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소생 (4)
"이번에 리얀에게 들었어. 성녀랑 같이 검은 나무를 처치하러 간다며. 나도 데려가 줘."
"황녀 전하랑 말 트셨어요?"
"응. 계속 놓으래서."
난 생각을 할 시간을 벌려고 다른 얘기를 했다. 아이리는 여전히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정말, 안대를 벗어서 그런가 더 강렬했다.
그녀가 나한테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엘파힘의 심안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뜻했다. 물론 이게 이성적인 호감도와는 다르다는 걸 알지만.
"검은 나무 원정대에서 내가 할 게 있어?"
"없죠."
난 단칼에 말했다. 공적인 일에선 냉정해야 한다. 헌터였을 때 늘 그런 걸 봐 왔다. 파티원의 구성에 사심을 넣는 경우, 그러면 백이면 백 망한다.
난 그러면서 엘파힘의 심안 창을 띄워 놓고 그녀의 호감도를 봤지만, 그녀의 호감도는 변동이 없었다. 마지노선이라는 게 쌓인 건지도 모르겠다. 희망 사항일 수도 있고.
"잡무?"
"잡무라고 할 만한 게… 딱히 없는데요. 성녀랑 둘이서 갈 거라."
"뭐야, 원정대 꾸리는 것 아니었어? 난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별로. 성녀랑 저만 있으면 돼요."
아이리의 심기가 불편해진 듯했다. 호감도에서 보인다. 88에서 87로 바뀌었다. 아, 무섭다, 이러다 갑자기 0으로 될 것 같아서. 하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면 더더욱 내가 가야겠어."
"아니, 왜요?"
"어떻게 둘이 가, 남녀가 유별한데. 무조건 염문설 난다고. 귀족들이 은근히 그런 걸 좋아한다니까?"
"염문설 나면 어때요? 실제로 안 사귀면 끝이지."
헌터 때 수많은 스캔들에 시달려 봤지만, 정작 당사자인 나는 느낌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모태 솔로였으니까. 오히려 스캔들이 진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몇 번 있었다.
"성녀님이 예쁘지 않아?"
"예쁘죠."
"그런데 마음에 전혀 없다고?"
"네."
이건 진심이다. 난 마리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마리나도 날 그렇게 좋아하진 않는다. 엘파힘의 심안이 레벨 업 된 채로 다시 봤을 때도 그녀의 호감도는 20 정도였다.
심지어 그 호감도 20도 이상했었지. 대체 왜 호감도 20이 쌓였는지도 모를 정도다.
"이해가 안 되네. 난 성녀님보다 예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솔직히 성격은 좀 나랑 안 맞긴 하지만."
아이리는 마리나가 조롱한 게 기억나는지 이를 갈았다.
"예쁘다고 사랑하는 건 아니잖아요. 잘생긴다고 사랑하나요?"
"맞… 나?"
아이리는 살짝 갸우뚱했다. 그러고 보니까 아이리도 꽤 얼빠였지. 가테스를 좋아하니까. 솔직히 가테스 좋아하면 다 얼빠다. 질투가 아니고, 실제로 그렇다고 생각한다. 성격이 개차반이잖아.
"그럼 다행이고."
"뭐가요?"
"그건 네가 알 바가 아니고."
"뭐야."
나는 시답잖은 말이라서 무시했다. 어쨌든 아이리는 검은 나무 원정대에 꼭 끼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면 이건 어때. 난 돈을 담당할게."
"물주요? 그건 좀 끌리는데. 근데 황궁에서 지원금은 어련히 나오겠죠."
"아니, 내가 알기로는 지원금 많이 안 나올걸. 황도를 빨리 복구하느라 비축해 둔 세금을 다 썼다고 들었어."
이건 또 새로운 정보네. 황궁이 거지라는 거잖아. 그래도 나라의 국운이 걸린 일인데 많이 안 줄까 싶은데. 아이리는 내 마음을 꿰뚫어 본 건지 아니면 자기를 어필하고 싶은 건지, 목소리를 키웠다.
"심지어 이렇게 황위 다툼까지 일어난다? 귀족들도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돈을 아끼지. 황궁은 아마 돈에 허덕이고 있을 거야."
"그래서 공녀님이 그걸 좀 채워 주시겠다 이 말이네요."
"그렇지."
아이리는 자기가 말하고도 좀 설득력이 있다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만약 황궁이 지원을 못 해 준다면 명색이 성녀랑 후작인데 허름한 여행을 해야 하잖아. 그건 싫다.
"그러면 나쁘지 않네요."
"그렇지?"
아이리와도 동맹 체결. 이건 트라프비체 귀족 동맹이라고 해야겠지. 얘기가 끝난 이상, 난 마지막으로 떨어뜨린 호감도 1을 올리고 대화를 마무리해야 했다.
