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S급 지휘관 (1)
대전으로 가자 이미 많은 장군들이 있었다. 잠깐 무너졌던 것으로 보이는 리얀은 대전 중앙에서 전시 상황을 보고받고, 접수하고, 하달하고 있었다. 지금 상황은 국경에서 국지전이 벌어지는 정도인 것 같았다.
"지금 전선은 많이 복구되어 있는 상태예요. 이미 오라버니가 검은 나무가 사라진 이후로 다 부대를 재배치해 놨기 때문이죠."
"그건 알고 있습니다."
"다만, 지금 문제가 되는 곳은 1군단인데요."
리얀이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맞네. 1군단장인 내가 전방의 자리에 없으니 문제라는 건가.
"…근데, 1군단 부군단장이 그 역할을 잘해 내고 있어요. 그래서 전 여기서 편제를 좀 바꾸고 싶어요."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소리십니까?"
장군들이 리얀을 바라보았다. 리얀은 장군들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의 말을 내뱉었다.
"에퍼리 후작을 제 근위 기사로 두겠어요. 에퍼리 후작은 지휘관 경력이 아예 없어요. 그런 사람을 1군단장으로 놔둘 수 없어요."
"…지휘관 경력이 없기는 하지만, 소드 마스터 아닙니까?"
"지휘관에게 개인 무력은 상관없어요. 극단적으로 말하면, 소드 익스퍼트라도 용병술이 뛰어나다면 군단장감이죠. 그게 더 많은 병사를 살리는 길이에요."
리얀이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역시, 날 잘 몰랐다. S급 헌터로서 많은 지휘관 역할을 해 봤으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난 이 황궁에서 좀 피해 있고 싶었다.
리얀의 나에 대한 마음이 식도록. 그녀가 온전한 그녀로 돌아오도록. 마리나의 말에 의하면 인간의 관성은 곧 돌아온다고 했다. 그쯤 되면 리얀도 날 잊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난 1군단장의 역할을 잘해 낼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엘파힘의 심안이 이제는 자동적으로 내게 무언가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아우라였다. 분명히 나만 느끼게 되어 있는 것이겠지. 장군들에게서는 각자 붉은 기운과 푸른 기운이 얕게 흐르고 있었다. 리얀에게서는 내게 넘칠 정도로 푸른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고.
리얀의 기운으로 미루어 봤을 때, 푸른 기운은 긍정의 의미이고 붉은 기운은 부정의 의미겠지. 이것만 알아도 용병술에는 큰 지장이 없다.
병력 지휘에 필요한 건 병법과 용병술이다. 사람의 마음을 대략적으로 이렇게 짐작할 수 있다면 용병술에는 커다란 가산점이 생기는 거다.
또 나는 제논 왕국의 대장군이라는 사람이 누군지도 알아봐야 한다.
"…에퍼리, 괜찮죠?"
"아뇨."
내가 일어서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모인다. 난 지금 이 회의 시간도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1군단 전선으로 가겠습니다."
"…장군들은 각자 위치에서 임무를 수행해 주시길. 에퍼리 후작은 남고요."
리얀의 싸늘한 말이 대전을 울렸다. 장군들은 모두 나와 리얀의 눈치를 보면서 대전을 나섰다. 이제 대전에는 나와 리얀밖에 남지 않았다.
"에퍼리, 난 당신의 실력을 못 믿는 게 아니에요. 정말 당신이 지휘관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요."
"설마 절 걱정하셔서 그런 의견을 내신 거라면, 괜찮습니다."
"개인적인 욕심일 수도 있죠. 난 당신을 옆에 두고 싶어요. 당신이 눈앞에 없으면 불안해요."
"…리얀."
나는 한숨을 쉬었다. 리얀은 정말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열병 앓는 듯한 표정과 아련한 눈빛이 그걸 짐작게 했다. 그리고 이 손에 잡힐 것만 같은 강맹한 푸른 기운도.
하지만 이건 진짜 사랑이 아니었다. 마리나의 농간일 뿐. 이런 사랑은, 리얀에게도 나에게도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내가 1군단장 임무에서 돌아오면 당신은 날 깨끗이 잊을 거예요. 그러니 지금 당신의 감정은 일시적인……."
나는 말을 다 마칠 수 없었다. 리얀의 커다란 녹색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렀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리얀은 진심으로 슬퍼했다. 왜냐하면,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니까. 근데 그 사랑이 누군가의 조작에 의해서라면. 난 마리나의 힘이 누구보다 무섭다는 걸 여기서 깨달았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데, 나는 이 감정을 어떻게 어떤 단어로 표현해야 할지도 조심스러운데 당신은 왜 내 감정을 정리하려 들어요?"
"…미안해요. 그럴 생각은 없었어요."
그때 다시 리얀의 앞에 놓인 마법구가 울렸다. 지금은 전시 상태였으니. 리얀은 곧바로 눈물을 멈추고 깔끔한 목소리로 다시 하달했다.
