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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91화 (91/150)

90화 공정거래 (3)

"고마워요."

"뭐가요?"

"알면서 모른 척하기는. 어떨 때 보면 선수야."

리얀이 내 옆구리를 푹 찔렀다. 그녀와 나는 '연기의 생활화'를 위해 여전히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정치적인 판단이에요. 제가 정치질 하나는 잘하니까요."

"그래요?"

"가테스 황자가 이런 소문을 퍼뜨릴 사람은 아니겠죠. 원래 정치 싸움에서 제일 몸집이 큰 사람은 사리기 마련이거든요. 발악하는 건 두 번째로 몸집이 큰 것들이죠."

"그건 대충 알고 있어요. 하이에크 공작이 언론을 꽉 쥐고 있으니까요. 아마 다른 귀족들도 모두 알고 있을걸요."

"정치 싸움이라는 게 다 그렇죠. 모두 알면서 눈감아 주고 불문율로 싸우는 것. 그러니까 더럽다는 거겠죠."

"꽤 정치의 생리를 아시네요."

리얀은 웃었다. 나에게는 웃을 일은 아니었다. 씁쓸한 일이지. 물론 여기가 이상한 세계기는 하지만, 중세 정치나 현대 정치나 맥락은 똑같으니까.

"그래서 무슨 이유로 정치적인 판단이라는 거죠? 내가 뺨 맞는 게 뭐 대수인가."

"대수죠. 가테스 황자는 선을 넘은 거예요. 그렇게 정치적인 세력이 큰데도 여기서 점수를 더 따려고 하다니. 적당히 해야지."

"좀 풀어서 설명해 줘요."

리얀은 그렇게 말하면서 내게 더 몸을 더 가까이했다. 참 좋으면서 이 불편한 느낌. 난 그걸 애써 외면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가테스는 황녀 전, 아니 당신의 뺨을 때림으로써 자신의 우위를 자기 세력에게 다시 확인하려고 했다고요. 지금은 남아 있는 가토스 황자 세력이랑 우리와 싸움인 건데, 여기서 우리는 우습지 않다는 걸 보였어야 됐죠. 그러니까 좀 강하게 말한 것도 있어요."

"그렇구나."

"아실 만한 내용일 텐데."

"사실 그냥, 그때 에퍼리가 멋져서 뒤통수 바라보고 있느라 바빴거든요. 그런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고 해야 하나."

컥. 난 말문이 막혔다. 이런 말을 들으면 립 서비스인 걸 알아도 아무리 냉정을 유지하려고 해도 타격이 좀 있다. 이렇게 손까지 잡고 있으니까.

"이제, 어떻게 할 건데요?"

"또 가테스가 숟가락 얹기 전에 빨리 처리해야죠."

"어떻게요?"

"그건 말씀 못 드려요."

나는 차갑게 끊었다. 리얀을 일부러 내가 안 바라보자 갑자기 귀에서 잔잔한 바람과 매혹적인 음성이 들렸다.

"…이래도요?"

"윽……."

소름이 끼쳐서 리얀의 손을 놓으려고 했지만 리얀의 손은 날 꽉 붙잡고 놔주질 않았다. 나는 나머지 손으로 귀를 문질렀다.

"원래 총수는 알면 안 되는 일들이 있어요. 몰라야지 일이 잘못돼도 행동대장이 덮어쓰죠."

"으응, 그렇구나. 열 살 이후로 처음 정치학을 공부하네요."

"놀리지 마시고요."

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리얀의 집무실에서 그녀와 헤어졌다. 귀가 또 갑자기 간지러워졌다.

솔직히 모르겠다. 이 방법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리얀한테 안 알려 준 건, 내가 창피해서 그렇다. 총수, 행동대장 이런 걸 내가 알 리가 있나.

"외출복으로 입고 왔어요. 어때요?"

"…예쁘네요."

"고마워요."

리얀은 목걸이가 있는 챙이 넓은 모자와 품이 넓은 바지, 짧은 레이스가 달린 옷을 입고 있었다. 왠지 남성용 복장 같은 느낌이다. 머리도 올림머리로 묶어서 보이시한 매력이 감돌았다.

