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77화 (77/150)

76화 소생 (2)

"네가 2100년대에서 왔다……."

"너도 2100년대에서 왔잖아. 거기선 잘나가드만. 그때 도서관에서 난데없이 환영살인마 몰라요? 이럴 때 얼마나 병신 같던지. 사실 그것 때문에 네가 씹덕인 줄 알았단 말이야. 근데 그게 진짜 있는 이명이었을 줄이야."

"…알면 됐다."

뭔가 인정을 받긴 받았는데, 떨떠름하네. 그렇다고 이럴 수가 있나. 내가 제일 이해가 안 되는 건 이거다.

"그래서, 네가 거기서 한 25년 살았다 이거지."

"응."

"25년이나 살았어? 네가 죽은 지 일주가 채 안 됐는데."

"아, 그러게. 뭐 세계까지 옮겨 갔는데 시간이라고 안 흘러가랴. 근데 너, 나이 구라 쳤더라? 2093년생인데 93년생이라고. 미친."

"…음."

그녀는 이 한나절 동안 내가 살던 세계에서 몇십 년을 살다 온 것이다. 세계선이 아무리 다르다고 해도 그렇지. 만약 내가 지금 지구로 넘어가면 난 이미 역사 속의 사람이 되어 있겠군. 친구들도 다 죽어 있고.

"그렇다고 누나라고 부르라는 건 아니겠지?"

"상관없어, 인생무상이니."

그녀가 말하는 게 꽤 마음에 다가왔다. 세 번의 삶을 살아왔으니 인생을 논해도 되지 않을까? 죽음을 알지 못하는데 삶을 어찌 알랴라는 공자의 말이 있었다. 근데 정연서는 두 번의 죽음을 겪었다. 그렇다면 삶을 알았다고 표현해도 되지.

"근데 넌 요절할 상인가 보다. 거기서도 스물다섯에 죽었어?"

"너 때문에 뒈졌거든?"

"그건 또 뭔 개소리야?"

마리나는 말했다.

"네가 해치우지 못한 마수가 던전 밖으로 나왔어. 난 그 근처에 살고 있었거든."

"거긴 김포 쪽 던전이었는데."

"응. 난 강서구에 살았거든. 그래서 마수한테 바로 씹혀 버렸지. 리바이어던이 또 있더라고. 그 새끼는 뭘까, 대체. 내가 죽였잖아? 아무래도 리바이어던에 먹힌 사람들은 이쪽 세계로 넘어오는 것 같아."

"아, 지랄맞다. 그럼 나도 뒈졌으면 지구로 돌아가는 거였나?"

"넌 여기 씹덕이라서 안 뒈질 거잖아."

마리나는 비웃었다. 하. 복잡하다, 복잡해. 어쨌든 이건 시간을 들여서 얘기할 그녀와 나 둘만의 문제였다. 가장 빨리 얘기해야 될 부분은 따로 있었다.

"그래서, 네가 「장미꽃이 흩뿌려진 침대」의 작가라는 거잖아."

"그래."

"지금부터 그 얘기를 해야겠어."

"그러든가."

나와 마리나의 대담을 위해 마련된 암실. 우리 사이에서 갓등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나도 긴장하고 있다. 먼저, 확인해야 할 것.

"일단, 중요한 게 있어. 네가 만약 그 작품의 작가라면 필명은?"

"정떨."

…맞네.

"근데 왜 정떨이냐?"

"세상에 오만 정이 떨어졌거든. 내 성이 정이기도 하고. 근데 너, 나 취조하냐?"

"그럴 리가."

사실, 맞다. 난 애초에 마리나라는 사람을 안 믿으니까. 애초에 내가 일주일을 보낸 사이에 25년을 보내고 왔다면 누가 믿겠는가. 그 사이에서 오는 괴리감에 대한 철저한 검증은 필요했다.

"시간선을 확인해 보자고. 나는 1993년에 태어났고, 죽은 다음 이 병신 같은 세계로 떨어졌어. 그다음 난 또 죽었고, 2090년대에 태어났다가 다시 죽어서 이 병신 같은 세계로 떨어지게 된 거지."

"왜 2100년대는 병신 같은 세계가 아니냐?"

"거기는 그래도 좀 사람 사는 곳 같더라. 내가 아는 역사와도 하나도 다른 게 없이, 뭔가 예상대로 발전한 세계? 물론 몬스터들이나 헌터들은 예상 외였지만, 그럭저럭 받아들일 수 있었어."

요점은 정연서, 즉 마리나는 개연성 있는 세계를 중요시한다는 말인가. 여기는 그녀가 보기에 너무 엉성한 세계라 이거지.

"그럼 넌 아직 여기를 세계로 인정하지 않는 거네?"

"그렇지, 뭐."

"가테스는 사랑한다며?"

"야, 25년 전 얘기야."

"그게 또 그렇게 되나?"

내가 귀를 파자 마리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넌 지구에서의 사랑이 여기서 기억이라도 나냐?"

"그런가."

