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S급 지휘관 (4)
"전 부대를 후퇴시킨다고요? 왜요?"
"그냥 믿어요."
리얀은 지도를 마력구 안에서 펄럭거렸다. 볼록한 구에서도 그녀의 미모는 바래지 않았다.
"뭐, 그래요. 사실 저한테 굳이 보고할 필요도 없어요. 지금 1군단의 사령관은 당신이니까요."
"아, 네."
나는 그 말만 하고 마력구의 마력을 차단하려 했지만 리얀이 날 불렀다.
"다쳤어요?"
"별것 아니에요."
"당신이 다치면 별것 맞는 게 아닌가요?"
리얀의 말에 난 할 말이 없어졌다. 그런가.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날 향한 사랑이 가득하다. 이 사랑은 대체 어디까지 갈까. 혹시 끝까지 안 없어지면 어떡하지. 난 리얀을 다시 봐야 될까. 아니다, 지금 내 사랑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괜찮아요. 난 걱정하지 마요."
"어떻게 걱……."
난 마력구를 강제로 차단했다. 칸나가 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첨언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맙게도 부관의 일을 확실히 하고 있었다.
"칸나."
"네, 군단장님."
"들었지? 철수시키면 돼."
"네. 전달하겠습니다."
칸나가 나가려 하자 나는 가장 중요한 걸 놓쳤다는 걸 깨달았다.
"아, 잠깐만. 진영은 남기고."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보급품만 가지고 다 철수시키면 돼."
칸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공성(空城)의 계를 쓰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응. 뭐, 그렇게 말하면 그렇네."
"공성계를 하시려면, 다시 덮치시겠다는 말씀이죠?"
"음, 맞아."
"근데 왜 병사들에게 다른 지시를 안 내리십니까?"
나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냥 옷을 정리했다. 칸나는 날 빤히 바라보다가, 표정이 변했다.
"지금 장난하십니까?"
"…왜."
"에퍼리, 지금은 반말로 해야겠어. 이러면 안 돼. 제논 왕국의 군인은 2만이야. 너 혼자 해봤자 그저 의미 없는 게릴라라고, 네 목숨만 위험한."
그녀는 눈치 빠르게도 내 계획을 눈치챈 것 같았다. 맞다. 난 여기를 공성으로 놔두고 제논 왕국의 병사들을 한 명씩 썰어 나갈 예정이었다. 근데 그걸 칸나가 눈치챈 거다.
"왜, 그러면 안 돼?"
"응. 안 돼."
"왜?"
칸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넌 사람 아니야? 네가 아무리 강하다고 하지만, 대장군들은 소드 마스터 그 이상들이야. 너 혼자 할 수 있는 건 정해져 있어."
"…괜찮잖아. 뭐, 죽지는 않을 거야. 투명 망토도 있으니까. 안전하게 할 거야. 내 계획은 걔들이 퇴각할 때까지만 죽이는 거야."
"그게 말이 돼?"
말이 된다. 솔직히 말하면, 왕공학을 포함해서 다른 사람들은 스킬에 대해 나보다는 훨씬 무지해 보였다. 난 적어도 도서관에서 몇 달을 붙어 있어서 공부를 했으니, 그들보다는 낫다. 그들은 공격적인 스킬 몇 개를 특화했을 뿐, 다른 건 스킬이 없는 거와 비슷하다.
"네가 실천할 수 있는 것과 그건 달라. 난 부관이야. 그런 짓을 용납할 수 없어."
"왜?"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칸나는 어이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네 목숨은 네 것만이 아니잖아. 그래, 연인인 리얀 황녀도 있고, 널 좋아하는 사람도 많잖아. 지금 제국의 백성들에게 너는 영웅이야. 너 혼자 그렇게 움직일 수는 없어."
"그런 명성은 절대적인 게 아니야. 시간이 지나면 다 무색한 거지. 난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하는 거야."
나는 그리고 조용히 칸나의 뒤로 돌았다. 칸나의 하얀 목이 소름이 돋은 듯 뻣뻣하게 선다.
"…그러니까, 이해해 줘."
왕공학은 오자마자 S급 헌터들을 대동하고 진격 명령을 내렸다. 주환영이라는 공적이 저 진영에 있다는 걸 안 이상 주저할 시간은 없었다.
"대장군님, 지금은 병사들에게 휴식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토록 빠른 진군 속도는 과거에도 없었습니다."
"그냥 출진하세요. 명령권은 나한테 있습니다."
사미르 중장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계속 자신에게 태클을 걸었다. 솔직히 말하면 왕공학은 이 사람들이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냥 게임에서 나오는 병사들처럼 보였다. 말도 달랐고, 아직도 남아 있는 계급이나 이런 것들이 너무 낯설어 보였다.
사미르 중장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진군을 명하러 갔다. 무슨 계략을 짤 생각도 없었다. 그냥 돌진, 돌진, 돌진이었다.
