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hwp
- (엄지 이모티콘)
근데 좀 걸리는 게 있었다. 자신이 가테스랑 이어져야 하는데, 그게 좀 창피했다. 왠지 혼자 뇌내망상을 하는 것 같아서. 이젠 이뤄질 수도 없는걸.
- 그럼 넌 왜 가테스를 사랑하는데?
그녀는 비비탄총을 들어 벽에 쐈다. 벽에는 S급 헌터 환영살인마, 주환영의 사진이 넝마가 되어 있었다. 뭐, 그의 사진은 구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포털 사이트 이미지에 주환영만 쳐도 몇만 건이 나왔으니 프린트하기만 하면 되었다.
텔레비전으로 그의 얼굴을 봤을 때는 얼마나 놀랐던지. 그녀는 히키코모리 생활을 청산하고 주환영을 만나러 가 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사실 일개 웹 소설 작가가 한국 제일의 인기를 가지고 있는 주환영을 만나기는 불가능했다. 불가능한 건 일찍 포기하자. 정연서의 신념이었다.
그녀는 텔레비전을 켰다. 공교롭게도 주환영의 하이라이트 신이 나오고 있었다. 헌터들의 이벤트성 대련, 그는 당연하게도 1위를 먹었다.
"날아다니네, 날아다녀."
카메라의 슬로모션으로도 흐릿하게 보이는 그는 도대체. 그녀는 감탄하면서 봤다. 슬로모션으로 보니까 그제야 멋있네.
"이번 생은 언제까지 살까."
그녀는 바깥 창문을 봤다. 강서구에 있는 오피스텔 13층. 저 멀리서 게이트가 열리는 게 보였다. 주황색. C급이구만.
"위험한 세계라 생각보다 빨리 뒈질 것 같은데, 이번 생은 좀 질기려나."
버석!
과자 봉지가 뜯기는 소리가 났다.
우리가 요정의 숲에서 보낸 건 반나절, 우리가 나갔다 온 시간을 포함하면 한나절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서진 황도와 황궁은 눈에 띄게 복구되어 있었다.
기둥을 세우고 철골로 뼈대를 잡은 다음에 벽을 세우는 게 내가 아는 건축 상식이지만, 여기는 달랐다. 그저 스킬을 이용하면 그만인 듯했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마법처럼 황궁은 다시 복구되어 있었고, 우리가 돌아갔을 때는 안쪽에 있는 먼지나 부서진 파편들을 청소하는 마무리 단계였다.
"빨리도 왔군."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는 먼저 가테스에게 보고를 했다. 가테스는 바쁜 모양새였다. 그는 종이를 몇 묶음을 들고 다니며 시공하는 잡부들에게 디테일 하게 설명했다. 이게 사람의 능력이라는 거겠지. 아마 이렇게까지 일이 빨리 진행된 건 가테스의 역할이 클 것이었다.
"난 적어도 한 달은 생각했는데 말이야. 하루 만에 온 건 과하게 빨랐어."
"빨리 오면 좋은 것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
가테스는 바로 잡부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우리를 안내했다. 마리나의 시체가 있는 곳은 우리도 몰랐다. 그건 가테스만 알고 있었다.
"그나저나 아이리 공녀, 눈은 다 나은 건가? 안대를 벗었군."
"아, 네. 그렇습니다."
"신묘한 힘이 깃든 것 같은데. 아닌가. 뭔가 눈이 묘해졌어."
가테스는 갸웃했다. 일반 사람들은 신성력에 감응을 잘 하지 못한다. 가테스도 그런 쪽에서는 젬병이었다. 아이리는 계속 은은하게 신성력을 내뿜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알아차리는 건 나뿐이었다.
"착각이십니다."
"그런가. 그렇겠군. 그냥 어쩐지 더 아름다워진 것 같아."
아이리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거 완전 여심 저격 멘트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아이리는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숙이고 눈을 치켜뜬 채로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그냥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니까. 그래도 내가 아는 아이리는 부끄럼이 많은데, 왜 저런 말을 듣고도 얼굴이 흰 건지는 궁금하긴 했다.
"가지."
"네."
가테스는 바로 우리를 대제전으로 인도했다. 대제전은 황궁에서 가장 중요한 곳 중 하나라서 이미 모든 복구가 완료되어 있었다. 중세의 기술, 너무나 놀랍다. 물론 스킬발이겠지만.
"여기에 성녀님이 계십니까?"
"비밀 통로가 있지. 황족들만 아는 곳이다."
리얀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를 보니 리얀도 알고 있는 장소인 듯하다.
"사실 쿠데타나 폭동이 일어나면 황제가 숨는 곳이 여기에 있지. 우리 아버지는, 명예롭게 죽음을 맞으셨지만."
가테스는 아버지의 죽음이 몇 년이나 된 것처럼 얘기했다. 그게 좀 이질감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건 정말,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가테스는 대제전의 의자를 치웠다. 대제전의 의자를 치우니 바로 뒤편에 조그마한 벽이 보였다. 가테스는 그 조그마한 벽을 힘도 주지 않고 살짝 밀었다.
쿠궁, 소리와 함께 벽이 밀려나고, 그 안에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있었다. 공작저에도 이런 곳이 있었지. 예프린의 수련 장소.
"잠깐."
가테스는 들어가기 전에 우리를 멈추고 벽면 옆에서 무언가를 조작했다. 벽 안쪽에서 철컥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무언가가 맞물린 채로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대로 들어가면 우린 벌집이 될 거니까."
"아, 기관이 있군요."
"리얀의 작품이다."
"하하……."
