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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82화 (82/150)

81화 검은 나무 원정대 - 파종 (2)

"조금 진정이 되셨어요?"

"…응."

가티스는 의자에 앉아 있고, 나는 차를 우려서 갖다줬다.

"…밍밍해."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잘못 우렸나 보네. 내가 차를 우릴 기회가 많지 않아서. 성공 확률 30%의 느낌이다.

"일단, 꿈 얘기부터……."

"일단, 내 얘기부터……."

나와 가티스의 말이 엇갈렸다. 난 두 손을 가티스에게 받쳐 들었다.

"먼저 하시죠."

"음, 그래."

가티스는 당당하게 답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그냥, 너한테 화내면 안 된다는 걸 알아. 어제 둘째 형에 대한 꿈을 꿨는데, 널 정말 찾아가고 싶었어. 근데, 너를 만나면 내가 화를 낼까 봐… 결국 화를 냈지만 말이야."

"괜찮아요."

"넌 내가 본 사람 중에 누구보다 강하잖아. 그래서 괜히 그런 상상을 했어. 네가 내 옆에 계속 있었다면 아버지가 죽지 않았을까 하고. 사실, 네가 원정대로 차출됐을 때 나한테 서면상으로 결재 서류가 왔었거든. 난 서류에 서명하는 게 처음이라 즐거워서 서명을 했지. 그게 너무 후회되기도 하고."

원래 사람이란 그렇다. 시간을 돌이켜 과거로 가도 뒤집을 수 없는 일에도 후회를 하고는 한다. 아직 이성과 감정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가티스의 나이에는 더 그럴 것이었다.

"전 괜찮아요. 됐죠? 그러면 끝. 더 이상 말하지 마세요."

"…그래."

"그럼 이제 꿈 얘기를 좀 해 볼까요?"

내가 짐짓 쾌활하게 말하자 가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사실 내 꿈에는 심각한 단점이 있어. 그건 뭐냐면, 단편적인 장면들만 보여 준다는 거야. 그래, 진짜 꿈처럼. 그리고 사실적인 장면들이 안 나올 때도 있어."

그러니까 가티스가 자신의 꿈인지 예지몽인지 확실하게 파악할 수 없었던 거지. 아직 너무 어리기도 하고. 그냥 자신의 아버지에게 갔던 건, 아버지가 죽는 악몽을 꿨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 꿈이 이뤄진다는 걸 이제는 대충 알았어. 그러니까, 그게 너무 무서워."

가티스는 자신의 작은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그렇겠지. 자신에게 쥐인 힘이 크면 클수록 사람은 부담을 얻게 된다. 예지라는 강력한 힘을 가티스는 온전히 감당하지 못할 거다. 하지만, 지금 감당하지 못하면 영영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난 만약 가티스가 자신이 예지몽을 꾸는 걸 부정하려 했다면 냉철하게 알려 줬을 것이다. 하지만 알고 있으니까 상관은 없겠지.

"괜찮아요, 제가 지켜 줄 수 있으니까. 전 근위 기사잖아요."

"너 나 버렸잖아 군단장으로 어느새 진급해 가지고."

"그거 바지예요."

"바지는 또 뭐야?"

앗, 8살에게 이런 안 좋은 단어를. 내가 마리나랑 다를 게 뭐야. 난 바로 말을 돌렸다.

"어쨌든, 뭔 꿈인지 알려 주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최대한 도와드릴 테니까."

"…어디부터 얘기해야 하지."

가티스는 머리를 박박 긁었다. 나는 가티스의 입이 열릴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곧, 가티스의 입이 열렸다.

"꿈 얘기는 굳이 하기 싫지만, 해야겠지. 괴물의 모습을 한 그림자가 둘째 형의 심장을 꿰뚫어 죽였어."

"괴물의 모습이 어떻든가요?"

"난 그림자만 봐서 모르겠어. 하지만 엄청 컸고, 엄청 흉악했던 것 같아."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가티스의 판단이라면. 일단, 현재 가티스는 가토스를 많이 걱정하고 있었다. 정보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마, 가토스 황자 전하는 황궁에 계실 겁니다."

지금 가토스는 내가 알기로 정신을 못 차리는 상황이거든. 그래, 오랜만에 좀 보러 가 볼까.

