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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83화 (83/150)

82화 검은 나무 원정대 - 파종 (3)

"오늘 참 이리저리 많이도 불려 다녔더군."

가테스는 내게 직접 차를 뽑아서 줬다. 당연히 맛있었다. 남자 주인공은 모든 것을 잘하니까. 적당한 온도와 찻잎의 맛이 어울려 몸을 노곤하게 만들었다.

"그걸 다 보고 계셨습니까?"

"아침에는 리얀이 왔다 갔고, 점심에는 가티스를 만나러 가고, 가티스랑 함께 또 가토스를 보러 갔다지. 무슨 유력 정치인의 행보도 아니고 말이야."

"정치엔 관심없습니다."

"그런 건 알고 있다네."

가테스의 책상에는 가토스의 책상과는 다르게 종이가 하나도 없었다. 당연하다, 다 해치웠으니까. 저 벽엔 수많은 서류가 깔끔하게 철이 되어 군기가 바짝 든 군인들처럼 열을 맞추고 있었다.

"오히려 난 그래서 자네를 편하게 대할 수 있지. 가령 라피테스 공작 같은 경우에는 좀 부담스러워. 내가 약점을 보이면 바로 잡아먹으려 들 거거든. 대신 약점을 안 보이면 그는 완벽하게 일을 수행하겠지."

"그렇군요."

"지금 자네는 꽤 거물이야. 자네가 바란 건 아니겠지만."

"황자 전하는 바라셨습니까?"

"아니."

가테스는 확실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차갑게 웃었다. 선황이 죽고 나서, 일대일 대면은 처음이었다. 왠지 그가 더 차가워진 것처럼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싶었다.

"나는 네가 내 사람이 되기를 바랐지, 나를 위협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 건 아니야."

그는 말을 이었다.

"원정대가 무사히 마무리된다면 나는 또 너를 띄워 줘야 되겠지. 자네는 더 큰 영웅이 될 거야. 지금 이렇게 고착화된 귀족 사회에서 자네는 갑자기 돌출된 히든카드라고 해야겠지. 지금 너를 적으로 돌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모두가 편이 되고 싶어 하지."

"꽤 노골적으로 말씀하시는군요."

"더 노골적으로 말할까? 내가 황제가 되는 걸 도와라."

가테스는 웃었다. 난 웃지 않았다. 당연히 내가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제가 왜요?"

"자네가 원하는 전부를 주지. 돈? 여자? 이런 건 말하기 유치하기까지 해."

난 찻잔을 굴렸다. 리얀은 처음부터 알아봤던 내 본성을, 가테스도 이제 알아차린 것 같았다. 나를 밑에 두는 게 아닌 동등한 계약자로 두는 것. 이건 지구의 방식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제위에 엮여 있는 사람들 물밑에 내가 있는 것이다.

"난 정확히 말할 수 있다. 내가 줄 것, 내가 받을 것. 리얀은 제대로 얘기하지도 못했겠지."

"얘기해 보시죠. 궁금하네요."

"내가 줄 것은 모든 것이고, 네가 줄 것은 자네가 선택하면 돼. 예를 들어, 넌 그냥 나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아무 행동도 안 해도 돼."

나는 차를 다 마시고 내려놨다.

"무슨 제 한 마디면 제위가 바뀌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그 정도로 영향력 있는 유명인은 아닌데."

"정확히 말하면, 한 나라를 바꿀 강함이라고 해야겠지. 난 웬만한 암살에는 끄떡없지만 말이야, 네가 작정하고 날 죽이려고 밤에 암습을 한다면 막을 자신은 없다. 리얀과 가토스야 말할 것도 없지."

"제가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지금 그는 내가 자신을 죽일 수 있으니까 나를 경계하고 있다는 거겠지. 근데 보통, 사람들은 그런 것으로 경계하지는 않는다.

"아버지가 어릴 때 한 말씀이 있었지. 인간과 인간은 사실은 동등하다. 아버지는 그 근거로 인간이 인간을 죽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어. 황족이라고 칼 안 들어가는 것 아니지 않나."

이제는 가테스가 차를 다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황족은 칼이 안 들어가도록 연습을 해야 하는 거야. 내가 어린 나이에 그토록 연습했던 이유가 뭘 것 같나? 죽는 게 무서웠기 때문이야. 그 어린 나이에 말이야."

가테스가 날 바라보았다. 그는 나에게 동정을 바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사실을 담담히 말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사설이 길어졌군. 어떡할 텐가?"

"제가 황자 전하의 부하였다면 무슨 명령을 내리시겠습니까?"

나와 가테스의 눈이 처음으로 맞붙었다. 난 가테스의 욕망을 물어본 것이었다. 뿌리 깊은, 욕망. 과연 이걸 대답해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나, 가테스는 손쉽게 대답해 줬다.

"그런 거라면 간단하지."

가테스는 씩 웃었다.

