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검은 나무 원정대 - 열매 (3)
"왜 왔어요?"
"…언제 쫓아왔냐."
"제가 단거리 속도는 좀 빠르거든요."
"그렇구나."
"이제 느리게 좀 가시죠."
내 말에 그는 속도를 늦췄다. 이미 우리는 황도를 벗어나 있었다. 저 멀리 아이리와 마리나가 보였다. 참 빠르게 오긴 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올 거예요. 워낙 빠르게 왔어야지."
"그래. 마지막 인사는 하고 가야겠지."
그는 내 옆에 서서 느릿하게 걸었다. 아이리가 우리를 알아보고 손을 들었다. 우리도 역시 손을 들어 보였다. 마리나와 둘이 있던 틈이 그렇게 지루했던지 아이리는 날 반갑게 맞아 주었다.
"왔어?"
"네."
"뭔 일이 있는 거야, 황궁에서는?"
"알려 줄 사람이 올 거예요."
"넌 가끔 이해 안 되는 소리를 해."
그게, 어쩔 수 없다. 재수 없이 보일 수도 있는데, 내 나름의 배려라고 해야겠지. 아니면 크게 놀랄 수도 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말이 먼지를 풍기며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타고 있는 사람은 길게 늘어뜨린 금발의 녹안에 우아한 차림을 하고 있는 사람, 리얀이었다.
갑작스러운 황녀의 등장에 마리나와 아이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리얀은 마리나와 아이리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말에서 내리자마자 알파튜러스에게 안겼다.
"…마지막 인사네."
"악, 씨발. 깜짝이야!"
알파튜러스가 입을 열자 마리나가 비명을 질렀다. 마수의 입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나오니까 그럴 만도 하지.
설명을 요구하는 마리나와 아이리의 눈빛을 난 무시했다. 이별을 앞에 둔 남매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리얀은 알파튜러스를 계속 안고 울었다. 알파튜러스, 아니 가토스는 날개로 리얀의 몸을 감싸 주었다.
"사형수 지하 감옥과 마수 연구소가 붙어 있는 줄은 몰랐는걸."
"실험을 해야 하니까."
"무슨 실험?"
"어떤 마수에게 독이 있다면 그 해독제를 만들어야 하잖아. 그런 약의 임상 실험을 사형수로 하니까."
"그런 것도 있었구나."
가토스는 문득 걸리는 게 있어서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형은 몰라?"
"이건 황제만 알아. 아직 오빠가 황제는 아니잖아."
그 말에 안심한 가토스는 마수 연구소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철창에는 온갖 마수들이 있었고, 벽에는 온갖 이름 모를 약품들이 있었으며, 중앙에서는 온도 조절 장비가 웅웅거렸다.
"이건 뭐지. 고블린하고 사파이어 혼 래빗을 합친 건가?"
가토스는 한 케이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리얀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블린인데 이마에 파란 뿔이 나 있었다.
"근데 되게 온순하다."
가토스의 말대로, 고블린은 눈동자만 뒹굴뒹굴 굴릴 뿐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원래는 정맥이 솟아 있어야 할 팔과 다리도 근육이 쪼그라들어 조그마해 보였다.
"지금 얘들의 뇌에선 신경세포가 계속 사멸하고 생성되고 있어. 눈으로 받아들인 정보를 머리로 가져가기도 전에 잊어버리기 때문에 아무런 행동도 못 하게 되지. 그저 보는 것밖에는."
"뭔 소리야."
"그냥 얘들 쉽게 다루려고 바보 만들었다고."
"아, 그래."
"그래서 얘들은 눈을 가리면 발광해. 눈만 안 가리면 온순해. 그게 신경계의 재미있는 점인데……."
"알았다니까."
가토스는 손사래를 쳤다. 누나는 가끔 발동이 걸리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계속했다. 더 듣고 싶어도 시간이 없다. 아마도 바깥에서 에퍼리가 기다릴 테니까.
