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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78화 (78/150)

77화 소생 (3)

"전 좋아해요."

대신 대답을 한 건 리얀이었다. 여기서 리얀이 갑자기 대답을 할 줄은 몰랐다. 아이리는 그저 끙 소리만 내고 있다.

마리나는 풋 웃었다. 마치 지금 상황을 모두 파악했다는 듯이.

이 삶이 당구라고 치면 마리나는 60년의 구력이 있는 사람이다. 말발로는 여기 있는 20대 귀족 아이들 정도야 간단히 찜 쪄 먹을 수 있는 정도라는 것이다.

"황녀, 뭔 말인지 모르는 건 아니죠? 나는 인간적으로 좋아한다는 그런 흔한 말을 듣고자 물은 게 아니라고요. 그리고 아이리 공녀한테 물었는데 왜 대신 대답해요?"

상황의 맥을 무림 고수처럼 모두 짚고 찢고 돌리는 마리나의 혀가 곡예를 펼친다. 내게도 말로는 잘 밀리지 않던 리얀도 입이 닫혔다.

"아이리 공녀, 대답해 봐요. 에퍼리 좋아해요?"

"아니……."

그 아니라는 말은, 거의 울먹거리고 있었다.

그 아니라는 말도 No라는 의미를 가진 아니가 아니고, 뭔가를 부정하기 전에 나오는 접속사같이 들리는 건 내 행복 회로일까.

"그 아니라는 말은, 아니라는 뜻? 안 좋아한다는 뜻?"

마리나는 집요하게 아이리를 물어뜯었다. 아이리는 말도 못 하고 안절부절 몸만 들썩거리는 듯했다.

난 지금 당장 눈을 떠서 아이리에게 엘파힘의 심안을 들이대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눈이라도 움찔거리는 순간 모두가 알아차릴 게 분명했다.

"잠깐만, 에퍼리가 깬 것 같아요."

칸나의 집요한 시선이 내 얇은 눈꺼풀을 뚫어지게 보는 게 느껴진다. 이제는 도합 여덟 개의 눈동자가 날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깼네."

"깼네요."

"…으."

곧 리얀, 마리나, 아이리 순으로 내가 깼다는 판결을 냈다. 아니, 이렇게 호흡이 자연스러운데 어떻게 눈치를 챘을까. 그 답은 곧 마리나가 알려 줬다.

"얘는 뭔 생각을 하기에 목젖을 계속 움직이는 거야."

난 그 말이 신호라도 된 듯 침을 다시 삼켰다. 난 민망해서 눈을 슬며시 떴다. 그때, 아이리가 내 머리를 받치고 있던 베개를 확 뺀 다음 내 얼굴을 눌렀다.

"읍."

중간에 숨이 막혀 버렸다. 마리나는 풋 웃었다.

"얼굴을 가리면 덜 부끄러워요? 아니면 지금 보이면 안 되는 얼굴이라도 하고 있나 봐요."

"조용히 하세요, 성녀님."

아이리가 마리나의 조롱에 이를 간다. 곧 베개로 가해진 힘도 약해진다. 난 베개를 슬쩍 내려서 눈만 내민 채로 아이리의 얼굴을 먼저 확인했다. 그녀의 얼굴은 너무 빨갛게 달아올라서 내가 민망할 정도였다.

"…보지 마."

정말 미안한데, 이건 봐야겠다. 그때 스킬 창에서 알림이 떴다.

【원죄: 엘파힘의 심안 Lv. 3 업그레이드】

이건 또 뭐야. 난 바로 아이리의 호감도 창을 켜서 확인했다.

「이름: 아이리 라피테스

나이: 20

호감도: 88

가장 사랑하는 사람: 예프린 라피테스

키워드: ???」

내 눈에 띈 건 가장 위에 있는 나이였다. 언제 생일이 지났나. 하긴, 나도 이 세상에 온 지 6개월이 가까이 되어 간다. 요즘 엘파힘의 심안으로 사람을 볼 겨를이 없다 보니까 그녀가 스무 살이 된 것도 확인을 못 했네.

생각해 보니까 섭섭한 면도 있다. 그래도 좀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나이 먹은 것도 얘기 안 하고. 난 그 섭섭함을 내심 감추고 아이리의 민망함을 환기해 주기 위해 주제 전환을 시도했다.

"아가씨, 언제 스무 살 되셨어요?"

"…어?"

아이리는 갑자기 얼굴이 더 빨개졌다. 왜, 왜. 내가 뭘 잘못 말했나 싶었다. 리얀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오늘이요."

리얀이 대신 답했다.

아.

그런 가능성도 있었구나. 말할 겨를도 없었을 가능성. 그 가능성을 등한시한 내 잘못이다.

"…생일 축하드려요."

