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80화 (80/150)

79화 소생 (5)

"너, 왜 이렇게 사람이 헤퍼?"

"제가요?"

아이리는 대뜸 복도가 꺾이는 곳에서 내 손을 놓더니 말했다. 나에겐 굉장히 억울한 누명이었다. 모태 솔로한테 헤프다니. 이건 진짜 너무하잖아.

"저만큼 검소하게 사는 사람 없는데. 여러 의미로."

"헤벌쭉하게 있지 마. 내가 말했지, 적이 될 수도 있는 사람들이라고. 네 약점을 잡으려고 온 사람일 수도 있어."

"아니, 그건 아닌 것 같던데요."

"아무튼 꼴 보기 싫어."

아이리는 내 말을 부당하게 가로막았다. 그녀는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화가 많이 나 있었다.

"왜 이렇게 화가 나셨어요?"

"화 안 났거든?"

아, 말실수했네. 화난 사람한테 화났냐고 말하면 당연히 안 되는데. 내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자 우리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뜻밖에도 먼저 입을 연 건 아이리였다.

"…화났어?"

그녀는 갑자기 이제는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똑같은 사람 맞나. 아까는 화를 내고 지금은 눈치를 보다니. 아이리가 좀 이상해 보였다.

내가 걱정되어 아이리를 빤히 바라보자 그녀는 입을 오물거렸다. 난 그녀의 말을 천천히 기다려 줬다. 가끔 이럴 때가 있지. 사람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니까.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이상한 상태였다.

"나 오늘부터 성년인데, 술 한잔할래?"

"…네?"

오늘 무슨 날인가.

20살이 됐을 때가 기억난다. 1월 1일, 민증을 보여 주며 박차고 술집을 들어갔지. 그녀에겐 아마도 그런 느낌인가 싶었다. 술은 그렇게 좋아하지 않지만, 술친구 노릇은 할 수 있었다.

"잠깐, 여기는 리얀이 올 것 같아……."

아이리는 자신의 집인데도 방을 고르느라 계속 헛돌았다. 여전히 그녀는 이상했다.

"황녀 전하 오면 안 돼요? 술자리는 사람 많을수록 좋은데."

"아니. 지금 보고 싶지는 않아."

단호하게 말하는 아이리. 둘이 뭐가 또 있었나. 아까 끌고 가던 걸 보면 뭔가 심상치 않은 기류가 있기는 했다.

그녀는 결국 방을 고르고 골라 제일 구석진 방에 들어갔다. 우리가 마실 술은 주방에서 꺼내 온 이름 모를 술이었다.

"들어와."

그곳은 꽤 좁은 방이었다. 아마 이 집에서 가장 작은 방이지 싶었다. 보통 방이 큼직큼직한 이런 귀족의 집에서 내가 작다고 느낄 정도였으니까.

"좀 좁네요."

"그, 그런가?"

아이리는 그 말에 뜻밖에도 당황했다. 당황시키려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괜히 나까지 민망해지는 기분이라 난 코르크를 바로 땄다. 병따개도 따로 받아 왔으니.

"익숙하네."

"전 아가씨보다 어른 아닙니까."

사실 나는 소주보다 와인파거든. 소주는 너무 써서 못 먹겠더라. 그냥 기로 밀어서 딸 수도 있지만, 그건 멋이 없잖아. 와인은 와인 따개로 따야 제일 맛있다.

"아가씨는 술 마셔 본 적 있으세요?"

"아니."

그녀는 당당하게 말하면서 내게 술잔을 든 팔을 쭉 뻗었다. 나는 반 잔만 따라 줬지만, 그녀는 팔을 거두지 않았다.

"왜요?"

"더 따라."

"진상 느낌 나는데."

나는 투덜거리면서 다 따라 줬다. 그래, 알아서 하라지. 나는 어른한테 뭐라 뭐라 하는 걸 싫어한다. 아이리도 이제는 어른이니까, 자기 주량은 자기가 알아야지.

"내가 따라 줄게."

"그래요."

잔을 받은 나는 아이리와 잔을 기울여 부딪쳤다. 뭔가 건배하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 아이리는 와인을 드레스에 흘리고 말았다.

"에이, 거참 칠칠치 못하게."

"내 옷이거든?"

"보기 거슬려요."

"어쩌라고?"

어쩌긴 어째. 난 이런 건 도저히 못 참는다, 은근히 깔끔한 성격이라서. 드레스 끝자락이라서 난 거침없이 잡아당겼다.

"야, 야, 야!"

아이리의 3단 고음을 무시하고 난 손에 물을 묻혀 빡빡 문질러 줬다. 그나마 좀 나아져서 난 놔줬다.

