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검은 나무 원정대 - 열매 (1)
"일주일 안? 말이 돼? 절대 불가능해."
"가능하다니까요."
나는 스트레칭을 하며 말했다. 아이리는 그런 나를 어이없어했다.
"왜 이렇게 표정이 가벼워 보여? 방금까지는 되게 심각한 표정이었으면서. 아니, 심각해야 했던 게 맞지."
"그거 다 연기예요. 원래 전 이런 성격이잖아요."
휘익.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저 멀리서 커다란 새가 날아왔다. 이건 마수 연구소장, 리얀에게 받아 온 마물이었다. 발목에는 빨간 리본이 달려 있었다.
"얘가 엄청 빠르다고요. 똑똑하기도 하고."
나는 그 새의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새는 머리를 푸드득 떨었다. 아직 인간의 손은 덜 탄 모양이었다.
"신기하긴 하네. 근데 검은 나무를 다 처치하려면 절대 일주일 안으로는 불가능해."
"거참."
나는 계속 찡얼대는 아이리의 눈에 손을 댔다. 아이리는 깜짝 놀라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지만 머리를 털어 내지는 않았다. 그녀의 눈에 담긴 신성력이 내게 옮겨 온다. 신성력 에너지 충전, 이상 무다.
"신성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검은 나무 감지 능력은 강해지죠."
"그, 그래서? 계속 내 눈에 손을 대고 있겠다는 말?"
내 착각일까. 아이리가 얼굴을 살짝 앞으로 숙이는 것 같은데. 몸과 말이 따로 노는 건가.
"그건 아니죠."
대신 태클을 건 건 마리나였다. 마리나는 아이리의 눈에 있는 내 손을 가로챘다.
"아이리 공녀도 신성력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짭이 원조는 못 이기잖아요."
"짭이라니. 뭔 말이에요."
확실히 마리나의 손만 잡고 있는 게 신성력의 충전에는 더 도움이 됐다. 이렇게 계속 잡고 있으면 될 것이다. 원래 이러려고 아이리를 안 부른 건데. 뭐, 자기가 오겠다고 한 거니까 어쩔 수 없지.
"사심은 없어요, 아가씨. 그냥, 그, 이래야지 신성력이 좀 쌓이거든요. 신성력 충전 작전이라고 해야 하나."
"나, 나로는 안 되는 거야?"
아이리가 뭔가 버림받은 여자의 얼굴을 했다. 아무 잘못도 안 한 내가 잘못한 느낌이 든다. 그때, 마리나가 미친 짓을 했다.
"아, 답답해. 그냥 이러는 게 제일 빠를 것 같다."
마리나는 내 얼굴을 돌려 갑자기 입술을 맞췄다. 신성력이 내 몸에 확 들어왔다.
…뭐지, 이건. 그녀가 뭐 혀를 굴리는 건 아니고, 그냥 입만 열어서 맞대고 있는 거다. 혀는 둘 다 잠잠하다. 아무리 모솔이지만 이게 키스가 아니란 건 안다.
눈을 또르르 굴려 보니 아이리는 굉장히 충격을 받은 얼굴을 하고 있다. 나도 충격받았다. 근데, 이게, 그 있지 않은가, 남자의 호기심이라는 게. 혀를 꿈틀거리게 된다. 첫 키스니까, 좀 제대로 해 보고 싶다는 느낌?
나는 혀를 살짝 움직여 마리나의 혀끝을 문질렀다. 내 혀가 마리나의 혀끝에 닿자마자 마리나가 전기가 오른 듯 몸을 파르르 떨며 머리를 떼었다. 마리나는 바로 머리를 좌우로 강하게 휘젓더니, 가래까지 끌어모아 침을 뱉은 다음 나를 노려보았다.
"야이 씨발 놈아, 누가 혀 대래?"
"…그, 본능적으로."
"아, 미친 새끼."
왜 외관은 예뻐 가지고 지랄이야. 진짜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사심은 없다. 궁금했을 뿐이다.
"아, 아가씨? 이건 진짜 사심 없는 거예요."
"그래야지 신성력이 모이는 거지? 응, 그렇겠지."
그렇게 대답한 아이리는 여전히 눈에 빛이 사라져 있다.
"맞아요. 정확하게 아시네. 보셨죠? 저 아무것도 못 하고 당한 거."
"소드 마스터가 아무 것도 못 하고 당했다라. 그건 좀 아닌 것 같고. 너도 내심 기대하지 않았을까?"
