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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85화 (85/150)

84화 검은 나무 원정대 - 파종 (5)

난 어릴 때 티브이를 보면 그런 생각을 했다. 정치인들은 왜 이렇게 멍청할까? 왜 굳이 국민들에게 미움받을 짓을 자처하는 것일까? 현 정치인의 반대로만 하면 이상적인 정치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할 정도였다.

하나, 내가 S급 헌터가 된 다음에 만난 정치인들은 굉장히 똑똑했고, 또 복잡한 사고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내가 볼 때는 정치인들이 멍청한 게 아니었다. 원래 정치는 파워 게임이고, 파워가 세면 단순하게 하는 게 나으니까. 그런 단순하고 억센 방법이 국민들에게 바보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고.

지금 이 상황도 가토스 황자가 계획했다고 생각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모두가 바보가 아닌 이상.

하지만 가테스에게 그런 인식 따위는 필요 없었다. 눈에 보이는 사고 하나를 만들어 주면, 그걸 지휘하는 사람은 힘이 강한 사람이니까.

"가토스!"

가테스가 울분에 찬 듯 외쳤다. 이제부터는 연기 판이었다. 나는 물론 진심으로 화났다.

가테스가 이런 짓을 할 줄은 대충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사람의 목숨까지 날릴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제위라는 게 대체 얼마나 중요한 거기에.

"혀, 형님, 저, 저는 아닙니다."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가토스가 벌떡 일어나서 말을 더듬었다. 말을 안 더듬어도 수상하게 보일 텐데, 더듬으니 더욱 신빙성이 없어 보였다.

그다음부터는 완전한 촌극이었다.

"네놈을 부른 자가 제국의 영웅을 폭사하려 했다! 네가 사주한 것이든 아니든 네 책임이 명백하다!"

"저는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중요한 일이지만 내겐 어찌나 역겨워 보이던지. 나는 그 폭사한 사람의 시체를 그러모았다. 얼굴이든 옷이든 다 조각났지만, 인간의 형태를 하게 되었다. 난 그의 품을 뒤졌다. 조각난 신분증이 있었다. 난 그 신분증의 조각도 모두 찾아서 한데 모았다.

"엑시 장군이었군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가테스가 마치 잘 말했다는 듯이 가토스를 몰아붙였다.

"엑시 장군이라면 너를 열렬히 추종하는 자가 아니냐?"

"그렇지만, 이건 제가 시킨 게 아닙니다!"

"닥쳐라! 아랫사람을 잘 돌보는 것도 너의 일. 이것 역시 너의 불찰이다!"

난 가테스가 이렇게 화를 내는 걸 처음 본다. 또 그가 화내는 걸 보는 게 마지막일 가능성도 크다. 그는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니.

가토스는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듯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지만, 가테스는 가차 없었다. 이런 뻔히 보이는 수작질에는 속도전이 중요했다. 당연히 나도 아는 걸 가테스도 알고 있었다.

"지금, 가토스 황자를 구금해라!"

가테스가 외치자 가토스의 편들이 들고 일어났다. 여기서 가토스가 구금이 되면 자신들의 미래도 없기 때문이겠지.

"구금은 부당한 처사이옵니다! 엑시 장군에 대하여 더 조사를 해 봐야 합니다. 진짜 엑시 장군인지도……!"

"이런 상황에서도 절차를 얘기하는 것이냐?"

가테스가 눈을 부라리자 가테스의 편이 이번엔 들고 일어났다. 그들은 비장의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일단 조사가 끝날 때까지는 가토스 황자 전하를 구금하는 게 맞는 판단입니다."

"지금 제국의 영웅이 죽을 뻔했습니다. 아무리 같은 계파라고 해도 국익을 먼저 생각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들?"

끔찍하게 유치하다. 유치하고 끔찍하다. 인간의 욕망이 얽힌 곳은 언제나 이런 찝찝함을 만들어 냈다.

원래부터 가테스의 쪽수는 더 많았다. 이 사건의 진상은 모두 알고 있었다. 가테스가 가토스의 부하 중 하나를 섭외해서 터뜨린 것이다. 나중에 가족들을 보살펴 준다는 말로 꼬셨을 수도 있지.

