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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92화 (92/150)

91화 공정거래 (4)

"그래서 오늘 한나절 동안 황도만 돌아다녔다고?"

"네."

"말이 되나?"

황궁 소식지의 책임자, 쉬버리 필리아 후작은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모든 끄나풀이 그렇게 말하니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황녀 전하는 안전모를 쓰고 건설 일을 했다라."

"네, 맞습니다."

계속되는 보고에 쉬버리 필리아 후작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귀족들의 중앙 정치를 안다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었다.

당장 애매한 위치를 지니고 있는 귀족들을 꼬셔 한 사람씩 입지를 다져도 모자랄 판에, 아무 쓸데도 없는 백성들과 가까이 해서 무엇한다는 말인가.

"아예 제위를 포기한 건가?"

쉬버리 후작은 고개를 저었다. 복잡한 생각은 자신이 할 게 아니었다. 황녀와 에퍼리 후작이 길거리에서 꼬치를 먹었느니, 건설 일을 했느니 하는 건 어차피 기사에 안 올라갈 것이다. 올라갈 기사들은 에퍼리와 리얀에 대해 자극적인 것뿐이니까.

"하여튼, 정치를 너무 물로 봤군. 공작님이 에퍼리 후작 때문에 걱정하시던데,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강한 것과 정치는 또 다른 문제니까."

쉬버리 후작은 씩 웃었다. 에퍼리 후작이 소드 마스터에 강하다는 건 안다. 만약 직접 붙으면 뼈도 못 추릴 것이다. 하지만 어떨 때는 펜대가 검보다 강할 때가 있는 것이었다.

"알았네. 그럼 다들 나가 봐."

"알겠습니다."

검은 옷으로 무장한 끄나풀들이 모두 방에서 천천히 나갔다. 쉬버리 후작은 이제 글을 써야 했다. 어떤 글을 써야 자극적으로 될까. 벌써부터 재밌었다.

멀리서만 봤던, 리얀 황녀 같은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자신의 펜대 하나로 이리저리 굴려질 수 있다니. 뭔가 흥분되었다.

하지만 그 흥분은 살짝 가셨다. 검은 옷을 입은 끄나풀 한 명이 안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네는 안 나가나?"

쉬버리 후작의 물음에 그는 가만히만 있었다. 끄나풀들은 대개 준남작이거나 평민이었다. 후작인 자신의 말을 이렇게 무시할 사람은 다 한 명도 없었다.

그는 가만히 있다가 품을 뒤적거렸다.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쉬버리 후작은 아래 테이블에 있는 스킬 스크롤을 꺼냈다. 그의 품에서 나온 게 날붙이라도 된다면 바로 찢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품에서 나온 건 날붙이가 아닌 작은 수첩이었다. 그는 수첩을 보고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읊조렸다.

"구순구개열 살짝 있고, 회색 머리에 짧은 코, 한쪽 눈만 있는 쌍꺼풀."

그는 뒤집어쓴 모자를 살짝 들었다. 쉬버리 후작과 그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싸늘한 눈에 쉬버리 후작은 전신이 얼었다. 잠깐 눈을 마주친 정도였지만, 그의 정체는 모를 수가 없었다.

"맞네, 쉬버리 필리아 후작."

그에게 이름이 불린 쉬버리 후작은 생각했다. 왜 이 사람이 여기에 있는 거지.

"…에퍼리 후작."

쉬버리 후작은 잠깐 당황하다가 껄껄 웃으며 일어났다. 그는 자신의 방에 있는 찬장에서 비싸 보이는 술을 꺼냈다.

"한잔하실 텐가? 제국의 영웅이랑 이렇게 독대하는 건 영광이지."

"술을 마시러 온 건 아닌데."

"그렇군."

그는 다시 의자 속으로 파묻혔다.

"어쩐 일이지? 이렇게 남의 집에 잠입해서 찾아오는 건 굉장히 무례한데."

그는 여전히 여유가 있었다. 나는 의자를 끌어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서 그를 바라보았다.

"날 협박하려고 온 건가?"

"협박이라."

나는 골똘하게 생각했다. 협박… 은 아닌 것 같다. 난 고개를 저었다. 그는 그러자 일말의 긴장마저 놔 버리고 피식 웃었다.

"그렇다면 회유? 뭐, 줄 거라도 있나 보지?"

"줄 건 없는데."

"그럼 여기는 왜 온 건가? 이해할 수가 없군. 이봐, 검 한 자루 잘 다룬다고 세상에서 제일 잘난 것처럼 행동하면 곤란해. 난 사실 이해할 수가 없다네. 황녀랑 사귀는 사이라고 해도, 뭐 그게 대수인가?"

난 검을 들려다 말았다. 여기에서의 연애관이 뭔지 살짝 궁금해졌다.

"대수가 아님 뭐지?"

"이 세상에 진정한 사랑이 어딨다는 말인가, 친구. 나도 유부남이고, 많은 귀족을 만나 봤지만 남자는 다들 첩을 두고 여자는 다른 몸 좋은 하인을 찾게 되더군."