뜨끔하다. 솔직히, 이런 건 남자의 로망이다. 여자에게 리드당하는 키스. 아니, 사실 난 그냥 키스가 로망이었지.
약간 어, 어, 하는데 내심 싫지 않은 기분? 그래도 마리나가 외형은 아주 예쁘니까.
"근데 혀는 왜 댄 거야?"
"…그건 본능적으로."
"그, 연애 경험이 없는 건 아는데, 네가 여자를 대할 땐 가끔 너무 바보 같다고 해야 하나? 평소 보여 주는 모습에 비해서는."
갑자기 아이리는 나를 혼내기 시작했다. 난 받아들이기로 했다. 새는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다. 마리나는 물로 입을 헹군 다음 내 곁으로 다시 다가왔다.
"아니 공녀님, 우리 둘은 사심 없어요. 그건 진짜인데 얘가 순간적으로 맛탱이가 가 가지고 혀 댄 거지. 연애 한 번도 못 해 본 놈이라 그냥 들어왔다 싶으면 개처럼 들이대는 거야."
"…말이 좀, 심하네. 개처럼 들이댄다니. 그래도 미안하다. 나도 모르게 그만."
어쨌든 할 말은 없다. 난 마리나에게 진심을 다해서 사과했다. 아니 근데, 입과 입이 맞닿았는데 어떻게 혀를 안 대 보냐고. 나한테는 너무 큰 유혹이었다.
"그래, 신성력은 다 채웠어?"
"네, 어느 정도는……."
"그럼 가자."
아이리는 한기가 가득 도는 목소리를 뿌린 다음 새에 탔다. 나도 따라서 새에 탔다. 좀 민망한 상황이 나오기는 했지만, 어쨌든 내 비대해진 신성력 덕분에 저 멀리 있는 검은 나무가 선하게 보였다.
"자, 남동쪽으로 가자."
나는 새에게 말했다. 새는 바로 남동향으로 날개를 폈다.
"프르르르르르르르릅."
마리나의 입에서 프로펠러 소리가 났다. 입을 벌리면 펄럭거릴 정도로 속도가 빨랐으니. 하여튼 어지간히 할 게 없나 보다. 사실 내가 다 하고 있었으니 그럴 만했다.
"너, 너무 빠른 것 아니야?"
아이리는 내 허리를 꽉 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나도 빠르다고 느낄 정도니 그녀는 까딱하면 떨어질 거라 생각할 것이다.
나는 날아다니며 검은 나무가 있는 곳에 폭격을 했다.
콰콰쾅!
저 뒤에서 연기가 난다. 이미 새는 폭격지로부터 20m는 떨어져 있다.
"이 새는 뭐기에 이렇게 빨라?"
아이리는 내게 더 찰싹 달라붙으며 비명을 질렀다. 나는 리얀에게 들은 정보를 말해 주었다.
"알파튜러스라고 한 대요, 이 새를."
"그거 멸종된 거 아니었어? 세계 최속 마수… 읍!"
알파튜러스가 급하강을 했다. 여기는 검은 나무가 좀 많은 듯하다. 마리나는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즐기고 있다. 아예 두 손을 하늘로 뻗기도 했다. 진짜 죽음 앞에 초연한 미친년이란 저런 것인가.
"근데 네가 새를 어떻게 조종하는 거야?"
"똑똑한 새라 알아서 가는 거죠."
우리는 계속 검은 나무를 폭격해 갔다. 내 말대로, 제국의 국토를 횡단하는 건 3일이면 충분했다. 이제 검은 나무의 핵심을 부수러 가야 했다. 그리고 이제 그건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었다.
검은 나무의 핵심은 검은 나무를 다 처치해야만 나온다. 핵심은 의외로 황도에서 20km 정도 떨어진 밑 지방에 있었다.
"저건 나도 느껴지네."
아이리는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워워. 알파튜러스, 멈춰."
알파튜러스는 머리를 돌려 나를 띠껍게 바라본 다음 속도를 늦추고 땅바닥으로 내려갔다.
나는 알파튜러스가 보든 말든 검은 나무의 핵심으로 나아갔다. 그래도 핵심이니까 폭격을 해서 죽일 수는 없었다. 벌써부터 땅에 마기가 가득해서, 공중에서 뿌리는 걸로는 부족하다. 직접 가야 한다.
"아, 이 알파튜러스 가지고 좀 놀면 안 되나? 공녀님, 같이 탈래요?"
"싫어요!"