"그래서, 우리가 할 건 뭔가요? 나한테도 안 알려 주고."

"거품 빼는 작업이요."

"뭔데요, 그게?"

"그냥 서민 체험한다고 보시면 돼요. 최대한 웃고 계시고요."

"뭐, 일단 알았어요."

나는 리얀의 손을 잡았다. 리얀이 깜짝 놀란 듯 몸을 떨었다. 왜 이렇게 당황할까. 연기의 생활화인데. 나도 부끄럽긴 한데, 리얀이 당황한 게 느껴져서 더 부끄럽다.

나는 그녀와 손을 잡고 황궁 밖으로 나갔다. 오히려 호위병은 아무도 안 두었다. 그런 건 다른 사람들한테 괴리감을 줄 뿐이었다.

"뭔가, 이렇게 아무도 없이 황도로 나온 적은 처음이네요."

리얀은 살짝 흥미롭게 주변을 슥슥 둘러보았다. 다른 백성들의 시선이 모이는 게 느껴진다. 나도 어느 정도 유명 인사가 되었고, 리얀이야 말해야 입 아프다.

"뭐 하나 먹을래요?"

"…갑자기요? 돈 안 가지고 나왔는데."

리얀이 당황했다. 솔직히 황녀가 돈을 주고 사 먹는 거리 음식이 몇이나 되겠나. 난 이해한다. 그럴 줄 알고 돈을 몇 푼 챙겨 왔다.

"아무거나 땡기는 거 먹어요. 황궁 요리보단 맛없겠지만."

"사실 저 황궁 요리 별로 안 좋아해요. 너무 건강식만 챙겨 줘서."

"그래요? 그러면 괜찮겠네."

나는 길거리 노점 아무 데나 들어갔다. 리얀은 주춤거리며 들어왔다. 나와 리얀이 노점 안에 들어가자 노점상과 주변에서 먹고 있던 평민들이 단체로 굳었다.

"…황녀 전하 아니십니까. 이런 곳에는 어쩐 일로……."

"음. 거기 걸려 있는 꼬치 두 개만 주세요."

"그냥 가져가시면 됩니다. 귀족들께는 안 어울리는 음식들인데……."

"그럴 수는 없죠."

나는 메뉴판에 있는 가격을 보고 팁까지 지불했다. 점장은 두 손으로 황송하다는 듯이 받았고, 나는 꼬치 두 개를 받아 들었다. 유치하지만 이런 게 필요하다. 난 순간 차폐막을 치고 리얀에게 조용하게 말했다.

"최대한 맛있게 먹어요."

"그, 맛있으면 맛있게 먹는 거죠."

리얀이 살짝 위축됐다. 저런,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닌데. 아직 역시 정치를 잘 모른다. 물론 여기가 민주주의는 아니지만, 여론은 항상 중요하다. 여론은 밑바닥부터 쌓아 가는 것.

내 이미지가 거품처럼 위로 가든 밑으로 가든 공통점은 다 거품이란 거다. 밑바닥부터 쌓아 가면 거품이 아니지.

"잘 봐요."

나는 차폐막을 바로 없애고 꼬치를 최대한 맛있게 뜯었다. 별로 맛은 없다. 나도 사실 입맛이 까다로운 축에 속하니까. 하지만 여기서 그걸 티 낼 수는 없다.

"고기 굽는 실력이 좋네요. 육즙이 살에 가둬져 있네."

"…그,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육즙은 개뿔. 약간 콩고기 같은 맛이 나는데. 하지만 리얀은 역시 눈치가 빨랐다.

"지, 진짜 맛있네요. 어떻게 이런 고기를 공수하셨지. 황궁에서도 잘 안 나오는 수준인데."

사정도 모르는 노점상은 우리에게 연신 배꼽 인사를 했다. 주변 사람들도 우리를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곧 우리 주변에 사람들이 몰렸기에, 우리는 결국 한 꼬치씩 더 먹고 나서 노점상을 빠져나왔다.

계속 우리는 대로변을 활보했다. 어른들은 그저 우리를 신기하게 바라보고 안 엮이려고 스쳤지만, 아이들은 아예 따라오기까지 했다. 아직 귀족의 무서움을 모르는 거지. 이런 애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역시 연기에 소질이 있으십니다."