아, 접수원 레이디. 예뻤지. 그렇지만 지금은 이름도 얼굴도 기억이 잘 안 난다. 난 심지어 여기서 1년도 채 안 됐는데 이러는 것을 보면, 마리나가 이러는 건 당연한 건가 싶다.

"그래도 이런 개떡 같은 세계보단 지구가 나은 것 같아."

"그래?"

"넌 왜 지구가 별로냐. 넌 심지어 지구에서 더 잘나갔잖아."

"별로 재미없었어."

"기만질 미쳤네."

마리나는 지구 얘기를 하자 즐거운 듯이 웃었다. 아마 그녀의 순수한 웃음을 본 게 지금이 처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니, 일단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러면 대체 이 세계의 앞뒤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거 타임 패러독스 아니야? 이 세계가 먼저야, 아니면 네가 쓴 게 먼저야?"

내가 물었다. 생각해 봐도 혼란스럽다. 시간선이 대체 어떻게 되는 거지. 2000년대의 정연서는 죽어서 마리나가 되었고, 마리나는 죽어서 2100년대의 정연서가 되어 「장미꽃이 흩뿌려진 침대」를 썼다. 근데 정연서는 이미 이 시대를 살고 있었다.

"내 시점으로 보면 명확하지. 이 세계가 먼저 만들어진 후 내가 그에 대한 소설을 쓴 거니까."

"잠깐, 그러면 네가 이 세계를 거쳐서 소설을 쓴 거라면 나는 왜 없냐?"

"넌 로판 캐릭터로 쓰기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어서."

마리나는 빙글거리며 웃었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뭘 놓치고 있지?

"그래서 난 왜 뺀 건데? 다른 애는 다 넣었으면서. 결함이 뭐야?"

"너 모솔이잖아. 물론 여기 나오는 애들도 모태 솔로지만, 넌 그냥 태생적으로 모솔이야. 그게 문제야. 로판엔 그래도 연애 세포가 살아 있는 사람들이 나와야 하거든. 다른 애들은 귀족이고 사귀는 게 어려워서 그렇다고 치지만, 너는 아니지."

마리나가 일침을 날렸다. 난 명치에서 피가 분출하는 느낌이었지만, 그걸 입 밖으로 흐르지 않게 꾹 참고 웃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지? 야, 나야, 나. 환영살인마 주환영이라고. 전 세계 1위. 그런 내가 모태 솔로 같아? 참 나, 농담도."

"네 추도식 때 철의 요새 구공환이 모태 솔로로 가기에는 너무 아쉬운 인생을 살아왔다고 했어. 그거 전 세계 라이브였는데."

"이런 미친."

그 아저씨는 왜 추도사에서 그딴 말을 지껄이는 거지? 진짜 더럽게 패고 싶네. 지금이라도 리바이어던을 찾아가야 하나. 구공환 아저씨를 죽여 버리고 싶다.

"야, 그리고 뭘 숨겨? 어차피 마지막에 뭔, 가테스한테 말해 줘? 이것만 해도 완전 연애 세포 제로인 거지. 난 그것만으로도 모솔인 거 눈치챘잖아?"

"그게 왜 모솔인 증거인데?"

"아니, 생각해 봐. 넌 사랑을 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는 거야. 사랑은 다른 사람의 입으로 전하는 게 아니야. 내 입으로 전해야만 하는 거지. 그런 발상을 하는 것 자체부터가 네가 모태 솔로인 거야."

"하."

비웃음을 날려 주긴 했지만, 은근히 논리적인 말 같아서 맞받아쳐 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부들거릴 수밖에.

"참 나, 웃기네."

"웃긴 건 너다. 넌 어떻게 S급 헌터가 연애 한 번 못 해 보냐. 진짜 기능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 이상……."

"야, 야, 거기까지 해. 인정할 테니까."

나는 솔직한 패배를 인정했다. 그래, 모태 솔로가 뭐 어때서. 난 전혀 부끄럽지 않다. 전혀.

"이제야 인정하고 쿨한 척하는 건 좀 역겹다."

"그만해라."

이렇게 개 처맞듯이 맞는 건 오랜만이었다. 아무래도 대화 주제가 내 홈그라운드가 아니기 때문인 모양이다. 난 이 대화 주제에서 빨리 벗어나야 했다.

"그래도 말이 안 돼. 넌 이 세계의 세부적인 설정을 다 알고 있었어. 너라면 당연히 몰랐을 만한 일."

"그게 뭔데?"

"생각해 봐. 내가 널 어떻게 부활시켰겠어?"

"신성력을 이용해서?"

"넌 신성력을 이용한 부활이 가능한 걸 알았어? 가테스도 몰랐던 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냥 내가 쓴 건데?"

"그게 문제라는 거야."

내가 그렇게 말할 때에야 마리나는 이해가 됐다는 듯 진지하게 다리를 꼬았다.

"그러면 내 소설이 이 세계에도 영향을 끼치는 거라고?"

"그렇다면? 넌 요정왕을 만난 적이 있어?"

"아니."

"난 만났거든?"

자, 지금부터 중요하다. 난 그녀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바로 뱉었다.

"요정왕의 이름은? 하나, 둘, 셋."

"아르펜."

"아르펜."