"그래서?"

"이봐, 그러니까 들어 봐. 차라리 황녀를 가지고 싶다면 황녀를 지키는 것보다 황녀를 무릎 꿇린 다음에 주워 가면 되는 거라네."

쉬버리 후작은 그게 정답임을 확신하고 있다는 듯이 껄껄 웃었다. 좀 끔찍한데. 이게 인간의 본성이라면 말이야. 난 소름 돋게도 이와 비슷한 말을 지구에서 너무 많이 들었다.

"세상에는 칼보다 무서운 게 참 많지. 펜이라든가 말이라든가. 자네는 칼은 강하지만 아직 그런 거는 약해. 만약 나를 따라오면 새로운 세계를 보여 주지. 당장 네 방에 최상급의 여자를 다섯 명은 넣어 줄 수 있는걸. 아, 연애도 한 번도 안 해 봤다고 했지? 그러면 두 명이면 충분하려나. 처음부터 너무 마니악 하면 힘드니까."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가 간과한 건 두 가지다. 내가 정치를 모른다는 점. 오히려 내가 살던 세계의 정치가 더 더러웠으면 더러웠다. 그리고 하나는 내가 이런 유혹을 안 받아 봤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것.

그래, 여자나 돈, 이런 유혹이 단순해 보이지만 꽤 잘 먹힌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S급 헌터들 사이에서도 그런 싸구려 유흥에 돈을 쓰다가 파산 신청을 한 자도 있었으니까.

그래도 실망스러운 건 실망스러운 거다. 뭔가 이자가 좀 신선한 얘기를 할 줄 알았는데. 닳고 닳은 얘기를 보물함에서 꺼내듯이 비밀스럽게 하니까.

"뭔가, 이 세계의 정치는 다를 줄 알았는데."

"정치란 과거에도 똑같았고 미래에도 똑같을 거네."

"아니. 그건 아닌 것 같다."

나는 주머니에서 동화 한 움큼을 꺼냈다. 오늘 리얀과 외출하면서 거슬렀던 돈들이 아직 주머니에 있었다.

"정치란 건 말이야.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더러울 거다. 그건 내가 장담하지."

푹!

바로, 동화 한 움큼이 그의 입으로 쑤셔 들어간다. 내 주먹이 들어갈 자리가 부족해 이 몇 개를 부숴 놨다. 동화로 가득 채워진 그의 입에서 나는 소리는 말의 형태를 띠지 못하고 끙끙거리기만 했다.

"참, 원래는 흰 장갑도 껴야 되고 뭐 그런다고 했는데."

전직으로 정치인들의 해결사 역할을 했던 구공환 아저씨가 내게 알려 준 팁이 많았는데, 여기선 굳이 써먹지 않아도 됐다. 과학수사가 발전이 안 된 곳이니까.

그는 분명 고통을 느끼고 있을 터였지만, 그저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이런 행동은 예상하지도 못했다는 듯.

"내가 아는 정치인들은 너희보다 더 더럽고 더 솔직한 사람들이야."

그는 당연히 말하지 못했다. 입안에 동화가 가득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그저 바람 새는 소리와 함께 피만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은 서슴지 않고 내 돈이 남의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더라. 그리고 명예는 돈과 시간이 있다면 언제든지 회복할 수 있다고도 하지."

난 그때 제일 커다란 차이점을 알아냈다.

"적어도 여기 애들처럼 명예 같은 걸 운운하며 시간 낭비는 안 하더라고."

곧 동전 몇 개를 그가 손으로 빼어 냈다. 그는 마치 나를 괴물 보듯이 바라보았다. 난 이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남을 밟으려 했으면 그만한 각오는 있어야 되는 것 아니냐?"

"이런 상스러운 짓을 하다니! 귀족에겐 귀족의 방법이 있는 거다! 이런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진다면 리얀 황녀는 절대 황제가 되지 못한다."

아직 입이 많이 살아 있다. 난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지. 구공환 아저씨한테 배운 팁을 여기서 많이 써야 될 것 같다. 난 그가 뱉어 낸 피와 침이 흥건한 동전을 주워서 가죽 주머니에 담았다.

좀 한심했다. 무언가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기관진식이든 호위 무인이든. 그저 오만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맨몸으로 있을 수가 있는 건지.

손쉽게 그를 제압해 동전이 가득 담긴 주머니를 입에 넣었다. 그다음 주머니에 끈을 통과시켜 끈을 그의 머리 뒤쪽에 묶어 놨다. 이제 그는 그 가죽 주머니를 입안에서 자력으로 빼내지 못할 것이다.

"읍, 이 미친놈이……!"

주머니를 넣기 전 마지막 한마디. 나는 그의 의자에 강제로 앉히고 손과 발을 묶었다. 그는 당황스러운 듯 눈을 굴리기만 한다. 내가 무얼 할지도 모르는 것 같다.

곧바로 난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 동전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면서 피가 벽으로 확 뿌려졌다. 남은 이들도 아마 깨졌을 것이다.

