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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95화 (95/150)

94화 킬 더 히어로 (1)

리얀과 내가 나간 곳은 황궁 외곽의 아무도 없는 곳이었다. 황실 사람들의 비밀 별장이라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테라스에서 머리를 풀어 헤친 채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원래 걸으려고 했는데, 폭우가 너무 쏟아져서 걷기 힘든 까닭이었다. 난 그저 소파에 앉아 그녀를 지켜보았다.

"어때요. 이런 것도 낭만이 있죠?"

"네."

"그래도 한 언덕배기는 넘었네요."

리얀이 말했다. 그녀는 담배를 바깥 비에 적셔서 끄고 바깥에 버렸다. 뭐, 자기네 집인데 쓰레기 좀 버린들 어떠랴.

"다 당신 덕분이에요."

그녀는 내 품으로 들어왔다. 담배 냄새는 담배 냄새고, 그녀의 몸이 부드러운 건 부드러운 거였다.

나는 리얀을 안아 줬다. 따로 흑심이 있던 건 아니었다. 그녀가 너무 떨었기 때문이다.

"제가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걸까요?"

"왜 그렇게 생각해요?"

"제가 괜히 욕심을 부리는 건 아닐까요?"

리얀이 내게 물었다. 난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이런 대답은 아무나 할 수 없고, 또 아무도 할 수 없었다.

"황제가 되면 하고 싶은 것이 많잖아요."

"그럼요."

"그러면 됐어요."

나는 리얀을 품에 둔 채로 소파의 옆에 누어 턱을 괴었다. 그녀는 내 가슴께로 슬며시 올라왔다.

"에퍼리."

"네."

"에퍼리는 정말 연애가 하고 싶어요?"

"…네."

이런 것까지 말해야 하나. 그때, 리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나랑 할래요?"

나는 그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난 리얀을 바라보았다. 풀린 금발, 이지적인 녹안. 그야말로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내가 가만히 있자 그녀가 천천히 내 몸을 타고 올라왔다. 내 몸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리얀은 손으로 내 허리를 조심스레 만졌다.

아. 간지럽다는 느낌 때문에 내가 입을 벌리자 곧 리얀의 입술이 포개졌다. 약간의 담배 냄새와 체리 향, 마차에서 잠깐 같이 마신 포도주의 향. 그녀의 모든 향이 혀에서 혀로 내게 전해져 왔다.

「이름: 리얀 트라프비체

나이: 22

호감도: 91

가장 사랑하는 사람: 헨리 트라프비체

키워드 : ???」

여전히 호감도는 극상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리얀이 입술을 떼고 날 촉촉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번개가 쿠릉, 하고 쳤다.

그때, 스킬 창이 피링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원죄: 엘파힘의 심안 Lv. 4 업그레이드】

난 다시 리얀의 호감도 창을 바라보았다.

「이름: 리얀 트라프비체

나이: 22

호감도: 91

가장 사랑하는 사람: 헨리 트라프비체

키워드: 죄책감」

그녀가 내 허리에 탄 다음 자신의 상의를 슬쩍 내렸다. 실크로 된 핑크색 내의가 보인다. 만약 바깥이 밝았다면 속살이 비쳤을 정도로 얇은 재질이었다.

이제는 그녀의 손이 내 옷으로 향했다. 내가 자주 입는 금색 수실이 있는 검은색 케이프 같은 옷을 벗겨 냈다. 역시 황족이라 그런지 어떻게 벗겨 내는지는 아주 잘 알았다.

"리얀."

"…왜요?"

"됐어요, 이제."

난 이제 그녀를 알 것만 같았다. 난 사실 긴가민가하고 있었다. 그녀가 날 좋아하는가 안 좋아하는가에 대해서. 사실 난 이미 그 정답을 알고 있었다. 이래서, 먼저 책을 읽으면 안 된다니까.

"리얀, 황제가 되고 싶다고 해도 이런 건 옳지 않아요. 난 당신과 계약관계예요. 굳이 이런 걸 안 해도 된다고요."

"…무슨 말을 하는 거죠? 나한테 창피를 주려는 건가요?"

리얀은 여전히 속이 비치는 내의를 가리지도 않고 내 어깨를 붙잡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하자 리얀은 다시 몸을 숙여 내게 키스를 했다. 이번에는, 왜일까. 담배 맛밖에 나지 않았다.

난 리얀을 강제로 떼어 냈다. 리얀은 뭔가 불안한 얼굴이었다. 상처받은 얼굴은 아닌 것 같았다.