"가토스를 죽이게 시키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생각 회로는 단순했다.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순간, 해치운다. 하지만 나는 이런 사람한테 나라는 검을 맡길 수 없다.

나는 마지막으로 가테스를 떠봤다. 이 질문은, 내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기회였다.

"서역의 경계를 맡게끔 하는 건가요?"

"오호, 그런 표현도 알고 있었군. 그래, 황제가 누군가를 죽이면 서역에 경계를 보냈다고 하지."

나는 씩 웃었다. 오만하다. 죽이면서도 임무를 맡긴다는 명목을 내세우니. 이 세계는 정말 나한테 안 맞다.

"어쨌든, 난 자네에게 선택의 기회를 줄 걸세. 자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말이야. 원정대 출정식에서는 긴장 좀 하고 나오게.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테니."

난 그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펜을 들었다. 내게는 펜을 드는 게 검을 드는 것보다 어렵다. 안 들어 봤으니까. 정리해 보자.

가토스는 원작에서도 죽었던 것 같다. 마리나가 가토스의 죽음을 의도했을까? 그럴 수도. 그녀는 여기 있는 사람들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어쩌면 의도적으로 가테스에게서 조명을 치운 걸 수도 있다. 어쨌든 「장미꽃이 흩뿌려진 침대」는 로맨스 판타지 소설이고, 대다수의 독자들은 서브남주가 메인남주의 모략에 걸려 죽는 걸 바라지 않을 테니까.

여기서 제위에 가까운 가테스와 리얀이 날 바라고 있다. 정말 내가 움직인다고 왕이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황금색 두루마리를 다시 펼쳤다. 원래는 대충 훑고 다시 넣어 두려 했지만, 그것에는 내가 처음에 봤던 문구와 전혀 다른 게 적혀 있었다.

- 안녕. 리얀 트라프비체입니다. 그대가 날 도와줄 생각이 없다면 이 두루마리는 곧 찢어졌겠죠. 그래도 아직 안 찢은 걸로 봐서는 그나마 그대가 날 도와줄 마음이 있는 거라 생각해요. 그래서 이런 수작질을 부려 봤어요.

두루마리에 장난질을 쳐 놨네. 나는 그걸 쭉쭉 읽어 나갔다.

- 이런 말을 하는 게 창피한 줄 알아요. 그래서 내가 이런 짓을 하는 것일 수도. 사실, 이 편지를 쓰는 것도 많은 고민을 했어요. 너무나도, 너무나도. 나라는 사람이 대체 누굴까에 대한 생각도 많이 해 봤죠.

- 정말, 답답해요. 전 사실 제 방식으로 황제가 되고 싶었어요. 국민들을 밝히고, 국민들을 챙기며, 어우러지는 그런 황제가요.

- 내가 당신들의 원정에 따라간 건 내 나름의 정치적인 판단이었어요. 제국의 중한 일에는 언제든 목숨을 던져 줄 수 있다, 뭐 이런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죠. 사실, 웬만한 중책은 모두 성녀가 죽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당연하죠. 그래야지 귀족들이 영지 방어를 능동적으로 하지 않겠어요? 그런 정보를 알려 주는 게 곧 윗사람으로서 할 일이기도 하고요. 이미 가테스 오라버니는 자신의 라인에게는 성녀가 가사 상태라는 걸 밝혔다고 해요. 여기서 죽음이 아닌 가사 상태라고 밝혔다고 해서 우리 원정대를 믿는 건 아니었겠죠. 그저 만에 하나 부활이 된다면 발을 빼야 하고 정치적인 입지를 다질 다음 체크포인트를 생성해야 하니까요. 가테스 오라버니는 정말, 정치적인 수완이 뛰어난 사람이에요. 저 같은 사람은 쳐다볼 수도 없는.

- 원정대가 끝나고 많은 사람을 찾아갔어요. 대다수 중립이라는 사람들. 저는 오해를 하고 있었어요. 어쩌면 너무 순진했던 걸 수도 있죠. 아니, 순진했다는 표현은 쓰지 않을래요. 내가 바보 같은 거였죠. 나는 그들이 어떤 신념 때문에 중립적인 위치를 취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정반대였어요. 그들은 언제 어떤 라인에 합류할지 정확히 계산을 하고 재고 있더군요. 그 계산에 저는 당연히 논외였으니, 제가 제위에 대한 욕심을 드러내자 저를 타이르며 보냈죠. 그래요. 사실상 쫓겨난 거예요.

"흐음."

리얀이 물밑으로 이런 정치적인 작업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그러니까, 지금 그녀는 황제에 오르기 위해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려 했지만 그 현실에 부딪히고 있었던 것이다.

- 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황제가 되고 싶어요. 이게 명예욕인가요? 모르겠네요. 제가 노선을 잠시 틀고 제가 뜻하는 바를 이루면 결국 좋은 것이 아닐까요? 이건 저도 알아요, 제가 현 정치에 맞는 행동을 한다면 저 역시 더럽혀져서 빠져나올 수 없을 수도 있음을.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하는 저는 이미 되돌아 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걸 수도 있죠. 인간은 불가역적인 존재니까요.

