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노을의 숲 (4)
"인간이 들어왔다고 해서, 혹시 하는 감정을 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대인가 하고, 그대인가 하고."
노을이 2호였던 연가시가 내게 계속 간증을 해 댔다. 그것은 아주 연모의 시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난 부담스러울 따름이었다.
물론 이들의 경배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부담스러운 건 뒷사람들의 시선이었다.
"에퍼리한테 설명을 들어야 할 것 같은데."
"아니, 뭔가… 듣고 싶진 않은데, 필요할 것 같기는 해."
그녀들은 자기들끼리 속닥거렸다. 나는 일단 그녀들을 무시하기로 했다. 이렇게 나한테 부복한 곱등이들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네가 노을이 2호야?"
"지금은 퍼스트 선셋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퍼스트 선셋……."
난 그걸 입속에서 굴려 보며 생각했다. 지랄맞네. 그는 계속 내게 머리를 박으며 얘기했다.
"당신이 떠나가고 나서부터, 우리에게도 꽤 많은 시련이 있었습니다. 저희에겐 노을 혁명이라고 불리는 사건이었죠. 저를 필두로 하여 수많은 곱등이가 커지고, 산란기를 거쳐 부대를 만든 다음에 요정의 숲을 습격했습니다."
"음, 습격한 이유는?"
"저희는 그저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요정들이 저희를 배척했습니다. 돌을 쏴서 죽이고, 1톤짜리 모래를 부어 우리의 3만 개나 되는 알을 생매장해 버리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안 했음에도 불구하고요."
"그렇구나. 힘들었겠어."
연가시, 아니 퍼스트 선셋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몸을 주억거렸다고 해야 하나. 어디가 머리이고 어디가 몸인지도 모르겠으니.
"그런데 교감계는 어떻게 생긴 거지?"
"당신이 주신 힘이 있지 않았습니까. 사실 불행한 역사가 있습니다."
퍼스트 선셋은 비장하게 말했다.
"제 품에서 나온 아이는 모두 당신의 힘을 가지고 있어 교감계가 활성화돼 있었지만, 다른 아이들은 그저 날뛰기만 바빴습니다. 지성도 없었고요. 그래서 모두 학살당하고 말았죠. 요정들은 잔인했습니다. 저희에게 보란 듯이 노을이의 다리를 자르고 몸통을 부수고 불태웠습니다. 그들에겐 그게 축제였습니다."
"그러면 여기 있는 곱등이들은 다 네 자식들이겠네?"
"맞습니다. 당신이 절 품어 주신 곳에서, 저는 이를 갈면서 젖은 흙을 파 나갔습니다. 숨조차 쉬기 힘든 곳에서 아이를 계속 낳았죠."
품었다는 건 좀. 이상한 표현 같지만, 그래 뭐, 어떻게 됐는지는 대충 알 것만 같다. 내가 신성력을 흡수한 것처럼, 이 노을이라는 친구도 내 힘의 편린을 흡수한 것이다. 그러니까 기의 파장이 맞는 거고. 그렇게 설명하니 딱 맞는다.
"그렇구나. 그러면 말이 좀 쉽겠는데?"
"네?"
내게 중요한 건 요정들과의 계약이다. 물론 요정들이 계약을 지키지 않을 건 알지만, 어느 정도 내가 뿌린 씨앗은 거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았기에.
"여기서 나갈 의향은 없냐?"
"있습니다."
퍼스트 선셋은 흔쾌하게 말했다. 이야기가 갑자기 수월하게 진행될 것 같다.
"저희는 요정들에게서 힘을 전부 뺏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 힘을 가질 자격이 없는 것들이니까요. 그것만 끝나면 알아서 나가려고 합니다."
"음."
그건 좀 내 생각과는 안 맞는다. 내가 고민하고 있자 리얀이 앞에 나서서 물었다.
"그렇다면 요정님들의 신성력을 전부 뺏지 않고서는 나가지 않겠다는 말씀인가요?"
"그렇다."
바로 반말하는 것 봐. 위계질서 확실하네. 그들이 모시는 건 나니까, 다른 사람한테는 고압적인 말로 응수했다.
"내가 나가라고 해도?"
"당신께서 나가시라면 나가겠습니다."
내가 그렇게 묻자 퍼스트 선셋이는 바로 다시 부복했다. 그러면 쉬운 것 아닌가. 그때, 내 귀로 노을이들의 교감이 들렸다.
- 퍼스트 선셋 님, 요정왕이 호송 중에 폭주했습니다!
- 뭐?
- 뭐라고?
요정왕이 폭주했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도 모르게 노을이들의 교감에 말을 걸고 말았다.
"가 봐야겠네."
