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공정거래 (6)
"어디 가세요?"
복도에서 조용히 나가려 할 때 리얀을 마주쳤다. 원래 나는 마주치는 사람을 최대한 피하고 있었다. 내가 피하고자 했을 때 피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왜냐면 난 S급 헌터니까.
근데 리얀이 천장에 슬며시 붙어서 가는 나를 꿰뚫어 보며 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설마 날 보며 말했겠어 하고 조용히 가려고 했다.
"어디 가냐니까요, 에퍼리?"
"…어떻게 보셨지."
난 천장에 붙어 있던 게 민망해서 웃으며 내려왔다. 리얀이 웃었다.
"도둑질하러 가요? 무슨 검은색 옷에 검은색 바지에다가."
"어떻게 아셨어요?"
그것보다 난 리얀이 어떻게 날 알아챘는지가 더 궁금했다. 알아챌 수가 없었는데. 리얀은 자신의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무언가 돌 같은 것이 빛나고 있었다.
"뭡니까, 그건?"
"당신이 근처에 있으면 알려 주는 경보기 같은 거라고 해야 하나요. 저 마탑 부탑주예요. 이 정도 만드는 건 쉽죠."
스토커 아니냐, 이 정도면. 난 살짝 오한이 도는 몸을 쓸었다.
"그나저나, 왜요?"
"같이 가요."
"어디 가는지 아시고?"
"그, 안 좋은 행동 하러 가는 건 알아요."
리얀의 말에 난 뜨끔했다. 맞다. 사실, 오늘 보여 준 건 그냥 우리의 적들을 안심시키게 하기 위한 수작이었다. 그리고 일망타진하는 거지, 가토스의 유산인 수첩을 이용해서.
그건 근데 리얀에게 보여 주기에는 거친 광경이었다. 그래서 리얀을 놔두고 나 혼자 하려고 했던 거다.
"그냥 돌아가세요."
"난 황제가 될 사람이에요. 이런 걸 피할 수는 없어요."
리얀이 날 바라보았다. 리얀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확실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다. 그녀 나름의 책임감이라는 거겠지만, 그래도 좀 말려 주고 싶었다.
"에퍼리, 이건 거래예요. 당신은 내가 원하는 걸 이뤄 주고, 나는 당신이 원하는 걸 이뤄 주고."
"…난 말렸어요."
"난 생각보다 강한 사람이라고요."
난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그래, 그녀의 의지니까 꺾을 수는 없었다. 이 여장부의 각오는 어디까지 갈는지.
"아악! 읍……."
리얀이 소리를 질러서 난 그녀의 입을 막았다. 정확히 10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우리가 황궁에서 벗어나 폭신한 무언가에 앉았을 때. 나는 오랜만에 서로를 인사시켰다.
"노을이입니다. 알아보시죠?"
"시끄럽군요, 이 여자는."
"…얘, 얘가 왜 여기 있어?"
"계속 그, 서로 안부는 주고받고 있었는데요. 이번에 쓸 일이 생길 것 같아서, 좀 친구들 데리고 오라고 했어요."
"뭔 안부?"
여기는 중세 시대라 도시에도 벌레와 쥐가 참 많았다. 그중 강한 번식력의 노을이가 뿌린 자손들이 있었고, 그들은 내게 정기적으로 인사를 건네 오고 있었다.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입맛 떨어질까 봐 안 하고 있었지만.
"…다시 돌아가실래요?"
벌써부터 이러면 곤란한데. 리얀은 하나 고개를 저었다. 약간 너무 놀라서 눈초리에 눈물이 살짝 맺힌 것 같았지만, 그녀는 결단코 부정했다.
"아니, 가!"
"…그래요."
난 한숨을 쉬고 노을이의 든든한 등에 탔다. 리얀 역시 노을이의 등에 탔다.
이게, 리얀이 황궁 신문사까지 같이 오게 된 전말이었다.
노을이의 자손들은 역시 연가시였다. 노을이는 확실히 다른 연가시들과는 달랐다. 요정의 숲에서 좋은 기만 받고 자랐고, 내 마나도 일정 부분 흡수한 노을이는 일반 연가시가 아니었다.
원래라면 넘볼 수도 없는 인간의 피부를 뚫고, 그 안에서 죽지도 않고 귀족의 뇌에 제대로 정착했으니 말이다.
