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노을의 숲 (5)
"여신님이 하사하신 땅에 벌레들이 창궐하느니, 아주 웃긴 세상이 됐구나."
"내가 볼 때는 네가 더 징그럽게 생겼구나."
요정왕은 어처구니없다는 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나도 좀 어처구니없긴 하다. 요정들은 대개 귀엽게 생겼다. 비비드 컬러의 옷과 멜빵을 하고 있었고, 요정왕은 작긴 하지만 확실히 포스를 지니고 있었다.
"우리는 여신을 숭배하지 않는다. 네가 아무리 여신을 들먹인들 난 아무런 감흥이 없다."
"그러니까 너희가 벌레라는 것이다. 지고함과 격을 모르는 것들이 어찌 세상에 편입될 수 있겠는가?"
요정왕은 웃었다. 퍼스트 선셋은 몸을 살짝 비틀었다. 사람으로 보면 얼굴을 찡그렸다고 표현할 수 있나, 비슷한 느낌의 움직임인 듯하다.
"어째서 웃는 거지? 이 많은 동지가 보이질 않는가?"
"웃기지 않은가. 벌레들의 난이라니. 너희가 하는 게 혁명 내지는 폭동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도 격이 맞는 것들끼리 하는 것이다."
요정왕은 싸늘하게 말했다. 그 작은 몸 좌우에서 날개가 펼쳐졌다. 왼쪽은 얼음의 날개, 오른쪽에는 화염의 날개였다. 발에는 어둠이 뿌옇게 꼈고, 머리 위에는 아름다운 빛 가루가 맴돌았다.
"너희는 목숨을 건 행동이라고 해도 그건 우리에게는 해프닝에 불과하다. 인간이여, 그렇지 아니한가?"
요정왕은 말의 타깃을 나로 바꿨다.
"네 집 안에 개미가 집을 지었다고 하자. 그러면 넌 그걸 개미의 혁명이라고 하는가? 아니지. 그냥 스킬을 사용해 불태우면 그만이다."
"그건 맞지."
나는 쉽게 긍정했다. 맞는 말이니까. 그러나 퍼스트 선셋은 실망하지 않았다. 이렇게 고민되는 순간은 처음이었다.
"요정들에게 들었다. 너는 신성력을 원한다고. 아마 요정들은 나눠 주겠다고 거짓말을 했겠지. 난 그런 거짓말은 안 한다. 다만 여신님께 건의는 한번 해 보지. 나를 도와주면 말이다. 넌 꽤 강한 인간인 듯하니 내게 도움이 되겠지."
요정왕은 근엄하게 말했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굳이 감청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혹시 내가 이 벌레들에게 진정으로 잡혀 있었다 생각해서 고민한다면, 내 그 고민은 지워 줄 수도 있지."
요정왕은 서서히 떠올랐다. 서서히, 서서히, 하지만 멈춤 없이. 곱등이들의 강한 점프력으로도 감히 닿을 수 없는 곳까지.
"농담은 한 번으로 족하다, 벌레야."
요정왕은 그렇게 말하고 왼쪽 얼음 날개를 펄럭였다. 그 부분에서 강력한 한기가 쏟아져 나와 먼저 요정왕 발밑의 바닥을 얼리고, 살랑이던 풀들은 뾰족하게 얼어 마름쇠같이 되었다.
솨아아악-
그와 동시에 바람이 불며 산등성이 전체가 한 번에 얼었다. 시작은 그저 찬바람이었지만, 그 안에 있는 반짝거리는 결정들은 절대적인 온도를 담고 있었다. 오싹해질 정도였다.
산등성이를 뒤덮은 노을이들은 전부 조각상처럼 얼어 있었고, 바닥에 떨어져 조각나 머리, 가슴, 배가 세 동강이 난 노을이도 있었다.
"…어떠한가, 인간. 난 자비로운 요정왕이다. 선택할 시간은 충분히 줬다. 지금까지도 선택을 하지 않으면 이 요정왕을 기만하는 것이다."
"어째서 선택을 강요하지?"
그걸 말한 건 내가 아니었다. 바로 허리를 꼿꼿이 편 퍼스트 선셋이었다.
"네가 나보다 높은 격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나?"
"그건 태생적인 것이다. 그건 누구도 바꿀 수 없다."
"그러면, 내 격이 너에게 맞는지 한번 시험해 보지."
"벌레야, 내 힘을 보지 못할 정도로 눈이 멀어 버렸나?"
퍼스트 선셋은 대답도 하지 않고 땅을 파고 들어갔다. 난 퍼스트 선셋에게 감각을 드리워 놓고 있어서 그것이 얼마나 빠른지 알 수 있었다.
우리가 다른 대화를 나누기도 전에, 곧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얼어 있던 곱등이들은 무너지고 깨졌다. 요정왕 때문에 살얼음이 낀 동토(凍土)도 쩌적 하는 소리를 냈다.
