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98화 (98/150)

97화 사랑의 형태 (2)

리얀을 어떻게든 떼어 내 보려고 해도 그녀는 계속 내게 달라붙었다. 힘으로 떨어뜨릴 수는 없었다. 그녀의 눈빛과 몸짓이 어쩐지 절박해 보였기 때문이다.

"나도, 나도 내가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맞아요. 당신 말대로 난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제국법상 동성애는 불법이에요. 그래서 난 그냥 평생 사랑을 안 하고 살기로 했어요."

리얀은 내 어깨를 붙잡았다. 나는 그녀의 마음이 왜 변한지 안다. 마리나의 개변이 그녀에게 영향을 끼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말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전 말이죠. 어릴 때 지방 귀족에게 납치된 적이 있어요. 아마 논공행상에서 밀린 귀족이 불만을 품고 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어요. 그때 저는 그 귀족의 공자한테 희롱을 당했었죠. 그때부터 전 남자가 너무 무서웠어요."

"그렇군요."

마리나의 말 때문에 알고 있었지만, 난 그냥 처음 들은 척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이런 걸 나한테까지 오픈한다는 게 내게는 굉장히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근데 왜일까요. 당신한테는 마음을 열게 됐어요. 이상해요. 제가 몸을 주려 했었던 것도, 옛날의 저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에요. 이런 저를 바뀌게 한 건, 당신이에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어떻게 이러겠어요."

"리얀, 지금 당신은 많이 혼란스러운 상태예요. 그러니까 조금만 진정해요."

"어떻게 진정이 되겠어요!"

리얀은 내게 소리를 빽 질렀다. 리얀과 맞지 않는 그 신경질스러움에 나는 잠깐 얼었다. 리얀은 어지럽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짚었다.

"아버지는 죽었고, 동생은 제가 죽였어요. 오라버니도 제가 역시 죽인 거나 다름없죠. 당신에게 사주를 했으니. 근데 어떻게 진정할 수 있겠어요?"

리얀은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난 그녀를 품에 안아 줬다.

"내가 이기적인 것 같아요. 내가 다 죽여 놓고 죄책감은 다 가지는 꼴이라니. 정말 꼴불견이죠."

"원래 사람들이 다 그래요."

"지금 이렇게 힘들 때, 난 당신의 얼굴이 제일 먼저 생각났어요. 난 지금 당신이 필요해요."

리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난 엘파힘의 심안으로 그녀의 진심을 보고 있었으니까.

「이름: 리얀 트라프비체

나이: 22

호감도: 100

가장 사랑하는 사람: 에퍼리 션

키워드: 죄책감」

그녀는 날 가장 사랑하고 있었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난 이게 마리나가 한 개변의 힘인 것을 알고 있었다. 이걸 나를 향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에 포개졌다. 난 그녀를 막을 수 없었다. 그녀는 문 쪽으로 나를 밀치고 내 혀를 휘감았다. 그제도 했지만, 그때와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저번이 몸을 쏟아붓는 느낌이라면, 이번에는 영혼을 쏟아붓는 느낌이다. 내 영혼에 그녀의 영혼이 문을 열고 비집고 들어오려고 하는 느낌이다. 난 이것을 열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내 굳어 있는 혀는 답을 못 찾고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리얀은 내게서 입을 떼었다. 그녀의 젖은 눈빛이 오히려 내 묘한 감정을 자극했다. 죄책감, 의지? 이 안에 어쩌면 사랑이 숨어 있는지? 사랑이란 감정을 안 느껴 봐서 무엇이 사랑인지도 나는 모르겠다.

"에퍼리, 내가 여자를 좋아했다는 과거 때문에 그런 건가요? 그래서 나를 못 받아들이는 건가요?"

"아니, 그게 아니에요."

내가 걸리는 건 그것이었다. 마리나가 아니었으면 리얀이 날 사랑하지 않았을 거라는 것. 마리나가 리얀의 남자 공포증을 없애 준 건 불행한 과거를 쥐여 준 나름의 책임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난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과거를 포함해서 그녀가 만들어진 건데, 그 과거를 인위적으로 덜어 내면 그녀에겐 무엇이 남는가.

"에퍼리, 나도 사랑이란 건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요. 그래서 서툴러요. 하지만 전 현재의 감정에 충실하고 싶어요. 아니, 이 감정 때문에 내가 사는 것 같아요. 처음, 사랑이라는 걸 느끼고 있어요."

"리얀, 그 감정을 정말 다 믿을 수 있어요?"