"당신, 날 좋아하지 않잖아요."

"왜 그렇게 생각해요?"

"아니, 당신은 날 좋아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원작대로라면 리얀은 날 좋아할 수가 없었다.

"당신은 여자를 좋아하잖아요."

내 말에 리얀이 얼어붙었다. 난 조용히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 리얀은 조용히 등을 돌리고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그녀는 옷을 다 챙겨 입은 다음 맞은편으로 가서 담배 하나를 물었다.

"…어떻게 알았죠? 제가 그걸 드러낸 적은 없는데, 적어도 당신한테는."

뭐긴 뭐야, 원작에서 봤으니까 알지. 당신이 마리나에게 찝쩍거리는 걸 난 다 봤다고. 물론 리얀은 사실 개그를 치는 캐릭터였지, 이런 진지한 캐릭터는 아니었다.

"그나저나 나한테 할 말이 있지 않아요?"

"…죄송해요."

"그래요."

나는 뭔가 허탈해졌다. 리얀은 나를 사람으로서는 정말 좋아하고 있었다. 그건 호감도를 봤으니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애초에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날 놀라게 한 그녀의 수작질은 나와의 관계를 조금 더 공고히 하기 위한 그녀의 선택이었던 거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했어요?"

"사실, 당신이 지금 날 도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왜요?"

"당신은 연애만이 목표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사실 오라버니가 되건 내가 되건 상관은 없죠."

"그런가요."

"확실히 그래요."

리얀의 담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 그러니까. 가테스를 내가 개인적으로 싫어하기는 하지만, 막말로 난 연애를 하려면 다른 곳에서 해도 된다.

다만 여기서 하는 게 더 편할 뿐이지. 리얀을 황제로 만드는 건 필수 사항이라기보다는 선택 사항 같은 거였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하고 뭘 요구하려고 했어요? 이 정도면 뭐가 됐든 되게 중요한 말을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렇죠."

리얀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녀는 곧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를 죽여 줘요."

"알았어요."

"이렇게 흔쾌히 대답하신다고요?"

"가테스는 세상에 별로 도움이 안 돼요. 무력은 강할지 몰라도. 전 그런 사람을 너무 많이 봐 왔죠."

난 검은색 케이프를 어깨에 둘렀다. 어느새 하얀 와이셔츠 위의 단추 몇 개도 풀려 있었다. 리얀, 보기보다 손이 빠른 여자였다.

"리얀, 가테스를 죽이면 우리 계약관계도 끝나는 거예요."

나는 그렇게 못을 박았다. 그리고 별장을 나왔다. 비가 여전히 많이도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우울했다. 리얀, 나도 좋아하는 사람이다. 물론 사람으로서.

하지만 그렇게 사랑을 도구 삼아 쓰려 한 점에서는 실망스러웠다. 왜 그럴까. 그녀가 대시했고 내가 막아섰지만, 내가 차인 기분이다. 그녀가 만약 날 진짜 사랑했다면 그런 행동은 안 하지 않았을까.

"답도 안 나오지, 이 문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은 다 다르니까. 그걸 알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사랑과 가장 비슷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난 비를 쫄딱 맞은 채로 황궁으로 돌아왔다. 씻기 전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난 내 집무실로 향하기 전에 성녀의 방으로 갔다. 이제 검은 나무도 사라진 마당이라 성녀가 할 일은 없었다. 지금은 뭐 하고 지낼는지.

근데 마리나의 방으로 다가가니 안에서 많은 사람이 느껴졌다. 뭐지. 파티라도 하나. 내가 문을 두들기자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멈추었다.

"…누구?"

안에서 갈라진 마리나의 목소리가 나온다. 뭔 일을 하고 있었던 거야.

"나야. 문 열어 봐."

"…하, 씨. 잠깐만."

그녀는 뭔가 우당탕하더니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뭐라 뭐라 했다. 아마 나가라고 하는 모양이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고, 수건만 걸친 남자들이 나랑 눈도 마주치지 않고 헐레벌떡 나갔다.

"…헐."

"뭘 쳐다봐. 남 재미 보는 거 망치면서 할 말이 뭔데?"

마리나는 젖혀 있는 어깨를 가리면서 말했다. 나에게는 너무 자극적이고 퇴폐적인 모습이었다.

"…일단 옷부터 제대로 입으면 안 될까?"

"이불 덮고 있지, 뭐."