"아뇨, 진짜 맛있었어요."

"…그래요?"

누렁이 입맛인가. 그럴 수도 있지. 리얀은 내게 매달리며 길거리 음식을 더 먹어 보자고 했지만 난 가차 없이 고개를 저었다. 보여 주는 건 한 번이면 충분하다.

"이제 어디 가요?"

"예약해 놓은 곳 있어요."

"어디요?"

리얀이 노골적으로 기대감을 풍겼다. 나는 미안해져서 아무 말도 없이 걸었다. 내가 예약을 해 놨다니까 무슨 고급 레스토랑이라도 예약한 줄 아는데, 어림도 없지.

리얀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 구경을 열심히 했다. 따라오는 아이들한테 화사하게 인사까지 해 주고. 이 정도면 내가 의도한 것보다 훨씬 좋은 효과를 내고 있다. 결국 우리는 사람을 몰면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폐허네요."

"곧 재건이 되어야겠죠. 스킬을 쓸 수 있는 노동자가 부족해서, 백성들이 벽돌을 나르는 곳입니다."

그곳에서는 이미 흰 민소매 차림의 노가다꾼들이 짐을 한껏 옮기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 역시 우리에게 모였다. 나는 귀족 차림이고 황녀야 말할 것도 없으니.

노동자들은 심지어 우리를 경계하고 있었다. 높은 사람이 왔으니 뭐 방해하러 왔나, 감시하러 왔나 생각이 들겠지. 하지만 전혀 아니다.

나는 그녀의 여행용 모자를 벗겨 주고 대신 노란색 철 모자를 씌워 주었다. 안전용 모자였다.

"윽, 무거워요."

"참아요."

우리가 그렇게 있자 이 공사장의 담당자로 보이는 사람이 헐레벌떡 나왔다. 뭔가 잘못했나 하는 불안한 표정이었다.

"갑자기 황녀 전하와 에퍼리 후작께서 방문하셨다고 하여 나왔습니다. 어쩐 일이십니까?"

"그, 오늘 노동자로 두 명 예약했는데요. 에퍼리라는 이름으로."

"…네. 되어 있습니다, 오후 3시부터 8시까지. 혹시 이 에퍼리가 후작 본인이십니까?"

"네."

내가 그렇게 말하자 공사 담당자는 땀을 뻘뻘 흘렸다. 일부러 귀족이라는 말을 안 하고 에퍼리란 이름으로만 지원해 놨으니. 리얀은 날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다. 다 필요한 일이라니까.

"…어찌 귀족께서 이런 험한 일을 하려 하십니까? 심지어 황녀 전하까지… 만약 사고라도 난다면 저는 그만 죽은 목숨입니다."

"괜찮습니다."

나는 리얀을 내 품으로 확 끌어당겼다. 연기의 생활화, 생활의 연기화. 난 속으로 되뇌었다. 리얀이 품 안에서 확 어는 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제 사람은 제가 챙길 테니까요."

"…흐읍, 알겠습니다."

공사 담당자는 부리나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마 등록하고 그런 절차가 있겠지. 우리도 따라서 들어가야 했다.

"…좀 놀랐어요."

"그, 이런 험한 일을 보여 주는 게 필요합니다."

"그건 모르겠고요……."

리얀은 말끝을 흐렸다. 아, 내가 안은 걸 얘기하는 건가. 그거에 대해서는 할 말 없다.

"죄송해요. 그냥 그, 연기입니다. 확실히 연기의 생활화가 도움이 되네요. 이런 짓거리도 막 나오는 걸 보니까.

"아니에요. 제가 주문한 건데요."

그다음부터 리얀이 왠지 말이 없어졌다. 우리는 결국 정해진 시간 동안 막노동을 했다. 리얀도 스킬을 써서 벽돌을 나르고 하고, 나야 뭐 말할 것도 없으니. 우리는 한 시간도 되지 않아 그 건물의 재건을 마쳤다.

새 것처럼 바뀐 건물을 보고 공사 담당자와 우리가 왔다는 걸 뒤늦게 들은 건물주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최소 일주일은 생각했던 건데."

