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공정거래 (2)
"뭐, 뭐야. 네가 왜 여기 있어?"
"그냥, 아가씨 데려다는 줘야죠. 날도 어두웠는데."
에퍼리는 그냥 그렇게만 말했다. 그는 아이리에게 다가오려고 했다. 어둠 속에서 그의 발이 삐져나올 때, 그때 아이리는 소리쳤다.
"잠깐만!"
"깜짝이야. 왜요?"
"오지 마."
그의 발이 그녀의 말에 따라 등불 뒤에서 멈췄다. 아이리는 등불에서 벽으로 오히려 도망쳤다. 아이리와 에퍼리 사이엔 등불이 비치는 만큼의 간격이 생겨났다.
아이리는 뒤를 돌아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분명, 눈이 부어 있고 많이 망가져 있을 것이다. 이런 모습을 그에게만큼은 보여 줄 수 없었다.
"…왜요, 혼자 있고 싶어요? 아가씨, 그렇게 큰 실수 한 거 아니에요. 술 마시다 보면 다 그렇고 그런 거지."
그런 게 아닌데. 뭔가 핀트가 어긋난 말이었지만 자신을 위로하고 싶어 한다는 느낌은 전해져 왔다. 아이리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아이리와 에퍼리는 어색한 침묵을 등지고 계속 서 있었다.
"…저 갈까요? 혼자 갈 수 있어요?"
계속 기다려 주던 에퍼리가 물었다. 그것도 나름의 배려겠지라고 생각했다. 아이리는 알고 있었다. 에퍼리라는 사람을 이제 어느 정도 알았기에 나오는 확신이었다. 그는 가끔 이상한 부분에서 많이 어수룩했다. 뭐, 여자를 안 만나 봤으니 이해할 수 있었지만.
물론 아이리도 남자를 만나 본 경험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너무 어수룩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조명 안으로 손을 뻗었다. 뒤는 여전히 안 돌아본 채로.
아이리는 눈을 꼭 감았다. 이 행동도 못 알아먹으면 어떡하지? 너무 바보처럼 느껴지면 어떡하지? 내 손이 찬바람만 쐬고 에퍼리의 멍청한
'뭐요?'
라는 말이 들리면 어떡하지? 결론적으로 자신이 바보 같은 행동을 했다고 자책할 때 그녀의 손으로 따뜻하면서도 큰 손이 감겨 왔다.
"이, 이거 맞아요?"
여전히 바보 같은 목소리를 내기는 했지만, 행동은 정답이었다. 아이리는 손을 뻗기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이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게 하다니, 에퍼리는 역시 자신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가자. 내 얼굴 보려 하지 말고."
"그래요."
아이리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은 채로 자신의 공작저로 걸었다. 마치 자신이 에퍼리를 산책시키는 느낌이었다. 공작저에 도착할 때까지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리는 일부러 공작저로 가는 길을 빙빙 돌았다. 다 아는 길이었지만, 밤이라 잘 보이지도 않는 길이었지만 아예 다른 길처럼 형형색색처럼 보이는 게 그녀에게 신기했기 때문이다.
"공작저로 가는 길이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네요. 오길 잘했네. 맨날 달려서만 가 가지고."
"넌 너무 빨라. 좀 걸어 다녀."
"그래야겠어요."
아이리는 핀잔을 주었다. 그녀는 살짝 죄책감이 들었다. 자신은 지금 친구의 남자를 유혹하는 걸까. 하지만 이렇게라도 그와 가까이 있지 않으면 자신이 미쳐 버릴 것 같은걸. 인정하고 나니까 순식간에 그에게 바라는 게 너무 많아졌다. 안기고도 싶고, 쓰다듬어져 보고도 싶고, 안아 보고도 싶고, 쓰다듬어 보고도 싶었다.
하지만 길이란 건 결국 종착점이 있는 법. 그녀는 더 돌고 싶었지만 에퍼리가 눈치챌까 봐 공작저로 향했다.