난 말을 뱉으면서도 후회했다. 아이리의 얼굴이 더없이 새빨개졌고, 마리나는 그걸 보고 또 놀렸기 때문이다. 아이리는 마리나를 흘기는 대신 날 흘겨보았다.

내가 쓰러진 관계로 성녀의 두 번째 출정식은 뒤로 미뤄지게 되었다. 대신 가테스는 사기 진작을 위해 모든 귀족을 초대해 연회를 열었다. 황궁마저 파괴된 마당에 무슨 연회냐고 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이런 게 중요했다. 나도 이제 슬슬 이 세계의 명예에 대해 어느덧 익숙해지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 두문불출한 성녀의 거취에는 모두가 관심이 많았다. 음모론에는 성녀가 죽었다더라 하는 말도 있었다. 물론 그건 사실이었지만, 당연히 마리나가 죽었던 건 1급 비밀이었다. 그리고 그 음모론은 성녀 마리나가 건강한 안색으로 연회에 나가면서 완벽하게 종식됐다.

"에퍼리, 괜찮아요?"

"나쁘지 않아요. 가티스 황자 전하는 어때요?"

"요즘 방에서 잘 안 나와요. 에퍼리가 원정 나가 있는 동안 가토스가 다른 근위 기사를 붙여 줬는데, 어째 조금 내향적이 된 것 같아요. 어쩔 수 없죠."

리얀의 말에 난 가티스를 걱정했다. 한번 가티스도 찾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웬일로 시간도 좀 붕 떴으니까. 사실 이번 연회도 나오기 싫었는데 가테스와 마리나가 꼭 참여하라고 했다. 심지어 리얀도 귀띔했다. 오늘, 아이리의 생일 축하도 연회 끝나고 따로 할 거니 참석했으면 좋겠다고.

저 멀리,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인 아이리가 보였다. 난 아이리에게 천천히 갔다. 많은 사람들 틈에서도, 안대를 벗은 그녀의 아름다움은 빛이 날 정도였다. 안대로 눈을 가린 아이리가 묘한 매력을 풍기는 고양이 같은 미녀였다면, 안대를 풀고 화장까지 한 그녀는 피어나는 꽃과 같았다.

"아. 에퍼리 후작님, 오셨습니까."

"에퍼리 후작이군. 아프다더니 괜찮나?"

난 살짝 멍을 때렸다. 언제 이렇게 친근한 사람들이 되었지. 여기에 분명히 내가 남작 위 받을 때 게거품을 물었던 사람도 있다는 게 유머 포인트다.

"이렇게 빨리 승작한 사람은 대체 본 적이 없을 정도야. 그 비결이 뭔가."

"무슨 비결이 있겠습니까, 그저 실력이죠. 오직 실력으로 증명한 자가 바로 에퍼리 후작 아닙니까."

내 평판이 갑자기 왜 이렇게 좋아진 거지. 내가 뭔 행동이라도 했나. 난 아무 생각도 안 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짚는 사람이 있었다.

"나의 친우, 에퍼리 후작이 여기 있었군."

난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서 가테스가 아주 가식적인 미소로 좌중을 돌아보고 있었다. 모두가 가테스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가테스 황자 전하, 오셨습니까."

"가테스 황자 전하, 이번 폐하의 승하는 참으로 마음 아픈 일입니다. 다만, 저는 대신 다른 황제의 재목을 본 것 같습니다."

"이제 즉위하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난 대충 눈치를 챘다. 내 예상대로, 가테스는 우리가 잠깐 바깥으로 나돈 사이 확실한 실적을 보이며 입지를 쌓았다. 뭐든지 황제가 승하한 직후 위기에서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중요한 법.

리얀이 물론 자신의 할 일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건 드러나지 못하는 성질의 것이었고, 가테스는 드러나는 일이었다. 중립 쪽의 귀족들도 가테스를 지지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에퍼리 후작이 조금 아프니 신경 좀 써 줬으면 하네."

"물론입니다, 황자 전하."

내가 이해가 안 되는 건 이거다. 왜 내가 가테스의 친우가 되어 있냐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나를 잘 대해 주는 것도 분명 이것과 연관이 있었다. 하루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때, 뜻밖에도 아이리가 나섰다.

"잠깐, 모두들 죄송해요. 에퍼리 후작과 할 말이 있는데 데려가도 될 까요?"

"저런. 공녀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가테스는 여전히 가식적인 미소를 띠고 우리를 배웅했다. 아이리가 드레스를 한 손으로 잡은 다음 내 손을 잡아 테라스로 끌고 나갔다. 끌려가면서 뒤를 살짝 봤는데, 단순히 공녀라서 온 게 아닌 그녀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온 귀족 2세들도 많았다. 그들의 시선이 전부 내게로 날카롭게 꽂혔다.