장문의 고백은 리얀의 필적으로 작성되어 있었다. 아까 계약서에 있던, 서기와 같은 누군가가 써 준 딱딱한 필체가 아니었다. 이건 그녀가 직접 쓴 것이었다.

그녀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반영하듯 필체는 들쭉날쭉했다. 가면 갈수록 흘려 쓰듯 풀어헤친 글씨는 해석하기도 어려웠다.

- 요즘 욕을 좀 배웠어요. 성녀가 알려 준 건데요. 'X 같다'라는 말을 알려 줬어요. 의미를 아니까 정말 상스러운 욕이던데요. 근데 신기하게도, 그 말을 하니까 속이 좀 풀리는 기분이 들었어요. 이렇게 내 감정 푸는 법도 모르는 내가 바보가 아니면 누가 바보겠어요? 아, X 같아.

정신이 많이 불안정하네. 난 이제 대충 마지막에 어떤 문구가 삽입될지 알 것만 같았다. 분명 그녀는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문구를 썼다는 것 자체로.

- 지금 제국의 현재 상황은 우리나라 정치에 무지한 당신도 알다시피 가테스 오라버니파와 가토스파로 나뉘어 있어요. 제국의 휘하 귀족들도 두 갈래로 나뉘어 있죠. 특히 아버지가 죽은 이후에는 중립인 귀족들도 모두 라인을 타고 있더라고요. 그러면 제가 이런 상황에서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괜히 인간적인 정에 기대어 제 신념에 맞는 사람들을 하나둘씩 일궈 내어 내 라인을 만들어 보려는 생각은 너무 이상적이었던 걸까요?

문장에 두서가 없고 문맥도 맞지 않는다. 흐름이 뚝뚝 끊긴다. 지금 리얀의 상황을 난 알 수 있었다. 마지막 줄에서는, 그녀의 혼란스러운 감정이 드러나듯 글씨가 완전히 날림이었다.

- 지금 제 솔직한 심정을 전부 말했어요. 이런 저라도, 혹시 도와줄 마음이 있다면 출정식 전에 절 잠깐 봐 주실 수 있나요?

그녀의 말이 맞다. 인간은 변할 수는 있지만 뒤로 갈 수는 없다.

원정대 출정식. 오늘 아침이었다. 난 방금 모든 이의 쪽지에 답장을 보냈다. 별로 의미 있는 답장은 아니었다. 그냥 한 거다.

내가 복도로 나가니까 마리나와 아이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기다리는 게 아니구나. 싸우고 있었다.

"아이리 공녀, 돈은 잔뜩 챙겨 왔죠? 그게 아니면 공녀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런가요? 다른 군단장 아저씨들에게 물어보니 인성이 좀 별로시더라고요. 그런 상황에서는 저 같은 사람이 필요하죠."

시간을 보았지만 아직 나가기까진 30분이나 남았는데 얘들은 왜 이렇게 일찍 왔을까.

내가 얼굴을 비치자 아이리와 마리나가 내 옆에 붙었다.

"음. 버스 기사님 오셨구나. 한 명이요."

마리나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내 어깨에 댔다. 띡 하는 소리도 자신의 입으로 내면서. 그런 마리나의 행동이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아이리는 이게 무슨 행동인지 아예 감도 안 잡힐 거다. 다만 우리만 아는 행동을 하니까 그녀의 기분이 불편한 모양이다.

"너, 이런 장난 받아 주지 마. 내가 볼 때는 성녀님은 인성 개조가 시급해."

"성녀한테 너무 막말한다, 일개 공녀가."

"일개 공녀라니요. 공녀라는 직위가 그렇게 만만한 것은 아닌데."

"그만 싸우세요. 마리나, 너도 그만하고."

지금 당장 넘어야 할 산이 있는데 저 멀리 산봉우리가 하나 더 보이는 느낌. 원정대 나가서도 평탄하진 않으리라 싶었다.

"오늘이 중요한 날이라서 다들 차려입고 왔네. 아이리 공녀야 그렇다 쳐도 너는 왜 이렇게 차려입었냐. 하여튼 씹덕 아니랄까 봐."

"씹덕은 또 뭐예요? 엄청 멸칭 같은데."

"애기는 몰라도 된답니다."

"성년식 끝났거든요?"

아서라, 마리나의 눈으로 보면 나도 애기일 게 분명하니까. 이렇게 웃고 떠드는 이들은 알까, 원정대 출정식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물론 나도 아직 모른다. 리얀을 보고 난 후엔 좀 달라지겠지.

"먼저 가, 할 게 있으니까. 아가씨도요."

난 뭐라 뭐라 하는 그녀들의 목소리를 등지고 황궁 도서관으로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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