거의 한 시간을 말없이 걸었다. 아이리는 그동안 한 번도 뒤를 돌지 않았다. 에퍼리도 뒤를 돌아보라고 하지 않았다. 그런 에퍼리가 자신은 좋았다.
"와 줘서 고마웠어. 난 들어갈게."
아이리가 에퍼리의 손을 놨다. 꽤 오랜 시간 잡고 걸어서 그들의 손에는 촉촉한 땀이 배어 있었다.
"…아가씨."
막 공작저로 들어가려던 찰나, 에퍼리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아이리는 우뚝 섰다.
"왜?"
"그, 황녀님하고 사귀는 건 거짓말이에요. 뭔가 말해 주고 싶어서."
"…흐응. 그렇구나. 알았어."
아이리는 최대한 새침하게 말했다. 공작저의 문이 곧 닫혔다. 아이리는 공작저의 문이 완전히 닫힐 찰나, 뒤를 돌아보았다. 에퍼리가 뒤돌아 있겠지 하고. 하지만 에퍼리는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급히 아이리는 뒤를 돌았다.
결국 보여 주기 싫은 얼굴을 들켜 버렸다. 아까 눈물로 얼룩진 그 얼굴보다 더 보여 주기 싫은 얼굴을.
"아침 대전 회의 가는 거잖아요. 같이 가려고요."
문 앞에 사람이 있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냥 시녀인 줄 알았지. 황녀일 줄 누가 알았겠어. 한 20분은 그냥 서 있었는데.
"…아. 우리 연인이었죠."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말고요. 황궁은 듣는 귀가 많으니."
"제 귀가 더 밝아요. 아무도 없어서 한 말이에요."
"아,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리얀은 내게 우아하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손을 잡았다. 연인인 척을 하려면 제대로 하긴 해야지.
"그리고 이제 황녀 전하라고 부르지 마요. 누가 연인끼리 그런 지칭을 쓴다고요."
"공적인 자리에서는 호칭 써야 되는 게 아닌가요?"
"그렇긴 한데, 우리 사적으로 있을 때 말이에요."
"사적으로 있을 때는 굳이 연기할 필요 없잖아요?"
"아이 씨. 그냥 내 말 들어요. 보면 진짜 답답하다니까. 연기의 생활화라고 해요 그럼."
리얀이 갑자기 짜증을 냈다.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테라스에서 흡연 한 방 때렸는지 담배 냄새가 푹 풍겨 왔다. 뜬금없이 답답하다는 말로 한 대 맞은 나는 가만히 있기로 했다.
분명 리얀도 내게 호감이 있는 건 맞다. 근데 난 이 호감도가 절대적이지 않은 걸 안다. 그냥 인간적인 호감도일 수도 있다는 거지.
「이름: 리얀 트라프비체
나이: 22
호감도: 88
가장 사랑하는 사람: 헨리 트라프비체
키워드 : ???」
오히려 이런 호감도가 날 더 헷갈리게 하는 요소라고 해야 하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보통 가족이고. 뭐 어쩌라고. 이건 진짜 왜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제일 불만이 많은 스킬이다. 차라리 안 보는 게 낫지.
심지어 가토스도 마지막 알파튜러스 때 봤을 때 나에 대한 호감도가 70을 넘어 있었다고. 그냥 우정의 표시겠지만 어쨌든.
"당신이 어제 우리 버려 놓고 아이리와 데이트할 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나 알아요?"
"무슨 일이요?"
"이미 싸움은 시작됐다고요. 사실 어제 그걸 말하려고 술 마시자고 한 건데. 참 나."
리얀은 나에게 눈을 흘겼다. 솔직히 할 말 없다. 근데 그때의 아이리는 가 줬어야 했다.
"그래요?"
"가 보면 알게 될 거예요. 너무 더럽다고 욕하지는 마요. 사실 황궁 사람들만큼 더러운 사람들도 없어요."