잘돼도 그만, 안돼도 그만이었다. 당연하다. 그들의 계획은 다른 것이었다.
"왕 헌터, 너무 그래도 막 대하는 거 아닌가? 부하들인데."
"뭔 부하입니까, 크리스토프 헌터."
왕공학은 비웃었다. 그는 팔에 통증이 있어서 이를 갈았다. 병영에 있는 신관에 의해 팔은 붙였지만, 여전히 이물감이 있었다.
"이 세계가 이것 하나는 좋네요. 상처 하나를 이렇게 말끔하게 고치는 건 지구에서도 안 될 일인데."
"그러게요."
"어쨌든, 진군합시다. 우리 목표는 따로 있으니까요."
"뭔가 설레네요. 성경으로 따지면 우리가 창세기를 쓰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군요."
왕공학과 다른 헌터들은 죽상이 된 병사들을 보며 낄낄거렸다.
"뭐, 뭐야?"
"아무것도 없는데?"
"공성계인가?"
사미르 중장은 군영을 버리고 도망간 트라프비체 제국의 진영을 보고 오싹한 기운에 빠졌다. 이건, 분명히 함정이었다. 하지만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왕공학이라는 대장군과 다른 간부들은 그저 만족하고 있었다.
"뭐 빠지게 도망간 거 아닙니까?"
"제국 병사들이 부족한가 보군요."
"아니면 주환영이 다쳐서 그런 걸 수도 있죠."
"대장군님, 이건 분명히 계략입니다. 바로 방호진을 짜야 합니다."
왕공학과 간부들이 시시덕거리자 사미르 중장이 말했다. 왕공학은 눈살을 찌푸렸다. 곧 많은 사람의 칼질이 날아갔다. 사미르 중장의 몸으로.
사미르 중장 역시 소드 마스터의 인물이었지만, 수많은 S급 헌터의 공격에는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결국 그 말을 유언으로 남긴 채로 죽었다.
"참, 여기 사람들은 쓸모없는 것이 많습니다."
"지구에 있는 사람들이 좀 교화를 해 줘야겠죠. 민주주의도 도입하고. 하여튼, 여기는 너무 미개하다니까요."
어느새 사미르 중장의 시체는 없는 것처럼 묻혔다. S급 헌터가 몇 명만 있다면 있던 사람도 원래 없었던 것처럼 만드는 건 쉬웠다.
"으아아아악!"
그때, 저 멀리서 병사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왕공학은 비웃었다.
"주환영은 여전한 모양이군요."
"거참, 그는 왜 그렇게 일반 백성들에게 집착을 할까요?"
"여기서도 그럴 줄은 몰랐는데요."
"그가 레이드를 안 한 몇 년 동안에도, 익명으로 던전을 레이드 했다는 게 사실인가요?"
"이상한 영웅병에 빠진 거죠. 헌터가 레이드를 남들 보는 앞에서 안 하면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저런 사람은 새로운 지구에 필요 없을 것 같군요."
왕공학을 포함한 모든 S급 헌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럴까. 왠지 제논 왕국의 병사들은 죽이고 싶지 않았다. 이들의 사기는 너무 떨어져 있었다.
이들의 사기가 떨어진 이유는 명확하다. 왕공학을 위시한 장군들이 병사들의 사기를 무시하고 지휘를 감행했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도 마리나와 같이 이들을 사람으로 안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원래,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안다. 남들 보기에 답답하다는 것도 알았다. 이건 선함보다는 바보 같은 행동이 아닐까. 하지만 이들은 그냥 왕공학을 포함한 헌터들의 희생양이라고만 생각되었다. 어쩌면 그냥 그들에게 가진 억하심정이라 이렇게 행동하는 걸 수도 있다.
"주환영 헌터님, 오셨구만."
"안녕들 하신가."
내가 병사들을 기절시키고 다니자 어느덧 헌터들이 나를 둘러쌌다. 왕공학을 포함한 헌터들. 모두 S급 헌터들이다. 7명 정도 되는 것 같다.
"어디를 보고 말하는 거요, 왕공학 헌터."
"지금 이상한 장비를 쓰고 있소. 내가 화살을 예광탄처럼 해 줄 테니, 그곳을 공격하면 됩니다."
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내가 기척을 감추고 있으면 다른 헌터들에게 드러날 일은 없었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리나는 내가 지구에서 공적으로 몰린 걸 알았을까? 수도에 돌아가면 한번 알아봐야겠다.
그때, 화살이 날아왔다. 촉에 빛이 압축되어 있는 화살이었다. 그와 함께 다른 헌터들의 공격이 날아왔다. 난 순식간에 가장 가까운 헌터에게 다가갔다.
내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목을 날리려고 하자, 왕공학의 화살이 내 검로를 막았다. 내가 목표로 겨눴던 S급 헌터는 지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화살이 날아오고 나서야 자신의 목숨이 위협에 처해 있었구나라는 걸 알아챈 모양이다.