마법구를 끈 리얀은 나를 다시 보았다. 어느새 그렇게 서글프게 울었냐는 듯 눈물은 멈춰 있었다. 리얀은 공사를 정확하게 구분하니까.
"에퍼리, 그러면 내기라도 해요. 1군단장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내가 당신에게 마음이 사라졌다면 그렇다고 말할게요. 하지만 내가 여전히 사랑하고 있어도, 그렇다고 말할 거예요. 당신이 날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도 난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리얀은 일어나서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 박력에, 난 움찔했다. 그녀가 내 얼굴에 손을 댔다.
"다치지 말고 돌아와요. 언제 돌아와도 내 대답은 변함없을 테지만."
나는 그녀의 강렬한 눈을 피하고 말았다. 대체 그녀는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난 그게 정말로 궁금했다.
내가 1군단 지역으로 출발하기 전에, 난 또다시 뜻밖의 사람을 만나야 했다. 그건 바로 제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칸나였다.
"소령 칸나 카라모프, 1군단장 에퍼리 후작의 근위 기사로 배속됐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칸나?"
그녀는 내게 절도 있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데. 칸나는 내가 근위병 시절에 내 부대장을 맡았던 사람이라 좀 민망하기도 했다.
"칸나, 둘이 있을 때는 괜찮아."
"…응. 그, 전입신고는 예식이라 어쩔 수 없어."
칸나도 민망한 건 아는지 얼굴을 붉혔다. 그녀의 몸에서 푸른 기운이 흐르고 있다. 단순히 호감이라는 뜻이지.
「이름: 칸나 카라모프
나이: 21
호감도: 82
가장 사랑하는 사람: 없음
키워드: 예의」
음, 호감도 창은 변한 게 없다. 난 그렇게 넘기려고 했지만, 갑자기 그 밑에 좌르륵 텍스트들이 늘어섰다. 그 텍스트들은 잔뜩 만들어지다가 흩어지고 있었다.
- …후, 에퍼리랑 있으면 힘든 일 많이 하겠네. 아니야, 그래도 군인으로서는 영광스러운 일이야. 아버지는 괜찮을까? 됐다. 알아서 뭐 해. 이번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 에퍼리는 강하니까. 어떻게 그렇게 강해졌지? 물어보고 싶다. 나랑 비슷한 나이대인데…….
완전, 이건 의식의 흐름 수준인데. 나는 지금 그녀의 의식을 엿보고 있는 것이다. 난 황급히 심안의 창을 껐다. 내가 당황스러워하자 칸나가 갸웃했다.
"그, 그래. 근데 가티스 근위 기사인데 왜?"
"이제 전시 상황이잖아. 황도에서 암살, 납치 위협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나 말고 다른 소드 마스터로 근위 기사가 바뀌었지. 잘린 거라고 해야 하나."
그런가. 하긴, 칸나는 그렇게 강한 편은 아니니까. 물론 내 관점에서 말이다. 이 세계에서 그녀의 성취는 나이로 보자면 전혀 낮지 않다.
그나저나 걸리는 게 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없을 수가 있나. 하지만 그걸 물어볼 수는 없다. 당장 우리는 출진해야 하니까.
내가 칸나만을 대동하고 황궁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저 뒤에서 새된 소리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에퍼리!"
흰 말을 타고 오는 은발의 소녀는 당연히 아이리였다. 그녀는 달리는 말의 기세와는 반대로 내려서는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왜요, 아가씨?"
"…그, 잘 갔다 오라고."
"그거 얘기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
"그러면 안 돼?"
아이리는 급성질을 냈다. 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렇지는 않죠."
"넌 강하니까 뭐, 혼자라도 잘 도망쳐 나오겠지."
"다 부수고 올 건데요?"
"그러면 그렇게 하든가."
아이리는 그렇게만 말하고 말을 타고 떠났다. 급하게 다가온 것치고는 싱거운 인사였다. 나와 칸나는 서로를 쳐다보고 다시 황도 밖으로 나갔다.
"아, 아가씨, 무슨 일이세요! 갑자기 그렇게 나가시고!"
"아, 몰라."
공녀의 몸가짐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려는 시녀의 잔소리를 문을 닫음으로써 차단했다. 아이리는 자기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방을 굴렀다. 너무 바보 같은 인사였다.
안아 주기라도 할 걸 그랬나. 아니, 그건 너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그녀는 그냥 에퍼리를 좋아하게 됐다. 처음부터.
원래 본인은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었다. 공녀라는 지위가 흔한 건 아니니까. 하지만 에퍼리는 그걸 은연중에 무시했다. 깔보고 무시한다는 게 아닌, 정말 그런 지위를 없는 것처럼 취급했다. 대체 어디서 길들여 온 버릇인지는 모르나, 그게 에퍼리란 사람이었다.