"…가티스구나. 오랜만이다. 아, 에퍼리도."

가토스의 눈에는 다크서클이 쭉 내려와 있었다. 가티스는 가토스를 보자마자 달려가서 안겼다. 무슨 꿈인지는 몰라도, 꽤 지독한 꿈을 꾼 모양이었다.

그래도 기특하게 울지는 않네. 아직 8살인데 퍽 철이 든 모양이다.

"그래, 어쩐 일이냐? 보다시피 바빠서 차를 같이 마셔 주지는 못할 것 같고."

가토스는 가티스의 뒤통수를 쓰다듬어 준 다음에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다시 집무 책상에 앉아서 도장을 계속 찍었다. 여전히 책상에 쌓인 종이들을 보면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은 것 같았다.

"그냥, 형이 보고 싶어서 왔지."

"그래? 그러면 쭉 보고 있으렴."

가토스는 힘없는 웃음을 지어 주고 다시 책상으로 머리를 돌렸다. 확실히, 그는 과로하고 있었다. 이런 가토스를 구해 달라니. 대체 무엇에서 구해 주면 되는 걸까.

가티스는 이런 상황에서 날 쳐다보았다. 뭐라도 하라는 눈빛. 여기서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큼, 난 일단 목을 가다듬었다.

"황자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응, 그래. 승작 축하한다. 이렇게 빨리 후작이 되는 사람은 처음 보는데."

"정치적인 술수에 말려든 거죠. 언제든지 반납할 준비는 되어 있는데요."

"하하."

온전히 내 힘으로 얻어 낸 작위가 있기 때문에 감흥이 없지만, 여기 사람들에겐 꽤 의미가 있는 모양이다. 보는 사람마다 그 소리를 하니.

"귀족 작위는 함부로 반납할 수 없다네. 제국에서 회수할 수는 있어도."

"주는 것도 뺏는 것도 마음대로군요."

"…그런가? 자네는 가끔 보면 굉장히 신랄한 말들을 한단 말이야. 그래도 나도 황족인데 말이야."

"아, 죄송합니다."

"안 죄송한 거 아네."

들켰네. 난 멋쩍은 웃음을 짓고 말았다. 어느 정도 말은 텄으니까. 난 제일 궁금한 걸 물어보기로 했다.

"제위에는 관심이 있으십니까?"

"…하, 더 신랄한 말이 기다리고 있었군."

가토스는 잠시 목을 뒤로 젖혔다.

지금 여기 세계는 나도 이제 잘 모른다. 마리나, 즉 정연서가 쓴 세계관이 어느 정도 작용하지만 완벽한 것도 아닌.

가토스가 제위에 관심이 없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소설에서도 가테스는 손쉽게 제위에 오르니까. 가토스는 그냥 그 이후로 비중이 없어졌다. '서역의 경계를 맡으러 갔다'는 묘사가 끝이었지. 그래도 서브 남주까지 맡았던 애인데, 좀 홀대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나는 제위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전혀요."

"그렇군."

가토스는 일어났다. 그 바람에 서류 몇 장이 책상 밑으로 떨어졌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나도 좀 쉬어야겠어."

"좋은 생각입니다."

나는 시종을 불러서 찻잎을 받은 다음에 차를 우려서 가토스에게 내줬다. 가티스는 먹었으니까.

"…진하군."

가토스가 얼굴을 찌푸렸다. 다음엔 좀 더 잘 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티스는 계속 초조한 얼굴로 가토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 이것 하나는 알아 두게. 황자는 제위에 관심이 없어서는 안 돼. 제위에 관심이 없다는 걸 표하는 순간 치세(治世)에 관심이 없다는 얘기를 돌려서 말하는 거니까. 황자라는 자리는 그런 거라네."

"나는 관심없는데?"

"넌 아직 어리지 않니."

가티스의 천진한 말에 가토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말은 어느 정도 나한테 무겁게 다가왔다. 황자인 이상 제위에 관심이 있는 것도 의무였던 것이다.

"정말 엉뚱한 말인데, 나는 제국의 백성들이 평화로웠으면 좋겠다네. 근데 제위에는 막상 관심이 없다고 해야 하나."

"모순적인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모순적이진 않지. 다만 무책임할 따름이라네."

