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노을의 숲 (7)
아이리는 고통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그건 눈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왜 이럴까. 요정왕을 눈으로 본 순간 고통은 너무나 격심해졌다. 그녀는 알았다. 자신의 눈 안쪽의 무엇은, 요정들의 신성력에 같이 반응하고 있었다.
그러니 요정왕이 본힘을 드러낼 때 이렇게 발작을 하게 된 것이다. 요정왕의 신성력은 이 요정의 숲 전체를 감싸고 있었으니까.
"…음?"
그런 생각을 마치고 눈을 떴을 때, 그녀는 하얀 턱이 자신의 눈 위치에 있는 걸 느꼈다. 그리고 오른쪽 눈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따뜻함…….
그녀는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거기에는 에퍼리가 눈을 감고 자신의 눈에 손바닥을 대고 있었다. 뭔가, 뭔가 부끄러웠다. 이 느낌은 뭘까. 자신에게서 빠져나가는 힘이 에퍼리에게 들어가는 걸 알 수 있었다. 뭔가, 영혼의 키스라고 할까. 아이리에겐 그런 것이 느껴졌다.
창피해서 눈을 감고 싶어도 감을 수 없었다. 눈에서 계속 무언가가 쏟아지고 있었으니까.
지금이라도 에퍼리를 불러서 그만하면 안 될까. 키스와 뽀뽀에 대해서 그녀가 아는 건 귀족의 예가 전부였다. 손등에 하는 키스, 발등에 하는 키스 등의 의미. 근데 이렇게 영혼끼리 하는 키스는 무슨 의미인지, 그녀로서는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계속 에퍼리의 얼굴을 보기도 뭐해 눈을 반대편으로 굴렸다. 그곳에서는 리얀과 칸나가 기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부끄러웠다.
"으."
아이리는 너무 부끄러운 마음에 신음을 토했다. 그때, 에퍼리의 눈이 번쩍 열렸다. 부드러워 보이는 갈색 눈동자에 자신의 얼굴이 고스란히 빨려 들어가 있었다. 자신의 눈에는 에퍼리가 담겨 있겠지.
"……."
"……."
그리고 눈에서 힘의 모든 방출이 끝난 게 느껴졌다. 에퍼리가 천천히 손을 그녀의 눈에서 뗐다. 아이리는 힘이 빠져서 다리가 풀렸다. 그때 에퍼리가 허리에 손을 둘러 그녀가 넘어지는 걸 다시 바로 세워 주었다.
에퍼리는 말했다.
"…갔다 올게요."
"…그래."
아이리는 그렇게 에퍼리를 배웅했다. 요정왕에게 달려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리는 오른쪽 눈을 손으로 훑었다. 에퍼리의 손바닥에서 느껴지던 감각이, 마치 화인처럼 뜨겁게 남아 있었다.
요정왕은 나와 아이리가 영혼을 맞대고 있을 때 공격을 했다. 비겁하기는. 언제는 그런 놈 아니라더니. 하지만 내가 앞에 친 방벽은 아이리에게서 힘을 흡수하면 흡수할수록 강해졌기에 요정왕에게 뚫릴 걱정은 없었다.
아이리가 가진 신성력의 흡수가 끝났을 때 그녀는 휘청거렸다. 나는 황급히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그녀의 한쪽 눈에는 여전히 신비스러운 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 색인 붉은색으로 비친 빛은 오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갔다 올게요."
"…그래."
더 이상 아이리의 눈에 빠져 있을 시간은 없었다. 난 지금 요정왕을 해치워야 했다.
난 방벽을 없앴다. 방벽을 순식간에 없애자 아이리의 힘이었던 붉은빛이 대기에 뿌려졌다.
"야, 넌 체력이 인간만의 문제라고 생각하냐?"
난 칼을 들었다. 회색과 붉은색이 합쳐진, 나만의 이상한 신성력이었다. 그래도 파괴력만큼은 훨씬 강했다. 이 싸움은 애초에 끝이 났다. 하지만 나는 궁금했다.
"한번 시험해 보자. 이 세계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법칙들이 있을 거거든."
"뭐라는 것이냐?"
"우주의 행성마저도 초과된 엔트로피를 못 견디고 스러지는데, 이 고증 안 맞는 병신 같은 세계에서 일진 노릇 하는 너는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지니고 있을까?"
난 바로 그의 앞으로 달려들었다. 어차피 뒤든 앞이든 상관없다고 했지. 그러면 정면이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요정의 허리가 움푹 파였다.
"으윽!"
요정왕의 입에서 드디어 비명 소리가 나왔다. 난 속으로 힘을 더 줄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문과긴 한데, 열역학 제2법칙은 알거든? 엔트로피의 법칙 말이야. 여긴 중세니까 그런 건 모르겠지?"