마리나는 긴장감도 없이 헛소리를 내뱉었고 아이리는 당연히 질색했다. 난 헛웃음을 짓고는 검은 나무의 핵심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마기가 뭉친다. 마기가 뭉치며 땅이 깊게 파였다.
여기로 들어오라는 거겠지. 사람 한 명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었다. 난 팔을 엇갈려 양 어깨를 잡아 폭을 최대한 좁힌 뒤, 쏙 하고 내려갔다. 바로 위의 땅이 닫혔다.
그다음은 마치 터널형 미끄럼틀을 타는 것 같은 익스트림이었다. 뭔가 내가 몸에 힘을 주기도 전에 푹신한 곳으로 떨어졌다. 내가 떨어진 곳은 흙이 많이 쌓여 있었다.
바로 앞에서는 이미 의인화를 한 검은 나무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말할 기회도 안 주고 다 죽이는 건 너무 하지 않았나?"
"안녕. 근데 내가 좀 바빠서."
내가 검을 들자 검은 나무가 두 손을 들었다. 뭐 하는 짓이야, 바쁜데.
"난 널 위해 이렇게 푹신한 매트릭스도 깔아 줬는데 말이야."
"고맙다."
"근데 좀 이상하지 않나? 너무 순탄하게 온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
"내가 강해서 그런 게 아닐까?"
"결과적으로 말하면 그게 맞지. 내가 검은 무리를 물렸거든. 괜히 상대하다가 죽을 것 같아서 말이야."
아, 검은 무리. 잊고 있었네. 흑마법을 쓰는 족속들이라 그랬나. 코빼기도 안 비쳐서 그냥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고 있었다.
"근데 네가 죽으면 검은 무리의 존재 의의가 있는 거야?"
"걔들은 내가 지휘하는 게 아니야. 난 그냥 그들과 대화를 할 뿐이지. 그 사람들은 너도 나중에 한번 보게 될 거다."
"그래? 그러면 됐고. 그럼 이제 죽어라."
"됐다. 어차피 난 사라지고 다시 나타날 존재이니. 내 스스로 가겠다. 어차피 내 역할은 다했으니까."
검은 나무는 킬킬 웃었다. 그의 마기가 갑자기 응축되는 게 느껴졌다. 검은 나무가 사특한 소리를 많이 한다더니, 설마 뒷통수를 치려는 건가 싶어 바짝 긴장했다.
"이봐, 검은 무리를 만날 때 이걸 가져가면 도움이 될 거야. 내가 여신의 눈을 피해 줄 수 있는 건 이런 것밖에 없는걸."
검은 나무는 자신의 입에서 검은 진주를 뱉어 냈다. 그것에는 마기가 응축되어 있었다. 내 발끝으로 또르르 굴러오는 걸 난 받을까 말까 했다. 그때, 그게 내가 들고 있는 백천에 흡수가 되었다. 원래는 하얗던 검이 회색으로 변했다.
"그것에다 잘 숨기고 다니라고."
"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태우면 되냐?"
"그러고 싶으면 그래도 된다."
검은 나무는 쿨하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니까 간직하고 싶어지잖아. 역시 검은 나무는 화술의 달인이야.
"다시는 보지 말자고."
"그래. 나도 마찬가지다."
검은 나무는 그렇게 사라졌다. 대체 뭐 하는 놈이었던 걸까. 당장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검은 무리라는 놈들을 맞닥뜨리면 좀 알게 되겠지.
일단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건 따로 있으니까. 난 찝찝한 마음을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아이리와 마리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깜짝이야."
마리나와 아이리는 땅속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날 보며 놀랐다.
"자, 이제 가 봅시다."
"벌써 끝났어? 근데 얘 내 말 안 듣더라. 한번 비행해 보고 싶었는데."
"그거 고귀한 품종이라 잘 안 따라요."
"이 세상에 나보다 고귀한 사람이 있나?"
마리나는 머리를 손으로 넘기며 헛소리를 지껄였다. 하긴, 성녀니까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알파튜러스는 나도 아니꼽게 바라보고 있다. 고귀한 품종인 걸 그렇게 티 내야 되나. 그래도 소리는 안 지르니 좋은 애완동물이라고 해야겠다. 애완용이기엔 좀 크지만.
"그럼 황도로 갑시다. 지금쯤이면 일이 다 진행되어 있겠네요."
"무슨 일?"
"연극이 무르익을 때가 됐죠."
나는 그렇게만 말하고 알파튜러스의 등에 올라탔다. 마리나와 아이리를 끌어 올리자 알파튜러스는 지시 없이 날기 시작했다.
목표는 당연히 황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