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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96화 (96/150)

95화 킬 더 히어로 (2)

내가 문을 닫고 복도를 벗어나려 할 때, 문안에서 하얀 손이 내 손목을 채었다. 뒤를 돌아보자 여전히 마리나가 옷을 벗은 채로 있었다.

"왜, 왜 이러는 거야, 나한테."

"들어와."

그녀는 힘을 줬고, 난 어쩐지 그 힘을 거절할 수 없었다. 난 결국 마리나의 방으로 다시 들어가고 말았다.

"남 재미 보는 것 망치고 이렇게 떠나면 좀 그렇잖아."

"뭐, 뭐 어쩌라고?"

난 뒤를 돌아보았고, 마리나는 매혹적으로 웃었다.

"옷 입었어. 하여튼, 찐따 새끼."

뒤를 슬며시 돌아보니까 다행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대신 무슨 목욕 가운 같은 걸 입어서 오히려 눈 두기가 더 민망해졌다고 해야 하나.

"술이나 한잔하고 가."

그녀는 내게 술 한 잔을 따라 주고, 자신의 잔에도 채웠다. 방금도 리얀의 유혹을 뿌리치고 온 마당인데, 얜 또 갑자기 왜 이럴까 싶었다.

굳이 말하자면, 리얀은 그런 유혹이 어색해 보였지만 마리나는 숨 쉬듯이 자연스러워 보였다는 점이다.

"난 너한테 궁금한 게 많거든."

"뭐가."

"그래도 세계 1위에 연예인급 인기를 가진 사람이었는데 여기서 발발거리고 다니는 게 신기하기도 좀 하고."

발발거린다니, 말 참. 나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술을 들이켰다. 크, 엄청 독한 술이다. 난 바로 물을 찾아서 한 모금 먹었다.

"나 이거 하나는 궁금했다. 그, S급 헌터 중에 정채린이라고 중학생짜리 하나 있잖아. 걔한테 재벌 애들이 스폰 해 준다는 거 진짜냐?"

이제는 의미도 없는 지구에서의 가십은 왜 물어보는 걸까. 아직 그녀는 지구에 미련이 많이 남은 걸까.

"아니. 걔 그리고 그 말 되게 싫어해."

"그렇구나."

마리나는 바보처럼 웃었다. 난 그 이후로도 그녀의 많은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대다수가 지구에서의 어떤 연예인끼리 사귀냐, 엑스파일은 진짜냐 하는 쓸모없는 질문들이었다.

"이딴 걸 물어보려고 잡아 둔 거야?"

"왜, 재밌잖아."

"이젠 의미도 없지."

"그래? 넌 아직도 근데 그 의미에 붙잡혀 살고 있잖아."

나는 마리나를 봤다.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술을 마시고 말았다. 알고 있었다. 그녀가 지구에서 왔다면 당연히 내 이야기는 알고 있겠지.

"지구에서 네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

"그래. 근데 난 다 잊었어."

"진짜?"

난 술잔을 돌렸다. 잊었겠지, 뭐.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사실 그 일이 꿈에 나타난다거나 그러진 않으니까 잊은 것 아닐까.

"내가 너보다 40년은 더 살았잖아. 근데 어떤 날은 막 어제 겪은 것처럼 생생하고 그래. 사람이라는 게 참 신기하지."

"그래서?"

"넌 잊지 못하고 있잖아. 네가 그러니까 헌터 일 접고 방송 활동이나 했지. 안 그래? 세상 사람들 다 아는 건데 왜 너만 모르냐."

나는 마리나를 노려보았다. 세상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긴 하지. 근데 경험한 건 나밖에 없는데 왜 이렇게 쉽게 말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기 세상 사람들은 모르잖아. 그거면 됐어."

"중요한 건 남들이 아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지. 네가 알아야 하는 게 중요하지."

"난 잘 알고 있어."

난 마리나를 보았다.

"그냥, 별것 없는 문제였어. 난 S급 헌터라는 의무를 가지고 사람들을 지키지 못했고, 그래서 욕을 먹었잖아. 그게 전부인 거야."

마리나가 나를 바라보았다. 난 이게 전부터 거슬렸다. 마리나는 이제 지구에서 왔으니 내가 지구에서 어떤 행동을 했는지 다 알고 있을 거니까. 그녀는 말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포항 게이트 사건이 그렇게 너한테 짐이 됐어?"