"원정대장은 어디 다친 곳 없습니까?"

"전 괜찮습니다."

가테스 황자 측의 귀족이 내게 걱정된다는 듯이 물었다. 난 대충 대답했다.

가테스가 이렇게 과격하게 행동을 벌인 이유는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당연히 지금 자신의 힘이 강해서 할 수 있는 행동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과시였다.

내가 지금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가도 아무도 말릴 수 없다, 황권은 이미 나에게 왔다는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다름 아닌 나한테.

"이런, 에퍼리 후작이 많이 놀랐겠군. 원정대 출정식이 한 마리 미꾸라지 때문에 엉망이 됐어. 괜찮다면 날짜를 뒤로 미루겠나?"

가테스는 가토스를 본인 손으로 구속하면서 내게 밝은 미소를 건넸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는데 어찌 시간을 미루겠습니까. 다만, 가토스 황자 전하에 대한 처분은 제가 원정대에서 돌아온 다음에 진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까지는 장담 못 하겠는데."

"부탁드립니다."

내 눈과 가테스의 눈이 부딪친다. 가테스는 허허 웃더니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그리고 내게 다가왔다. 그는 내 귀 쪽으로 머리를 숙였다.

"자네가 내 밑으로 들어온다면 가토스를 죽이지 않음세. 어떠한가?"

나는 머리를 돌려 가테스를 바라보았다.

"죽이시든지 말든지 별로 관심없습니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깔끔하지 못한 일 처리였습니다."

"이제부터는 속도전이 될 거거든. 사소한 것은 생각할 수 없다네. 황제란 건 그런 자리니까."

"그렇습니까."

나는 그러한 문답만을 나누고 가테스에게서 멀어졌다. 내가 멀어지자마자 가테스가 커다란 소리로 외쳤다.

"원정대가 출정한다! 비록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영웅들에게 주는 박수를 아끼지 마라!"

나는 그 말과 함성을 못 들은 척하고 여전히 멍하니 있는 아이리와 마리나를 챙기듯 하여 대제전을 빠져나갔다. 마지막으로 난 가토스를 일별했다. 가토스는 머리가 땅에 처박혀서 나를 쳐다볼 수도 없었다.

"정화."

리얀은 단상을 마법 하나로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녀와 마탑의 사람들이 단상을 정리하기로 되어 있었다. 폭사한 시체의 흔적은 치우기도 어렵고, 냄새를 지우는 건 마탑의 훈련된 사람들이나 가능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을 거라고 했어. 그러면 나도 아는 것이겠지.'

리얀은 구석구석 청소하면서 생각했다. 당연히 그녀도 이 사건의 전말은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가테스의 억지스러운 누명 씌우기. 하지만 아무도 반박할 수 없는.

에퍼리는 자신을 도와준다고 했다. 계약상 그랬다. 설마, 이게 도와준 건가? 가테스와 짜고 가토스의 세력을 없애 버리는. 사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이미 단단한 가테스의 세력이 아니라 물렁한 가토스의 세력이었다.

그걸 한 번에 먹기 위해서는? 가토스가 세상에서 없어지면 된다. 리얀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사람은 아니고.'

자신이 아는 에퍼리는 그렇게 막무가내로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 누군가를 죽인다? 그런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렇다면…….'

분명 리얀은 단상 뒤 황족의 자리에서 듣고 있었다. 처분을 미뤄 달라고. 그건 가토스에게 주는 시간이 아닌 분명히 자신에게 주는 시간일 것이었다.

'…에퍼리, 당신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사람인가요?'

리얀은 당장 성문 바깥으로 쫓아가 그를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지금뿐만 아니라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가테스 황자 전하가 저런 패악질을 보이시다니. 살짝 실망인걸."

"실망하지 마세요. 원래 그런 놈이니까."

아이리의 말에 마리나가 아주 상쾌하게 말했다. 나도 그런 놈인 건 알고 있었는데, 사람까지 죽여 가면서 그럴 줄은 몰랐다. 난 좀 충격이 있는데 마리나는 그런 것도 없는 모양이었다.

난 늘 생각하고는 했다. 로맨스 판타지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이 없는 한에서는 아주 개차반인 사람이다. 능력만 좋은 쓰레기.