"계속… 무슨 소리냐?"
"기다려 봐. 온몸으로 체험하게 해 줄게."
퍼퍼펑!
그와 함께, 요정의 온몸에서 폭발음이 터졌다. 내 신성력과 요정왕의 신성력이 부딪치며 폭발을 낸 것이다. 난 마나의 흐름을 이용해 그 폭발력이 온전히 요정왕에게 가게끔 방향을 바꿔 놓았다. 이런 전투에는 요정왕은 젬병이어서 그저 맞을 수밖에 없었다.
"아악!"
나는 요정왕이 비명을 지르건 말건 계속 요정왕의 몸을 터뜨려 나갔다. 요정왕의 몸은 가히 불꽃놀이의 터전이었다. 신성력이 닿는 곳마다 반탄력에 의해 터졌으니까.
요정왕의 크기는 점차 작아지고 있었다. 이것도 요정에 의해서 부풀린 에너지니까, 요정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그 떨어져 나간 신성력은 내 검이 자동으로 흡수했다.
"저 우주의 태양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스러질 텐데, 너 따위가 어찌 에너지가 무한하다고 착각할까. 무지에서 온 오만이야."
"뭔 소리를 하는 거냐, 자꾸?"
"뒈질 준비 하라고."
나는 요정왕을 계속 베어 나갔다. 지금까지 벤 숫자를 모르겠다. 요정왕은 몸부림을 치면서 내 칼날을 어떻게든 피하려 했지만, 5m에 육박하는 커다란 몸뚱이는 피하려야 잘 피할 수도 없었다.
"으으… 인간 따위가, 인간 따위가… 어찌, 이 고결한 요정왕을 해하려 드는가!"
요정왕이 울부짖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너도 인정하지 못하는 건 똑같네. 난 심지어 격의 차이가 나는 걸 이렇게 보여 주고 있는데."
"뭐?"
"네가 나한테 말했잖아. 왜 인정하지 않냐고, 격의 차이를. 넌 왜 인정 안 해?"
내 말에 요정왕이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검술을 펼쳤다. 요정왕에게서 신성력을 최대한 도려내고 있었다. 요정왕이 한 번에 까무룩 하고 죽으면 신성력이 다 흩어질 위험이 있으니 돌려 깎는 거다. 얘가 느낄 고통 따위, 상관하지 않았다.
"여… 여신의 징벌이 무섭지도 않은가?"
요정왕은 말했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베어 나갔다. 그는 내가 무시하자 분노를 하며 크게 소리쳤다.
"무섭지 않느냐는 말이다! 이 잡종 인간 놈의 새끼야!"
"고귀한 척은 다 하더니 욕하는 것 봐. 그게 생물의 본능이라니까? 뒈지기 전엔 다들 욕을 한 움큼씩 뱉게 돼 있어. 내가 너 같은 놈 많이 사냥해 봐서 잘 알아."
나는 말했다.
"그게 본능이야, 네 본능도 모르는 불쌍한 것아."
"인간한테 모욕당하다니, 요정왕의 이름이 우는구나!"
"울지 말고 뒈져라, 그냥. 너한텐 볼 장 다 봤다."
나는 요정왕의 목에 칼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내 칼이, 요정왕의 신성력을 강하게 흡수해 나간다. 요정왕은 작아지고 작아졌다. 요정왕의 얼굴 윤곽은 아예 사라졌다. 마치 요정왕은 얼굴을 제작하지 않은 봉제 인형 같았다. 내가 그의 신성력을 다 흡수하자 요정왕은 한 줌의 재도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없어져 버렸다.
"으."
요정왕이 너무 많은 신성력을 지니고 있어 내가 살짝 흔들렸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받쳤다. 나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아이리였다.
"너, 무거워. 빨리 일어나."
나는 아이리가 끙끙거리며 날 받치는 걸 보며 웃었다. 이 아가씨, 보면 볼수록 귀여운 면이 있었다. 신기한 매력도 있고.
나는 번쩍 일어났다. 그때 퍼스트 선셋이 내게 다가왔다. 저 멀리, 커다란 노을이 1호의 껍데기도 역시 부복하고 있었다.
"주인님, 저를 거두어 주시옵소서. 이제 요정의 숲은 패망했나이다. 나는 이제 알을 낳을 수도 없는 몸이로소이다. 이 한 몸, 당신에게 바치지 않으면 무의미합니다."
"음."
나는 가만히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연가시, 퍼스트 선셋이를 바라봤다.
"아니면 저를 파괴하소서. 이 한 몸, 당신에게 바칠 수 있다면 크나큰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니, 그렇게는 안 할 거야."