"아가씨."
"응."
"다시 한번, 생일 축하드려요."
"…그래."
아이리가 얼굴을 살짝 새침하게 돌렸다. 호감도 2가 올라 버려 89가 되었다. 이득이다, 이득.
"아, 그러고 보니까."
"네."
"오늘 끝나고… 내 생일잔치 있는데, 너도 와."
아이리는 무슨 대단한 말을 하는 것처럼 손을 꼼지락거렸다. 이미 리얀한테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가야죠. 안 부르려고 했어요?"
"아니, 원래 초대장을 돌렸는데. 너한테는 안 돌려서."
"뭐야. 왜요."
"…그냥?"
이해할 수가 없네. 아이리의 호감도 정도면 나한테 초대장 정도는 돌릴 수 있을 텐데. 까먹은 건 아닐 테고. 살짝 섭섭한데.
"초대장 없으면 안 갈래요."
"왜, 왜?"
"초대장 없는데 뭐 하러 가요,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지."
"그럼 써 줄게."
뭐지. 아이리는 내 눈을 쳐다보지 않은 채 내 손을 낚아챈 다음, 손바닥에 몇 글자를 썼다.
- 초대!
무슨 게임 초대도 아니고. 난 손바닥이 간지러워서 웃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가락이 지나갔음에도 간지러움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갈게요, 그럼."
"그래야지."
아이리는 날 따라서 웃었다. 그게 예뻐 보여서, 나도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공녀의 생일 파티라고 해서 무슨 대단한 건 줄 알았다. 그래도 TPO는 지켜야겠다 싶어 황궁에서 옷도 하나 맞춰서 갔다. 후작이니까 옷 가게에서 명함도 주고 그랬거든. 금 자수로 맞춰진 으리으리한 옷을 입고 가긴 좀 그래서, 그냥 정장 비슷한 걸 입고 갔다.
"뭐 그렇게 화려하게 입고 왔냐. 그냥 편하게 오지."
그 결과는 아이리의 핀잔이었다. 생각해서 꾸며 입고 와도 이러냐. 너무하기는. 어째 호감도가 올랐는데 대하는 건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왜 그럴까 대체.
실제로 주변 사람들을 보면 다 편하게 입고 있었다. 물론 중세에서 편해 봤자 간이 드레스에 정장이지만, 그래도 내 옷은 좀 튀었다. 살짝 창피하다.
"어머. 오늘 멋있네요, 에퍼리."
"감사합니다."
사서 코스프레를 안 한 리얀이 내게로 다가왔다. 리얀도 꽤 편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미녀 둘이 붙어 있으니 내게로 시선이 몰리는 느낌이다. 남자들뿐 아니라 여자들도. 아니, 당연히 아이리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라 여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인기가 많네요, 에퍼리 후작이."
"거품이죠. 저도 그 소문은 들었습니다, 가테스 황자님이 저한테 약을 치셨다고."
내가 노골적으로 말하자 리얀이 웃었다. 아이리는 내 옆구리를 찔렀다.
"넌 말버릇 좀 고쳐. 황족 앞에서 뭔 약을 쳐."
"없는 데선 나라님도 욕하는데요, 뭘."
"미쳤니?"
진짜 황족인 리얀은 그저 후후 웃고 고개를 저었다.
"에퍼리 후작은 자신의 인기를 실감하지 못하는군요. 내가 볼 때는 큰일 났어요, 지금."
"왜요?"
내가 묻자 리얀은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아이리를 바라보았다.
"아이리, 뭔 말인지 알지?"
"…몰라."
대충 보니까 아이리도 아는 것 같은데, 무슨 느낌인지 감도 채 안 잡힌다. 둘만 알고 있는 듯한 대화를 하니 왠지 내가 왕따가 된 기분이었다.
"뭐야, 알려 줘요."
"곧 알게 될 거예요. 아이리, 가자."
"싫어."
"가야 돼. 에퍼리 후작도 즐겨야지."
"뭘 즐겨, 즐기기는?"
리얀과 아이리는 여전히 뜻 모를 말을 하고 있었다. 리얀은 내게 윙크를 하고 아이리를 끌고 갔다. 꽤 힘이 센 듯, 그래도 소드 익스퍼트 3인 아이리를 억지로 끌고 갔다.
난 그 뜻이 뭔지 몰랐지만, 리얀과 아이리가 사라지자마자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순식간에, 내 주변이 여자들로 싸였다.
"삐졌어?"
"아니."
아이리와 리얀은 건물 2층에서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에퍼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퍼리는 굉장히 당황스러워하며 하나하나씩 다 받아 주고 있었다. 하지만 표정만큼은 즐거워 보였다. 리얀은 에퍼리와 아이리의 표정을 번갈아 보면서 차를 음미했다. 아주 맛이 훌륭했다.