"믿는다? 그런 차원이 아니에요. 그저 사랑이 내게 왔을 뿐이에요. 선물처럼 온 거고, 전 그 느낌을 받은 거예요. 난 당신이 내게 와 주길 원해요. 당신이 내게 오면 완전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리얀은 내 품에 다시 안겼다. 하지만 난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못내 마리나가 아니었으면 리얀이 이러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이 걸렸다. 조금은 다른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지금 리얀을 허락한다면 우리는 결실을 맺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난 지금 리얀에게 사랑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마리나가 내게 그 사실을 알려 줬다는 이유 때문이다. 나는 그녀에게 그녀의 마음이 개변됐다는 사실을 속일 수밖에 없었고, 속임이 있는 이상 난 그녀를 사랑할 수 없었다.

난 그 정도 확신이 들어서야 리얀을 힘으로 떼어 냈다. 리얀은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리얀, 미안해요."

난 그렇게만 말하고 리얀의 방을 떠났다. 이 S급 헌터의 좋은 귀는, 저 멀리 황녀의 집무실에서 낮게 흐느끼는 것도 들을 수 있었다.

또, 또 이 감각이다. S급 헌터라는 직위가 내게 저주처럼 느껴지는 건… 포항 게이트 사건 이후에 진드기처럼 붙어 있는 어두운 앙금들.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에퍼리 후작님."

"들어갈게요."

"아, 네!"

지하 감옥을 지키는 간수가 내게 경례를 했다. 이제 사실상 황제는 리얀으로 결정이 났다. 즉위식의 날짜만 잡으면 되었다. 그런 마당에 나는 리얀 라인의 최측근이다. 내가 갑자기 제국의 실세가 된 거다. 날 막을 사람은 없다는 거다.

덕분에, 난 웬만한 귀족들도 못 들어가는 독방 지하 감옥에도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했다.

"성녀님을 뵈러 오셨습니까?"

"네."

"아무리 에퍼리 후작님이라도 면회 시간은 많이 못 드립니다. 황녀 전하의 엄명이 있었습니다."

"네."

난 인사하는 척하면서 간수의 허리춤에 있는 열쇠를 슬쩍 훔쳤다. 고작해야 소드 익스퍼트 정도 되는 간수다. 이 정도 훔치는 건 껌이다.

난 조용히 지하 감옥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가토스가 갇혀 있던 사형수의 감옥이 여기였을 것 같다.

주변은 아주 더럽기 짝이 없었다. 하긴, 중세 시대의 감옥이다. 깨끗할 리가 없지. 구석에서 쥐가 울고 있고, 바퀴벌레들의 시체가 가득하다.

"마리나?"

나는 열쇠를 잡아 돌리며 조용히 마리나를 불렀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혹시, 나는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그녀는 삶에 대한 애착이 없다. 그렇다면, 죽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난 급하게 지하 감옥의 문을 땄다. 그곳에 마리나가 한 테이블에 팔을 하나 걸친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의 풀어진 머리카락에는 바퀴벌레가 머리핀처럼 사선으로 앉아 있었다.

"…야."

난 흠칫했다. 마리나의 움직임에 미동도 없었기 때문이다. 인기척을 느낀 바퀴벌레가 그녀의 얼굴 쪽으로 기어갔다. 그때, 마리나가 녹색 눈을 번쩍 떴다.

"아, 드럽게."

그녀는 손가락을 튕겨서 바퀴벌레를 떼어 냈다. 튕겨 낸 바퀴벌레가 다시 그녀의 몸을 타고 기어올랐지만, 그녀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노곤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왔냐?"

"궁금한 게 많아서."

"뭐."

"네가 리얀한테 한 마음 조종. 그거 다시 바꿀 수 있냐?"

"내가 별생각 없으면 다시 돌아가겠지. 인간한테는 관성이라는 게 있거든."

그건 좀 반가운 얘기다. 마리나는 피식 웃었다.

"왜, 리얀이 너한테 많이 들이대냐? 그 정도 미녀가 들이대면 고마운 줄 알아라. 심지어 황녀인데."

"난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니었어. 사랑을 하고 싶다고."

"모솔 새끼들이 따지기는 드럽게 따져."

"모솔이라서 따지는 거야."

"아, 그래."

마리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녀의 몸짓 하나하나가 대충이었다. 그야말로 대충 산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그런 조종도 안 할 거야. 됐지? 이런 확신을 듣고 싶은 거 아니었어?"

"맞아."

"근데, 넌 이대로도 괜찮겠냐?"

"뭐가."

"편히 살고 싶다며. 근데 이렇게 더러운 독방에서 평생 지내야 될 것 같은데."