지금 당장은 이해가 안 될 것이다. 화가 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곧 이해가 될 것이다. 그는 나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경멸함으로써 자신이 숭고해진다고 생각하는 걸까. 모르겠다. 하지만 난 그게 거짓말인 걸 안다.

"두드려 패면 뭐라도 나온다고 했었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계속 그의 얼굴을 쳤다. 주머니 사이로 부서진 치아 조각들이 피와 함께 질질 흘렀다. 그는 점점 끙끙거리며 신음을 내기 시작했다.

그는 정말 바로 눈빛을 바꿔 나를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죽 주머니가 물린 입으로 무언가를 계속 말하려 하고 있었다.

"어하, 능 게, 뭐야."

"원하는 게 뭐냐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제대로 알아들었다는 뜻이었다. 이런, 아직 때가 아니다. 난 이 사람의 말을 알아들으면 안 됐다.

난 아무 말 없이 또 그의 얼굴을 흔들어 댔다. 이가 깨져 부어오른 잇몸과 피를 가득 먹은 가죽 주머니가 슬슬 그의 숨을 막는 모양이었다.

"야, 너 이름 뭐야."

"…으흐, 으흐으."

못 알아듣겠다. 이 정도면 됐고. 난 바로 손을 집게처럼 해 그의 코를 완전 삐뚤게 막아 버렸다.

- 제일 중요한 건 말이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껴야 돼. 그래야지 사람들이 막 술술 분다니까.

-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는 게 쉽나?

- 체험시켜 주면 되잖아.

구공환 아저씨는 그런 섬뜩한 말을 하고 웃었지. 그리고 그런 섬뜩한 짓을 내가 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는 몸을 버둥거리다가 의자와 함께 넘어졌다. 난 위치를 바꾸면서도 그의 잡은 코를 놓지 않았다.

"…으급, 읍! 으극!"

나는 그의 코에서 손을 잠깐 뗀 다음에, 다시 코를 잡고, 뗀 다음 잡고를 반복했다. 원래 가장 중요한 건 반복 학습이더라고. 이 불쌍한 트라프비체 제국 사람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악폐습을 단기 체험 하고 있었다.

사경을 다섯 번은 헤맨 쉬버리 후작은 내가 가죽 주머니와 손과 다리에 묶은 끈을 풀어 주자 바로 내 다리를 부여잡았다.

"에퍼리 후작! 에퍼리 후작! 내 다 말함세. 원하는 게 대체 뭔가. 난 다 줄 수도 있다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성능 확실하네, 이 수첩.

- 쉬버리 필리아 후작. 제국력 213년, 소규모 교전에서 자신의 부대를 버리고 도망간 전력이 있음.

이렇게 본능에 충실한 사람이 명예는 뭔 명예야. 어쨌든 쉬버리 후작은 내가 첫 타깃으로 잡기는 참 좋은 사람이었다.

"이봐요, 쉬버리 후작. 리얀과 내가 정치를 모른다고 했었나?"

"아, 아닙니다. 응당 아니고말고요."

온순해졌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부터 내가 아는 정치를 알려 줄게. 보도 지침이라고, 약간 전통적인 게 있거든."

"보, 보도 지침이요?"

낯선 단어에 쉬버리 후작이 갸웃거린다.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껏 알아듣는 거지, 뭐.

"자, 받아 적어. 헤드라인은, 공작이 된 평민, 역량 부족을 드러내나?"

내가 그 말을 하자 쉬버리는 덜덜 떨었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아는 모양이었다. 난 수첩을 열었다.

- 하이에크 공작. 황제가 거둔 고아 시종이었으나, 뜻밖의 영민함을 발휘해 황제의 심복이 되었다. 백성에서 공작의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할 게 많다, 쉬버리 후작."

"예, 예……."

그는 덜덜 떨면서 글자를 작성해 나갔다. 그는 곧 원고를 완성해 내게 검수를 받았다. 난 얼굴을 찡그리고 그걸 전부 찢었다.

"왜, 왜……? 제가 아는 건 다 썼습니다."

"아는 것도 쓰고 모르는 것도 써야지."

"모, 모르는 것 말입니까?"

"예를 들면 하이에크 공작이 사병을 늘리는 것 같다는 거. 다시 써 봐."

내가 착하게 코칭을 해 주니까 쉬버리 후작이 벌벌 떨었다.

"이, 이걸 쓰면 전 하이에크 공작에게 축출당할 겁니다."

"축출이 낫잖아, 뒈지는 것보다는."

나는 다시 동화가 든 가죽 주머니를 쩔렁거렸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이를 앙 물었다. 피가 줄줄 새어 나오고, 난 발로 그의 의자를 찼다.

"아직 할 게 많단 말이야."

나는 수첩을 열었다.

- 하이에크 공작.

- 쉬버리 후작.

- 소트니 백작.

- 리사비 백작.

- 온두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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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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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런트 후작.

- 모니카 후작.

- 페레이라 백작.

이렇게 쓸 게 많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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