"아주, 웃기는 짓을 하는구나."
요정왕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땅이 쩍 갈라지며 나온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건 바로 제로 선셋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벤 노을이 1호.
그러나 노을이 1호는 분명히 내가 죽였다. 여기 있는 건 제로 선셋이었다. 아마도 느껴지는 기로 파악해봤을 땐, 퍼스트 선셋이 들어간.
그러니까, 지금 제로 선셋은 퍼스트 선셋이 몸 안으로 들어가 조종을 하는 것이었다. 노을이 1호의 눈은 빛나고 있지 않았지만 몸뚱이는 완전히 커져 있었다. 마치 곱등이 괴물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
우리가 지금 작아져 있으니 그렇게 보이는 걸 수도 있지만, 어림짐작해도 2m는 되어 보이는 거구였다. 슈퍼 노을이다.
"웃기는 짓을 하는구나, 벌레야."
요정왕은 100개는 족히 되어 보이는 불덩이들을 쏘아 냈다.
노을이 2호, 노을이 1호와 합체된 슈퍼 노을이는 날개를 붕붕거렸다. 슈퍼 노을이는 내가 아는 노을이와는 달랐다. 노을이 2호가 들어가서 그런 것일 테다.
날개는 물론이고, 내가 잘라 낸 허리마저 붙어 있다. 그저 얇았던 앞다리는 근육이 붙어 있기까지 하다. 이제는 손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의 정교함마저 갖추었다. 앞다리 안쪽에는 톱니 모양이 있었다.
쉬이이이익!
바람이 길게 끌리는 소리가 나며 슈퍼 노을이가 빠르게 움직였다. 나도 아주 한순간 놓칠 정도의 빠른 속도였다. 그와 함께 불이 전부 베였다.
동시에 내가 본 건 요정왕 앞에서 날고 있는 슈퍼 노을이가 앞다리의 칼로 요정왕을 베어 가는 장면이었다.
요정왕은 순간 눈 모양의 방어막을 펼치며 슈퍼 노을이의 공격을 막았다. 그들은 서로 멀어지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벌레 녀석이 아주 미쳤구나."
요정왕은 분노한 듯했다. 슈퍼 노을이에게 분노했다기보다, 잠시나마 위협이란 감정을 느낀 자신에게 느끼는 분노였다. 슈퍼 노을이는 요정왕이 숨을 돌릴 시간을 주지 않았다. 슈퍼 노을이 역시 분노하고 있었다.
아마, 내가 무시당했을 때부터 계속 저런 상태였던 것 같다. 슈퍼 노을이는 날개를 눈에 안 보일 정도로 펄럭거렸다.
그와 함께 슈퍼 노을이가 뿜어낸 바람들이 회색 소용돌이가 되어 역으로 돌아가 산등성이를 쓸어버린다. 그건 따뜻한 훈풍이었다. 그건 곧 얼어 버린 곱등이들을 녹이는 토네이도였다.
녹은 곱등이들은 빠른 속도로 요정왕을 압박해 갔다. 높이 띄워진 요정왕에게 닿기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하며 짓밟는 걸 허락하기도 했다. 요정왕의 주위로 곱등이로 쌓은 피라미드가 형성이 됐다.
"이래도 격이 안 맞다고 할 텐가?"
"흐흐……."
요정왕은 허탈하다는 듯이 웃었다.
"웃기구나, 세상은. 정말로. 왜 아직 여신은 침묵하고 계시는가?"
"이제 와서 여신을 찾는가?"
"난 그저 허락을 받고 싶었을 뿐이다."
요정왕은 눈을 감았다. 그 주변에서 수많은 마법진 같은 것들이 빛을 내며 문양을 만들어 갔다.
"호랑이 없는 데선 여우가 왕이란다, 벌레들아. 난 이제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는 거야."
그와 함께 엄청난 바람이 모든 마법진에서 불었다. 그건 끌어당기는 것도 아니고 내쫓는 바람도 아니었고, 누군가를 조이는 태풍도 아니었다.
그때, 하늘에서 빛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밤이라면 별이라고 착각했을 자그마한 점들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건 기절한 요정들이 빛을 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 요정들은 곧 마치 블랙홀에 빨리듯 짓이겨지고 뭉쳐 한 알의 빛이 되었다. 아름답긴 했지만 분명한 죽음이었다. 빛나는 죽음이라, 그 이질감에 나는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빛들은 요정왕에게 쏘아져 더 커다란 빛을 만들어 냈다.
"인간, 아직도 선택하지 못했나."
요정왕이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힘이 강해진 게 느껴진다. 확실하다. 수많은 노을이가 짓밟히며 쌓아 올린 피라미들이 일수에 스러질 것임을 난 예감했다.
반짝거리는 빛이었다. 그와 함께 피라미드가 타기 시작했다. 노을이들은 온몸에 불이 붙은 채로 사방팔방 비산했다.
"끄아아아아악!"
"아악! 아악!"