"네. 안내하겠습니다. 타시지요."
뭘? 그때 노을 헌드레드 네 마리가 나와서 우리에게 머리와 엉덩이를 다소곳이 내밀며 내려앉았다.
"…으."
그녀들의 비명 소리가 하나의 하모니가 된다. 솔직히 나도 싫다. 근데 보다 보니까 좀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미쳐 가는 건가?
"타자."
"…후우. 그래. 한 번 탄 거, 두 번 못 타냐."
내가 노을 헌드레드에 탑승하자 퍼스트 선셋이 내 옆에 착 달라붙었다.
"야, 근데, 내가 노을이를 좀 많이 죽였는데 괜찮은 거야?"
난 문득 걱정이 되어서 물었다. 여기 오자마자 노을이들을 학살한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도 전해졌을 텐데.
"괜찮습니다. 당신께 죽는 것은 무한한 영광입니다."
"미친놈인가."
나는 피식 웃었다. 부담스럽다 못해 웃길 지경이다. 날 이렇게 받들어 주는 사람이 있다니. 물론 S급 헌터 때도 나는 언제나 박수갈채를 받는 사람이었지만, 이런 맹목적인 복종과는 달랐다. 그저 S급 헌터라는 타이틀 때문에 받았던 거지. 근데 이들은 달랐다. 그냥, 나라는 이유로 존경하고 있다. 이 세계는 확실하게 미쳐 있네.
"갑시다."
곱등이들에게 붙어 있으면 안 되는 날개들이 비행기 엔진 소리를 내며 퍼덕이기 시작한다. 곧 날개가 위 아래로 움직이는 게 잔상으로 보일 정도로 빨라진 다음, 우리는 곧 이륙했다.
"이 바닥이 카펫이라고 생각하면 좀 편해지는 것 같기도."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니까."
"그게 너무 무섭다."
리얀은 한숨을 쉬면서 곱등이 등을 손바닥으로 잡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황녀가 곱등이를 타고 있다니, 만약 황제가 살아 있었다면 이런 익스트림 한 경험을 제공한 내 목을 자를 수도 있었다.
노을 헌드레드는 활강과 상승을 반복하며 아주 곡예비행을 펼치고 있었다. 바람의 저항을 최소한으로 받으려는 생쇼였다. 물론 목표까지 도달하기 위한 최선의 수단이겠지만, 아이리와 리얀, 칸나는 그걸 맨몸으로 버틸 수 없었기에 곱등이의 몸에 착 달라붙어서 끔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근데 어디로 가는 거야?"
내가 물었다. 이쪽 방향은 내가 알기로 우리가 탄탈로스 숲의 요정 반지를 갈취했던 도서관 방향이 아니었다.
"가장 성스러운 곳으로 갑니다."
"거기가 도서관 아니었어?"
"아닙니다. 그곳은 이곳에서 제일 성스럽지 않은 곳이죠."
그런가? 신성력이 가장 많이 모인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노을 헌드레드들의 빠른 비행에 의문점을 추가했다.
"이곳은 요정의 숲 입구로 나가는 방향인데?"
"맞습니다."
"저의 아버지, 제로 선셋이 있는 곳으로 갑니다."
아, 노을이 1호. 내가 베어 죽였었지. 여기 있는 것들은 다 노을이 1호의 자식들일 거고. 이 퍼스트 선셋도 노을이 1호의 자식일 터였다.
…산으로 간다, 산으로 가.
저 멀리서도 요정왕이 폭주하는 게 느껴졌다. 엄청난 신성력의 폭발이었다. 우리는 여전히 비행 중이었다. 그때, 노을이들의 구부러진 다리가 노을 헌드레드들에게 날아왔다. 난 피하려고 했지만, 노을 헌드레드들의 반응이 먼저였다.
노을 헌드레드들은 강한 앞다리로 그걸 모두 쳐 냈다. 강하네. 싸움의 싸 자도 모르는 요정들을 압박하기에는 충분한 전투력으로 보였다.
"요정왕은 근데 어떻게 잡았냐? 꽤 강할 텐데."
난 퍼스트 선셋에게 물었다. 요정왕은 성녀와 비견될 정도의 신성력을 가졌는데. 다양한 스킬도 많이 알고 있을 거고. 요정왕이 성녀에게 몇 가지 스킬만을 가르쳤던 걸 소설에서 봤지만, 그가 녹록지 않은 자라는 건 뻔했다.
또 걸리는 건 요정왕의 성질이다. 요정들의 말이 있었지. 요정왕은 자비롭다고, 일반 요정들과는 달리. 나도 소설에서 읽어서 그렇게 알고 있다.