그런데 그런 사람한테 브레이크인 여자 주인공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시대에 남는 폭군이 되지 않을까? 지금 난 그 결과를 보고 있는 것이었다.

"가토스 황자 전하는 좋은 사람이야. 난 그건 알 수 있어. 물론 칸나에게 들은 바도 있지만."

아이리는 씁쓸하게 말했다. 가테스에게 실망했을까. 그녀는 가테스를 좋아하는 걸로 아는데. 살짝, 나쁜 생각이 들 뻔했다. 아이리가 가테스를 그만 사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아니다, 됐다. 나부터도 아이리를 사랑하는지 모르는데, 그녀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건 무례한 거다. 난 아직 사랑을 모르니까.

"우리는 우리의 일만 하면 되지."

"…그래. 우리의 임무 역시 제위 못지않게 중요하니까."

아이리는 한숨을 쉬었다. 난 사실 아이리보다 마리나의 의견이 궁금했다. 사실 가테스를 사랑한다고 가장 적극적으로 표현한 건 마리나였으니까.

"마리나, 넌 어때?"

"뭐?"

"별 느낌이 없어?"

"응. 원래 그런 놈이잖아."

"그건 알고 있었지만."

"그럼 됐지, 뭐."

마리나는 쿨했다. 아니, 여기다 쿨하다고 붙이면 안 되지. 얘도 이상한 사람인 거지.

성문을 나가니 딱 봐도 명마처럼 보이는 말 세 마리가 우리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분명 공작저의 말 중에서 명마 중의 명마가 뽑혔을 것이다.

"역시, 부자들 데리고 놀면 이게 좋다니까."

마리나는 성녀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며 갈기를 쓰다듬었다.

"완전 비단이네, 비단."

"성녀님, 가면 갈수록 실망이네요."

"실망하시든가."

마리나는 아이리의 말을 무시하고 휘리릭 말에 올라탔다. 아주 깔끔한 동작이었다.

"승마 스킬 좀 올랐나 보네?"

"엉덩이라도 덜 배겨야지, 오랫동안 다닐 건데. 사람 하나 붙여 달래서 승마 공부만 했어."

마리나는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아이리는 조심스럽게 말을 쓰다듬으며 안장에 올랐다. 나도 말에 탔다.

"저번 원정대가 한 세 달 걸렸으니까, 얼마나 걸릴까. 말 타는 거 지겨운데."

마리나가 칭얼거렸다. 하나 아이리는 이런 임무가 처음이라 설렘이 섞인 긴장을 느끼는 듯했다.

"아이리 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응? 뭐가?"

"오래 안 걸려요."

"뭐, 얼마나?"

마리나가 그새를 못 참고 나와 아이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는 말을 천천히 움직이면서 나갔다. 또각또각 하는 소리가 마치 구두 소리와도 같다.

"글쎄요? 적어도 일단 가토스 황자 전하가 처형되기 전까지?"

"뭐?"

아이리가 놀란 듯 말했다.

"넌 진짜 가토스 황자 전하가 처형될 거라고 생각해?"

"그건 무조건이지. 가테스는 미친놈이니까."

"그건 맞습니다."

아이리의 질문에 대신 대답해 준 건 마리나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분명 기다려 달라고 했지만 필요 이상으로 기다려 주진 않을 거다.

그것도 날 위해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어느 때에 죽일까를 생각하겠지. 황족이란 무섭다. 자신의 형제도 이렇게 거리낌 없이 죽이다니. 뭐, 우리 민족도 왕자의 난 같은 게 몇 번 있었다만. 막상 보니까 좀 역겨웠다.

"그러면 얼마나 걸릴 것 같아?"

"검은 나무를 다 처치하는 건 한 달이면 될 것 같은데요."

"…뭐? 제국을 주마간산으로 돌아도 한 달은 더 걸릴 텐데?"

"대신 돌아가는 건 두 달 뒤로 하자고요."

"네가 뭔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아이리는 혼란스럽다는 듯 말했다. 다 계산이 선 방식이다. 이 한 달 동안 리얀이 대체 얼마나 준비를 잘해 줄까. 어쨌든 씨앗은 다 뿌려 놨다.

이제 나는 열매만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난 장담한다.

가테스가 황제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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