"빨리 가자."
"…그래."
정신을 차린 리얀은 가토스를 이끌고 마수 연구소의 안으로 계속 들어갔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리얀이 열쇠로 연 문만 다섯 개는 될 것이었다. 그야말로 여기는 기밀 구역이었다.
리얀과 가토스는 커다란 철문 앞에 섰다. 문 앞엔 원을 관통하는 붉은 선이 있었고, 피로 그려진 것처럼 음산했다.
"뭐야, 이건."
"그냥. 어차피 나밖에 못 오는 곳이니까 꾸며 놓은 거지."
"취미 한번 이상하네."
리얀은 살짝 부끄러워졌다. 그냥 극비의 구역 같은 느낌을 내고 싶은 자기만의 놀이였는데, 동생한테 들킨 것이다.
하지만 가토스와 리얀은 시간이 없었다. 리얀은 원에 손바닥을 댔다. 만약 어떤 호기심 많고 멍청한 연구원이 이곳에 리얀 대신 손을 댄다면 바로 원에서 나온 칼날에 손이 잘려 버릴 것이다.
문이 쩌적 소리를 내며 열렸다. 리얀은 잠시 기다렸다. 워낙 걸려 있는 스킬이 많아서 해주 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기 때문이었다.
문이 열리자 바로 커다란 철창이 보였다. 커다란 철창 아래서 커다란 눈이 굴려진다. 커다란 흰색 깃털, 노란 부리, 날카로운 황금색 눈. 커다란 새였다.
"…알파튜러스라고 해. 마음에 들어?"
"모르겠는데. 뭐, 지금보다는 낫겠지."
짐짓 태연하게 말하는 가토스의 목소리에 리얀은 차마 대답할 수도 없었고 뒤를 돌아볼 수도 없었다. 그저 한탄할 수밖에.
"우리에겐 황족의 피가 저주와도 같구나."
가토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리얀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는 철창을 열었다. 알파튜러스는 사파이어 혼 래빗과 고블린이 믹스된 개체의 그것처럼 눈만 굴리고 있었다.
"누나, 근데 이런 실험은 난 불가능하다고 알았어. 대제님의 말씀 중에 이런 얘기가 있잖아. 마수와 절대 섞이지 마라. 마수와 인간은 결이 다른 종족이니 엮이면 하등해지고 오염되어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너지게 된다고."
"음. 헛소리인 것 같아."
"대제님도 모욕하는 거야? 막가는구나."
리얀은 가토스의 말에 웃었다. 자신은 지금만큼 황족의 피가 역겨운 적이 없었는데, 가토스는 여전히 자신들의 피를 만들어 준 대제를 옹호하고 있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마음에 들어?"
"응, 마음에 들어."
리얀은 가토스의 얼굴을 여전히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봐야 했다. 더 이상 피할 수는 없었다. 가토스의 얼굴을 본 리얀은 그나마 안심했다. 참 편안한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이 순한 동생은 거짓말을 잘 못했다. 물론 대제전 위에서는 연기를 잘했지만.
"누나, 한 번만 안아 줘."
"통했네. 나도 지금 너를 안고 싶었거든."
리얀과 가토스는 서로 포옹했다. 가토스의 몸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그래, 떨리지 않는 게 이상했다.
"됐어.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래, 다음번에는 새로운 몸으로 만나겠네."
"만날 수는 있을까?"
"아, 잠깐."
리얀은 자신의 머리를 묶었던 빨간 끈을 알파튜러스의 다리에 묶어 주었다. 그냥, 이런 거라도 주고 싶었다.
"자, 이제 끝났다."