"그거, 방송사 사람들에겐 금기야. 왜냐하면 내가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거든."

"이제 여기 세계니까 물어보는 거야."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 과거를 이제 전부 아는 그녀를. 난 참,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과거의 그림자는 이토록 따라붙는지.

"포항 게이트 사건은 넌 뭘로 알고 있냐?"

"네가 술 취해서 늦게 가는 바람에 게이트 안에 있는 사람들 다 터져서 죽어 갔잖아."

"맞아."

"지금 나 지구에서 아무도 못 한 인터뷰하고 있는 것 맞지?"

"응."

갑자기 왜 이렇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난 솔직히 말해서 이 얘기를 죽을 때까지 하기 싫었다.

"어차피 오프 더 레코드니까 말하자. 난 솔직히 말해서, 그때 S급 헌터라는 등급을 막 받은 사람이었어. 그런데 세상의 모든 사람을 지키라는 말을 들으니까 어처구니없는 거야."

"그렇겠네."

"막말로 술 먹는 건 내 자유야. 근데, 내게 사람을 지킬 의무라도 있는 거야?"

마리나는 내 술주정에 웃었다. 사실 술주정이라고 해도,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어쩌다 얘한테까지 끄집어냈는지는 모르지만.

"야, 그때 해외 가서 원정 나간다는 헌터들 다 뭐 하고 있었는지 알아? 던전 탐사한다는 명목으로 다 여자 끼고 놀았지. 아, 여자는 남자 끼고 놀았고. 그냥 난 국내에 있었을 뿐이야."

"맞아. 근데 지금 너는 어때?"

"뭐가?"

"넌 아직 거기서 못 벗어나고 있잖아, 사람들을 죽였다는 죄책감으로. 그런데 그런 억하심정은 남아 있어서 사람들은 못 믿고. 하나만 하자, 하나만."

마리나는 내게 술을 따라 주었다. 난 술을 넙죽넙죽 받아서 마셨다. 슬슬 세상이 흔들리고, 커튼이 흔들리는 게 바람 때문에 흔들리는 건지 내 의식 때문에 흔들리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바람은 찼다.

"넌 내가 볼 때는 아직까지도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애매하기만 해. 계속 그렇게 휘둘리다가는 이도 저도 아니게 된다고."

"그럼 어떻게 하라고?"

"정해."

마리나가 두 주먹을 쥐고 내밀었다.

"다른 사람들을 구하고 싶어, 아니면 네 연애를 하고 싶어?"

난 술에 취해서 비틀거렸다. 그래도 그 정답을 비추는 칼날은 여전히 날카롭다. 내 자존심 하나는 이거였다. 칼날을 겨눌 상대에게만 겨눈다는 것.

그래, 얘를 해치우면 뭐가 달라질까. 난 그런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잘 모른다. 내 행복은 남에게 달려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 우울해지기만 한다.

가테스 주변을 지키는 근위 기사들이 술 취한 나를 보고 경계했다.

"에퍼리 후작? 여기는 어쩐 일이지?"

누가 봐도 이제는 적이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가테스 황자를 만나러 왔습니다."

"무례하기는. 알현 신청은 내일 낮에나 해라."

"뭐, 안 될 줄은 알았습니다."

난 그들 뒤로 가서 모두 기절시켰다. 제압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소드 마스터들이라고 해도 나한테 덤비기에는 한참 이르다.

가테스가 있는 방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 수많은 복도에 있는 방에서 가장 흉악한 기운을 뿜어내는 사람을 파악하면 된다. 난 가테스가 있을 법한 문을 찾아서 두드렸다.

곧 문이 열렸다. 가테스는 여전히 깔끔했다. 검은 머리를 질끈 묶고, 잘 채비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쩐 일이지?"

"당신을 죽이러 왔습니다."

"그렇군."

가테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자신의 검을 달빛에 비추어 보았다. 확실히 아름다운 검이었다. 나는 자리에 앉았다. 가테스는 진지하게 검을 닦았다.

"예상하셨습니까?"

"내가 예상한 것 중에서는 가장 낮은 확률이었지. 이렇게 그냥 닥치고 들어오는 수단은 말이야."

가테스는 역시 먼치킨이었다. 내가 술김에 이렇게 즉흥적으로 오는 것도 그의 계산 안에 있다니 소름이 돋았다.