뜻밖의 시선을 받은 리얀이 멋쩍은 듯이 웃었다. 살상 무기를 만들었다는 것이 약간 창피한 듯했다.
계단은 깊었다. 가면 갈수록 숨도 살짝 찼다. 이렇게 밀폐된 공간이라니. 계단의 층고도 높아 발을 헛디디면 뇌진탕이 오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아니, 이 정도면 목이 꺾여서 죽을 거다.
"흣!"
아니나 다를까, 내 뒤를 바싹 따라오던 아이리가 발을 헛디뎠는지 내 등에 부딪혔다. 내가 만약 일반인이었다면 아이리와 서로 뒹굴며 구르다가 뼈가 몇 개는 부러졌을 거다.
"으… 미안."
"괜찮아요."
난 뒤를 돌아보며 웃었지만, 아마 그 웃음은 아이리는 볼 수 없었을 거다. 여기는 완전히 어두운 곳이었으니까. 그래서 난 아이리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야, 나 네 어깨 잡고 걸어도 돼?"
내가 다시 뒤를 돌자 뒤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나한테만 들리는 아주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어두워서 보지 못했을 테지만 작은 두 손이 내 어깨에 살포시 얹혔다. 난 아이리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걸어 주었다.
"고마워."
"별것 아닙니다."
"뭐가 고마운 거지?"
저 앞에서 우리의 상황을 모르는 가테스가 물었다. 아이리는 즉각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음, 그렇군."
철벽 치는 것 봐. 좋아하는 남자한테는 오해받기 싫다 이건가. 왠지 아이리가 좀 귀여워 보였다. 얘도 모솔이겠지, 공녀니까. 왠지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
"아가씨, 자신 있게 덤빕시다. 자신감이 사랑을 쟁취한다고요."
모태 솔로 특징. 연애 상담은 의외로 잘해 준다. 난 내가 한 번도 실행해 본 적 없는 일을 해 본 것처럼 얘기했다. 아이리는 내 어깨를 팔꿈치로 눌렀다.
"윽."
"넌 또 뭔 헛소리야?"
아이리는 다시 팔꿈치를 떼고 손을 얹은 다음에 조용히 걸었다. 우리가 계단 마지막 칸에 다다랐을 때 아이리는 또 발을 헛디딜 뻔했다. 내 어깨를 잡고 있어서 그나마 나았지.
"성녀는 저기에 있다."
가테스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성녀를 볼 수 있었다. 마리나는 방 중앙의 작은 침대에 카데바처럼 꼿꼿이 누워 있었다. 그녀의 피부는 전혀 상하지 않았다. 아마 보존 마법을 펼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신성력을 이용해 살리는 건 듣도 보도 못 했다. 그런데 뭐, 네가 할 수 있다니."
"저도 잘 모릅니다, 될지."
난 일단 검을 들었다. 이미 검과 나의 기는 혼연일체가 되어 있었다. 나는 내 기와 섞인 신성력을 내뿜었다. 물론 아이리의 것도 섞여 있었다. 분명 강한 신성력이었다. 요정왕의 것까지 흡수했으니 마리나의 신성력보다 강하면 강했지, 덜하지는 않을 거다.
마리나가 붕 떴다. 마리나의 몸이 걸신이 들린 듯 내가 뿜어 낸 신성력을 포식했다. 하지만 눈을 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이게 맞나? 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리나가 가테스를 살렸을 때의 묘사를 더듬어 볼까. 중요한 장면이어서 묘사가 꽤 잘되었었는데.
- 난 간절히 바랐다, 그가 일어나기를. 원래도 싸늘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지금은 너무나 싸늘해져 있었다. 그는 여름에 기대기 좋았다. 피부가 찼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뜨거웠다. 온몸이 뜨거운 피로 뒤덮여 있기 때문이었다. 그건 이질적이었다. 그는 차가워야 했다. 내가 사랑한 그는 차가웠다. 따뜻한 가테스라니, 난 인정할 수 없었다. 사랑해, 난 당신을 사랑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이 일어나면 좋겠어.
이때의 마리나는 사랑을 인정하고 있었을 때지. 중후반부에 나오는 내용이니까.
- 여신님, 도와주세요. 당신이 말하는 거라면 아무리 무리한 바라도 모두 행할 테니, 당신에겐 보잘것없는 기적을 하사하소서.
그때 여신이 말했었지.
- 네 진심이 담겨 있구나. 난 인간의 진심이 좋단다. 그것만큼 강한 에너지를 풍기는 건 없기 때문이지. 그래, 너한테 기적을 내려 주마.
근데 이거, 문제가 좀 있다. 난 여신하고 사이가 좋으려야 좋을 수가 없는 거다. 그녀가 총애한다던 신수도 죽였고, 요정왕마저 죽여 버린 장본인이 내가 아닌가. 난 솔직히 지금 내가 왜 아직도 번개를 안 맞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도, 진심을 담아서 말한다. 여신에게 닿기를.
- 일어나, 미친년아.
그때 마리나가 눈을 번쩍 떴다. 뭐야, 진심이면 다 되는 거야? 여신은 대체 뭐 하는 작자이기에. 어쨌든 성녀만 살렸으면 됐지. 마리나는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 내가 꿈꾸고 있는 건가요?"
"아니, 내가 살렸어."
마리나의 얼떨떨해하는 말에 내가 심플하게 답해 줬다.
"…당신."
마리나가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굴을 조목조목 뜯어보는 듯하다. 그녀의 시선이 내 이마에 머물고, 눈에 머물고, 코에 머물다가 광대에 머물고, 입에 머물고, 다시 역으로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
"맞네. 진짜 유명인이었네, 환영살인마."
"…뭐?"
아무래도, 둘이 얘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