"괜찮아. 난 곧 죽을 거야."

그녀는 마치 내일 여행을 가는 사람처럼 말했다. 난 당연히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여신이 날 싫어하기 시작했거든. 너 개인적으로 걔랑 만나 본 적 없지? 진짜 개쌍년이거든. 관음증도 있어서 이거 듣고 있을 수도 있어."

"여신이 널 죽인다고?"

"여신은 인간 세계에 직접적인 개입은 못 해. 그러니까 성녀라는 대리인을 쓰는 거지. 물론 걔도 성녀가 나 같은 애인 줄은 몰랐겠지만?"

마리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제국을 위험에 빠뜨리게 하는 거지. 내 예상으로는 아마 제국이 위험해지지 않을까 싶은데."

"뭐?"

그 말과 함께 황궁 전체에 비상벨이 울렸다. 긴급한 목소리로 리얀이 방송하는 게 들렸다.

- 현재 제논 왕국이 침입하고 있습니다. 모든 병사와 백성들에게, 제국 위험 경보를 발령합니다.

마리나는 귀신이라도 되는 건가. 거의 예상을 전부 맞히고 있다. 신기에 오르면 이렇게 되나?

"면회는 여기까지 해야겠네."

"그럼."

나는 스킬로 방 전체를 깔끔하게 청소해 주었다. 그녀의 냄새나는 방이 순식간에 먼지 한 톨 없어졌다.

그다음 주머니에서 과자 몇 개를 꺼내 주었다. 사식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면회 올 때 이런 건 기본이니까. 내가 과자를 건네주자 마리나는 웃었다.

"아무리 S급 헌터라고 해도, 국가 재난을 막을 수 있나?"

"뭐, 해 보는 거지."

내가 나가려고 하자 마리나가 일어나서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내 몸을 돌려 입을 맞추었다. 아니, 도대체 요 며칠 사이에 이십몇 년간 못했던 키스를 몰아서 하는 것도 아니고.

그녀는 정말 능숙하게 혀를 돌렸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스킬에 휘말려 아무것도 못 할 정도로. 아니면 그녀가 나한테 잠깐 동안 개변을 취한 걸 수도 있었다.

결국 난 리얀과 다르게 내 힘으로 마리나를 떼어 내지 못하고 마리나가 내 혀를 다 탐한 다음에야 머리를 뗄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스킬 창이 갑자기 떴다.

【원죄: 엘파힘의 심안 Lv. 5 업그레이드】

"어때, 원죄가 업그레이드됐지?"

"…어? 응."

"네 원죄는 아무래도 사랑이나 색욕에 관련된 것 같긴 했어. 그래도 스킬이 오른 것 보니까 너도 나한테 야릇한 감정을 느꼈나 보지?"

마리나는 다시 앉아서 작은 책상에 팔을 걸치고 웃었다.

"넌 근데 그런 생각 안 해 봤어?"

"뭐가."

"리바이어던에게 죽은 사람이 이 세계로 넘어오는 거라면 지구에 있던 다른 사람은 어디 있을까?"

그녀의 말에 난 우두커니 섰다. 마리나는 나를 무시하고 말을 이어 나갔다.

"찾아봐. 내가 알기론 리바이어던한테 죽은 S급 헌터 중 한 명이 제논 왕국의 대장군 역할을 하고 있어."

"네가 어떻게 알아?"

"너도 세상을 통달하면 좀 알게 될 거야."

마리나는 나른하게 웃었다. 그리고 내게 손사래를 쳤다.

"방 청소해 줘서 고맙고, 과자는 잘 먹을게. 한번 열심히 해 봐."

난 아무 말도 못 하고 지하 감옥을 빠져나갔다. 너무 당황해서 열쇠를 잠그는 걸 까먹을 뻔하기도 했다. 혀를 한 번 굴려 보았다. 너무 당혹스러운 일이다. 적어도 쟤랑은 이런 거 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하긴 마리나도 내게 마음이 있어서 키스를 한 건 아닐 테다. 기술을 높여 주려고 한 것이겠지.

이 스킬이 올라가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또 무엇이 바뀌었을까.

지하 감옥을 나가자 다른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 군단장님은 어디 계신 거야?"

"누구 1군단장 본 사람 없나?"

병사들의 외침을 듣고 나니 내가 지금 겸직으로 뭘 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가테스가 내게 1군단장이라는 직함을 줬었지. 그때는 무늬만인 줄 알았는데. 내 품에서 1군단장임을 알리는 로켓이 나왔다.

"하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