내가 그렇게 말하자 퍼스트 선셋이는 실망한 듯이 축 늘어졌다. 마치 나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난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날 따르는 것을 죽이는 사람은 아니야. 그건 내 성질에 안 맞아."
나는 말했다.
"요정의 숲에서 나가서, 자연을 맛봐라. 네가 있을 곳에서, 자유롭게 살아라. 어쩌면 너는 죽을 수도 있다. 네가 자연의 최강자가 될 수도 있겠지. 그건 참 어느 쪽이든 웅장하고 비장한 일인 거야. 하지만 나를 따라오면, 너는 네 삶이 없는 거야. 그건 웅장하지도 비장하지도 않아. 비참할 따름이야. 나한테 주어진 내 삶이 있듯이, 너에게 주어진 네 삶이 있는 거다. 난 남의 삶을 통제할 정도로 위대하지도 않아."
"전 당신 아래서만 온전합니다."
퍼스트 선셋은 애절하게 말했다. 나는 피식 웃었다. 약간 답답하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여기 세상의 방식이 아닌 인간의 방식으로 하자. 우리는 지금 친구를 맺는 거야. 친구라 함은, 떨어져 있지만 연결되어 있는 관계지. 우리는 친구가 되는 거야. 난 이 세상의 방식을 따르기는 싫다."
"제가, 당신과 친구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전 혐오스러운 벌레입니다."
"아니, 내가 잘못 생각했어. 넌 혐오스럽지 않아. 보다 보면 귀여운 구석도 있는 것 같아. 내가 볼 땐 요정왕이 훨씬 혐오스럽더라."
난 퍼스트 선셋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내 손가락에 조심스럽게 머리를 대고 내 손가락을 휘감았다. 뒤에 있는 그녀들은 살짝 질색하는 모습이었지만, 난 괜찮았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참 웃긴 일이다.
이 노을이라는 친구가 내게 의미가 된 탓이겠지. 이 친구는 나에게만 의미가 있는, 최초의 연가시가 된 거다. 물론 그녀들에겐 의미가 없으니 그저 연가시로 보일 따름이고.
"이런."
나는 위를 쳐다보았다. 천장에는 어느새 구멍이 뚫려 있었다. 내가 요정왕을 신명 나게 패다 보니 결계마저 망가진 탓인 듯했다.
"노을아, 다음에 보자."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우리는 친구야. 그것만 기억하면 돼."
난 노을이를 손가락에서 돌돌 말아서 뺀 다음 하늘로 날려 보냈다. 그는 날 수도 있는 특별한 연가시였다. 요정의 숲의 결계가 완벽히 깨지고, 우리는 탄탈로스 숲의 어딘가로 폭 하니 떨어졌다.
요정의 숲에서는 보이지 않던 노을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만큼이나 시간이 흘렀던가. 아이리, 리얀, 칸나가 내 등 뒤에 나란히 섰다.
"그, 노을이… 는 잘 갔겠지?"
"뭐, 지금 저기 있는 벌레 속에 살고 있을 수도 있겠죠."
"윽."
아이리는 뭔가 디테일하게 끔찍한 상상을 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언젠가는 노을이를 볼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내 뒷모습만 봐도 나라고 알아차릴 것이며, 나 역시 노을이가 가까이 있다면 노을이를 느낄 것이라고. 난 천천히 걸었다.
"왜 이쪽으로 가? 이쪽은 황도로 가는 길이 아닌데?"
"잠깐 들를 곳이 있어서요."
아이리가 묻자 난 대답했다. 그녀들은 말없이 나를 쫓아왔다. 내가 도착한 곳은, 커다란 곱등이의 사체가 있는 곳이었다. 제로 선셋, 아니 노을이 1호라고 불러야겠지.
내가 사용하고 무참하게 죽인. 그 사체에는 이미 개미들이 많이 몰리고 있었다. 커다래서 물어뜯을 게 많았기 때문이다. 난 검을 홱 그었다. 노을이의 몸에 불이 붙었다.
벌레가 타는 냄새와 함께 연기가 하늘로 올라간다. 이 무슨, 감정일까. 내가 죽인 벌레를 화장하면서 느끼는 이 감정. 다만, 난 나의 할 일을 할 뿐이었다.
"갑시다."
나는 노을이가 다 연소한 걸 보고 나서 몸을 홱 돌려서 떠났다. 아니, 떠나려고 했다. 그 순간 노을이 떠있는 쪽에서 바람이 확 불었다. 노을이의 사체를 태우고 남은 잿가루가 하늘로 휙 솟구친 다음 사방으로 퍼졌다.
"……."
나는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고 다시 몸을 돌렸다. 이제 신성력도 모았겠다, 성녀를 살릴 차례였다. 어떻게 될는지는 몰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