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사랑의 형태 (1)
가테스가 살해당했다는 건 처음에는 아무도 몰랐다. 나도 며칠은 칩거한 상태로 있었다. 난 내 부주의한 살인에 곧바로 나를 추적할 줄만 알았다. 그래서 제국을 떠날 채비도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정말 아무도 몰랐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며칠 동안 사람들은 그저 가테스가 실종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에퍼리, 어떻게 된 건가요?"
리얀은 내게 조용히 물었다. 내가 분명히 죽였던 가테스의 시체는 사라져 있었다. 여기서 내가 죽였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그때는 너무 취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죽였다고 확신도 못 하겠다. 가테스와 얘기를 나누고, 그가 내 손을 잡아 줬었나.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어쨌든, 정국은 혼란 상태로 접어들게 되었다. 갑자기 황위 계승 1순위가 실종됐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도 어떤 단서 어느 것도 없이. 완전히 증발해 버린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 방에서는. 내가 가테스를 죽이고 나왔을 때, 경비병들은 그냥 기절시키고 말았다. 그 경비병들마저 사라져 있다.
"리얀, 난 잠깐 내 방으로 돌아갈게요."
"그래요."
리얀은 날 놔주었다.
난 혼란스러워하며 내 방으로 돌아갔다.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싶었다. 그때, 내 방 안에서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옷장 쪽이었다. 난 옷장을 슬며시 열었다.
난 열자마자 눈을 꽉 감고 비명을 질렀다.
"썅, 깜짝이야!"
"소리 지르지 마. 내가 더 깜짝 놀랐네."
내 옷장 안에는 구겨져 있는 마리나가 있었다. 마리나가 대체 왜 여기에 있지. 난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자세히 보니 가죽 주머니 하나를 들고 있었다.
"자, 여기."
그녀는 가죽 주머니를 던졌다. 난 무심코 그것을 열어 보고 또다시 욕을 내뱉은 다음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풀린 가죽 주머니 안에서 가테스의 머리가 굴러 나왔다.
"깜짝 놀랐냐?"
"미친년이, 뭐 하는 거야?"
"그냥, 마지막 인사 같은 거야."
아무리 내가 간이 크다고 해도 며칠 전에 죽인 사람의 머리를 보는 건 모골이 송연해지는 일이었다. 마리나는 다시 가테스의 머리를 잘 정돈해 준 다음에, 가죽 주머니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너 사이코야?"
"아니."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가 가테스를 죽인 건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역시, 나는 가테스를 죽인 것이다.
"네가 흔적을 지운 거야?"
"응. 성녀의 불꽃은 마수 잡는 것보다 범죄 흔적을 지우는 데 더 쓸모가 있더라고."
"여신이 보면 울겠다."
"그럴까?"
마리나는 웃었다. 나는 침대에 풀썩 앉았다. 일단, 그녀가 온 것에는 당연히 목적이 있을 터였다.
"근데 왜 지웠냐?"
"내가 죽였으니까, 책임은 받아야지."
"내가 죽였는데?"
"아니야. 내가 죽인 거야. 이건 양보 못 해."
죽인 사실을 양보 못 하겠다니, 난 처음에 농담이라도 하는 줄 알았지만 그녀는 날 표독스럽게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확실히 진심이었다.
"그 말이야. 사실 좀 답답해서 왔어. 마지막으로 내 이야기를 이해라도 시켜보고 싶어서."
그녀는 머리를 긁었다. 자세히 보니 마리나의 눈은 살짝 부어 있었다. 아무래도 좀 운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걸 지적하기는 싫었다.
"원래 가테스는 너보다 강해질 예정이었어. 그, 나랑 자면 신성력이 올라갔거든. 「장미꽃이 흩뿌려진 침대」 안 봤냐?"
"봤지. 그게 제일 그, 달달한 장면이었는데. 장면 스킵은 됐지만."
뭔가 여자 앞에서 잔 얘기를 하느니 해서 낯간지러웠지만, 그녀는 진지했다.
"근데 내가 얘랑 한 번도 안 잤어. 그러니까 얘가 약한 거지. 그러면 내가 죽인 게 맞지."
"좀 해괴한 논리네."
"이것보다 확실한 얘기는, 내가 가테스를 죽기 바랐다는 거지."
"그게 더 뜬구름 잡는 소리 아냐?"