리얀은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 내 손을 이끌고 대전으로 들어갔다. 이미 많은 대신이 와 있었다. 황녀의 자리는 고정되어 있었기에 우리는 대전에서 손을 놓았다. 나는 아무 데나 빈자리에 섰다.
근데, 뭔가 날 바라보는 귀족들의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그들은 내가 선 자리에서 슬금슬금 피했다.
요 며칠 겪었던 경험과는 완전히 달랐다. 가테스가 날 띄워 줬을 때는 나와 어떻게든 가까워지고 싶어 했다면, 지금은 꺼려 한다는 느낌이었다.
- 하이에크 공작은 조심해야 될 자다. 라피테스 공작이 재계의 손이라면 하이에크 공작은 여론의 손이다.
가토스의 책에는 자기 라인의 인물들을 분석한 모든 내용이 들어 있었다. 지금, 가장 필요한 책이었다. 이렇게 여론이 확 바뀌었다면, 하이에크 공작의 수작질임에 분명했다.
그때, 황제의 권한 대행인 가테스가 나타났다. 그래, 주인공은 늦게 나타난다 이거지. 그는 대전에 오자마자 리얀 앞으로 다가갔다.
아마 나밖에 못 봤을 거다. 가테스가 리얀에게 다가가기 전 그 순식간에 지은 웃음을.
짝!
소리가 났을 것이다. 내가 가테스의 손을 막지 않았다면.
"뭐 하는 짓입니까?"
"황족의 일이다, 에퍼리 후작."
가테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얘 연기하는 꼬라지 봐라.
"황족의 명예를 더럽혔으니 교육을 해 주려 했거늘."
"무슨 명예 말입니까?"
"황궁 소식지도 안 보나? 아, 자네는 옌시 사람이었지. 구독해 두도록 하게. 꽤 유용하니."
모르긴 몰라도, 난 대충 눈치 깠다. 그래, 언론으로 낀 거품, 언론으로 뺐다 이거지.
"리얀과 자네 사이에서 얼마나 추잡한 얘기가 오가는지 아나?"
"알 바 아닙니다. 다 진실이 아닐 테니."
"하나하나 다 말해 줄까? 황녀가 임신을 했다가 중절했다는 말도 있고, 자네들이 다른 사람들을 끼고선 문란하게 잠자리를 했다는 말도 있고 아주 다채롭다네. 개인적으로는 흥미롭지만, 황족으로서 이런 소문이 나면 곤란하다네."
"다 거짓말인 걸 아시지 않습니까?"
"나야 모르지."
가테스는 능청을 떨었다. 얘는 천상 정치인이네. 지구에서도 한자리 할 놈이다. 냉정하면서 뻔뻔한 사람이 정치를 보통 잘하니까.
"황궁 소식지가 그렇게 천박한 것인지 몰랐군요. 그게 오히려 황족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일 아니겠습니까?"
"황궁 소식지는 민간에서 하는 일이라 가십거리가 많지. 이건 대제님의 뜻이었다네. 적어도 백성들에게 황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려 줘야 한다고."
"그렇군요. 대제님이 땅을 치고 우시겠습니다."
"대제님을 모욕하는 건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말꼬리 잡기 싸움은 취향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정치질은 내가 잘 아는데, 말싸움은 해 봐야 독이다. 진짜 정치를 잘하는 사람은, 말로 하는 것보다 보여 준다.
내가 지구의 정치를 조금 맛보여 줘야겠다. 이 고증도 안 맞는 미개한 중세 시대한테 말이야.
"제가 황궁 소식지를 안 보기는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거짓임을 곧 밝히겠습니다. 그리고 그 거짓 소문을 퍼뜨린 자에게 책임을 묻겠습니다."
"어떻게 책임을 묻겠다는 말인가?"
나는 좌중을 바라보았다. 고조된 긴장감에 모든 귀족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국의 방식대로요. 황족의 명예는, 그 무엇보다 귀중하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제일 귀중한 것을 상처 내려 했다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