"일부러 그랬지?"
"왜.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아이리의 흘기는 눈에 리얀은 빙글거리며 받아쳤다. 아이리는 말문이 막힌 듯 눈을 내리깔고 차를 마셨다.
리얀은 그런 아이리를 바라보았다. 빛나는 은발, 흰 피부, 루비를 박아 넣은 것 같은 적안, 길게 내려앉은 기품 있는 속눈썹. 어릴 때는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주 예쁜 숙녀가 되어 있었다.
"괜찮아. 넌 성녀만큼 예뻐."
"풋……."
아이리가 교양 없게 차를 뱉어 냈다. 차를 마시다가 사레가 들린 듯했다. 아이리는 고개를 땅에 처박고 기침을 하다가 눈물 맺힌 눈으로 리얀을 바라보았다.
"그게 뭔 말이래, 갑자기?"
"자신을 비하하지 말라는 거지."
리얀은 그렇게만 말하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에퍼리는 재미있어 보이지?"
"뭔 상관이야."
간신히 숨을 고른 아이리는 일부러 창문에서 눈을 뗐다. 그 아이리의 모습이 리얀은 귀여웠다.
"너, 그거 알아?"
"뭐?"
"에퍼리 한 번도 여자 사귀어 본 적이 없대."
"…그걸 어떻게 알아?"
"성녀가 말해 줬어."
리얀은 그렇게 말하고 아이리의 반응을 보았다. 아이리는 리얀의 정확한 예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의 은발이 마구잡이로 흔들린다.
"그, 그게 나랑 뭔 상관인데?"
"상관은 없지, 그럼."
"근데 성녀님은 그걸 어떻게 알았대?"
"모르지 뭐."
아이리는 리얀의 단답형의 대답에 다시 풀이 죽었다. 다채로운 그녀의 반응에 리얀이 다시 큭큭 웃었다. 리얀은 아이리가 노려보자 정색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그러든가."
아이리의 불퉁한 말투에 리얀은 다시 웃음을 참아야 했다.
"에퍼리 후작님, 저는 티모넬이라고 해요."
"전 엘리자베스라고 해요, 후작님."
"전 바이올렛이에요."
"후작님, 혹시 제 이름을 모르시는 건 아니죠? 전 줄리아나라고 해요. 저번 데뷔탕트 연회에서 뵀었는데……."
내 눈이 핑핑 돈다. 가, 갑자기 이게 뭐지 싶었다. 내 주변은 모두 기품 있는 귀족 여식들이었다. 그녀들은 말이 겹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내게 닿기만 하면 된다는 듯이 말을 했다.
"잠깐, 잠깐. 제가 뭐 잘못이라도 했나요?"
"아뇨? 저희는 그저 에퍼리 후작님하고 친교를 나누고 싶을 뿐이에요. 안 되나요?"
여자들의 날 올려다보는 눈망울이 마치 사슴과도 같다. 나는 설마설마했다. 이건, 꿈이 아닌가?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지며 바랐던 꿈. 그게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건가?
"에퍼리 후작님, 얘기 들었어요. 가테스 황자 전하와 같이 검은 나무를 처치했다고요. 정말 영광이네요. 제국의 영웅과 같은 연회장에 있다니……."
"에퍼리 후작님,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영웅담이라도 저희에게 얘기해 주시면 안 될까요?"
이건, 맞다. 아무리 연애 세포가 없고 눈치가 없는 나라고 해도 알 수 있다! 지금, 나는 인기가 있다!
그래, 이게 삶이지. 물론 가테스가 억지로 만들어 준 영웅이라고 해도, 이런 부상이 따라온다면 당연히 환영이다.
"흠, 흠. 그러면 얘기 좀 해 볼까요?"
"역시 호쾌하시네요!"
난 기분이 완전히 들떠 버렸다. 마치, 다시 태어난 느낌이다. 난 이런 걸 바랐다고. 갑자기, 검은 나무 원정이고 뭐고 그냥 여기서 눌러 있고 싶다.
주변에 적당한 테이블이 있어 난 폼을 잡고 앉았다. 이럴 때 폼을 안 잡으면 언제 잡으랴. 어떻게 하면 도입부를 흥미 있게 만들까 하는 고민 끝에 내 입이 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너 뭐 해?"
그 말에 바다가 갈라지듯 영애들이 갈라졌다. 그 끝에는 붉은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아이리가 날 노려보고 있었다.
"…왜요?"
"따라와."
뭔가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은 아이리가 내 손을 채어서 끌고 갔다. 아, 왜. 지금이 내 인생의 황금기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