가토스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보기에 그는 가테스처럼 휘하의 귀족들을 물건으로 보는 사람도 아니며, 그들을 이끌고 싶은 사람도 아니었다. 다만, 그 책임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끌고 있는 것뿐. 지금의 집무도 마찬가지였다.

"애매한 책임감이라면 빨리 버리시는 게 도움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애매한 책임감이라. 그것참 옳은 표현이야."

가티스는 내 말을 듣고 날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신랄한 말의 당사자인 가토스는 수긍하는 눈치였다.

"왜 둘째 형이 애매한 책임감이야? 이렇게 책임감 있게 사는 사람도 없는데."

"책임의 골자는, 끝까지 책임지는 겁니다. 끝까지 책임질 자신이 없으면 안 하는 게 낫죠."

"맞는 말이다, 가티스."

가티스는 자기가 편을 들어 준 가토스마저 이렇게 말하니 삐진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지. 이건 꽤 어려운 문제다.

"지금도 내 쪽에 섰던 귀족들은 나에게 성화를 부리고 있지. 이렇게 가만히만 있으면 제위를 뺏길 수도 있다고. 참 웃긴 말이야. 나한테 언제 제위를 맡겨 놓은 것처럼 얘기들을 하니."

"그렇군요."

"그들도 이해는 돼. 내가 제위에 오르지 못하면 그들은 곧장 한직으로 물러날 것임에 뻔하니까. 논공행상에 따라 쥐여 주는 국가사업을 못 받으니 영지 발전도 힘들겠지."

가토스는 골치 아프다는 듯 차를 티스푼으로 저었다.

"차라리 자네 말대로, 모욕을 감수하더라도 처음부터 제위에 관심이 없음을 명확히 했어야 하는지도 몰라. 물론 그럼 나는 지금 어디 지방을 전전하고 있겠지만."

"그렇군요."

"내가 자네에게 지금 이렇게까지 얘기하는 건,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네. 자네는 형님의 사람도 아니고 누님의 사람도 아니겠지. 물론 내 사람도 아니고. 자네는 누구 사람이 되기를 싫어하지 않은가."

"그렇죠."

이게 바로 중세 로맨스 판타지에서 주로 나오는 암투일까. 나는 이런 걸 선천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이다.

「장미꽃이 흩뿌려진 침대」에도 이런 암투가 나오지만, 난 이런 장면들을 거의 다 스킵 하고 읽었다. 그냥 난 연애하는 걸 보고 싶었을 뿐이니까.

내가 당장 만들어진 영웅이 된 다음에 얼마나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고 있는가. 다들 나라는 밭에 씨앗을 뿌려서 무언가 한몫을 잡아 보려는 사람들 판이다. 어쩌면 아이리의 생일 축하 때 나에게 온전히 호감을 보냈던 아가씨들도 집안의 명령을 받고 행한 에이전트일 수도 있었다.

아, 모르겠다. 솔직히 이런 진창에 발을 들이고 싶지는 않다. 다 각자 알아서 하라고 하고 싶다. 하지만 못내 걸리는 건 가티스와 가토스였다.

가티스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게 불쌍해서, 가토스는 왠지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S급 헌터라는 누구나 동경하는 등급을 받고도 막상 던전 레이드에는 관심이 없던 나라는 사람이 겹쳐 보여서.

이번 한 번만이다, 이런 진창 속에서 몸을 구르는 건. 난 그렇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난 이런 의무를 도피하는 데 있어서는 경험이 많은 사람이니까. 도움을 충분히 줄 수 있었다.

"가토스 황자 전하, 이번 한 번만 도와드리겠습니다."

가토스는 에퍼리라는 사람을 늘 궁금해했다. 뭐 하는 사람일까, 하고. 자유로운 듯하면서도 자신만의 규칙은 있는 사람인 것 같고. 뭔가를 바라는 것 같지만 그 무언가가 명확하지 않은 사람. 또 이해가 되지 않는 그 강함도. 하여튼 복잡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가토스 황자 전하, 이번 한 번만 도와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한 에퍼리의 허리춤에서 빛살이 하나 뿜어져 나왔다. 그건 자신의 목을 향하고 있었다.

그 빛살은, 자신의 목을 꿰뚫었다. 피가 분출하는 느낌을 받으며 가토스는 책상 위로 엎어졌다. 쓰러지면서 본 에퍼리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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