그 말과 동시에, 철창 바닥에 빼곡하게 그려진 진이 빛나기 시작한다. 스킬과 함께 기관 진식이 동시에 작동한다. 천장에서 증기가 뿜어지고 땅에서 안개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스킬: 영혼 교환 Lv. 3 사용】
【스킬: 영혼 교환이 신성을 침범합니다. 스킬이 제한됨과 동시에 원죄로 변환됩니다.】
【원죄: 아지라의 재주 Lv. 1 개방】
리얀은 스킬 창에서 뜨는 문구들을 보면서 기절했다. 그다음에 그녀가 일어났을 때, 알파튜러스는 없었다. 그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가토스가 있었다. 그녀는 그제야 눈물을 마음껏 터뜨릴 수 있었다.
"와, 근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모든 전말을 들은 마리나는 혀를 내둘렀다. 나는 심플하게 대답했다.
"황녀 전하는 똑똑하니까."
"에퍼리 후작 덕분이었죠."
리얀은 눈은 팅팅 부은 채로 다시 도도한 황녀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게 조금 귀여워 보였다.
"저는 그냥 황녀 전하께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라고 했을 뿐입니다."
"마수와 섞으라고 힌트를 준 건 당신이었잖아요.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요?"
"왜 그런 생각이 안 돼요?"
내 반문에 대답한 건 아이리였다. 그녀는 너무 당연하게 말했다.
"인간은 특별하니까. 그건 여신이 내려 주신 지위야. 대제님도 특별히 언급하셨었지. 마수와 우리는 다르다, 우리의 존재에 자부심을 느끼라고. 마수는 인간 세계에서 절멸해야 될 존재기 때문에 던전을 놔둬서는 안 된다고 하셨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말이지."
"별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애초에 상격이라고 자칭한 것들이 요정왕 아르펜, 신수 리바이어던, 베히모스인데 다 나한테 죽었는데 뭘.
"나도 그런 생각이 뿌리 깊었는데, 에퍼리가 요정왕을 없앤 것을 보고 깨달았어. 그런 격 자체가 허상은 아닐까 하고. 결국, 에퍼리의 삶이 날 바꾼 거지."
"엄청 거창하게 말씀하시네요."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봤구나."
알파튜러스가 말에 끼어들었다. 멀쩡한 사람의 목소리가 새에서 나오는 건 아무리 들어도 적응이 안 됐다. 나는 그게 무슨 연극 같아서 웃겼다. 아니, 연극의 뒷풀이라고 해야겠지.
대제전에서 열연한 주연 배우들이니까. 리얀은 분노한 연기를 해 가토스를 잘 빼돌렸고, 가토스는 억울한 듯 말을 잘 더듬었으니까.
"여기 너무 오래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볼 수도 있겠구나."
알파튜러스가 말했다. 리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별의 시간이 다가온 것 같았다. 리얀과 알파튜러스는 다시 서로를 안았다.
"다시 인간으로 돌아올 수도 있을까? 스킬 막혔다며."
알파튜러스가 물었다. 최대한 가볍게 말하는 게 리얀의 부담감을 줄여 주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리얀은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든 해야지."
"그래. 기다릴게."
"조금만 기다리면 될 거야. 또 내가 황제가 되어야겠지. 마수 연구소는 황제의 입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조직이니까."
"그렇구나. 뭔가, 누나를 놔두고 가는 것 같아서 미안한걸. 나만 도망치는 느낌이야."
알파튜러스는 웃으며 슬슬 도약 준비를 했다. 큰 날개가 펄럭이며 주변의 풀들이 반대 방향으로 꺾였다.
하늘에 뜬 알파튜러스는 리얀을 보더니 우리를 한번 쭉 훑어보았다.
"잘해 봐. 아니다. 에퍼리, 잠깐."
"네."
알파튜러스가 날개를 퍼덕이며 나를 불렀다. 그 모습이 생각보다 웃겨서 좀 웃었다.
"내 집무실 의자 가죽을 뜯어 보면 누나와 너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 있을 거야."
"그래요?"
"그래."