그녀는 이불을 끌어 올려 어깨까지 덮은 다음 나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나도 이럴 줄은 몰라서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즐긴다지만, 너무 즐기는 거 아니냐고.

"…그냥, 해 보고 싶은 건 다 해 볼 뿐이야."

"너무 막 놀지는 마라."

"그래, 뭐가 궁금하냐?"

마리나는 이불을 살짝 헤치고 팔꿈치를 고정해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받치며 누웠다. 아예 나 같은 건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쿨함이었다.

"…뭔가 답답해 보일 수도 있지만, 난 적어도 사랑에 대해서는 진지하려고 노력해. 그러니까, 여기 온 것도 그런 이유야."

"서론이 기네. 그래서?"

"가테스, 죽여도 되냐?"

마리나는 가만히 있다가 풋 웃었다. 그녀는 방이 떠나가라 웃었다. 지금이 그렇게 이른 시간은 아닌데. 민폐가 따로 없었다.

"죽여 주면 나야 고맙지."

"왜?"

"그건 너는 몰라도 되는 얘기."

마리나는 그냥 옷을 홀랑 벗은 채로 방을 활보했다. 잠깐 내 눈에 들어온 그녀의 몸은 정말 조각과도 같았다.

"야이, 미친년아!"

난 눈을 꼭 감았다. 방금 스친 것도, 정말 보고 싶어서 본 게 아니다. 보여서 본 거다. 마리나는 술잔 두 개를 채웠다. 그녀는 내 앞에 술잔을 내려놓고 다시 자신의 침대로 돌아가서 이불을 끌어당겼다. 그제야 난 눈을 뜰 수 있었다.

"너, 원죄라는 스킬이 있는 것 같네. 그치?"

"무슨 소리?"

"발뺌 좀 하지 마. 내가 도서관에서 엘파힘의 심안인가 뭔가 알려 줬잖아. 눈치껏 보자면 그건 스킬이겠지.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을 알려 주는? 더 유치하면 호감도 이딴 것도 있겠네."

미친, 소름 돋았다. 마리나는 백수에 무기력증으로 보이지만 꽤 통찰력이 있었던 거다. 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가테스를 사랑한다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고 있잖아. 아주 재수 없게 확신하고 있지."

"…뭐, 맞아."

난 수긍했다. 이 정도까지 속 시원하게 까발려졌으면 더 숨기는 것도 할 짓이 아니었다. 마리나는 몸을 반쯤 눕힌 채로 술을 한 번에 들이켰다.

"야, 사랑에는 여러 형태가 있어. 너 같은 모솔 찐따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뭐?"

"그래, 나도 이제 숨기지 않을게. 난 가테스를 좋아해. 정말, 이 세상에서 제일 말이야. 내가 제일 사랑하는 건 걔뿐이야."

마리나는 매혹적으로 웃었다. 그 웃음을 받는 당사자인 가테스가 부럽다고 생각될 정도로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근데 너 말이야, 이런 사랑 들어 본 적 있어? 죽어야만 완성되는 사랑."

"그게 무슨 소리야?"

"난 가테스를 사랑하지만 가테스가 죽었으면 하거든. 정확히 말하면, 가테스가 죽어야 내 사랑이 이뤄진다고 해야 하나."

그녀는 자신의 입으로 설명하기도 골치 아프다는 듯이 머리를 꼬았다. 당연히 나는 못 알아들었다. 죽어야만 될 수 있는 사랑?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하냔 말이야.

"굳이 이해할 필요 없어. 다른 사람의 사랑을 이해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행동은 없으니까. 다만 나와 너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면 돼. 그렇지?"

"그렇다면?"

"나도 리얀과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지금."

마리나는 손으로 술이 묻은 입술을 훔쳤다.

"가테스를 죽여. 그러면 이 세계의 결말을 줄게."

「이름: 마리나 스미노프

나이: 22

호감도: 21

가장 사랑하는 사람: 가테스 트라프비체

키워드: 책임감」

나는 그녀의 호감도 창을 봤지만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난 알아야 했다, 꼬일 대로 꼬인 이 세상의 결말을. 이 세상은 아직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검은 무리부터 제국의 업, 여신, 검은 나무의 정체에 이르기까지. 그것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넌 그럴 줄 알았어."

마리나는 싱긋 웃었다. 그녀가 다시 이불을 헤치고 술을 따르러 나오려는 마당에 난 아예 그녀의 방문을 닫고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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