지금 내 위치를 아는 건 왕공학뿐이었다. 왕공학은 계획을 바꿨다. 내가 가는 걸음걸음마다 화살을 쏘기로.
내가 움직이는 곳 뒤에 발자국처럼 화살들이 날아왔다. 마치 그림이 그려지듯 화살이 투두둑, 땅에 박힌다. 마치 그림자라도 되듯이 헌터들의 공격이 나를 따라온다.
"쥐새끼 같은 놈!"
아무리 왕공학의 화살이 빠르다고 해도, 움직이는 건 나다.
원래 S급 헌터가 7명이면 내가 이길 리가 없다. 아무리 내가 세계 1위라도, 여기 있는 사람들도 세계권이니까.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다르다.
【고유 스킬: 환영살인마 Lv. 8 사용 중】
모래먼지에 미스터리 서클처럼 박히고 있는 화살이 순간 멈춘다. 왕공학이 순간 내 위치를 놓친 것이다. 그리고 그건 치명적이었다.
난 가장 붉은 기운을 뿜어내는 헌터의 뒤로 가서 목을 그어 주었다. 그래야 지금까지 공포스러웠던 만큼 비명을 크게 지를 테니까.
"아아아아아악!"
붉은 기운을 노골적으로 뿜어 대던 S급 헌터는 그렇게 절명했다. 아마 브루나이 S급 헌터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브루나이의 영웅이 여기서 죽는다.
"왕 헌터! 빨리 화살을 쏘게!"
"이런 썅, 고작 한 명이야!"
이미 위치를 놓쳤다면 다시 잡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난 왕공학 쪽으로 갔다. 모양도 안 살게 땅을 빠르게 기어가며. 그들이 땅바닥에 먼지를 일며 움직이기 때문에, 땅바닥을 기면 왕공학이 나를 볼 수 없었다.
"누가 한 명이래?"
뒤에서 울리는 말에 왕공학의 피부에 닭살이 오돌토돌 돋았다. 난 왕공학의 뒷목을 얇게 저몄다. 그리고 내 검에 감긴 노을이 한 마리가 그곳으로 침투한다.
왕공학이 뻣뻣하게 고개를 들었다. 이제 왕공학의 목 위는 노을이가 조종하고 있어 마음대로 눈도 꿈뻑이지 못할 거다.
"뭐, 뭐냐. 무슨 짓을 한 거냐?"
"지켜봐 봐. 내가 가만히 호구 잡힐 사람인가."
이제부터는 사냥의 시간이었다. 얼빠져 있는 S급 헌터들의 목이 하나둘씩 날아간다. 허수아비처럼 서 있는 왕공학 앞에서.
S급 헌터들은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알고 각자 다른 방향으로 비산해서 도망치려 했지만, 그럴 줄 알고 난 그들의 발뒤꿈치에 다 상처를 내 놨다.
난 한 명씩 머리채를 잡아끌어 왕공학 앞에서 목을 잘라 주었다. 당연히 왕공학은 공포로 인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런 잔혹무도 한 짓을!"
"날 잔혹무도 한 사람으로 만든 건 자네잖나, 왕공학 헌터."
난 투명 망토를 벗었다.
"지구를 일부러 망친 사람인데, 이 정도는 아주 우스운 일이지."
이제 피가 튀는 걸 상관 안 해도 됐다. 내 얼굴에 뜨거운 피가 뿜어졌다. S급 헌터들의 비명이 울려 퍼지자 제논 왕국의 병사들은 가까이 올 생각도 못 했다.
6명째를 마지막으로 내 참수극은 끝났다. 왕공학은 눈을 자의로 감을 수도 없기에 이걸 오롯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정말 잔인하군. 난 그저 책임감만 없는 놈인 줄 알았더니."
"넌 진짜 그렇게 생각하냐?"
"그런 건 중요하지도 않지. 그냥, 지구는 단합할 기회가 필요했고, 이미 사라진 네가 제물이 된 거다. 그게 그렇게 억울한가? 대의를 위한 희생이 아닌가."
하하, 난 어이없어서 웃었다. 결국 그는 처음 내게 지구의 공적이라고 할 때 여론전의 수작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대의를 위해 희생하라니. 네가 희생자라면 그 말에 납득하겠어?"
난 검을 그의 목에 갖다 댔다. 왕공학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듯 내게 중국어로 마구 욕을 뱉어 댔다. 대충 알아들었지만, 자세히 해석하기는 싫었다.
"그냥 사실대로 가면 누가 아플 일도 없잖아. 그냥 너희가 약한 거고, 난 운이 나쁘게 잡아먹힌 것뿐이라고. 그렇게만 해 주면 안 됐던 거냐?"
"그걸 왜 나한테 묻나, 이 버러지 같은 자식아."
그 말을 마지막으로 왕공학의 목이 허공으로 날았다. 제논 왕국의 군영에 모래가 골고루 묻은 S급 헌터 7명의 목이 나뒹굴었다.