알파튜러스는 이제 홀가분하다는 듯 몸을 털었다. 깃털 몇 개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날았다. 아마 이제 제국 각지 초소에서 커다란 마수의 그림자가 지나갔다고 온갖 보고가 들어올 게 분명했다.
우리는 빠르게 작아지는 알파튜러스를 바라보았다. 알파튜러스는 빨라서 곧 점이 되었고,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하늘 속으로 쏙 들어가고 말았다.
"…에퍼리."
"네."
"너, 나를 왜 도와준 거야? 넌 굳이 안 도와줘도 됐잖아. 네 목표는… 음. 뭐, 그게 거짓말일 수도 있지만."
리얀이 날 쳐다보았다. 미안하지만, 그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의미 없는 속죄라고 해야 하나. 지구에서 못 했던 걸 해 보고 싶기도 했고. 마리나는 날 묘하게 바라보았다. 난 그녀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헛소리를 했다.
"그냥 뭐, 호감도 올려 두면 좋죠."
"뭐, 그런 거면 나야 좋지."
리얀이 웃었다. 그녀는 긴 손가락을 쭉 펴 나를 가리켰다.
"너, 그 말 후회하게 될 거야."
나와 아이리, 마리나는 따로 할 일이 있었다. 원정대는 귀환하면 보고할 의무가 있으니까. 나는 사실 몰래 한 번 황도로 들어갔다 나왔지만, 다시 바깥으로 나와서 공식적으로 들어가야 했다.
리얀은 알아서 쪽문으로 들어가겠지. 난 아이리와 마리나를 옆에 두고 성문으로 들어갔다.
"…검은 나무 원정대시군요. 제국의 보위에 감사드립니다."
"별것 아닌데요."
우리가 초소를 스쳐 가자 근위병은 바로 우리를 알아보고 문을 황급히 열었다. 초소에서 우리를 보는 눈에는 존경심이 가득했다. 어쩌다가 입지가 이렇게 됐을까.
황도를 걸을 때도 우리는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검은 나무 원정대야, 검은 나무 원정대!"
"쉿, 영웅님들한테 소리가 들리잖아!"
"정말 어떻게 다들 저렇게 선남선녀실까."
그래, 내가 어디 가서 꿀리는 외모는 아니라고 생각해. 그리고 사실 좀 이런 이미지면 좀 잘생겨 보이기도 한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마리나가 피식 웃어서 한 번 째려봐 주었다.
곧 황궁에서 뛰쳐나온 것 같은 기마 근위대가 우리에게 달려오더니 바로 앞에서 멈췄다. 그들은 말에서 내린 다음에 모두 트라프비체의 예를 갖췄다.
"제국의 수호자이신 검은 나무 원정대를 뵙습니다. 가테스 황자 전하의 명으로 의전을 하려고 왔습니다."
"소식이 좀 늦으시네. 온 지 꽤 됐는데."
"…그, 성문 초소에서 들은 다음 바로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건 아니지. 오랜만에 이런 위치에 있어 봐서 갑질 한번 해 봤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기마 근위대가 다시 예를 갖추고 우리를 둘러쌌다. 심지어 우리를 위한 마차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두 명씩 앉을 수 있는 마차의 좌석에서 난 좀 넓게 쓰고 싶었지만, 아이리가 마리나와 같이 앉기 싫다고 굳이 내 옆에 앉았다. 이것도 좋지, 뭐.
"…리얀이 네게 후회할 거라고 한 말은 뭘까?"
"저도 모르죠, 뭐."
아이리는 뭔가 초조한 듯 손톱을 깨물었다. 솔직히 나도 좀 불안하기는 하다. 리얀이 무슨 짓을 할까. 이제 본격적인 제위 다툼이 시작돼서 나한테 뭔 짓을 하기도 어렵지 않나.
곧 우리는 황궁으로 들어갔고, 마차는 황제의 집무실이 있는 대전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우리는 마차에서 내려 대전으로 나아갔다.