"그냥 도우러 온 겁니다."

"정말 성은이 망극합니다. 어찌 이렇게 도우시는지. 급여를 저희가 어떻게 치기도 뭐하고……."

"그냥 준비된 일당으로 주시죠. 그거 받으러 온 거니까요."

"정말 그것만으로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얀은 저 뒤에서 무거운 안전모를 벗고 머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싸구려 재질의 봉투 두 장을 받고 우리는 유유히 물러났다. 저 뒤에서 건물주, 공사 담당자, 노동자들이 우리를 빤히 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왜 왔나 싶겠지.

나는 괜찮았지만, 리얀은 퍽 지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긴 그녀는 이렇게 오래 밖에 돌아다닐 일이 없었을 테다. 그녀는 아무도 없는 골목에 들어서자 힘없이 말했다.

"약간 그, 우리의 친숙한 모습을 백성들한테 보여 주자 이건가요?"

"네."

"이런 게 중앙 정치에 도움이 될까요?"

"여론이라는 건 20% 진실에 80% 거짓말을 섞는 거니까요. 오늘 치 진실은 다 만들었습니다."

"그런가요?"

리얀은 내 말에 피식 웃었다. 제국에서는 말이 안 되는 정치겠지. 귀족들의 정치니까. 하지만 백성들이 만든 이미지가 귀족들에게 돌아가고, 그건 결국 우리가 흡수하기 마련이다.

"피곤하신데 돌아가시죠."

"목이 너무 아픈데요. 그 무거운 모자를 오래 쓰고 있었더니."

리얀이 자신의 챙 모자를 벗으면서까지 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그 가벼운 천 모자도 무겁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좀 주물러 줄래요?"

그녀는 일하느라 풀어진 머리를 다시 묶어 들어 올린 다음, 내게서 돌아섰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래, 뭐 안기까지 한 사이인데 목덜미가 뭔 대수인가 싶었다.

하지만 왠지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그녀의 하얗고 긴 목을 잡는 게 뭔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목 부분을 어루만졌다.

"흑."

내 손이 닿자마자 리얀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어깨를 올렸다. 난 바로 손을 뗐다.

"왜, 왜요?"

"아니, 손이 너무 차가워서."

너무 오래 돌아다녔더니 그런 모양이다. 난 손을 마나로 따뜻하게 만들고 그녀의 목에 다시 손을 댔다. 리얀의 다듬어진 머릿결이 손등에 스쳐 뭔가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괜히 나 혼자 창피해져서, 난 대충 주물러 주다 손을 뗐다. 리얀이 뒤를 힐끗 쳐다보았다.

"내가 오늘 잘 이해한 게 맞으면, 우리는 우리에게 덮어써진 안 좋은 이미지들을 다 희석하고 가는 게 맞겠죠?"

"밑에서부터 쌓는 여론은 한 번에 뒤집기 힘들어요. 이런 건 작은 이슈들이거든요. 크고 자극적인 이슈가 터져야죠. 그런 이슈는 제가 알아서 만들 거니까, 황녀 전하는 이제 황궁에 가서 쉬시면 돼요."

난 정론을 말해 주었다. 하지만 리얀은 뭔가 성에 안 찬 얼굴을 했다. 자기가 듣고 싶은 대답이 아니었다는 듯.

그녀는 내 손을 잡고 대로변으로 나아갔다. 이제 막 노점상들이 정리하고 나가는, 세일을 하고 그것을 사려는 백성들이 모이는 시간이었다. 오늘의 마지막 러시아워 같은 느낌이었다.

다시 화려한 복장의 우리가 대로변으로 나오자 역시 시선이 모였다. 그녀는 갑자기 내 몸을 자기 쪽으로 돌리더니, 까치발을 해 내 볼에 입맞춤을 해 주었다.

갑자기 이뤄진 공개적인 애정 행각에 모든 사람의 눈이 크게 떠졌다. 나 역시 당황해서 리얀을 바라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가십거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잖아요."

리얀은 그렇게 말하면서 챙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리얀의 얼굴이 어떤지는 보이지 않았다. 단지, 볼에 남은 입술의 감각이 날 화끈거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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