"아가씨, 무슨 일이에요?"

"네가 이해가 안 되는 표정을 하고 있었잖아. 이해시켜 주려고 데리고 왔지."

아이리는 어깨를 펴며 말했다. 그 와중에 자연스럽게 손은 놔서, 난 그 부드러운 촉감의 여운에 아직 취해 있는 상태였다.

"뭐가요?"

"나도 오늘 들었거든."

아이리가 말했다.

"네가 가테스 황자 전하의 친우가 된 이유를."

아이리는 그러면서 설명했다, 이 하루 이틀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성녀를 살리러 갔던 날, 살리고 다음 날까지 기절해 있었던 날까지 이틀 동안. 그녀가 말하기를, 자신의 아버지인 라피테스 공작이 수작을 부렸다고 했다.

"우리 아버지가 엄명을 내렸어. 네 승작을 일방적으로 발표하고,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경우 황제 대행인 황자 전하가 직접 처형한다고 말이야. 그건 아버지 독단이었대."

"그게 가능합니까?"

"아버지도 아버지 나름의 한 수를 던진 거지. 가테스 황자 전하 라인으로 중립 귀족들이 많이 들어오니까, 자신이 2인자인 스피커 역할을 자처하고 나선 거야. 원래부터 아버지는 사람의 욕심 같은 건 기가 막히게 파악하셔. 아마 황자 전하의 욕심도 꿰뚫어 보신 거겠지."

"무슨 욕심이요?"

"널 측근으로 두겠다는 욕심 말이야. 황자 전하는 조금 민망하기는 하지만 가려운 곳을 긁어 줬으니 장단에 맞춰 주는 거고. 아무래도 이런 걸로 우리 아버지를 내칠 수는 없으니까 품어 두기로 한 거지. 우리 아버지는 아무래도 꽤 강력한 카드니까. 아버지 당신께서도 그걸 잘 알고 계시고. 선수들의 싸움이야."

이게 귀족들의 암전인가. 의외로 생각해 보면 마리나는 통찰력이 강한 편이다. 난 원작에 비추어 모든 사람을 바라봤는데, 그게 얼추 맞았다. 하지만 그건 흘낏 본 마리나의 시각이었을 뿐이다.

물론 마리나의 시각으로 쓰인 그 소설이 마리나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쓰여 있다는 웃긴 점도 짚고 넘어가려 했지만, 마리나는 프로라면 응당 그래야 했다며 쿨하게 씹었다.

"일단 넌 보여 준 게 너무 많아. 지금 당장은 귀족들이 반겨 줄 테지만, 그들이 곧 진짜 무서운 적들이 될 수 있으니까."

"그렇네요."

아이리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일이라도 되듯이. 그녀는 나를 아이 취급 하면서 가르치려 했다. 그게 맞았다. 난 귀족들의 생리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니까.

뭔가 뿌듯한 건 있었다. 처음에 날 그저 바보처럼만 보던 그녀가 날 위해 이렇게 열띤 강의를 해 주고 있다니.

"뭔가, 굉장히 복잡하네요, 귀족들이란."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도 복잡한 사람이야."

"아가씨가요? 아가씬 그래도 단순한 편인데."

난 농담을 했지만 아이리는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너한테 고맙다는 말을 아주 예전부터 하고 싶었어. 근데 귀족이라는 체면 때문에 못 하고 있었지."

그녀가 내 눈을 마주치기 민망한 듯 달을 바라보았다. 뭐가 나한테 고마운 걸까. 탄탈로스 숲의 요정 반지를 구해 준 것? 수련을 도와준 것? 생각해 보면, 감사함을 받을 일은 몇 번 했지만 그녀에게 들은 적은 없었다.

하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건 내 생각과는 동떨어진 얘기였다.

"예프린을 구해 준 거, 정말 고마워. 걔가 공작이 됐다면 정말 난 평생 죄책감을 가지고 살았을 거야."

그녀는 그제야 날 바라보았다. 진심만큼은 눈을 맞대고 전달하겠다는 그녀의 의지가 엿보였다. 이 세상은 소설이 아니었다. 예프린 역시 그냥 도망치기로 정해진 사람이 아니라 도망치고 싶었던 사람이다.

난 그 등을 떠밀어 줬을 뿐이었다. 물론 내가 예프린을 도와준 건 비밀이지만, 아이리는 어쩐지 내가 그녀를 빼돌렸다고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아이리가 어깨를 펴고 말했다. 이제 좀 자연스러워진 기분이다. 부끄러운 말은 끝났다는 듯.

"하세요."

"나도 좀 구해 주면 안 될까."

그녀와 나의 눈이 부딪쳤다. 난 당황스러운 눈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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