좌우에는 귀족들이 쫙 깔려 있었다. 가테스는 우리의 얼굴을 보자마자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모두, 영웅들에게 박수를."
그와 함께 사람들의 기계적인 박수소리가 났다. 오히려 황도의 시민들의 환호성이 더 감흥이 있어서 별로 느낌은 없었다. 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돌아온 리얀이 날 쳐다보며 묘하게 웃고 있었다.
뭐야, 괜히 불안하게.
"에퍼리 후작, 무사 귀환을 환영하네."
가테스는 내게 악수를 건넸다.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예의는 지켜야지. 가테스가 내 손을 꽉 잡았다.
"내가 황제가 되면 이 공로를 치하해 영지를 하사하겠네. 후작인데 영지 하나는 있어야지. 지금이라도 당장 주고 싶지만, 영지 분배권은 황제만 행할 수 있게 되어 있으니."
가테스는 짐짓 큰 소리로 말했다. 진짜 정치질 하나는 타고났네. 이렇게 자연스럽게 편으로 두겠다는 거겠지. 지금 보니 우측에 있는 귀족들은 가토스 황자의 라인이었던 사람들 같다. 그들의 표정은 거무죽죽했다.
그때, 가만히 있던 리얀이 웃으며 나왔다. 그 웃음은 소름 돋게 가면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모두가 가면인 걸 알지만, 그 가면이 너무나도 완벽해 아무도 시비를 걸 수 없는 느낌이다.
"무슨 권리로 오라버니가 그런 약속을 하시는 거죠?"
리얀은 입을 가리며 웃었다. 가테스는 리얀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마치 지금 나올 줄 알았다는 듯.
"리얀, 드디어 독니를 드러내는구나. 왠지 그럴 것도 같았다. 혹시 가토스를 죽인 것도 네 수작이냐? 가토스 측의 귀족들을 한 번에 흡수하려고?"
"뭐, 그건 귀족들이 결정할 일이지 제가 할 일은 아니죠. 단, 제가 제위에 관심이 있어졌다는 것, 그뿐입니다. 저도 황족의 피니까 그 자격은 충분하지 않을까요?"
"자격보다 중요한 건 실력이 아닐까 싶구나. 지금까지 황궁 사무 업무를 등한시해 놓고 갑자기 황제가 되고 싶다니. 웃긴 것도 유분수다. 괜히 너와 내가 다퉈서 낭비될 행정력이 곧 백성들을 궁핍하게 한다."
"전 오라버니가 옳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황제가 되어야겠어요. 단기적으로 백성들이 조금 힘들지라도, 결국 좋은 제국을 만드는 건 저라고 생각해요. 장기적으로 보면 백성들에게 좋은 거죠."
리얀과 가테스가 한 마디도 밀리지 않고 싸늘한 말을 뱉어 댔다. 공격만 있고 방어는 없는 개싸움이었다. 방어는 당연히 필요 없을 것이었다. 그들은 이미 적이었고, 그들은 서로의 말에 상처받지 않을 것이었기에.
"너를 지지하는 귀족이 한 명이라도 있느냐?"
"왜 없겠어요? 지금 오라버니가 손잡고 있는 제국의 영웅이 제 편이라면요?"
…뭐야. 결국 이런 거였나. 난 대충 예상은 했다. 리얀이 나를 자신의 편이라고 공언하는 것. 어차피 리얀을 도와줄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뭐.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겁박을 해.
"에퍼리 후작, 사실인가?"
가테스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려고 했다. 리얀에게 힘을 실어 주려는 판단이었다. 근데, 리얀이 내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움직였다.
"물어봐서 무엇 하겠어요."
리얀이 내게 다가왔다. 곧 그녀의 부드러운 손이 내게 감겼다. 곧 리얀의 매혹적인 음성이 대전을 울렸다.
"저와 에퍼리 후작은, 연인 사이인걸요."
…이건 또 뭔 개소리야. 내가 바라보자 리얀이 예의 그 묘한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