그의 눈에 들기 위해서는 자기도 노력을 해야 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이 마음에서 곱씹기도 부끄러운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을까.
"해 보는 거지, 뭐."
아이리는 자신의 말랑말랑한 뺨을 툭툭 쳤다. 어떻게 하면 자신이 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녀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꼬박 일주일을 달려 1군단 전선으로 도착했다. 칸나는 꼬박꼬박 나를 보좌했다. 그녀는 유능한 부관이었다. 마을에 있는 동안 내가 신경 쓸 부분은 하나도 없었고, 여의치 않아 바깥에서 잘 때도 그녀는 모든 걸 다 해냈다.
완전 야전 스타일이라고 해야 하나. 이에 밧줄을 물고 텐트 기둥을 세우는 망치질 역시 깔끔했다.
"칸나, 그렇게 열심히 안 해도 돼."
"내 할 일이야. 아니, 이제부터는 존댓말 할게. 습관이 될 수도 있어. 근위 장교하고 군단장이 말을 트는 건 군법상 어긋나는 일이야."
"그, 그렇게까지 해야 돼?"
"그럼요."
칸나는 날카롭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확실히 예절을 중시하는 사람이지. 지금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너무 보고 싶지만 볼 수 없다. 그건 칸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제 곧 1군단 전진기지에 도착하네."
"네."
칸나는 아예 나를 존댓말 모드로 대하기로 한 모양이다. 뭔가 어색하다. 그래도 뭐, 그게 그녀가 편하다면 내가 맞춰 줘야지.
"그나저나, 칼 카라모프 대령도 1군단 소속이시지?"
"네, 그렇습니다."
"그분도 한번 뵐 수 있으면 좋겠네."
"네, 뭐……."
칸나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 있나. 가족이라고 다 친한 법은 없으니. 그래도 저번에 대제한테 바치는 제물 의식에서는 꽤 존경해 하면서 봤던 것 같은데.
존경과 좋아하는 건 다른 건가. 뭐, 그런 사정까지 내가 알 필요는 없으니. 난 프라이버시를 존중한다.
그렇게, 다음 날이 밝았다. 군단 전진기지까지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말을 타고 1시간은 뛰었나, 칸나와 나는 삼엄하게 펼쳐진 바리케이드와 초소를 볼 수 있었다.
"누구냐!"
"암구호!"
석궁을 우리에게 겨누면서 외치는 초소병들이 있었다. 나는 잠시 주섬주섬 품에서 군단장 패를 꺼냈다.
"1군단장 에퍼리 후작이다. 들어가겠다."
"…아, 암구호 확인됐습니다. 신원 확인됐습니다."
뭘 했다고 신원이 확인되고 암구호가 확인 돼. 난 그들을 격려하면서 그냥 지나갔다. 내가 그들과 악수하자 그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자신의 관등 성명을 크게 외쳤다.
"군단장님의 위명은 전방에서도 늘 듣고 있었습니다! 영광입니다!"
"아, 그래요……."
내가 뭘 했었나. 이 사람들은 전방에서 뺑이만 치던 군인들인데 뭘 어떻게 아는지. 나는 칸나를 데리고 지휘부로 올라갔다. 지휘부는 전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기지의 맨 꼭대기에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의외로 익숙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검은 나무 원정대에서 내 분대였던 1군단의 사단장들, 연대장들이었다.
"어이구, 분대장님, 아니, 군단장님 오셨구만."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에 본 얼굴들이라 난 반갑게 인사했다. 그래, 이 사람들이면 뭐.
"수도 상황이 조금 위태롭다고는 들었습니다. 황자 전하가 성녀님에게 시해를 당했다죠."
"아, 네."
난 그 말을 하면서 뜨끔했다. 죽인 건 나였는데.
"그래도, 군의 할 일은 영토를 내주지 않는 것입니다. 저 멀리 보십시오. 저 간악한 제논의 것들이 여기까지 침범했습니다."
난 통유리 창으로 되어 있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제논 왕국의 커다란 진이 보였다. 어림잡아 감안해도 트라프비체 제국의 진보다 두 배는 큰 모양이다.
"아마, 여기가 요충지라 사력을 다하는 모양입니다."
"그렇군요."
"어떻게, 뭔가 타개책이라도 있으실까요?"
"어허, 방금 오신 분한테 전황도 설명 안 하고 그런 질문을 하다니. 생양아치가 아닌가."
누군가 내게 질문을 하려 할 때 사단장 중 한 명이 막았다. 난 손을 들어 잠시 사람들의 말을 멈췄다.
"글쎄요. 좀 나올 것 같기도 한데요."
"네?"
그들의 얼굴에 황당함이 물든다. 내게 보이는 건 제논 진영에서 노을처럼 붉게 타오르는 부정적인 에너지들이었으니까. 난 확신할 수 있다. 저 부대는, 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