소드 마스터들은 부들부들 떨면서도 자신의 피부를 허락하지는 않았다. 마나를 분출해서 노을이들을 떼어 내기 바빴다. 몸에 들어가지 못한 노을이들은 내게 죄송스럽다는 듯 몸을 구부렸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이, 이봐, 괜찮나?"
"일어나 봐!"
노을이에게 몸을 꿰뚫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몸을 흔들어도 일어나지 못하다가, 그들의 손을 뿌리치고 벌떡 일어났다. 귀족들은 삐걱거리며 내게 다가온 다음 무릎을 꿇었다.
"음. 뒤로 가 있어."
"…네."
노을이가 들어가 온순해진 귀족들은 내 뒤에 섰다. 노을이한테 몸을 허락하지 않은 귀족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칼을 들어 내게 겨눴다.
"넌, 검은 무리냐?"
"흑마법을 사용하는 놈이었군."
그들은 내게 적대감을 불태웠다. 난 그게 좀 한심했다. 검은 무리가 뭐고 흑마법이 뭔지는 모르나, 적어도 이들이 지적할 만한 것들은 아니었다.
난 수첩을 보면서 놀란 것들이 있다. 어째서 이렇게 쓰레기 같은 놈들만 모아 놨을까. 난 적어도 인성이 바른 가토스의 라인이라서, 인성만큼은 어느 정도 된 애들일 줄 알았다.
하지만 가테스의 라인보다 개차반인 것들이 가토스의 라인들이었다. 가테스는 적어도 상벌이 명확하고 냉철했지만, 가토스는 유약했으니까. 그 차이가 있는 것일까. 가토스의 라인들은 아주 가관이었다.
"하이에크 공작, 아녀자를 3번이나 겁탈했군. 다 돈을 주고 풀려나기는 했지만."
나는 수첩을 열어서 읽었다. 갑자기 드러나는 자신들의 치부에 하이에크 공작을 포함한 사람들이 당황했다.
"소이 장군은 황궁에서 사람을 죽인 전력이 있군. 홧김에 술병으로 찔러 죽였다라. 평민이라서 그냥 넘어갔다고 되어 있군."
사실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는 사람 없다. 근데 그렇게 생각해도, 이 사람들은 다 질이 안 좋았다. 나는 수첩에 적힌 그들의 약점을 모두 낭독하고 그들을 한번 슬쩍 보았다.
그들은 날 얼떨떨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이에크 공작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근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오히려 그렇게 당당하게 나오니 좀 할 말이 없어졌다. 하이에크 공작은 계속 말했다.
"평민들에게 실수할 수도 있지. 뭐가 그리 대단한 거라고 이렇게 얘기하는 건가? 설마 정의의 징벌자 역할이라도 할 셈인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난 그럴 자격은 없는 사람이다.
"아니 뭐, 그럴 생각은 없어. 이런 사람도 있으면 다른 사람도 있는 거니까. 근데, 적어도 남들한테 민폐 끼치면서 살아왔으면 자기가 당할 때 억울하다고는 하지 말아야지."
나는 검을 들었다. 나도 그들을 징벌하거나 그럴 정도로 착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위선은 떨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난 너희보다 강한 거고, 그게 끝이야. 너희가 운이 나쁜 거지."
난 검을 들었다. 난 노을이들에게 눈짓을 했다. 흰 실처럼 생긴 노을이들이 내 검에 차례차례 감겼다.
"순번 맞춰서 들어가라, 괜히 꼬이지 말고."
명령은 여기서 끝. 난 곧바로 가장 강해 보이는 소드 마스터 앞으로 짓쳐 들어 갔다. 신기하게도 그는 내 검을 막았다. 그래, 여기서 소드 마스터 정도면 S급 헌터는 된다는 말일 거다.
그렇지만 난 이 사람을 죽이는 게 목표가 아니다. 나는 빠른 속도로 급소와 발등을 노렸다. 동시에 두 군데를 공격하니 그는 당연히 급소를 막았다. 하지만 발등은 베일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는 거지.
베인 발등의 자상으로 감겨 있던 노을이 한 마리가 쑤시고 들어갔다. 피부를 뚫고 들어가지 못하면 피부를 벌려 주면 된다.
"크아아악!"
그는 곧 신경계를 타고 오는 격통에 비명을 지르고 예의 귀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엎어졌다. 아직 감겨 있는 노을이는 많았다. 여기 있는 귀족도 많았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거만하던 그 사람들이 피식자의 표정이 되었다.