"으……."

아이리가 눈을 감고 부들부들 떨었다, 내가 뭐 모욕이라도 한 것처럼. 그래도 난 이제 후작이잖아. 많이 친해지기도 했고.

"너 진짜 헤프구나."

"무슨 소리입니까."

"못 알아듣는 것도 헤퍼."

"그런 걸로 하죠."

여자들의 언어는 아무리 들어도 모르겠단 말이야. 난 대충 무시하고 아이리의 잔을 다시 채워 줬다. 내 잔은 알아서 채웠다.

"이제부터 알아서 마시세요. 전 책임 안 집니다."

"누가 책임지래?"

아이리는 갑자기 빽 소리를 질렀다. 지금 거의 아이리의 희노애락을 30분 만에 맛본 것 같은데. 확실히 그녀는 정상이 아니었다.

"왜 소리를 질러요, 귀 아프게."

"네가 소리 지르게 하니까."

"오늘 좀 이상하시네요."

"…전혀."

아이리와 나는 순식간에 좀 어색해졌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뭔가 어긋난 것 같아서 슬쩍 아이리를 바라보았다.

「이름: 아이리 라피테스

나이: 20

호감도: 68

가장 사랑하는 사람: 예프린 라피테스

키워드: ???」

뭐야, 왜 이렇게 떨어졌어. 아이리는 지금 나한테 확실히 삐져 있다. 아니라면 이렇게 나올 리가 없었다.

"아가씨, 내가 오늘 뭐 잘못했어요?"

"…아니."

"잘못한 게 있으면 말해 줘요, 고칠 테니까."

아이리는 갑자기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술을 그냥 한 번에 들이켰다. 은근히 세네 하고 생각할 때쯤 아이리의 얼굴이 붉어졌다. 뭔가 부끄러워서 짓는 붉음이 아니라, 술에서 올라오는 홧홧한 기운이 얼굴에 몰린 게 분명했다.

"모르겠다, 나도."

그녀의 말에 나는 멍하니 그녀의 심안의 창을 바라보았다. 아이리의 호감도 창의 숫자가 뒤죽박죽으로 섞이고 있었다. 어쩔 땐 1이 되었다가, 100이 되었다가. 30이 되었다가, 59가 되었다가, 23이 되었다가, 83이 되었다가…….

'고장 났나?'

무슨 카지노 룰렛처럼 호감도가 바뀌니까 내 눈도 돌아갈 지경이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아이리가 들어온 사람을 보고 흠칫 몸을 떨었다.

나는 리얀이 들어온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들어온 사람을 보고 나도 흠칫 떨었다. 그냥 누가 온다는 것만 알았지, 누구인지는 정확히 몰랐기 때문이다.

"딸, 여기 있었구나."

들어온 사람은 라피테스 공작이었다. 그는 들어와서 술병과 나, 아이리를 번갈아 보고 흥미롭다는 웃음을 지었다.

"호오. 대작이라."

"제가 마시자고 했습니다."

왠지 아이리가 민망해진 것 같아 내가 선수를 좀 쳐 줬다. 이 정도는 해 줘야지. 아이리는 눈빛으로 내게 고맙다는 사인을 보냈다. 호감도는 더 엉망으로 구르고 있었지만.

"나도 같이해도 되나?"

뭐야, 이 눈치 없는 아저씨는. 솔직히 이러면 아무리 나라도 화난다. 이런 미녀와 단둘이 술을 마시고 있는데 아저씨가 낀다니. 이 무슨 개같은 소리란 말인가.

"아뇨."

"자네는 여전히 단호하군."

라피테스 공작은 뻔뻔하게 그렇게 말하며 나와 아이리 사이에 주저앉았다. 아이리는 나긋하게 구부렸던 허리를 가시방석에 앉은 듯 꼿꼿이 폈다.

"왜 공작령에 안 계십니까?"

"하나밖에 없는 딸의 생일잔치인데 당연히 와야지. 방금 도착했네."

라피테스 공작은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라니. 예프린은 그냥 잊어버린 듯하다. 아이리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딸, 무슨 문제라도 있니?"

"아뇨."

아이리는 정신을 차리려고 머리를 잠깐 흔들었지만, 이미 새빨개진 얼굴은 어쩔 수 없었다. 라피테스 공작은 그런 아이리를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이리는 다시 머리를 흔들더니 자신의 말을 수정했다.

"아니다. 문제가 있어요."

"음. 말해 봐라."

라피테스 공작은 턱에 손을 괴고 아이리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웃고 있었지만 감정이 없어 보였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눈이었다.