"음, 아니."
마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마리나는 내게 농담을 하는 걸까. 그래도 그녀의 입에서 술 냄새는 나지 않는다.
"난 어느 정도 세상에 간섭하고 있잖아. 내 힘을 나도 깨달은 지는 얼마 안 됐어. 내가 상상하는 것들이 여기서는 현실이 돼."
"뭔 소린지……."
"잘 봐. 내가 잘 모르긴 몰라도, 리얀이 널 덮치려고 했었을걸?"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마리나는 내 말을 무시하고 계속 이었다. 하긴, 뜬금없는 행동이기는 했다. 난 그저 리얀이 날 유혹하고 확실히 가테스를 죽이게 하기 위해 한 수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생각해도 리얀이 할 행동은 아니었는데.
"너도 책을 읽었으니 리얀이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잖아. 그냥, 난 그녀가 남자도 좋아하면 어떨까 생각했지. 가토스가 죽고 영혼 교환을 통해서 새가 되면 어떨까 생각해 봤지. 난 가토스는 그렇게 나쁘게 생각 안 하니까. 그를 살릴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고 느꼈고."
나는 마리나를 바라보았다. 진짜 얘 지금 진심인가? 이 정도면 과대망상증인가. 그렇다고는 해도 나와 리얀의 계획을 눈치챘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분명 나는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의도하고 실행한 계획이다.
"왜, 안 믿겨? 네가 그냥 내 꼭두각시였다는 게."
"믿기겠냐? 내 의지라고 생각했던 게 너의 생각이었다니."
"그럼 잘 봐 봐. 이제 비둘기 날아온다?"
그녀의 헛소리 같은 말과 함께, 비둘기가 창문을 깨고 방 안에서 퍼덕거렸다. 나는 그 놀라운 광경을 보고 아무 말도 못 하게 되었다. 이건, 거의 신에 가까운 힘이 아닌가.
"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뭐, 근데 확실한 힘은 아니야. 난 이 세상이 멸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안 되더라고. 정확히 말하면 반대급부의 힘이 있어. 난 그게 여신이라고 예상해."
"어쨌든 사람들 마음은 조종할 수 있다는 거잖아. 그게 말이 돼?"
"뭐, 사랑 같은 내밀한 감정 조종은 안 되고."
"리얀이 날 덮치려고 했잖아?"
"뭔가, 그건 좀 달라. 난 여자 말고 남자를 사랑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고, 널 사랑하라고는 안 했지. 리얀은 남자한테 거부감을 가지고 있잖아. 걔한테서 남자에 대한 거부감만 지워 준 거야."
"난 리얀이 남자한테 거부감 가졌는지 몰랐는데?"
"아, 그건 그냥 내 상세 설정. 원래 글쟁이들은 캐릭터의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 부분도 다 설정하거든. 약간 직업병이야. 음, 리얀은 어릴 때 납치돼서 성폭행을 당할 뻔한 적이 있다는 설정이 있지. 소설에 나오지는 않지만."
"대체 장르 소설에 그딴 설정을 왜 넣는 건데?"
내 합당한 물음에 마리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근데 안 썼으니까 됐지 뭐."
"그래, 그럼 여신에 준하는 힘을 가진 너는 왜 가테스를 죽이고 싶었는데?"
마리나는 가죽 주머니에서 다시 가테스의 머리를 꺼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시체의 머리를 계속 보는 건 취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계속 얼굴을 돌릴 수는 없었기에 다시 마리나와 가테스를 바라보았다.
"얜 선천적인 결함이 있거든. 난 후천적인 건 조정할 수 있지만, 선천적인 건 조정하지 못해. 얼마나 무능함을 느꼈던지."
"선천적인 결함?"
"감정의 부재."
마리나는 한숨을 쉬었다.
"난 노력했어. 얘한테 죄책감을 느끼게끔 하려고도 했지. 근데 안 되는 건 안 되더라고."
"근데 너한테만큼은 마음을 열었잖아. 너도 마음이 있었고."
마리나는 머리를 긁었다.
"이제는 안 되지. 말했잖아, 20년의 시간이 흘렀다고. 그리고 나한테는 이 세상이 너무나도 장난 같고. 그건 선천적인 거야. 내가 틀린 게 아니라고. 소설 속에서 연애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현실과의 괴리 때문에 못 하는 사람도 있는 거지. 아무리 해도 흥분이 안 된단 말이야. 흥분이란 건 원초적인 감정이지. 누가 건드려서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야. 난 여기서 한 번도 흥분해 본 적이 없어."