난 가만히 앉아서 스킬을 발동했다.

【고유 스킬: 환영살인마 Lv. 8 발동 중】

이제 모든 감각이 내 손아귀에 있다. 이곳에 있는 흐름, 가테스의 숨소리마저 내 사정거리 안에 있다. 그도 내 바뀐 기도를 느꼈다.

가테스 역시 자신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스킬은 모두 켠 듯했다. 대기가 느려지는 것 같은 감각이 든다.

"자네는 쓸모없는 이상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제가요?"

"그래. 넌 가끔 보면 이상하단 말이야. 대체 뭘 위해서 움직이는 거지?"

난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 봤다. 난 뭘 위해서 움직였더라. 사실 연애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참으로 자기기만적인 목표 설정이었다. 내 스스로, 나는 연애 따위는 못 할 거라고 생각했었으니까.

"지금 자네가 날 죽이려고 하는 것도 자네의 목표와는 하등 상관없잖아?"

"그러게요."

나는 순순히 수긍했다. 내가 목표 의식이 없다는 건 이미 수많은 사람에게 들킨 모양이었다. 어지럽다. 술을 마시고 앉아 있자니 어지럽다.

"당신에게 부탁 하나 해도 됩니까?"

"뭘 말인가?"

"황제가 되는 걸 포기하면 안 되겠습니까?"

가테스는 슬쩍 웃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안 되는 것 아니겠나."

"당신이 황제가 되어야 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냥 그러고 싶을 뿐인데, 그게 이유라면 이유지. 그건 자네에게도 해당되는 얘기 아닌가?"

난 흠칫했다. 내가 가만히 있자 가테스는 내 맞은편에 앉았다.

"난 알 수 있어. 자네는 나와 동류인 사람이야. 사람 위에서 났고, 사람의 감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지.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건 완전히 상반되고 말이야."

가테스는 껄껄 웃고 검에 물을 한 번 부은 다음에 한 번 털어 냈다. 그 찰나에 순간, 칼날에 베인 물방울들이 조각나서 방에 뿌려졌다.

"그러니 자네가 날 죽이고 싶은 것도 충분히 이해하지. 나도 자네를 죽이고 싶었다네."

"그렇군요."

나는 일어나려다가 의자를 잘못 잡아 우당탕 넘어지고 말았다. 가테스가 내게 손을 건넸다. 난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고마워요."

"뭘."

난 자세를 잡은 다음 가테스에게 바로 쏘아져 나갔다. 가테스는 내 검을 옆으로 흘리고 검을 돌려서 내 얼굴 전체를 베려고 했다. 난 고개를 숙이고 몸에 반동을 주어 그의 턱을 걷어차려 했다.

그는 고개를 비껴서 피한 다음에 내 어깻죽지에 칼을 찔러 넣었다. 난 어깻죽지를 내주고 그의 허리를 노렸다. 내 어깻죽지가 나가고, 가테스의 허리가 크게 베였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던 가테스의 방은 피가 낭자해졌다. 물론 가구의 위치나 그런 건 전혀 바뀌지 않았다.

"자네, 신성을 침범할 생각이로군."

가테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못 알아들었다. 하지만 가테스는 자기 혼자 질문을 던지고 자기 혼자 수긍했다.

"아마도 힘든 일일 거라네. 아무도 안 알아 줄 수도 있지. 난 사실 타협을 한 거야, 인간 세계에서 군림하기로. 자네는 그러지 못할 이유라도 있는 모양이군."

"뭐,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자네는 나보다 욕심이 더 많아. 그만큼 의지도 있었으면 좋겠군."

난 더 이상 듣기 싫었다. 바로 난 가테스의 목을 잘라 버렸다. 가테스는, 나보다 약했으니까. 가테스의 목이 데구르르 내 발치를 굴렀을 때, 난 갑자기 눈물이 났다.

이 세계 또한 내가 망치는 것이 아닐까. 난 그저 사랑을 하고 싶은 건데. 그는 남자 주인공이라고 하기엔 너무 싸늘하고 허무하게 죽은 것만 같았다.

정말, 내 선택이 맞는 것일까. 리얀을 황제로 추대하면 나한테 남는 게 뭐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계속 했다. 하나, 내게 남는 건 없었다. 난 그저 가테스의 방을 나섰다.

이제 이 세계는 어떻게 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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