 교감하는 법을 모른다니까.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머릿속으로 글자를 만들어서 보냈다.
- 뭔 개소리야.
어, 되네. 나도 곱등이처럼 얘기할 수 있다. 근데 조금 자괴감이 드는 이유는 왜일까.
- 드디어 목소리를 하사하시는군요. 당신의 종이 여기 있습니다.
- 넌 누군데?
- 당신께서 붙여 주신 이름, 노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 솔직히 짐작은 하고 있었는데. 설마 하긴 했지만. 근데, 내가 벤 노을이 1호에는 연가시가 없었는데. 그렇다면 얘는 뭘까.
- 노을이 2호기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습니다.
아, 그렇구나. 2호기. 솔직히 별생각 없었는데. 난 1호기도 무참하게 베었고. 2호기는 죽일 필요가 없으니까 안 죽였던 것일 뿐인데.
- 안녕.
- 흐… 흐으윽…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그 실은 허리를 꼿꼿이 편 다음에 땅에 머리를 박았다. 노을 헌드레드 100마리 역시 우리에게 단체로 머리를 박았다. 나는 갑자기 일어난 이 상황에 대해서 벙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들의 눈에선, 너무 비현실적인 광경을 본 관계로 초점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