"이번 검은 나무 원정대에 나가겠습니다."

"음. 무엇을 할 예정이냐?"

라피테스 공작은 날카로웠다. 아이리가 나에게 물주 역할을 한다고 했지만, 사실 그녀의 돈은 라피테스 공작에게서 나오는 것이었으니까. 아무리 아이리가 취한 상태라지만, 그런 말이 나올 수는 없었다.

그때 라피테스가 입을 천천히 열었다.

"사랑하는 딸아, 뭔가를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네?"

"아직 넌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라피테스 공작의 눈빛이 살짝 엄하게 바뀌었다.

"지금 네가 입고 있는 옷, 신발부터 공녀라는 지위까지, 네 삶은 모두 나에게서 비롯된 것 아니냐? 막말로, 내가 널 쫓아내면 넌 혼자 살 자신이 있느냐?"

뭐지. 이건 아버지의 훈육인가. 난 잠깐 넋이 나갔다. 너무 갑작스러운 태도의 변화이기도 했다. 아이리의 어깨가 좁아졌다.

라피테스 공작은 순식간에 다시 따뜻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나한테 한 번 더 통보하듯 얘기하지 마라. 내가 이렇게 얘기하는 건 널 사랑하기 때문이다. 원래 사랑이란 건 서로를 채워 주는 것 아니냐?"

"…네."

"아닌 것 같은데요."

아이리와 내 대답이 엇갈렸다. 나도 반사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아이리와 라피테스 공작이 나를 홱 돌아보았다.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저는 절 채워 주는 사람을 바라는 게 아니거든요."

나는 잠깐 쉬고 대답했다.

"제가 채워 주고 싶어 하는 사람을 원하죠."

"…자네."

라피테스 공작과 아이리가 날 같은 눈빛으로 바라본다.

솔직히, 난 이 말을 하고서 약간의 뿌듯함을 느꼈다. 왜냐하면 좀 멋있는 말이라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라피테스 공작의 말은 나를 산산이 부숴 놓았다.

"진짜 연애 경험이 없나 보군. 그냥 낭설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요?"

"푸핫."

아이리가 터지더니 탁상에 머리를 박고 웃었다. 분명 진지한 분위기였던 것 같은데. 내 말 한마디로 박살이 나 버리고 말았다.

"내가 한마디 해 줄까, 청년?"

라피테스 공작이 말했다.

"사랑은 입 밖으로 꺼내는 게 아니야. 그러면 사랑이 아니게 되지. 앞으로는 사랑에 대해서는 금언하게. 사랑은 느낄 때에야 비로소 가치가 있는 거라네."

뭐야, 그러는 당신은 왜 꺼내는데. 내가 그렇게 속으로 불만을 갖자 라피테스 공작은 내 마음을 꿰뚫어 본 듯 얘기를 이어 갔다.

"나야 사별했으니 이런 얘기를 꺼내도 된다네. 난 앞으로 사랑할 계획이 없으니까."

"…하아. 재밌다."

아이리는 여전히 내 말이 웃긴지 피식피식 웃었다. 엄청 자존심이 상했다. 난 그냥 술을 한잔 들이켜고 말았다.

"어쨌든, 이번 한 번은 허락하겠다, 딸아. 다음부터는 이 아비와 상의하고 얘기하도록 해라."

라피테스 공작 역시 술을 들이켜고 나갔다. 아이리는 라피테스 공작이 문을 닫자마자 다시 웃기 시작했다. 술잔을 나도 모르게 꽉 잡았다.

"그만 웃으세요."

"내가 다 창피하다, 야."

나는 아이리가 진정할 때까지 자작을 했다. 오늘처럼 술이 단 날이 없었는데. 오늘이 인상적인 날이라 그런가. 다른 의미로 인상 깊긴 한데, 흑역사를 생성한 느낌이라.

"아, 웃겨."

"웃기려고 한 말이에요."

"그만 추해져."

"네."

나는 가만히 짜져 있기로 했다. 내가 의기소침해 있자 아이리의 손이 상을 슬쩍 넘어와서 내 손목을 쿡쿡 찔렀다.

"나 사실, 아버지 앞에서 웃은 적 오랜만이야. 예프린이 나가고 처음인 것 같아."

"그래요? 잘됐네요."

"그러게. 다시 태어난 기분이야."

아이리는 다시 내 손목을 쿡쿡 찔렀다.

"그래도, 썩 나쁘진 않았어, 네 사랑에 대한 철학."

그녀는 술기운에 발개진 얼굴로 날 올려다보며 웃었다. 난 잠깐 숨을 참았다. 정말,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해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