가테스는 기다렸다. 오늘도 대전 아침 회의에 가토스 황자파의 귀족들과 리얀, 에퍼리는 안 오는 건가. 벌써 사흘째였다. 연통을 보내고는 있지만 답장도 없었다.
"…그럼, 시작하지."
아무리 사람이 없어도 정기적인 회의는 해야 하는 법. 가테스가 회의의 시작을 선포하려 할 때, 문이 벌컥 열렸다. 그곳에 리얀과 에퍼리가 손을 잡고 있었다.
"늦었습니다."
"…늦었으면 앉도록."
에퍼리는 리얀의 의자를 먼저 빼 주고 바로 옆에 앉았다. 리얀의 옆은 원래라면 하이에크 공작의 자리였다. 원래 귀족의 자리란 앉는 사람이 없어도 비워 놔야 되는 법이었다.
"거기는 하이에크 공작의 자리 아닌가?"
"허락받고 맡았습니다."
"무슨 허락?"
가테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사람들이 우수수 들어왔다. 마치 팔과 다리가 고장난 사람들처럼 뻣뻣하고 어색한 움직임이었다.
"하이에크 공작입니다."
"소트니 백작입니다."
"리사비 백작입니다."
어째 다들 사람이 아닌 것 같은 톤이다. 가테스는 뭔가 이질적인 감각을 느꼈다. 그는 제왕안을 발동했지만, 신기하게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제왕안이 발동되었고, 걸렸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그 안은 완벽한 무였다. 대체 이건 무슨 느낌인지.
"자네들, 괜찮나?"
"네, 괜찮습니다."
"그럼 자리에 앉게."
"네, 괜찮습니다."
심지어 인지능력도 약간 부족한 것 같다. 에퍼리가 일어나더니 의자를 하나씩 끌어 주고 다른 사람들을 강제로 앉히다시피 했다. 뭐가 뭔지는 몰라도, 이상하다는 건 명확했다.
"소트니 백작, 이번 의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네, 괜찮습니다."
시험용으로 물어봐도 이상한 답변뿐. 분명 에퍼리가 이상한 짓을 했음이 틀림없었다. 가테스는 에퍼리를 쳐다보았다.
"뭔 짓을 했지, 에퍼리?"
그때, 가테스는 우측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두 몰린 걸 느꼈다. 그 시선들은 하나같이 분노가 일렁거리고 있었으며, 분노 이외의 감정은 담기지도 않았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표정을 드러내는 걸 떠나서, 모든 귀족이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는 점에서 소름이 돋는 상황이었다.
"뭐,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그런가."
가테스가 에퍼리에게서 적의를 돌리자, 우측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정면으로 돌아가고 무표정으로 변했다. 흑마법인가? 하지만 마기를 느낄 수는 없었다.
"…아침 회의를 시작하지."
"아직 훈련이 더 필요할 것 같네요. 사흘은 좀 부족했던 것 같아요."
"트라프비체의 예법은 꽤 복잡하니까요."
리얀이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나도 이 세계에 떨어진 지 꽤 돼서 익숙할 따름이지, 적응하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노을이들 교육을 제가 담당해도 될까요? 예법은 제가 더 잘 가르칠 것 같은데."
"굳이 안 그러셔도 돼요."
난 좋은 마음으로 리얀을 말렸다. 바쁠 텐데 연가시들 교육하라고 시간 내라는 건 좀. 근데 리얀은 뜻밖에도 살짝 삐진 듯했다. 뭐야, 뭔 포인트야.
"에퍼리, 전부터 날 계속 짐짝 취급 하는 것 알아요?"
"무, 무슨 소리세요."
"신문사 갈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리얀은 의기소침한 듯이 말했다. 난 변명하려 했지만 그녀는 내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지금 우리는 계약 상태라고요. 이대로라면 불공정한 거래라고요."
"뭐가 불공정해요?"
"당신이 나한테 주기만 하니까요."
그걸 불공정거래라고 할 수 있나. 리얀은 아랑곳 않고 계속 말했다.
"계약서 기억나죠? 우리는 서로 원하는 걸 이뤄 주고 그 우선순위는 당신에게 있다고. 에퍼리는 연애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정말 그게 목표의 끝이에요?"
"그렇긴 한데, 뭐 당장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그게 쉽나."
"내가 도와줄게요."
리얀이 말했다. 뭘 도와주겠다는 거야. 그녀는 내 손을 잡아채서 일어났다. 나도 모르게 따라서 일어나고 말았다.
"오늘만큼은 내가 주는 날로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