"요정왕은 저희를 모두 말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퍼스트 선셋에게서 나온 말은 완전히 달랐다.
"처음에는 화친을 주장했죠. 하지만 그건 그의 계략이었습니다. 그는 내 손을 잡았고, 전 앞다리를 내밀었습니다. 그때, 제 몸은 하얀 불꽃으로 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노을이들의 교감이 이렇게 확장될 수 있는 건 모두 저라는 매개를 통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아마 그는 저를 죽이면 곱등이들이 사분오열할 거라고 생각했겠죠. 하지만 저는 아니었습니다. 제 본체는 이 실과 같은 몸이었으니까요."
퍼스트 선셋은 지금 생각해도 분하다는 듯 이를 갈며 말했다.
"결국 저는 모든 노을이에게 명령하여 요정왕을 포박했죠. 신성력을 감당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습니다. 당신께서 하사하신 힘은 신성력과 부딪쳐도 꿀리지 않는지라, 그는 저와 3만 마리에 해당하는 노을이들의 전력을 막을 수는 없었죠. 물론 1만 마리가 넘는 희생은 불가피했습니다."
가슴 웅장해지는 전투구나. 요정왕과 곱등이의 대결이라니.
"근데 그렇게 강한 놈을 막 호송한 거야?"
"봉인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서요. 제가 볼 때는, 요정왕이 한 수를 숨겨 놓은 것 같습니다. 괜찮습니다, 요정왕은 저희를 이길 수 없으니까."
지금도 노을이의 잔해물들이 토네이도처럼 비산하고 있는데, 퍼스트 선셋은 여유로웠다. 이건 단순히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고 있었고, 목숨 자체의 무거움을 모르고 있었다. 벌레라 그런 걸지는 모르겠다.
"야."
"네?"
나는 퍼스트 선셋을 바라보았다. 뭔가 얘기해 주고 싶은 게 있었는데, 됐다 싶었다. 내가 지금 연가시랑 뭐 하고 있나,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
"에퍼리!"
내가 딴생각에 빠져 있을 때, 칸나가 나를 급하게 불렀다. 아주 가까이서 신성력의 폭풍이 우리를 덮쳤다. 이건 내가 느끼지 못했다. 저 밑을 바라보니 마나의 맥동이 느껴졌다. 리얀이 보여 준 안개 스킬과 마찬가지로 함정 고급 스킬인 모양이었다.
난 바로 폭풍의 사정권에서 벗어나 사각으로 뛰어내렸다. 그다음 기막을 거미줄처럼 만들어 휘말리는 노을 헌드레드들과 내 파티원들을 그러모았다. 난 기막을 어깨에 둘러메듯 메며 선물을 준비한 산타클로스처럼 사뿐히 내려갔다.
"함정이네."
"죄송합니다. 미처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네 잘못이냐."
나는 그렇게 말했다. 저 멀리 숲 사이로 작은 점, 아른거림, 모자이크 따위로 표현될 만한 이질적인 무언가가 떠오르고 있었다.
난 눈을 찡그려서 최대한 시력을 강화했다. 내가 이렇게 소형화 마법으로 작아져 있는데도 그 점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점은, 모자이크처럼 보이다가 곧 요정의 형태로 보였다.
"저게 요정왕인가. 저렇게 작은 놈일 줄 몰랐는데."
"그래. 내가, 요정왕 아르펜이다."
난 그저 작게 읊조렸을 뿐이지만, 누군가가 내 귓가에 대고 말했다. 난 깜짝 놀라서 옆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여전히 작은 점으로 보이는 요정왕이 있었다.
"너로구나, 이 곱등이들의 우상이. 인간일 줄은 몰랐다."
그때 퍼스트 선셋이 나섰다.
"요정왕아, 어찌 이 모든 노을을 상대하려 하는가. 너희는 한 줄기 실낱이오, 우리는 불타는 노을이니. 너희는 가까이 오면 올수록 불에 탈 것이 자명하다."
"곱등이 새끼가 문자를 배우니까 더 역겹기 그지없구나. 이제 연가시라고 해야겠지. 여신님이 침묵하실 때를 어떻게 노려 가지고 왔는지는 모르나, 이대로 여신님의 음성을 기다리는 것도 요정왕으로서 창피한 일이다."
"처단할 수 있겠는가?"
퍼스트 선셋이 실 같은 몸을 꼿꼿이 세웠다.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땅에 구멍들이 폭, 폭, 폭, 폭 뚫렸다. 곧 땅은 벌집처럼 구멍투성이가 되었다. 그곳으로, 곱등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저 멀리 언덕까지 메운 곱등이의 양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그 웅장한 광경에, 아이리는 헛구역질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