"그래, 그건 맞아. 그게 죽일 이유야? 네가 도와주면 안 됐던 문제야?"
난 물어보면서 조금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마리나가 내 마음을 움직여 가테스를 죽이게끔 시켰다고 한들, 결국 죽인 건 나였기 때문이다.
"결말에 나오거든. 가테스는 날 차."
"…음."
그렇게 바라 마지않았던 「장미꽃이 흩뿌려진 침대」의 결말을 이렇게 듣게 된 셈이었다.
"가테스의 감정 결함은 고쳐지지 않는다?"
"그래. 걔는 결함이 있는 애야. 걔는 어떤 사랑도 못 받고 자랐고, 어떤 사랑도 줄 수 없는 애야. 내가 그렇게 만들었고. 그러니까 내가 책임을 져야지. 평생 불행하게 사는 거지. 난 그렇게 사는 꼴은 못 봐."
그녀는 진지했다. 다시 그녀는 가죽 주머니에 가테스의 머리를 넣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그녀가 말한, 죽음으로써 완성되는 사랑이란 이런 것인가.
모르겠다. 그녀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넌 쉬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쉬고 싶어. 근데, 내가 여기서 신에 가까운 힘을 낼 수 있다는 걸 알아내고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건 최소한의 책임감, 양심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해 주는 이유가 뭐야?"
난 너무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마리나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너무 낯설었다. 그냥 원래 마리나처럼, 정신이상 같은 얘기를 했으면 차라리 좋았을 것 같다.
"네가 가진 원죄 스킬 있지? 그 스킬을 극한까지 올리면 신성에 침범할 수 있어. 일단, 넌 그게 먼저야."
"어떻게 올리는데?"
"그건 네가 알고 있겠지. 내가 다 떠먹여 줘?"
마리나는 그렇게 말하고 가죽 주머니를 어깨에 둘러멨다. 마치 흔한 보부상 같은 느낌이었지만, 저 안에 든 게 머리라면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못할 거다.
"원죄 스킬은 절대 좋은 게 아니야. 널 위한 스킬도 아니고. 그걸 잊지 마."
마리나는 문을 닫기 전 마지막으로 말했다.
"넌 해낼 수 있을 거야. 지구에서도 꽤 열심히 살았잖아."
그리고 복도에서 큰 외침이 들려왔다. 마리나의 악에 받친 목소리였다. 마치 우는 것 같기도 하고, 소리만 지르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여기 가테스의 시체가 있다! 이 개새끼들아!"
성녀에 대한 재판은 즉결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녀는 자신이 가테스를 죽였다고 굳게 믿고 있었고, 재판정에서도 그렇게 말했다. 내가 참관했을 때 그녀는 내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제가 죽였습니다. 그 이유는 말해 줄 수 없습니다."
재판관 역할을 맡은 리얀은 한숨을 쉬었다. 마리나는 그저 자신이 죽였다고만 앵무새처럼 말할 뿐이었다.
이 초유의 사태에 다른 판관들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결국은 형량의 문제였다. 원래 황족 시해는 당연히 사형감이다. 하지만 마리나의 위치는 성녀였다. 성녀를 사형에 처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성녀의 정신감정이 일단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성녀가 살해했다는 증거도 마땅치 않고. 일단 지하 독실에 가두겠습니다."
결국 리얀의 판단에 의해 마리나는 독실에 가둬졌다. 난 모르겠다. 재판이 끝나고 나도 퇴정하려 하자 리얀이 내 손을 붙잡았다.
"…같이 가요."
"네?"
"같이 가자고요."
리얀은 아까보다 조금 더 큰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녀는 내 소매를 붙잡았다. 난 분명히 말했는데, 가테스를 죽이면 이 계약은 끝났다고.
그녀는 나를 자신의 집무실로 끌어들이더니 갑자기 나를 벽에 몰아붙이고 입을 맞추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리얀을 떼어 냈다. 리얀의 얼굴은 완전히 붉어져 있었다.
"나, 나, 당신… 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이번엔, 진심이에요."
…아. 마리나야,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었으면 고치고 가야 되는 것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