"썅."

내 목소리와 마리나의 목소리가 겹치자 마리나는 바로 욕을 뱉었다. 마리나는 바로 머리를 탁상에 박았다.

"골치 아파졌네."

"그런가?"

마리나는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겠지. 3번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마리나의 몸 같은 경우는 죽었다가 살아났으니 2.5번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기회다.

"이번 인생은 나한테 믿고 맡겨 보는 게 어때. 넌 어차피 귀찮을 것 아니야."

"맞아. 존나 귀찮아. 사는 게 귀찮다."

"그러면 그냥 나한테 버스 타. 솔직히 나 버스 기사 정도는 되거든?"

마리나가 눈을 밝혔다. 그녀는 바로 책상에 엎어져 늘어지며 백수 같은 얘기들을 지껄여 댔다.

"3번 살았는데 맛있는 걸 많이 먹고 다닌 것도 아니야, 여행을 한 것도 아니야, 부자인 적도 없어. 씨발. 진짜, 복권은 40년 동안 사도 2등 한 번 돼 본 적도 없고. 는 건 뒈지고 난 후 묏자리 하나 기가 막히게 보는 것밖에 없네."

"그러면 잘됐네. 넌 여기서 성녀잖아. 일단 메리트 획득."

"일하기 싫은걸. 너 같으면 60년 동안 10대, 20대로만 3번 살았는데 일하고 싶겠냐?"

"그래, 그러니까 사는 건 내가 대충해 줄게. 넌 하나만 해 주면 돼."

"뭐?"

그녀가 고개를 꺾어 들었다. 난 그녀의 작은 머리통이 날 도와줄 배경 보따리처럼 보여서 아주 든든했다.

"하자고, 지구인 동맹."

"저번에는 싫다더니."

마리나는 웃었다. 나도 그녀를 좀 다르게 대할 필요성을 느꼈다. 왜냐하면 가능성을 느꼈으니까. 그녀는 저번 세계에서 히키코모리로 살았다고 했다, 어떤 사람과도 교류하지 않는. 하나 이곳에서는 오히려 다를 것이다.

「이름: 마리나 스미노프

나이: 22

호감도: ???

가장 사랑하는 사람: 가테스 트라프비체」

왜냐하면, 그녀는 아직도 가테스를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순정파야 뭐야, 얘는. 하여튼 이상한 애인 건 맞는 것 같다.

"됐어. 그럼 내일 일하러 가자."

"어디?"

"검은 나무 다 쓸고 와야지."

"그, 그래야 되나?"

"음. 그래야 네 인생이 좀 편해져."

마리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버스 기사가 되어 준다니까 퍽 온순해진 느낌. 나는 내일을 기약하고 나가려고 했다. 근데 그때, 의자에서 일어날 때 세상이 핑 돌았다.

아, 잊고 있었다. 부활을 시키면 컨디션이 제로가 되지. 그 설정은 왜 모르고 있었을까.

"그러니까, 입만 다물고 있으면 괜찮다니까요?"

"굳이 입만 다물고라는 말은 왜 들어가는데요? 칸나, 말 좀 해 봐. 얘 그래도 좀 괜찮게 생긴 것 아니야?"

"그, 그러게요."

"리얀, 아니 황녀 전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잘생겼다기보다는, 말끔하게 생겼다고 해야 하나? 아이리, 근데 왜 굳이 황녀 전하를 붙여? 섭섭하게."

뭐야, 이 소리들은. 여자 네 명의 목소리가 들린다. 다 아는 목소리들이다. 리얀, 칸나, 마리나, 아이리의 목소리다. 대체 왜 여기 총집합이 걸렸는지는 모르겠다.

"아, 근데 에퍼리 앞에 두고 이런 말을 해도 되나요?"

이건 칸나고.

"어차피 기절해 있는데 뭔 상관이야. 그냥 난 객관적인 평가를 할 뿐이야."

이건 아이리고.

"객관적으로 그냥저냥 생겼어요. 아, 근데 화장하고 나면 좀 볼만하긴 해요."

이건 마리나.

"남자가 화장을 왜 해요?"

이건 리얀. 리얀은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말투였다. 하긴, 여긴 유사라고는 해도 중세 시대 배경이었지. 남자가 화장을 하는 걸 이해할 수 없는 게 분명하다. 근데 방송 나가려면 다 그래야 된다. 파우더랑 비비 찍어 발라야지.

"여기분들은 다 얘한테 호의적이시네."

"아니, 당신이 제일 호의적이어야 하는 것 아니에요? 자그마치 목숨을 살린 사람인데!"

마리나의 말에 아이리가 마치 본인이 살린 것처럼 억울해했다. 너무 억울해하지 마. 얘는 오히려 삶이 더 고통스러울 수 있는 사람이다. 자그마치 60년을 스무 살까지만 살았으니까.

"왜 이렇게 공녀님이 발끈하실까. 나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뭐요?"

"혹시 에퍼리 좋아해요?"

"…뭐요?"

한 박자 느린 아이리의 반응에 내 귀가 쫑긋 열렸다. 난 눈을 최대한 조용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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