그건 분명히 잔인한 광경이었다. 그들도 그들 나름의 소통을 했겠지만, 내가 이해할 수 있게끔 소통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그저 인간의 말을 하게 됐을 뿐인데, 난 그게 잔인하다고 여겼다. 나도 지구에서 벌레를 잡아 본 경험이 당연히 있다. 하지만 그들이 비명을 지르는 건 듣지 못했다.
"명예로운 죽음이군."
"누구의 명예인가?"
"바로, 저기 있는 분이시다."
슈퍼 노을이가 나를 가리켰다. 실제로, 그건 내게 힘이 되고 있었다. 그 곱등이들이 죽어 가면서, 회색 신성력이 내게 흡수되고 있었으니까. 그건 강제적인 주입이었다. 내가 거절하고 말 것도 없었다.
"인간, 빨리 선택하라. 이 혐오스러운 벌레들인가 아니면 빛나는 요정왕의 명예를 나눠 가질 것인가? 이만큼의 노골적인 격을 보여 주고도 너에게 선택지를 주는 건 나의 관대함이로다."
요정왕의 몸에서는 빛이 간헐적으로 번쩍거리고 있었다. 요정의 기들을 흡수한 것이다. 난 곱등이의 기들을 흡수해 그걸 조절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입을 열 때 노을이와 눈을 마주쳤다. 그가 나를 보지 못하는 건 알았다. 곱등이들은 시각이 없으니까. 노을이들도 시야가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다만 나를 느낄 수는 있겠지. 나도 그를 느끼고 있었다.
슈퍼 노을이는 내게 뚜벅뚜벅 걸어와서 부복했다. 머리를 땅에 처박고, 엉덩이를 치켜들었다. 내 작은 몸 앞에 커다란 머리와 더듬이가 살랑거렸다.
"제 머리를 자애로우신 당신께 조아릴 테니, 귀하신 발을 이용해 나를 으깨 주소서. 내 삶을 받아 주소서."
그는 곱등이들의 사체가 내게 힘이 되는 걸 알아챘다. 그는 꼼짝 않고 부복했다. 그 광경에 요정왕은 배를 잡고 웃었다.
"아주 촌극을 펼치는구나. 하등한 인간과 더 하등한 벌레들의 서로 물고 빠는 광경이라니. 허락되지 않은 흉측한 교미를 보는 듯하구나."
노을이는 그 말을 무시하고 머리를 박은 채로 흙에 비볐다.
"내가 부족하게 태어난 건 알고 있나이다. 내가 혐오스럽게 보이도록 태어난 것도 역시 알고 있나이다. 못난 내 삶이라도 당신에게 도움이 된다면 부디 받아 주소서. 전 이렇게 당신을 숭배하나이다."
나는 눈을 감았고, 곧 다시 눈을 떴다. 역시 곱등이는 혐오스러웠다. 끔찍했다. 내 칼로 베는 것도 싫었다. 이런 곱등이가 나를 숭배하는 것도 역시 꺼려지는 일이었다.
그건 태생적인 것이었다. 벌레는 인간이 보기에 흉측했고, 그냥 그랬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노을이를 죽일 수는 없었다.
어째선지, 노을이 1호를 죽였을 때의 죄책감이 이제야 밀려들었다. 그 역시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나를 이렇게 숭배했겠지. 나는 그의 외침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그를 죽였겠지. 그는 죽으면서도, 나를 경배하면서 나를 위해 죽는 건 명예롭다 생각했겠지.
"씨발."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오자 뒤의 일행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난 노을이의 머리에 검을 댔다.
"난 네가 날 경배하는 것도 싫다."
난 말했다.
"왜 이렇게 넌 끔찍하게 생긴 것이냐. 통통한 배와 꺾인 다리, 길쭉한 더듬이, 점프력과 번식력, 뭐 하나 끔찍하지 않은 게 없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날 따르는 놈을 죽이는 건 나는 싫다. 그건 파티장으로서 할 일이 아니야. 그건 나에 대한 배신이다. 인간은 모든 걸 지키고 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몇 가지 규칙을 세워 두고 살지. 자신이 세운 규칙 중 하나라도 위배되게 산다면 사람은 사실상 죽는 것과 같다. 난 죽고 싶지 않다."
난 칼을 거둬들이고 요정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건 다른 얘기인데, 난 나를 얕잡아 보는 놈들을 많이 봤다."
그리고 엎드린 노을이를 거쳐 앞으로 뚜벅뚜벅 나아간다.
"그런 새끼들, 다 내 발 앞에서 지리게 만들었는데, 넌 어떨지 궁금해졌다. 오만하게 태어난 존재는 어떻게 지리는지."
"역시 여신님은 인간을 싫어해."
요정왕은 박수를 쳤다.
"아니면 이렇게 불완전하게 만들 수 없거든."
그 말이 신호탄이라도 된 것처럼, 난 요정왕에게 쏘아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